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예술이 된다 - 문학과 영화에서 죽음을 사유하는 방식
강유정 지음 / 북바이북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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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강유정 에세이/ 죽음은 예술이 된다.

지은이: 강유정

 : 문학과 영화에서 죽음을 사유하는 방식(죽음에 대한 사유여행 안내서)



파리 올림픽이 끝난 여름 끝자락, 국회에서는 대한 체육회와 축구 협회의 고위 인사들을 상대로  청문회가 진행되었다.

여야 국회의원들은 배드민턴 협회에서 벌어진 상식을 벗어난 많은 문제점과 대한축구 협회의 대표팀 감독 선임 과정에서 발생한 석연치 않는 의혹들에 대해서 추궁을 하였다.

이때 체육계의 철옹성 같은 카르텔과 특권 의식으로 무장한 증인들을 상대로 면리장침(綿裏藏針: 부드러운 솜안에 날카로운 바늘을 감춘 듯) 한 질의을 던지는 국회의원  한 명이 눈에 들어 왔다.

그 국회의원은 바로 방금 읽은 책<죽음은 예술이 된다> 의 저자 강유정 작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강의원은 국회의원(비례대표) 이 되기전 까지만 해도 문학과 영화 평론가로 널리 알려졌으며  심지어는 대학 교수로도 왕성한 활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청문회에서 그의 질의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 책 <죽음은 예술이 된다>는 강의원이 평론가로 활동하던 시기에  영화와 문학을 통해 사색한 죽음에 대한 에세이 집이다.

올 해들어 나는 의학과 사회, 역사 분야등의 책을 통해 죽음에 대해 이해해 보고자 했다.  그런데 문학과 예술 장르에서 만나는 죽음이라 하니 처음에는 약간 생소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문학과 예술이야말로 죽음을 이해하는데 더할 나위 없는 소재들로 가득차 있지 않는가 ?


<죽음과 삶은 뒤섞여  예술이 된다.  죽음이 예술과 몸을 섞어 다른 무엇으로 현현하는 그 작은 시간들, 스몰 아워Small Hour. 빛도 어둠도 아닌 밝은 밤, 그런 밤에 이 글을 쓴다. 황혼은 길고, 밤은 깊고, 아침이 오기 전까지의  깊은 새벽, 스몰 아워는 속삭인다. > (스몰 아워의 고백) 중에서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스몰 아워의 고백'  에서 작가는 '죽음은 삶과 뒤섞여  예술이 된다' 고 예술에 대해 정의했다.

우리의 생()은 영속성(永續性)을 지니고 있지 않다.  

생이 다하는 그 순간 이후를 우리는 '죽음' 이라고 이름 짓는다.

우리의 생은 우연(偶然)이지만 죽음은 필연(必然)이다.

필연의 마지막, 그 죽음의 순간은 영겁으로 향하는 찰나(刹那)의 시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그래서 아마도 작가가 뜻하는 '스몰 아워' 란 빛과 어둠이 섞이며 함께 공존하는 찰나의 시간, 아주아주 작은 시간이란  뜻으로 정의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한 스몰 아워에서 벌어지는 삶과 죽음이  뒤섞이는  순간 즉, 죽음이 예술이 되는  다양한 순간을 작가는 문학 작품과 영화속에서 살펴보았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상실을 견딜 수 있고, 사랑의 정서와 감각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기다릴 수 있다>(삶에 새겨진 아프고  아름다운 경고)중에서


사랑이란 감정이 죽음과 얽히게 된다. 사랑은 순수함과 동시에 아주 복잡한 감정이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처럼  순수한 사랑 끝의 죽음도 있지만  <데미지>,<페드라>,<욕망의 제국>등 같은 영화속에서 금지된 욕망의 결과가 파멸뿐인 죽음도 있다.

순수하고 순결한 그래서 나이브한 사랑에서 부터 불륜이나 치정과 같은 금지된 욕망의 사랑 조차도 죽음과  뒤섞이게 되면 그때 이 모든 사랑은 영원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의 생을 구성하는 감정중에  하나인 사랑이  죽음과 만나 예술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 주었던 마음의 에너지, 리비도를 찾아오지 못할 때 ,남아 있는 사람은 우울증에  빠진다.> (죽음을 모르는 어른은 없다) 중에서


멜랑콜리는 우울함을 의미한다.  우울함은 '어둡다' 는 어원을 두고 있다.

