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욕망의 변주곡 - 안톤 체호프의 에로티시즘 단편선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이항재 옮김 / 에디터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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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사랑과 욕망의 변주곡 (안톤 체호프의 에로티시즘 단편선)

지은이:  안톤 체호프/ 이항재 옮김

제   목:   성성연애(聖性戀愛) , 체호프식의 사랑 




마힐: 안녕하세요. 안톤 체호프(1860~1904) 선생님. 저는 마힐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선생님을 모시고 사랑과 욕망이란 주제를 가지고 가상 인터뷰를 진행 하려고 합니다. 혹시 괜찮으신가요? 



체호프: 쁘리 벳(안녕)!  괜찮아요. 그런데 주제가 사랑과 욕망이라고요?



마힐: 네,  <사랑과 욕망의 변주곡> 이란 책이 있는데요. 

선생님 생전에 쓰신 사랑과 욕망에 관련된 소재의 단편들을 작품의 시간순으로 따로 모아 출판한 책이에요.  

책 표지만 보면 19금(禁) 같았는데.… 

그런데 막상 읽어 보니 제가 상상했던 그런 것은 전혀 없더라구요. 



체호프: 하하. 참나. 뭘 상상 했나요?  초면에 미안 한데... 순진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하여간 남자들이란... 욕망,에로티시즘이란 말이 들어 가면 상상하길  좋아하는 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똑 같네요.



마힐:  음....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이번에  이 책<사랑과 욕망의 변주곡> 의 자극적인 표지와 선전에  낚였다고 생각 했습니다. 



체호프: 아니죠.  사랑과 욕망의 감정은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감정중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감정이 아닐까요?



마힐: 네. 그렇긴 한데요. 사랑과 욕망 하면은 사실상 전혀 다른 이미지가 떠 올라요. 

사랑은 성(聖) 스러운 이미지가 있고요. 욕망은 성(性) 적인 이미지가 연상 되거든요. 

성(聖)과 성(性)의 차이는  구분하기가  쉬울 것 같지만 사실 애매 하기도 하는데요. 

선생님은 그 둘의 관계를 어떻게 구분하시나요?



체호프:  사실 사랑의 범위는 광범위 하죠. 그래서 나는 사랑과 욕망을 구분하지 않아요.

욕망도 사랑의 일부라 생각 하거든요. 

나는 말이죠.  사랑은 순수해서 좋고 욕망은 부정(不貞)이나 불륜을 나타내는 거라고 해서  나쁘다는 구분을 가지고  작품을  써내지 않았어요.

예를 들어 이런건  순수한 사랑이고, 저런건 불륜이야 하는 식의 분별을  나누고 싶지 않았어요. 

독자들이 어떤 판단을 하도록 유도 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 책에서 <사랑에 대하여>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작품 읽었죠? 

읽으면서  작품속의 사랑이 비도덕적이라고 해서 비판하는 마음이 들었나요?



마힐: 음…  솔직히 지금 시대의 관점으로 보면  두 작품속의 주인공인 '알료힌'과 '안나 알렉세예브나', '구루프' 와 '안나 세르게예브리나' 의 사랑은 확실히 불륜이죠.

그런데  작품속에서 그 당사자들 서로는 아주 절절해요. 

알료힌과 안나가 기차에서 헤어지는 장면이나 구루프가 안나를 못 잊어서 안나를 찾아가는 장면은 연인들의 찐 사랑이 맞죠.  

그래서 그네들의 사랑은 비정상적인 연애 이긴 한데  뭔가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그들이   '썸' 을 타는게 이해가 되더라구요. 

아마 그래서 위의 두 작품들을 선생님의  대표적 단편으로  손꼽는게 아닐까요?



체호프: 내가 방금 사랑과  욕망을 구분 하지 않는다고 했죠?



마힐: 네. 아까 욕망도 사랑의 일부라고 하셨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구분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요? 



체호프: 내 작품속의 사랑은 인간이 본래 가진  천성이라고 보는 거죠.

사랑은 아름다워야 하고 욕망은 추한 것이라는 관념은 사회 제도가 만들어 낸 거 잖아요?

제 작품 <불행> 에서 '소피야' 가 변호사 ‘일리인’의 사랑 고백에 흔들리는 가운데 처음에는 가정의 '기초' 를 지키려고 하죠. 

소피아는 가정이 파탄나는 것을 막으려고 이성으로 막 붙들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결국 이성적인 판단보다 더 강한 끌림은 막을 수가 없었죠.

현실적으로  보면  머리로는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았지만 본능이 이성 보다 훨씬 강하게 작용 하지 않았나요?




마힐: 네  그렇긴 한데... 건전한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본능이 이성을 압도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본능이 이성을 압도하는 것은 지극히 일부 사람들에게만 해당 되지 아닐까요?




체호프: 아니죠. 이성이 본능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은 사회적인 설정일 뿐이죠. 

개인적으로 보면 보이지 않는 욕망의 힘이 압도할 경우 이성은 아무 맥도 못 써요.

