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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30

오늘의정진: 獅子吼無畏說/사자후무외설/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 100일 정진, 95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열 일곱번째와 백 열 여덟번째 구절은

<在欲行禪知見力/재욕행선지견력/욕망 속에서 선정에 든 지견의 힘이여

火中生蓮終不壞/화중생련종불괴/불꽃에서 연꽃이 피니 끝내 시들지 않도다

勇施犯重悟無生/용시범중오무생/용시 비구는 중죄 짓고도 남이 없는 법을 깨치니

早是成佛于今在/조시성불우금재/벌써 성불하여 지금에 있음이로다> 였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목적이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또한 죄를 지어서는 절대 안되고 계율은 꼭 지켜야 한다고 여긴다. 불자라면 가장 기본적인 5계는 물론 출가하신 비구스님은 250, 비구니 스님은 348계나 되는 계율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선() 은 이러한 보편적인 상식을 뒤집어 놓는다. 선에서는 오히려 묻는다. 본래 내가 없는데 지은 죄가 어디 있는가? 어떠한 중죄(重罪)를 지었어도 무생(無生)의 도리를 깨우치면 가고 옴이 본래 공()하니 죄 또한 공함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은 백 열 아홉번째와 백 스무번째 구절

獅子吼無畏說/사자후무외설/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深嗟懞憧頑皮靼/심차몽동완피달/어리석은 완피달은 몹시 슬퍼하는 도다

只知犯重障菩提/지지범중장보리/중한 죄를 범하면 보리를 막는 줄만 알뿐

不見如來開秘訣/불견여래개비결/여래께서 비결을 열어 두심은 보지 못하도다.


현대 중국어에서 頑皮(wán pí 완피)말썽 꾸러기, 두꺼운같은 뜻이 있다. 즉 아직 다스려지지 않은, 가공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 가죽이란 뜻으로 완피달이란 가공되지 않은 무척 두꺼운 가죽으로 여기에서는 마음이 완피달 같이 무척 두껍다는 것이다. 사자의 두려움 없는 설법은 바로 돈오(頓悟)의 가르침이다. 사자후(獅子吼)같이 내지르는 돈오의 깨우침을 어리석은 완피달 같은 마음이라면 얻지 못한다. 깨달음은 죄가 없어야 구원받는 결과물이 아니다. 부처를 이루는 깨달음과 죄가 있고 없음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이 바로 여래가 알려 주신 비결임에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처의 마음은 모든 생명을 잉태하는 바다와 같다. 바다물은 깨끗하고 청정한 물로만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바다물은 더럽고 깨끗한 물을 구별하지 않고 세상 온갖 물들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에는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넘치고 살아 숨쉬는 곳이다.

부처의 마음도 그와 같아 죄가 있든 없든 결국엔 부처를 이루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자비(慈悲)에 차별이 있다면 그건 자비가 아니다. 그래서 불교를 자비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부처의 자비는 이미 지은 죄에 대한 고통을 받지 말고 어서 벗어나라는 뜻이지 그렇다고 일부러 죄를 짓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된다.


<일일 소견>

긴 겨울의 끝에 봄인 줄 알았는데 겨울은 아직도 떠나기를 온 몸으로 거부하는 것 같다.

얼마나 더 떨고 나서야 꽃 잎 피어나는 따사로운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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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29

오늘의정진: 在欲行禪知見力/재욕행선지견력/욕망 속에서 선정에 든 지견의 힘이여


- 100일 정진, 94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열 다섯번째와 백 열 여섯번째 구절은

<了卽業障本來空/요즉업장본래공/마치면 업장이 본래 공함이여

未了還須償宿債/미료환상숙채/마치지 못하면 도리어 묵은 빚 갚아야 하니

飢逢王膳不能飡/기봉왕선불능선/굶다가 임금 수라 만나도 먹을 수 없으니

病遇醫王爭得差/병우의왕쟁득차/병들어 의왕 만난들 어찌 나을 수 있으랴> 였다.


영가현각스님이 속가의 모친과 누님을 절에서 봉양했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출가한 스님이 절에다 가족을 데려와 함께 있는 경우는 들어 보지도 못한 일이다. 세속의 정을 끊지 못해 괴로워하는 수행자가 아니라 세속의 정을 그대로 지닌 채로 수행을 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는다면 제일 먼저 누구를 구제해야 하는가?


