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41227

오늘의정진: 絶學無爲休道人(절학무위휴도인) 배움이 끊어지고 함이 없는 한가한 도인



u  100일 정진,  2일차


먼저 어제 언급했던 '보여지는' 약간의 수동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조금 깊이 보는 단계를 () 이라고 했다.

오늘 대해 깊이 보는 () 해보면 나타날 가깝다.

예를 들어보면 어두운 밤에 혼자 깜깜한 방에 들어가게 되면 눈으로 방안을 보면 어둡기 때문에 보이질 않는다. 그런데 방문 전등 스위치를 켜는 순간 밝아지면서 앞에 방의 전체 모습이 전부 드러나게 된다. 이때 비로소야 드러난 방의 실체를 눈으로 똑똑히 전부를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고 깨달음이다.  

다시말해 견은 바로 나타나져() 보이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군불견, 그대 보이지 아니한가 뜻은 그대의 앞에 깨달음이 보이지 않는가 하고 묻는 것이다

깨달음은 나타나져야 있는 것인데 '그대 이제는 보이는가' 로 영가(永嘉) 스님(674~713)은  구절을 시작했다.

오늘은 증도가(證道歌)의 두번째 구절이다.


絶學無爲休道人(끊길 절, 배울 학, 없을 무, 할 위, 쉴 휴, 길 도, 사람 인)

절학무위휴도인 (배움이 끊어지고 함이 없는 한가운 도인은)

不除妄想不求眞 (아닐 부, 제거할 제, 망령 망, 생각할 상, 아닐 불, 구할 구, 참 진)

불제망상불구진  (망상을 제거하지도 않고 참을 구하지도 않는다.)


증도가 전체를 들어 가장 많이 알려진 구절이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이다.


이 구절은 승찬대사(僧璨510~606)신심명(心銘)의 첫 구절


<至道无难 지도무난 (이를 , , 없을 , 어려울 )

唯嫌拣择 유혐간택 (오직 , 꺼릴 , 가릴 , 가릴 )

도에 이르는것은 어렵지 않나니, 오직 가리고 택하는 마음만 꺼릴뿐이.>

더불어 선어록 중에 가장 유명하다.

어쩌면 증도가는 군불견 다음의 사실상 첫 구절인 '절학무위휴도인'과 신심명의 첫 구절 '지도무난' 은 의미로 볼 때 쌍둥이 처럼 서로 닮았다.


배움이 끊어지고 함이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말 그대로 깨우친 사람을 말한다.

이것은 신심명의 도에 이르는 것 과 서로 상통한다.

그리고 그 경지는 어떻게 해야 도달하는가?

증도가에서는 망상을 제거하지도 않고 참, 즉 진리를 따로 구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신심명은 오직 가르고 택하는 마음, 즉 분별심을 꺼린다고 했다.

결국 도에 이르고, 도인이 된 사람들은 망상을 제거하거나, 진리를 얻고자 애를 쓰는게 아니다. 분별하지  않는 사람을 바로 도인 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어서 원죄를 지은게 아니다.

선악과를 먹고서 분별을 했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다.

모든 죄의 근원은 분별심이다.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렸다

즉 옳다.그르다, 좋다, 싫다로 나누는 그 분별심 이야말로 업을 지는 것이다.

그래서 승찬대사와 영가스님은 분별하지 않는 것이 도라고 하셨다.


도인이 되고자 해서 도인이 되는게 아니다.

그러니 배움이 끊어진 絶學 절학의 경지는 배울게 더 이상 없거나 배울 필요가 없다는 뜻도 아니다.

배워야 한다는 마음 자체, 즉 분별이 끊어진 상태라는 것이다.

뭔가를 일부러 지어서 할려고 하는 마음을 有爲 유위 라고 한다.

無爲 무위는 함이 없는 것을 뜻한다. 저절로, 자연 스럽게. 그러한 경지.

이 역시 수동에 가깝다. 그런데 이 수동은 수동이 되고자 해서 되는 건 또 아니다.

저절로, 자연스럽게.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하게 되는 경지다.

분별이 사라지는 경지는 저절로 이루어 지는 경지다.

내가 분별을 하지 말아야지 해서 이루어지는 경지가 아닌 것이다.