제 작품속의 등장 하는 사람들의 일탈이나 부정한 관계는 사회적으로 불륜으로 취급 당하겠지만  현실에서 그런 관계가 여전히  공존하고 있잖아요?  

순수하지 않은 부분을  애써 외면 하지 말라는 거죠. 

그것도 삶의 일부분이고 사랑의 일부분이라고 나는 보는 거죠.

비록 사회적 지탄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당사자들은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 할 꺼예요.

내가 살았던 삶이 그랬으니까요. 



마힐: 그럼 작품속의 불륜..앗. 아니 사랑들은 선생님  본인의 사랑관이 반영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건가요?



체호프:  네, 잠깐 제 이야기를 좀 해보죠.

나는  원래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위치한 항구 도시 '타간로그' 의  농노 집안에서 태어 났죠. 

어떻게 해서든 농노 신분을 벗어나고자 할아버지 때 부터 노력 했데요. 

그러다 우리 아버지때에 이르러서야 잡화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죠.

그때 우리집 형제가 7남매 예요. 내 위로 형 2명, 아래로 남동생 2명, 여동생 2명이 있었죠.

그런데 아버지가 결국 빚만 잔뜩 지고 파산하고 모스크바로 혼자 야밤도주를 해버리죠.

술만 먹으면 가족들에게 손찌검을 해댔으니 오히려 처음엔 잘 됐다고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머니 혼자서 우리 7남매를 돌봐야 했는데  끝내 감당이 안되는 거죠.

이번엔 나만 혼자 남겨두고 결국 온 식구가 전부 아버지가 있는 모스크바로 가버려요.




마힐: 아니, 그럼  혼자 집에 남게 된 거예요? 그때가 몇 살이었는데요?



체호프:  그때가 16살 이었어요. 사실 모스크바에 가면 우린 빈민촌에 살아야 했어요. 

그래서 나는 고향에  남아 공부를 학업을 마치기로 한 거죠.  

솔직히 나 한테는 그게 더 좋았거든요.  가정 교사 아르바이트로  와  공부를 병행했죠. 

결국 난  모스크바 의과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마힐: 혼자 고학(苦學)을 했었군요. 대단하시네요.  

이 시기가 선생님에게는 고난의 시기였지만 반면에 오히려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시간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



체호프: 맞아요. 고립된 생활의 어려움을 견디면서 나의 내면이 이때 각성하게 된 셈이죠. 

모스크바로 대학을 다니면서 이때 부터  우리집의 모든 생계를 내가 다 맡게 되죠.  

위에 형들이 있었지만 모두 제 구실을 못해서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내가 하게 된거죠.

사실 나의 글쓰기도 그렇게 시작 된 거예요.

처음엔 가명으로 단편을 써냈죠. 그 당시 작품을  몇 백편을 썼는지  나도 잘 몰라요.  

먹고 살자고 쓰기 시작한 글들이  의외로 반응이 좋았어요.

대학 졸업후 의사가 되긴 했지만 작가 수입이 더 좋으니 아예 전업 작가로 전향 해버렸죠.



마힐: 아, 그래서 실제 의사 였기 때문에 작품속 의사에 대한 묘사가 그토록 생생한 현장감이 있는 거군요.  자. 그럼 이번엔  선생님의 본격적인 연애관으로 넘어가시죠. 



체호프:  네.네. 알았어요.  너무 재촉 하지 말아요. 곧 들어 갑니다.(휴~ 한숨 쉬고)

난 말이죠. 살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타간로그 시절의  고향 사람들,  모스크바  시절의 빈민촌 사람들. 의사 시절 돌봐준 환자들, 나중엔 사할린 섬의 감옥에 갇힌  죄수들 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봤어요. 

그런데 귀족,부자 같은 상류층 사람들 보다  평범하거나 오히려 밑 바닥 삶에 가까운 사람들이 대부분 이였어요. 

어쩌면 내가 농노 출신 집안으로 어렵게 자라서 그런지 나와 비슷한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연민(憐愍)이 갔어요.  

그래요.  제가 깨달은  인간의  마음속에 가장 밑바탕에 깔린 감정은 연민이라고 생각 해요. 난 사람들을 만날때 마다 그 사람에 대한 연민이 먼저 생겨요.



마힐: 아니,   그런데요.  연민하고 선생님 연애관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가요? 

그럼 연민이 불륜의 출발선 인가요? 욕망이 아니고요? 



체호프: 뭔가 훅 들어오는 질문 같은데... 

아마도 내가  출생 신분이 고귀했다면 연민이란 감정에 대해  깨닫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난 하위 계층의 사람 속에서 비교적 뛰어난 머리와 글재주로 신분 상승을 한 셈이죠. 

그래서 전 고귀한 사람들이 하는 순수한 사랑 같은 것은  잘 모르겠어요. 

그런건 내  주위에 없더라구요.  아니 적어도 나 한테는 눈에 띄이지 않았는지도 모르죠.

내가 살았던 세상에서는  순수한 사랑이든 비정상적인 사랑이든 그런 구분이 중요한게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제 작품속의 사랑은 불륜이지만 연민도 같이 묻어 있어요. 