오늘은 백 열 일곱번째와 백 열 여덟번째 구절

在欲行禪知見力/재욕행선지견력/욕망 속에서 선정에 든 지견의 힘이여

火中生蓮終不壞/화중생련종불괴/불꽃에서 연꽃이 피니 끝내 시들지 않도다

勇施犯重悟無生/용시범중오무생/용시 비구는 중죄 짓고도 남이 없는 법을 깨치니

早是成佛于今在/조시성불우금재/벌써 성불하여 지금에 있음이로다.


욕망을 버리고 선정(禪定)에 드는 것이 아니라 선정은 욕망을 지닌 채로 드는 것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는 것이 아니라 진흙이어야만 연꽃이 피는 것이다.

욕망이 있는 그대로 선정에 들어야 참된 지견의 힘이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욕망 속에서도 연꽃은 피어날 수 있고 또한 시들지도 않는다. 선정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용시비구는 과거 수 억겁 전에 살았던 수행자인데 너무나도 잘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어 여성들이 그 스님의 용모에 빠졌다고 한다. 결국 스님은 어느 유부녀에게 유혹을 당해 그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급기야 스님은 음계(淫戒)를 범하고 여인의 남편까지 살해하고 야 말았다. 파계를 하고 살인까지 저지른 죄는 무조건 지옥에 떨어지는 벌을 받아야 한다. 유위법으로 보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선()에서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불심(佛心)을 가지고 있다. 불심이 곧 불성(佛性) 이다. 아무리 용시비구처럼 중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본래 남이 없는 경지인 무생(無生)을 깨치면 그 죄 또한 공()함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죄는 본래 자성 없고 마음을 따라 일어나니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 마음이 만일 없어지면 죄업 또한 스러지네

죄망심멸양구공(心滅兩俱空) 죄와 망심 모두 놓아 마음 모두 공하여야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謂眞懺悔) 이를 일러 이름하여 진실한 참회라 하네> (대행스님의 뜻으로 푼 천수경 중에서)

<일일 소견>

진흙 속에 피는 연꽃처럼, 욕망 가득한 내 마음 속에서 불성이 피어난다.

진흙 속에 연꽃이 심어져 있듯이, 욕망의 늪 속에서 불성이 심어져 있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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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28

오늘의정진: 了卽業障本來空/요즉업장본래공/ 마치면 업장이 본래 공함이여


- 100일 정진, 93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열세번째와 백 열네번째 구절은

<執指爲月枉施功/집지위월왕시공/손가락을 달로 집착하여 잘못 공부하니

根境塵中虛捏怪/근경진중허날괴/육근, 육경, 육진 가운데서 헛되이 괴이한 짓 하도다

不見一法卽如來/불견일법즉여래/한 법도 볼 수 없음이 곧 여래이니

方得名爲觀自在/방득명위관자재/마침내 이름하여 관자재라 하는구나> 였다.


영가현각스님은 비록 8살 어린나이에 출가를 했지만 지극한 효심을 지녔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스님은 장성하였고 홀로 남은 어머니와 누님을 자신이 수행하던 개원사(開元寺)로 모셔와 봉양을 하였다.  당시 절에 함께 수행하던 스님들과 대중들은 영사스님의 이러한 행위를 비방하였다. 지금의 관념으로도 출가한 스님이 세속의 연을 끊지 못하고 속가의 가족을 절에다 들인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러나 영가스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절의 한 구석에 공간을 마련하여 어머니와 누님을 모셨다. 영가스님은 출가를 했으나 속가와의 연()을 끊지 않았다. 또 그렇다고 환속을 하지도 않았다. 스님의 이러한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스님이라면 반드시 세속과의 정을 끊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난 것이다. 그는 스님이라는 이름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영가스님에게 깨달음은 어떠한 의미였을까?


