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디블 가족 - 2029년~2047년의 기록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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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연배가 있는 사람이라면 1997년 외환 위기, 이른바 IMF 사태가 일어났던 시절의 일들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조차도 그때를 똑똑히 기억한다. 국가 부도나 금융 구제 같은 어려운 말은 몰랐지만, 나라가 외국에 진 빚을 갚으려는데 달러가 부족하다, 그러니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달러나 금을 모두 내놔서 나라를 도와야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듣고 어린 마음에도 큰일이 난 줄 알았다. 


그렇다면 경제력으로 보나 군사력으로 보나 세계 1위이자 부동의 세계 패권 국가인 미국이 경제 위기를 맞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케빈에 대하여>를 쓴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신작 <맨디블 가족>은 2029년 미국에서 중국으로 세계 패권이 이동하고 기축 통화가 달러화에서 위안화로 바뀌면서 극심한 경제 위기를 겪게 된 미국의 중산층 가정 맨디블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소설을 이해하려면 아주 약간의 국제 경제 지식이 필요하다. 2018년 현재 기축 통화는 미국의 화폐인 달러화다. 기축 통화란 금과 더불어 국제 외환시장에서 금융거래 또는 국제결제의 중심이 되는 통화다. 전 세계의 화폐는 달러에 대비해 가치가 매겨지고 달러를 매개로 거래된다. 거칠게 말하면 미국은 달러화를 찍어내고 달러화를 빌려주는 것만으로 자국 경제를 꾸려갈 수 있다. 현재 미국의 국가 부채는 21조 달러로 전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달러화가 기축 통화인 이상 미국의 국가 신용도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미국은 부채를 당장 갚을 필요도 의지도 (어쩌면 능력도) 없다. 


문제는 미국이 언제까지나 세계 패권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을지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현재 중국이 엄청난 속도로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따라잡고 있다. 작가는 구체적으로 2024년 '스톤에이지' 사건으로 주요 인터넷 인프라가 마비되며 미국 경제 시스템의 허점이 노출되고, 2029년 중국과 러시아가 금융 쿠데타를 주도해 미국을 세계 패권의 지위에서 몰아내고 새로운 기축 통화를 대신 세울 것이라고 내다본다(물론 전문가로서의 예측이 아니라 소설가로서의 상상이다). 


이 경우 1997년 한국이 외환 위기를 겪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이 미국 경제, 아니 미국 사회 전체에 가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작가는 이때 벌어질 법한 일들을 13세 소년 윌링 맨디블과 윌링의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세대의 모습을 통해 자세히 보여준다. 가정 내에 실직자가 속출하고, 밀린 월급이 나올 기미가 안 보이고, 물가가 치솟고 가처분 소득이 낮아지고, 사립학교에 다니던 아이는 공립학교로 전학하고, 대학에 진학해야 할 아이는 입학을 미루고 취업을 하는 등의 모습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 국가 부채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결혼반지나 부모님이 물려준 귀금속 등 개인이 가진 금붙이까지 전부 국가에 바치는 모습까지 똑같다. 


주목할 점은 소설의 배경이 1997년이 아니라 2029년이라는 것이다. 2029년이면 현재 진행 중인 제4차 산업혁명이 지금보다 훨씬 더 심화된 상태다. 지금도 로봇과 인공지능, 빅데이터 기술 등이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라는 우울한 예측이 나오고 있는데, 2029년에 경제 위기가 닥치면 1997년보다 더한 대량 해고, 고용 한파가 일어날 것이다. 국가가 망했으니 공무원도 더 이상 철밥통이 아니고, 대학도 문 닫을 상황이니 정년 보장받은 교수도 안심할 수 없다. 소득은 줄었는데 물가는 오르고, 세금 부담은 커졌는데 복지 혜택은 반토막으로 줄고...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경우 국민들은 '탈조국'을 꿈꾸게 될 것이고, 국가는 이들을 붙들어 맬 명분이 없을 것이다. 


작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2047년의 모습까지 상상해 보여준다. 이 시대에는 직업을 가지려면 칩을 이식받아야 한다. 이는 사회보장번호(한국으로 치면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는 것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칩은 개인 정보뿐 아니라 개인의 금융 정보, 거래 내역, GPS 좌표, DNA, 정신 상태 등등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디지털 처리해 정부에 보고하는 데 이용된다. 말도 안 되는 상상 같지만, 블록체인 기술이 발전하면 가까운 시일 내에 이것과 비슷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조지 오웰의 <1984>보다 훨씬 실감 넘치는 디스토피아 소설의 탄생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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