노자(老子)의 사상을 접했다면 무위는 이해가 되는 단어다.

함이 없이 , 억지로 행하는 것이 아닌 行행 하는 가운데 한다는 생각 없이. 그냥

쉽게 말하면 그냥이다. 배고프면 밥 먹고, 목 마르면 물 마시고, 배 아프면 화장실 가고, 졸리면 자는 행위가 바로 그냥 하는 무위이다.

그냥 하는 경지. 분별이 없는 경지 그게 바로 무위다.

신심명과 증도가는 도의 경지를 글의 맨 앞 구절에 확실히 선포를 해버렸다.

깨달음의 상태에서 바로 그대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마치 베토벤 운명 교향곡의 서곡과 같은 강한 충격과 인상을 마음 속에 새겨 놓는다.

증도가와 심신명의 첫, 두 구절뒤에 이어지는 구절들은 앞의 구절을 전부 변주하며 이어지는 것 과 같다.  깨달음의 오케스트라가 펼쳐지는 것이다.


絶學無爲休道人 절학무위휴도인 ( 배움이 끊어지고 함이 없는 한가운 도인은)

不除妄想不求眞 불제망상불구진 (망상을 제거하지도 않고 참을 구하지도 않는다.)

2000 1 7일은 내가 중국으로 처음 취업을 해서 오게 날이다.

지금이 2024 12 이니 벌써 25년이 지났다.

25년전 집을 떠날  나의 스승님께서 손수 그리시고 써주신 구절이 바로 증도가의 '絶學無爲休道人'  이였다.  

화선지에는 옛 사람이 크고 둥근 달 빛 아래 낚시대를 드려놓고 앉았고, 맞은편 멀리 초가집 한채가 옛 사람를 기다리고 있다.  

그림 아래 써 주셨던 '絶學無爲休道人'  구절은 지금도 내 마음 속에 간직되고 있다.

어쩌면 이번 100일 정진은 그 시절 , 그 마음 상태로 환본(還本)하는 정진이 될 지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4 1226

오늘의정진: 증도가(證道歌) 구절, 君不 그대 보이지 않는가


u  100 정진, 1 일차


어제 발심을 했고 오늘 정진 1일차 들어간다.


증도가(證道歌) 지은 영가(永嘉)스님(674~713) 중국 ()나라 시기에 살으셨던 분이다.  당시의 중국 불교는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 등장으로 ()불교가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기존에 교학(敎學) 중심으로 하던 수행방식을 완전히 전복 시킨 혁명과도 같은 수행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돈오(頓悟), 단박에 깨닫는다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불교 수행이었다.

부처님 열반 이후 불법은 인도에서 28대조인 달마대사로 부터 중국에 전해졌다.

선불교에서는 달마대사를 선의 초조(初祖) , 1 조사로 삼는다.

핵심은 "불입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入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이라 수있다.

직지인심,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르킨다. 마음을 깨치는 것이 부처라고 했다.

부처님 말씀을 경전을 통해 공부하여 부처와 같은 경지로 가는 것에서 경전을 통하지 않고 바로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 이다.

선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바로 부처와 같은 경지,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 선불교가 번성하게 이유이다.

선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돈오(頓悟)  점수(漸修) 나눠지는데 우리나라에는 성철 스님이 한때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었다.

돈오와 점수는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스님(1158~1210) 의해 이미 정리가 되었다.


증도가는 '() 증득(證得) 노래()' 풀이할 있다.

증도가를 지은 영가스님은 혜능대사에게서 깨달음의 인가(認可) 받으신 스님으로 혜능대사 문하에서 직접 수행지도를 받으신 분은 아니라 한다.

혜능대사를 뵙기 전에 이미 스님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고 그에 대한 인가를 혜능선사에게 받은 것이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깨달음에 이르렀어도 자신의 깨달은 바가 맞는지 검증이 필요하다고 한다. 거짓 깨달음에 빠질 수도 있고, 깨달았다고 착각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지식(善知識) 찾아야 한다.

영가 스님이 조계산(曹溪山) 계신 혜능 스님을 찾아 뵙고 선문답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를 인가를 받게 된다. 인가를 마친 영가스님은 바로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혜능 스님은 영가스님을 하루 밤만 머물다 가라고 하셨다.