오늘은 백 열 다섯번째와 백 열 여섯번째 구절

了卽業障本來空/요즉업장본래공/마치면 업장이 본래 공함이여

未了還須償宿債/미료환상숙채/마치지 못하면 도리어 묵은 빚 갚아야 하니

飢逢王膳不能飡/기봉왕선불능선/굶다가 임금 수라 만나도 먹을 수 없으니

病遇醫王爭得差/병우의왕쟁득차/병들어 의왕 만난들 어찌 나을 수 있으랴


옷깃만 스쳐도 인연(因緣)이라고 했다. 부처님께서도 정각을 한 후 하신 설법이 12연기(緣起)였다. 나의 현재는 과거로 부터 왔고, 미래는 나의 현재로 부터 이어진다.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 인연은 갑자기 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현생에서 만나는 인연들은 먼,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보다 더욱 머나먼 과거로 부터 이어져 지금 현생까지 온 것이다.

현재 나의 인연 중에 가장 깊고 중요한 인연은 누구보다도 부모 형제와 같은 친속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스님이라는 이름에 걸리지 않고 속가의 모친과 누님을 봉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스님은 위로는 불법을 구해야 했지만 아래로는 묵은 빛을 갚아야 했다. 불법을 배우는 목적이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 즉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이 목적에 비추어 보면 스님은 자신만의 불법을 실천한 것이다. 깨달음을 위해 가족을 버려야 하는 출가승이긴 하지만 정작 깨달음을 얻은 후 누구를 구원할 것인가? 깨닫지 못하면 오히려 업장만 쌓이고, 갚아야 할 빚만 늘어난다. 이는 마치 굶어서 임금의 수라상을 만나도 먹을 수가 없고, 병들어서 의왕을 만났어도 고칠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일일 소견>

인연의 묵은 빚은 어떻게 갚아야 할까?

깨달음이란 거창한 이름을 떠나 내 곁의 소중한 인연들을 저버리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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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27

오늘의정진: 執指爲月枉施功/집지위월왕시공/손가락을 달로 집착하여 잘못 공부하니


- 100일 정진, 92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열한 번째와 백 열두 번째 구절은

<二乘精進勿道心/이승정진물도심/이승은 정진하나 도의 마음이 없고

外道聰明無智慧/외도총명무지혜/외도는 총명해도 지혜가 없도다

亦愚癡亦小駭/역우치역소해/어리석고 바보 같아 겁이 많으니

空拳止上生實解/공권지상생실해/빈주먹 손가락 위에 있다는 생각을 내는도다> 였다.


빈 주먹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빈 주먹을 펴보이면 그저 손가락들만 쥐고 펼 수 있다. 손가락과 주먹은 사실 다르지만 같은 손이다. 주먹과 손가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주먹과 손가락이 다르다고 여긴다. 성문승과 연각승을 합쳐 이승인데 이것을 각각 분별한다면 도()에 이를 수 없다. 외도 또한 사이비라 여겨서는 도에 이를 수 없다. 분별심(分別心)은 도가 아니다.

영가스님이 입문했던 천태종은 교종이라고 하지만 사실 선종과 다르지 않다. 천태종의 핵심 수행법은 지관수행(止觀修行)이다. 지관수행은 산란한 마음을 그치고(), 자기 근본을 지켜보는() 수행이다. 즉 선종에서 화두를 들고 깊이 몰입해서 참구하는 수행과 다르지 않다. 단지 종파가 다르다고 깨달음까지 다른 것은 아니다.

도심(道心)은 둘로 보지 않는 마음(二心)이다.


오늘은 백 열세번째와 백 열네번째 구절

執指爲月枉施功/집지위월왕시공/손가락을 달로 집착하여 잘못 공부하니

根境塵中虛捏怪/근경진중허날괴/육근, 육경, 육진 가운데서 헛되이 괴이한 짓 하도다

不見一法卽如來/불견일법즉여래/한 법도 볼 수 없음이 곧 여래이니

方得名爲觀自在/방득명위관자재/마침내 이름하여 관자재라 하는구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달이 아님에도 손가락을 달로 여기는 우()를 범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근, 육식, 육경으로 세상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감각기관을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육근에 의해 인식하는 경계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육경(六境)이라고 한다. 육근과 육경을 합쳐서 12()라고 부른다. 그리고 육경에다가 의식(義識)을 더하면 바로 육식(六識)이 된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육근, 육경, 육식을 합쳐 18계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육근, 육경, 육식을 통한 현실인식은 사실은 오류투성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18계를 통한 인식은 단지 우리의 주관적 해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즉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라고 했다. 이것은 관세음 보살이 반야심경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핵심이다. 오온은 바로 색수상행식(色受相行識) 이며 곧 우리의 몸과 마음을 뜻한다. 영가스님은 마침내 육근, 육경, 육식의 놀음이 바로 망상이며 공()임을 알게 되었다. 18계로는 법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없음을 깨우친 것이다. 이제 비로소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진정으로 관자재보살의 법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일일 소견>

