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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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물론 작가에 대한 정보도 없이 무작정 책을 샀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정신없이 빠져들 줄도 모르고. 일본에는 좋은 작가, 좋은 소설이 참 많구나. 새삼 느꼈다(물론 한국에도 많습니다).


1982년, 건축학을 전공한 사카니시는 졸업 직전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물리치고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건축가인 무라이 선생의 건축 설계사무소에 취직한다. 무라이 선생의 사무소는 업계 내에서 평판이 좋고 세간의 명성 또한 대단하지만, 무라이 선생이 벌써 일흔 남짓한 나이인 데다가 몇 년째 신입을 받지 않은 터라서 다들 사카니시의 취직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카니시는 채용하기로 결정했다는 통보를 받고 무사히 건축가로서의 첫 경력을 시작한다. 


무라이 설계사무소는 도쿄에 있지만, 매년 7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도쿄에서 한참 떨어진 기타아사마에 있는 오래된 별장지, 통칭 아오쿠리 마을에 있는 '여름 별장'으로 사무소 기능을 옮긴다. 이제 막 사무소에 입사한 사카니시 또한 선생님과 선배들을 따라 아오쿠리 마을에서 한여름을 보내게 된다. 알고 보니 사카니시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무라이 설계사무소에 채용된 것은 국립현대도서관 프로젝트 준비를 앞두고 인력을 보충하기 위함이었고, 사카니시는 입사 첫해부터 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어 잔뜩 기대한다. 


건축과 건축가에 관한 이야기가 소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직업물이 분명한데도, 대자연으로 둘러싸인 여름 별장이 무대이고, 낮에는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일하고 논쟁했던 사람들이 밤에는 함께 요리를 만들고 휴식을 취하며 여유를 부리는 모습을 같이 봐서인지 덜 딱딱하고 덜 팍팍하게 느껴졌다. 차분하고 정적인 분위기 때문에 등장하리라고 예상치 못했던 로맨스가 몇 번이나(그것도 삼각, 아니 사각 관계) 등장해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인 점을 부인하기 힘들다. 


사카니시의 시선으로 소설을 바라보면 햇병아리 건축가가 노장 건축가의 설계사무소에 입사해 그의 문하에서 철학과 기술을 사사하는 과정이 도드라진다. 반면 무라이 선생의 시선으로 소설을 바라보면 건축가로서 높은 경지에 올랐고 남부럽지 않은 부와 명예도 누렸지만, 말년에는 일도 사랑도 뜻대로 이루지 못하고 허무하게 눈을 감은 한 남자의 생애가 떠오른다. 만약 무라이 선생이 소설의 화자였다면 결말이 허망하고 씁쓸했을 텐데, 사카니시의 시선으로 무라이 선생의 생애를 보니 그의 생애가 꼭 허망하지도, 그의 마지막이 씁쓸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사람이 살면서 '형태 있는' 어떤 것을 남길 수도 있지만 '형태 없는' 어떤 것을 다른 사람의 마음에 남길 수도 있다. 누군가가 누군가의 마음에 남긴 '그것'은 그 어떤 건축물보다도 사람을 단단하게 받치고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이 아닐까. <화산의 기슭에서(火山のふもとで)>라는 다소 밋밋한 원제를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는 멋진 제목으로 번역한 역자의 센스도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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