용서에 대하여 - 용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강남순 지음 / 동녘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르는 사람이 내 발을 밟으면 아프기는 해도 화를 내지는 않는다.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려니, 여기서 화를 내면 나만 속 좁은 사람이 되는 거려니 하고 가볍게 넘어간다. 아는 사람이 내 발을 밟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나 싶고 대갚음해주고 싶다. 모르는 사람이 내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졌을 때에도 얘기가 달라진다. 발을 밟힌 것만큼 아프지는 않아도 기분이 더럽다. 고의로 그랬든 아니든 가볍게 넘어갈 수 없다. 아는 사람이 내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지면 상황이 복잡하다. 만약 그가 내 상사라면? 아버지나 오빠, 남동생이라면? 가볍게 넘길 수도 없지만 넘기지 않을 수도 없다.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강남순 교수의 <용서에 대하여>를 읽으며 용서란 참 어려운 개념이라는 생각을 새삼 했다. 저자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책을 읽다가 용서에 관한 구절을 읽고 용서라는 개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구절은 이렇다. "만약 용서할 만한 것만 용서하겠다고 한다면, 용서라는 바로 그 개념 자체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니. 이 모순적인 문장은 그 자체로 용서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행위인지를 드러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용서에 관한 여섯 가지 질문에 답한다.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는가? 왜 용서해야 하는가? 무엇을 용서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용서인가? 언제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에 전제조건이 있는가? 물론 저자의 답은 그 자체로 완결된 답이 아니며, 유일한 답도 아니다. 용서란 지극히 개인적이고 다층적이며 복잡한 행위이기 때문에, 백 명의 사람이 용서를 할 때에는 백 개의 경우와 방식이 존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용서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고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선 용서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와 대인 관계적 용서, 정치적 용서, 형이상학적 용서 등이 있다. 이를 통해 용서의 주체와 객체가 동일한 경우도 있고, 용서의 주체와 객체가 개인 대 개인, 개인 대 집단, 집단 대 집단인 경우가 있고, 이를 분명히 나눌 수 없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용서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다. 용서의 전제는 가해자의 뉘우침이 아니다. 가해자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진심으로 사죄하는 행위 자체는 옳지만, 가해자가 뉘우치지 않아도 피해자가 먼저 용서하는 경우가 엄연히 존재한다. 피해자의 용서와 가해자의 법적, 도덕적 제재 및 처벌은 별개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면서도 가해자의 법적 처벌을 원하는 경우 역시 엄연히 존재한다. 용서는 화내지 않고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것과 다르다. 좋게 좋게 넘어갈 수 있는 정도의 문제는 애초부터 용서의 대상 축에도 들지 않는다. 피해자가 화내지 않고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경우는 용서가 아니라 체념이며, 제3자가 피해자에게 화내지 말고 좋게 좋게 넘어가라고 하는 것은 충고가 아니라 묵인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 사면이다. 


저자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이 남성에게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분노하며 그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하기보다 그 상황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남성의 폭력과 억압, 차별을 당연한 일, 마땅한 일로 받아들이고 참으며 사는 것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용서가 아니라 체념이며 묵인이다. 가족의 평화를 위해, 조직의 질서를 위해, 사회의 안정을 위해 한 사람이라도 자긍심과 평화를 빼앗기는 대가를 치른다면 그것은 '거짓 평화'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피해자가 이런 상황을 모르거나, 알고도 모른 척하면서 '자기 기만'으로 일관하는 경우도 많다고 지적한다. 명백히 잘못되고 부당한 행위를 당하고도 그렇지 않다고, 내 탓이라고 자책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