잘못된 공부란 둘로 보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닐까? 둘로 보지 않는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는 것, 그것이 제대로 된 공부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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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26

오늘의정진: 二乘精進勿道心/이승정진물도심/이승은 정진하나 도의 마음이 없고


- 100일 정진, 91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아홉 번째와 백 열 번째 구절은

<從來層磴覺虛行/종래층등각허행/예전에 비틀거리며 헛된 수행하였음을 깨달으니

多年枉作風塵客/다년왕작풍진객/여러해를 잘못 풍진객 노릇 하였구나

種性仕邪錯知解/종성사착지해/성품에 삿됨을 심고 알음알이 그릇됨이니

不達如來圓頓制/부달여래원돈제/여래의 원돈제를 통달치 못함이로다> 였다.


14살의 어린 사미승이 3조 승찬(僧璨  ? ~606)대사를 찾아왔다.

승찬 대사가 묻길 "어디서 온 꼬마냐?".  사미승 왈(), "주처(住處)가 없이 온 아이입니다."  

대사가 다시 묻길, "()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냐?"

사미승 왈 "성은 불성(佛性) 이고 이름은 불명(佛名)입니다.

승찬 대사가 호통치며 "네 놈은 어디서 이런 말을 배웠느냐?", 사미승 왈 "전생(前生)에 스님 한테 배웠습니다"

이 어린 사미승은 선종사(禪宗史)에서 승찬의 법을 이은 4조 도신(道信580~651) 이다.  본래 4조 도신은 14살 때 처음으로 승찬대사를 만난 것이 아니었다. 15년전, 도신의 전생은 재송(栽松)이란 이름의 80이 넘은 노인이었다. 당시 재송은 승찬을 찾아가 제자로 받아 달라고 요청했었다. 하지만 법을 받기에는 재송의 나이가 너무 많아 거절당했다. 그러자 재송은 몸을 바꿔 다시 오겠다고 물러났다. 그날 이후 재송은 바로 몸을 벗고 도신으로 다시 환생하여 찾아온 것이었다.

영가 현각스님은 8살 어린나이에 출가를 했다. 어쩌면 영가 스님도 도신 스님처럼 다른 누군가의 전생에서 환생하지 않았을까? 수행은 한 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수 있을것 같다.


오늘은 백 열한 번째와 백 열두 번째 구절

二乘精進勿道心/ 이승정진물도심/이승은 정진하나 도의 마음이 없고

外道聰明無智慧/외도총명무지혜/외도는 총명해도 지혜가 없도다

亦愚癡亦小駭/역우치역소해/어리석고 바보 같아 겁이 많으니

空拳指上生實解/공권지상생실해/빈주먹 손가락 위에 있다는 생각을 내는도다


영가스님의 출가는 천태종 계열의 절이었다. 천태종의 소의경전이 법화경이니 당연히 법화경에 통달했을 것이다. 이승, 삼승 그리고 일승이란 용어들은 법화경에서 나온다. 삼승(三乘) , 세가지 수래는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으로 모두 깨달음에 이르는 수레를 뜻한다. 법화경에서는 삼승이 곧 일승(一乘) 이라, 즉 삼승은 각각의 수레가 아니라 하나의 큰 수레라고 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三位一體) 개념하고도 비슷하다. 영가 스님은 이러한 뜻과는 다르게 이승이든 외도든 모두  깨달음에는 이르지는 못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승은 정진을 해도 도심이 없고, 외도는 총명해도 지혜가 없다고 했으니 말이다. 깨달음은 커녕 어리석고 바보처럼 여겼다. 마치 빈 주먹을 쥐니 손가락 밖에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은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과연 진짜 그럴까?


<일일 소견>

법화경에서는 삼승이 곧 일승이라 했다. 이승도 삼승에 포함되는데 왜 도심(道心)이 없다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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