그래서 영가스님을 '일숙각(一宿覺: 하룻 밤의 깨달음)' 이란 별칭을 가지게 된다.

스님은 현세에서 하루 뿐인 인연이었지만 세세생생 함께 이어지게 된다.

공교롭게도 분이 713, 모두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나셨다.



증도가의 구절, (임금 , 아닐 , ) 군불견 으로 시작한다.

뜻은 통상적으로 군을 '그대' 라는 뜻으로 보고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혹은 <그대 보았는가> 해석한다. 성철 스님도 그렇게 해석하셨다.

그런데 나는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그대 보이지 않는가>

이것은 전혀 다른 뜻으로 분명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본다는 뜻의 한자는 , , (, , ) 있다.

얼핏 같은 뜻인 같지만 사용되는 면에서 각각 차이가 있다.

중국어로 "看不见" (kan bu jian: 지엔) <보이지 않는다> 뜻으로 쓰인다.

이를 분석해서 보면 뜻은 사실은 <보는데 보이지 않는다> 뜻이 된다.

우리말로는 '' '' 전부 '보다' 뜻으로 있지만  앞의 간은 볼려고 하는 의도가 들어가 있다.

앞의 볼려고 시도하는 의지가 있는 능동적이고 , 뒤의 '보여지는' 약간의 수동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견은 보려고 하는 의지가 아닌 자연스레 혹은 저절로 보여지는 상태인 이다.

뉘앙스가 서로 전혀 다른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 '보려는 의지' 아닌 '보여지는 상태' 이해 해야 한다.

팔정도(八正道) 유명한  正見(정견) '바르게 보다' 뜻이지만 사실은 <바르게 보여지다>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깨달음의 단계에 해당하는 '견성(見性)' <성품을 보다> 아니라 <성품이 보여지는> 으로 이해 해야 뜻이 부합된다.


깨달음은 의지로 이루어 지는게 아니다. 성품을 볼려는 의지로 보아지는게 아니란 것이다. 깨달음이 와야한다. 성품이 보여져야 한다. 능동이 아닌 수동이다.

그래서 불교의 세계관에서 인연은 억지로 맺는게 아니다. 저절로 자연스럽게 되어져야 한다. 성품은 보여지는 것이다. 내가 본다고 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라는 경지에 다달아야지 저절로 보여지는 경지 것이다.

그렇다면 증도가 구절, (군불견) <결국 그대 보지 못하는가> 보다는 <그대 보이지 아니한가> 이해해야 한다.


증도가는 영가스님의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한 글이다.

그러니 '그대' 지칭하는 '' 아직   경지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보여지는 경지가 것이라고 믿는다.

문득 보여지는 경지.

그대 아직 보이지 아니한가.



마지막으로 () '' '' 모두 합친 상태의 '보다' 이해하면 좋을 하다.

관은 유위법(有爲法) 적인 대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무위법(無爲法) 해당하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보는 것을 뜻한다.

,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본다' 때는 () 으로 써야 한다.

그래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뜻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보는 보살이라고 했다.

소리를 어떻게 있는가? 그러니 무위법이다.

내면을 관한다. 이것도 역시 무위법이다. 보는 대상을 눈으로 보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관하는 , 그것이 바로 진정 나를 보는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24-12-26 1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걸음을 내딛었군요. 정진하시길...
 

 <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4 1225

오늘의정진: 크리스마스 날인데 ... 마음 세우기 (발심 發心)


u  100 정진,  0일차

일전 부터 다시 ()어록을 보게 되었다.

하루에 구절이라도 참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하고 독후감 쓰기도 벅찬데 매일 관노트를 쓰려고 하니 과연 해낼 있을까 싶다. 그런데 이미 2023 4 부터 7 까지 100 정진을 해본 경험이 있으니 이번에 다시 한번 도전해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든 한번 해봤으면 다음엔 쉬워지니까... 그걸 믿고 해야 겠다.

그때는 승찬대사의 신심명(信心銘) 풀어 봤는데 이번에는 영가(永嘉)스님(674~713) 증도가(證道歌) 해야 겠다는 마음이 자꾸 일어난다.

사실 증도가는 하고는 싶지만 감히

혹시 하루에 구절을 하더라도 개의치 말자고 다짐한다.