인간이 가진 보편적 감정중 하나인 우울함은 필연적으로 어두운 죽음을 만나게 된다.

이에 대해 저자는 프로이트의 상실의 슬픔에 대해 말한다.

우울한 감정과 만나는 어두운 죽음은 어쩌면 쉽게도 자살 충동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특히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던 10대 시절이 그러하겠지만 어른이라 해도 자살의 유혹을 뿌리쳐 내긴  쉽지 않다.

영화 <월플아워>, <죽은 시인의 사회>와 하루키 소설<상실의 시대>에서는 우울함과 결합된 죽음 즉, 자살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선택의 결과는 너무나 비극적이다.

슬픔을 동반하는 모든 행위들은 비극적 끝을 맞이한다.

우리는 이러한 비극적인 죽음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두고자 한다.

왜냐하면 의미를 남기는 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과 영화는 이러한 의미 있는 죽음을 살려내기에 가장 좋은 도구가 아닌가 싶다.  실제 삶에서 의미 없이 잊혀져야 했던 죽음은 문학과 영화라는 산소 호흡기를 달고 나서야 다시금  생생하게 깨어난 죽음을 우리는 마주하게 된다.

바로  죽음이 예술이 되는 순간이다.

이처럼 저자는 수 많은 영화와 문학 작품을 넘나들며 작품 속의 다양한 죽음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작가는 우리가 죽음을  접해야 하는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신화속의 왕 미트리다테스는  독살을 두려워해 매일 조금씩 독을 먹었다고 한다. 문학과 예술도 그렇다. 우리가 문학과 예술에서 죽음을 접하는 것은 그 죽음이라는 미지의 공포로부터 면역을 얻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린 자신을 죽이고 성장한 스스로와 만나야 한다.> (10대 그리고 죽음이라는 유혹) 중에서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저자의 '사유여행(思惟旅行)' 보고서이며 독자에게는  다양한 죽음에 대한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다.

우리 생의 순간에 존재했던 다양한 감정들이 죽음과 섞이면 그 죽음이 어떻게 예술이 되는지를 사유여행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곧 예술로 승화된 죽음은 일종의 '메타포(metaphor :은유)'  가 되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이처럼 수 많은 죽음의 간접 체험으로 얻은 통찰로써 지금 보다 더 나은 삶이 되길 소망했다.  다시 말하자면 죽음을 보여 준다는 것은 삶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죽음과 삶은 분리될 수 없다. 


이제 작가는 조용하고 안정된 평론가와 교수의 길을 벗어나 시끌벅적하고 불안한 정치인의 길로 뛰어 들었다.

진정한 정치인이라면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공감할 수 있는 연민이란 덕목을 지녀야 한다.  

작가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게 아니라 내가 아파 봐야 타인의 아픔도 알 수 있다고 했다.  

아마도 작가가 지닌 이러한 소중한 가치관이 그를 정치의 길로 이끈 것이 아닌가 싶다.

정치가로서의  행보에 마음속으로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죽음이 예술이 되듯이 삶도 예술이 되길 희망한다.




미래를 안다고 해서 바꾸는 게 의지가 아니라, 미래를 앎에도 불구하고 선택하는 게 의지이다. - P54

그리고 보면, 결국 죽음이란 하나의 결말이자 하나의 메타포다. - P117

그는 결국 이 두 죽음을 목격하되 잠식되지 않고, 앓되 전염되지 않음으로써 그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세계를 갖는 데 성공한다. - P107

아내의 성기는 한때 그의 욕망의 성소 였으며 이후 사랑스러운 딸이 태어난 생명의 성소였다. 그러나 항암제에 고스란히 난타당한 아내의 성기는 이제 더 이상 욕망이나 생명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오히려 생명의 통로였기에 더 빠르고 급하게 생명이 빠져나간다. - P163

이야기가 재앙을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의미없는 재앙은 없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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