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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평점 :

얼마 전 급사한 고모에게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은 남자가 있다. 남자는 고모가 살았던 로스앤젤레스의 대저택에 머무르며 장례를 준비하고 고모의 삶을 정리한다. 이 과정에서 남자는 백혈병을 앓다가 여섯 살 때 죽은 것으로 알려진 고모의 딸이 실은 유괴를 당했고 현재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산을 상속받은 사람으로서 고모가 끝내 밝히지 못하고 죽은 진실을 알아낼 책무가 있다고 생각한 남자는 고모가 남긴 단서들을 찾는 한편 사립탐정을 고용해 고모의 딸을 찾는다.
유괴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소설임에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차분하고 단정하다. 유능하고 내향적인 독신 남성이 죽은 고모의 저택에서 지내며 혼자 장보고 요리하고 음악 듣고 운동하는 모습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이따금 걸리는 대목이 있었다. 남자가 저택 인근의 풀장을 둘러보다가 노란 비키니를 입은 스무 살 남짓의 여성을 보고 몸매 품평을 하는 대목이라든가, 피규어 가게를 운영하면서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제시카가 논문 쓰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성적 호감을 표현한 거라고 제멋대로 판단하고는 거절하는 대목이라든가, 정원사 대니 씨의 손녀인 리사와 리사 친구 한나가 그에게 솜사탕을 사달라고 졸랐을 뿐인데 이번에도 제멋대로 아이들이 교태를 부린다고 착각하는 대목이라든가. 작가의 생각일까, 아니면 작중 인물의 생각일까 혼란스러워하면서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니 그제야 판단이 바로 섰다.
부부는 부부이기 이전에 한 남자와 한 여자다. 부모 역시 부모이기 이전에 한 남자와 한 여자다. 위험에 처한 자식을 구하는 것이 부모의 본능이지만, 그보다 남자의 본능, 여자의 본능이 커져버린 때에는 부모가 위험에 처한 자식을 반드시 구할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다. 작가는 작중 인물을 통해 자신의 본능에서 비롯된 욕망을 타인(작중 인물의 경우에는 여성)에게 투사하고 그것이 타인의 유혹 또는 교태인 양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고모의 가족을 통해 본능이 이성을 능가했을 때 벌어지는 비극을 그리고자 한 것이 아닐까. 애달프고 기묘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