중요한 것은 발원이다. 발심을 내는게 중요하다.

그러니 오늘은 마음 내는 걸로 시작해야 겠다.


u  오늘 있었던

설이의 국가 장학재단 신청을 어제서야 신청을 하게 되었다.

사실 그전에 알고는 있었지만 귀찮은 마음이 강해서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치려 했었다

그런데 쌍선이 형이 출근하자 마자 빨리 신청하라고 모르면 자기가 대신해 주겠다고 호들갑을 떤다.

피할래야 피할 없는 운명임을 느끼고 신청을 하기 시작했다.

내일이 신청 마감날 인데 홈페이지 내용만 봐서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갔다.

오늘 전화로 물어 보려 했으나 계속해서 ARS 자동 응답만 들린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늘이 크리스마스다. 한국은 크리스마스가 쉬는 날이었던 것이다. 이곳 중국은 전혀 상관이 없는데...

올해의 예수 보살님의 생일 축하 파티는 너무나 조용히 보내는 같다.

나만 그런가? 예수님, 성탄 축하드립니다. 메리크리스마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잠깐, 여기서 구주는 救主, 구세주를 뜻하는 것이겠지?

세상을 구원하는 . 세상을 구하는 것은 잠시 미루고 ' ' 부터 구원해야 하는데..

그러니 정진해야 겠지....

암튼 신청 관련 질문은 내일 다시 전화로 의문나는 것을 물어 봐야 겠다.

그래서 연습장에 질문할 여러개를 적어놨는데 다른 부모들도 이럴까 싶다.

부모 노릇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어쩌랴... 부모가 되서 해야할 일이 자꾸 생기는데...

이것도 돌려 놓고... 지켜 본다.

그래 이번 정진 발원은 "나 부터 구원하자."로 삼아야 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쁜 책 - 금서기행
김유태 지음 / 글항아리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제목: 나쁜 책 / 금서기행

지은이: 김유태

 : 금기(禁忌) 를 넘어서 존재하는 진실을 찾는 여정



나는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책 제목이 <나쁜 책> 이다.

'금서기행' 이란 부제목을 달고 있는 '빨간 책' 이다.

나에게 '빨간 책' 하면 학창 시절의 은밀한 단상이 떠오른다. 

그 시절 학교에서 선생님 눈을 피해 친구들과  몰래 돌려가며 보던 19금 서적을 우리끼리 속어로 '빨간 책' 이라고 불렀다.

신성한 학교에서 겉이 하얀 교과서 뒤에 속이 야한 빨간 책을 숨겨놓고 메마른 침을 삼켜가며 숨죽여 보는 짜릿함은 당시의 우리에게 엄청난 일탈이자 모험이었다.

성적 호기심으로  충만한 사춘기 소년들에게 풍만한 여신에 대한 환상을 생생히 상상하게 만드는 '빨간 책' 은 분명히 '금서(禁書)' 였다.

물론 금서를 몰래 보다가 들키게 된다면 마치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는 듯한 끔찍한 결과를 각오해야 했다.

지금 우리 애들도 나 몰래 비밀리에 야동을 보겠지만 그 시절 나와 같은 느낌으로 보는 지는 모르겠다.

이제 세상은 변했고 성()과 폭력(暴力)에 대한 수위의 경계는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오늘날 아직도 많은 국가에서는 정치, 종교, 사회, 문화적인 체제에 반()하여 불온(不穩) 하다는 이유로 작가들의 사상을  통제하고 출판의 자유를 빼앗기도 한다.

그래서 금서(禁書)에 대한 호기심은 어쩌면 사춘기 소년의 욕망과도 비슷한 일탈성(逸脫性)을 갖고 있지 않을까?


이 책 <나쁜 책> 에는  한때 금서였거나 아직도 금서로  봉인(封印)된 작품과 작가 들을 만날수 있다.

이문열, 마광수 같은 우리나라 작가를 비롯하여 조지 오웰, 니코스 카잔차키스, 밀란 쿤데라 , 주제 사마라구, 엔렌커 같은 비교적 친숙한 이름의 작가들도 있었다.   

하지만  넬리 아르캉, 사데크 헤다야트, 타슬리마 나스린, 이스마엘 카다레, 비톨트  곰브로비치 등 나에게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작가들의 책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중에서 <난징의 강간>을 쓴 아이리스 장의 슬픈  개인사, 한때 실제로 창녀로 살았던 <창녀>의 작가 넬리 아르캉, 다 읽는 순간 자살하게 된다는 < 눈먼 부엉이> 의 사데크 헤다이트, 시선이 곧 권력이 된다는 <포르노그라피아> 의 작가 비톨트 곰로비치 등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다수의 작가와 작품은 생소했고  근친상간, 살인과 폭력,  소아성애, 신성모독,시체유기등 같은 상당히 높은 수위의 자극적인 소재가 난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대부분이다. 금서의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한 불편한 소재안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이다. 



<참극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작가 본인과 난징 피해 여성간의 시간적 . 공간적 거리감이 사라졌고 이 때문에 아이리스 장의 고통으로 전염되었다는 설명입니다. 타인의 고통이 씨앗처럼 이식되어 그녀 내부의 고통으로 발아된 것이겠지요. 그 싹이 자라 맺은 결말의 이름은 작가 자신의 '죽음' 이었습니다.> (P.38 아이리스 장, 난징의 강간 중에서) 



<나는 정치적인 것이나 젠더의 문제나 무엇이든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 보려한다.  예술과 정치는 뼈와 피의 관계와 같아 분리할 수 없다. 픽션은 진실이며, 픽션은 더 깊은 진실이기도 하다.> (P.358 아룬타티 로이, 작은 것들의 신 중에서)


<시선의 문제는 권력의 발생과 등가를 이루는 일이며 시선을 확보한 자가 권력의 소유자가 됩니다. 인간이 지하 단칸방이 아닌 고층 건물 거주를 희망하거나 권력자가 되어 세상을 내려다 보기를 바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시선 확보의 문제 이기도 하지요. 시선의 우위에 서면 타자로부터의 개입('균열')을 근원적으로 차단할 수 있으니까요.> (P.366 비톨트 곰브로비치, 포르노그라피아 중에서 )



이처럼 <나쁜 책>을  소개하는 저자 김유태의 통찰은 감탄할 만큼 아주 훌륭했다.

금서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금서속에 숨겨진 작가들의 내면을 발견하고 그 사색의 지점을 저자의 시선으로 독자와 함께 바라 보고자 했다. 

아마도 책의 소제목이 '금서기행' 이라 붙인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쁜 책>은 가장 좋은 책이었다. 

일명 '불온서적(不穩書籍)' 으로 불리는  '나쁜 책'을 통찰하는 아주 '좋은 책'인 셈이다.


<나쁜 책>의 저자 김유태는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자 매일경제신문 기자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발표 되기전에 이미 한강 작가와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때 한강작가의 수상을 예측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을 정도로 기자로서 통찰이 뛰어난 것 같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매주 100여권 정도의 신간이 여러 출판사로부터 저자 앞으로 배달이 된다고 한다. 한달이면 500여권, 일년이면 6000권이 넘는 신간이 우리나라에서 출간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 중에서 매주 10권 정도만 저자에 의해 선택  되어지고 나머지는 버려진다고 한다.

그 버려진 책들에 대하여  저자는 '안전한 책' 이라고 부른다.


독자를 충격하지 못하는 책은 출판과 동시에 죽기 때문에 살아서 팔딱거리는 책 골라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오직 살아서 펄떡거리는 책, 세상과 불화하고, 독자에게 싸움을 거는 책이라야 진정한 책의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의 바램처럼 언제나 항상 살아 있는 책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때마다 저자는 독자의 신분으로 돌아가 자신이 성소(聖所)로 여기는 대학 도서관 책장의 책들을 끄집어 본다고 한다. 

그때 저자가 읽게 된 책이 바로 엔렌커(阎连科) <사서(四書)> 였다.

엔렌커는 현존하는 작가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작품이 금서로 지정 되어졌다.

그가 쓴 작품중 무려 8권이나 중국에서 출판 금지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세상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서랍속에 갇힌  '서랍문학(抽屉文学)' 이라 불린다.

저자는 서랍속에서 빛나는 금서(禁書) 사서(四書)를 언급하며 위험한 책인 금서가 가진 의의를 말한다.


<위험한 책에는 금서라는 딱지가 붙고, 금서중에서도 정말 위대한 책은 독자의 내면에 끊임없이 싸움을 걸어온다. 독서의 끝자락에서 어지러움증을 일으키는 책만이 불멸의 미래를 약속 받는다. 엔렌커의 대다수 책이 그러한 것 처럼 금서는 이중적 드라마다.> (들어가는 글 중에서 P.12)


<금서를 선택하여 읽는다는 것은 잊힐 뻔했던 인류의 가치와 미래 지향적인 진의를 제자리에 위치시키는 독자(讀者)적 행위다. ... 중략... 위험한 책만이 위대한 책은 아니다. 그러나 안전한 책만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우위에 서서 교훈 처럼 자신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들어가는 글 중에서 P.15)


이러한 시각으로 보면 세상의 거의 모든 문학 작가들은 언어를 통해 진실을 찾는 탐색자(探索者)이자 구도자(求道者)들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 감추어지고 가려진 진실을 찾고자 그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파헤치고 있다.

그들 중 아주 일부는 외부의 세상이 아닌 인간 정신과 사물의 내부로 시선을 돌려 펜을 마치 수술실의  메스처럼 사용하여 해부하기 시작한다.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과연  진실인가?


그러한 작가들의 진실 찾기의 첨예함은 결국 시대와의 불화를 불러 일으킨다.

안전한 책을 쓰질 못하고 시대와  타협하지 못한 그들이 써낸 책은 불온하고 위험한 '나쁜 책' 이라는 시대의 평가를 받게 된다.

정치, 종교, 이념, 문화등 사회 체제가 정한 '금서(禁書)' 는 사실은 어두운 인간본성과  불편한 진실을 은밀히 감추고 있다.

어쩌면 금서를 정한 사회 제체는 독자가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때의 충격을 보호해 주려는 선한 의도도 분명 있을 것이다.  또 현실과 픽션을 구분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대중들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진실을 왜곡, 조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 사회는 시대와 체제를 맹신하고 맹종하는 사람들을 더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아직 금서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이 더 있다는 뜻 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세상의 모든 금서 작가들의 진실 찾기는 여전히 계속 될 것이다.

맹종(盲從)맹신(盲信)을 멈추고 깨어있는 지성과 영성을 위해 우리는 '나쁜 책'을 읽어야 한다

금기(禁忌)를 넘어서 존재하는 진실을  향한 나의 독서 여정은 계속해서 이어져 갈 것이다.



지금은 봉인해제가 되어 버린 사춘기 시절 '빨간 책' 속의 픽션은 성숙과 성장에 필요했던 또 다른 의미에선 '좋은 책' 이지 않았을까?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

근래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금서의 작가는 없다. 노벨문학상의 안전한 선택은 변질이며 이는 권위의 하락으로 이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 P14

타인의 렌즈로 자아를 규정하려는 이중성은 우리 모두가 갖고 있습니다. 특히 흑인에게 그것은 참혹했던 역사와 차별적인 문화가 억지로 눈알에 끼워넣은 무형의 콘텍트렌즈이고, 심장에 깊숙이 박은 미추의 안경일 것입니다.
<토니 모리슨, 가장 푸른눈> - P101

대중적으로, 또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는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회 내부의 기저심리, 일종의 무의식을 건드릴 때라야 가능하다는 것이 널리 입증됐습니다.
<카밀로 호세 셀라,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 P132

생각해보면 인간이 간절히 원하는 욕망은 언제나 파괴적입니다. 자아를 부수고 그의 주변 세계를 붕괴시킵니다. 거친 욕망일수록 그 욕망은 평범한 삶으로부터의 월경(越境)을 전제로 삼습니다.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윤리적 굴레를 무너뜨리고 금지된 땅으로 진입하는 시도일 때가 많습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어둠 속의 웃음소리> - P148

다시말해 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인간의 비범한 운명을 계획했다는 의미였으며, 역경과 고난에 빠진 인류가 신을 찾음으로써 위안을 얻는게 아니라 신의 영광을 위해 인간이 도구화된다는 충격적인 전제였습니다.
<주제 사마라구, 예수복음> - P273

우리는 이처럼 자기 자신의 심연을 응시하면서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자기 내면과 대화 없이 삶은 완성되지 못합니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내면에 헤다야트의 부엉이 같은 ‘무엇‘이 있지 않던가요.
<사데크 헤다아트, 눈먼 부엉이> - P3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은 예술이 된다 - 문학과 영화에서 죽음을 사유하는 방식
강유정 지음 / 북바이북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제목: 강유정 에세이/ 죽음은 예술이 된다.

지은이: 강유정

 : 문학과 영화에서 죽음을 사유하는 방식(죽음에 대한 사유여행 안내서)



파리 올림픽이 끝난 여름 끝자락, 국회에서는 대한 체육회와 축구 협회의 고위 인사들을 상대로  청문회가 진행되었다.

여야 국회의원들은 배드민턴 협회에서 벌어진 상식을 벗어난 많은 문제점과 대한축구 협회의 대표팀 감독 선임 과정에서 발생한 석연치 않는 의혹들에 대해서 추궁을 하였다.

이때 체육계의 철옹성 같은 카르텔과 특권 의식으로 무장한 증인들을 상대로 면리장침(綿裏藏針: 부드러운 솜안에 날카로운 바늘을 감춘 듯) 한 질의을 던지는 국회의원  한 명이 눈에 들어 왔다.

그 국회의원은 바로 방금 읽은 책<죽음은 예술이 된다> 의 저자 강유정 작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강의원은 국회의원(비례대표) 이 되기전 까지만 해도 문학과 영화 평론가로 널리 알려졌으며  심지어는 대학 교수로도 왕성한 활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청문회에서 그의 질의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 책 <죽음은 예술이 된다>는 강의원이 평론가로 활동하던 시기에  영화와 문학을 통해 사색한 죽음에 대한 에세이 집이다.

올 해들어 나는 의학과 사회, 역사 분야등의 책을 통해 죽음에 대해 이해해 보고자 했다.  그런데 문학과 예술 장르에서 만나는 죽음이라 하니 처음에는 약간 생소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문학과 예술이야말로 죽음을 이해하는데 더할 나위 없는 소재들로 가득차 있지 않는가 ?


<죽음과 삶은 뒤섞여  예술이 된다.  죽음이 예술과 몸을 섞어 다른 무엇으로 현현하는 그 작은 시간들, 스몰 아워Small Hour. 빛도 어둠도 아닌 밝은 밤, 그런 밤에 이 글을 쓴다. 황혼은 길고, 밤은 깊고, 아침이 오기 전까지의  깊은 새벽, 스몰 아워는 속삭인다. > (스몰 아워의 고백) 중에서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스몰 아워의 고백'  에서 작가는 '죽음은 삶과 뒤섞여  예술이 된다' 고 예술에 대해 정의했다.

우리의 생()은 영속성(永續性)을 지니고 있지 않다.  

생이 다하는 그 순간 이후를 우리는 '죽음' 이라고 이름 짓는다.

우리의 생은 우연(偶然)이지만 죽음은 필연(必然)이다.

필연의 마지막, 그 죽음의 순간은 영겁으로 향하는 찰나(刹那)의 시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그래서 아마도 작가가 뜻하는 '스몰 아워' 란 빛과 어둠이 섞이며 함께 공존하는 찰나의 시간, 아주아주 작은 시간이란  뜻으로 정의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한 스몰 아워에서 벌어지는 삶과 죽음이  뒤섞이는  순간 즉, 죽음이 예술이 되는  다양한 순간을 작가는 문학 작품과 영화속에서 살펴보았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상실을 견딜 수 있고, 사랑의 정서와 감각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기다릴 수 있다>(삶에 새겨진 아프고  아름다운 경고)중에서


사랑이란 감정이 죽음과 얽히게 된다. 사랑은 순수함과 동시에 아주 복잡한 감정이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처럼  순수한 사랑 끝의 죽음도 있지만  <데미지>,<페드라>,<욕망의 제국>등 같은 영화속에서 금지된 욕망의 결과가 파멸뿐인 죽음도 있다.

순수하고 순결한 그래서 나이브한 사랑에서 부터 불륜이나 치정과 같은 금지된 욕망의 사랑 조차도 죽음과  뒤섞이게 되면 그때 이 모든 사랑은 영원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의 생을 구성하는 감정중에  하나인 사랑이  죽음과 만나 예술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 주었던 마음의 에너지, 리비도를 찾아오지 못할 때 ,남아 있는 사람은 우울증에  빠진다.> (죽음을 모르는 어른은 없다) 중에서


멜랑콜리는 우울함을 의미한다.  우울함은 '어둡다' 는 어원을 두고 있다.

인간이 가진 보편적 감정중 하나인 우울함은 필연적으로 어두운 죽음을 만나게 된다.

이에 대해 저자는 프로이트의 상실의 슬픔에 대해 말한다.

우울한 감정과 만나는 어두운 죽음은 어쩌면 쉽게도 자살 충동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특히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던 10대 시절이 그러하겠지만 어른이라 해도 자살의 유혹을 뿌리쳐 내긴  쉽지 않다.

영화 <월플아워>, <죽은 시인의 사회>와 하루키 소설<상실의 시대>에서는 우울함과 결합된 죽음 즉, 자살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선택의 결과는 너무나 비극적이다.

슬픔을 동반하는 모든 행위들은 비극적 끝을 맞이한다.

우리는 이러한 비극적인 죽음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두고자 한다.

왜냐하면 의미를 남기는 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과 영화는 이러한 의미 있는 죽음을 살려내기에 가장 좋은 도구가 아닌가 싶다.  실제 삶에서 의미 없이 잊혀져야 했던 죽음은 문학과 영화라는 산소 호흡기를 달고 나서야 다시금  생생하게 깨어난 죽음을 우리는 마주하게 된다.

바로  죽음이 예술이 되는 순간이다.

이처럼 저자는 수 많은 영화와 문학 작품을 넘나들며 작품 속의 다양한 죽음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작가는 우리가 죽음을  접해야 하는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신화속의 왕 미트리다테스는  독살을 두려워해 매일 조금씩 독을 먹었다고 한다. 문학과 예술도 그렇다. 우리가 문학과 예술에서 죽음을 접하는 것은 그 죽음이라는 미지의 공포로부터 면역을 얻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린 자신을 죽이고 성장한 스스로와 만나야 한다.> (10대 그리고 죽음이라는 유혹) 중에서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저자의 '사유여행(思惟旅行)' 보고서이며 독자에게는  다양한 죽음에 대한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다.

우리 생의 순간에 존재했던 다양한 감정들이 죽음과 섞이면 그 죽음이 어떻게 예술이 되는지를 사유여행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곧 예술로 승화된 죽음은 일종의 '메타포(metaphor :은유)'  가 되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이처럼 수 많은 죽음의 간접 체험으로 얻은 통찰로써 지금 보다 더 나은 삶이 되길 소망했다.  다시 말하자면 죽음을 보여 준다는 것은 삶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죽음과 삶은 분리될 수 없다. 


이제 작가는 조용하고 안정된 평론가와 교수의 길을 벗어나 시끌벅적하고 불안한 정치인의 길로 뛰어 들었다.

진정한 정치인이라면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공감할 수 있는 연민이란 덕목을 지녀야 한다.  

작가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게 아니라 내가 아파 봐야 타인의 아픔도 알 수 있다고 했다.  

아마도 작가가 지닌 이러한 소중한 가치관이 그를 정치의 길로 이끈 것이 아닌가 싶다.

정치가로서의  행보에 마음속으로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죽음이 예술이 되듯이 삶도 예술이 되길 희망한다.




미래를 안다고 해서 바꾸는 게 의지가 아니라, 미래를 앎에도 불구하고 선택하는 게 의지이다. - P54

그리고 보면, 결국 죽음이란 하나의 결말이자 하나의 메타포다. - P117

그는 결국 이 두 죽음을 목격하되 잠식되지 않고, 앓되 전염되지 않음으로써 그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세계를 갖는 데 성공한다. - P107

아내의 성기는 한때 그의 욕망의 성소 였으며 이후 사랑스러운 딸이 태어난 생명의 성소였다. 그러나 항암제에 고스란히 난타당한 아내의 성기는 이제 더 이상 욕망이나 생명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오히려 생명의 통로였기에 더 빠르고 급하게 생명이 빠져나간다. - P163

이야기가 재앙을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의미없는 재앙은 없다. - P2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