마힐: 아, 선생님의 사랑관을  듣고보니  이제야 이해가 조금 되네요.

그런데 결국 연민이란 감정도 따지고 보면 평등한 관계가 아닌 내가 좀더 우월한 입장에서 상대를 동정하는 심리도 있는 거라 어찌보면  연민을 기초로 한 사랑은 동등한 입장의 감정은 아니지 않나요?

그래서 연민에서 시작하는 사랑이란 것도  결국엔 다 불행으로 끝나지 않을까요?




체호프: 사실 그렇다고 봐야죠.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젊은 시절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내 가정을 꾸릴 생각을 못했죠.  대신 그 시절 수 많은 여자들을 만났죠. 

작품 <아가피야>,<여자의 복수>,<나의 아내들>같은 것은 그때의 경험에서 나온 거죠.

그러다가  내가 20대 후반(1889)에 만난 '리디야 아빌로바(1864~1943)' 와 10년 정도 비밀 연애를 했었죠. 그때 난 이미  유명 작가였었죠. (톨스토이가 많이 날 아꼈었죠.) 

내 작품들 속의 비밀 연애 경험은 리디야와의 실제 경험이라고 볼 수 있죠.

사실 이것도 어느 정도 연민의 감정 있었죠. 당시 리디야는 작가 지망생이었거든요.

결국 그런 연애는 끝까지 이어지질 못하죠.

내 작품속의 수 많은 주인공들의 사랑은 결국 나의 현실을 벗어 나지 않았던 거죠.

실제도 연민에 바탕을 둔 삶과 사랑이었단 말이 되는 거죠. 

그래서 불륜의 감정 또한 인간 또 다른 본성이었구나 하고 이해했던 거죠.




마힐: 그런데 그건 선생님 한테만 해당 되는게 아닐까요?

그런 감정 까지도  인간이 지닌 순수한 본성이라고 해도 사회적으로  일탈과 불륜에 대한 비난은 피 할수가 없죠.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선생님의 연애관이 통용되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체호프: 그럴지도요. 내가 41살(1901) 에 당시 러시아에서  유명했던  여배우 '올가 크니페르(1868~1959) '와 결혼했고 3년 뒤(1904)에  이번 생을 아쉽게도 마감하게 되죠. 

아마 내가 더 오래 살았다면 나의 연애관이나 사랑에 대한 관념은 변했을 수도 있었겠죠.




마힐: 네, 이번 가상 인터뷰를 통해 선생님의 사랑관에 대해 확실히 이해 했습니다.

결국 선생님의 모든 작품은 실제 삶속에서  연민에 바탕을 둔 사랑 이야기라는 것을요. 

그래서 작품속에 항상 위트가 있고 따뜻함이 있는 거였군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무더운 여름, 무덤을 벗어나  이렇게까지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 하고요. 

다음 또 다른 작품을 읽게 되면 다른 주제로 모시도록 할 께요. (손을 흔든다)



체호프: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불러 주세요.  noka (빠까: 안녕~)(사라진다)






마힐: 성성연애(聖性戀愛) , 성스러움과 속됨이 공존하는 체호프식 사랑이었다.




음식뿐만 아니라 사프카의 옷에도 여자의 ‘연민‘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아가피야> - P164

외롭게 사는 사람들은 기꺼이 이야기하고 싶은 그 무언가가 늘 마음속에 있기 마련이다.

<사랑에 대하여> - P257

사랑을 할 때는 그 사랑을 논하면서 일반적인 의미의 죄나 선, 행복이나 불행보다 더 중요하고 가장 높은 것에서 출발해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절대 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습니다.
<사랑에 대하여>
- P270

어떻게? 어떻게 하면? .... 좀 더 시간이 지나 해결책을 찾으면 그땐 새롭고 멋진 생활이 시작될 것 같았다. 그러나 끝은 아직 멀고도 멀며,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이제 막 시작됐다는 것을 두사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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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 18세기 소품문 낭송Q 시리즈
이용휴 외 지음, 길진숙 외 옮김, 고미숙 / 북드라망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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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낭송 18세기 소품문

지은이: 이용휴,이덕무,박제가/ 길진숙, 오창희 풀어 읽음

   : 낭만전승(浪漫傳乘)


 

낭만 배드민턴, 파리올림픽에서 여자 단식 배드민턴 금메달을 목에 걸은 안세영 선수가 한 말이다.

그녀는 2022년  항주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후  이미 세계 랭킹 1위로 올라 서긴 했지만 아직 올림픽에선 메달을 따질 못했었다.

그래서 안세영 선수는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꼭 금메달을  따내 그랜드슬램을 이루어  '낭만' 있게  여정을 마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결국 그녀의 희망대로 올림픽에서 금메달를 쟁취하여  자신의 '낭만 배드민턴' 인생에서 화룡정점을 찍는 빛나는 순간을 맞이 하게 되었다


금 빛나는 천하무적(天下無敵) 안세영.

 


낭만을  떠올리니 방금 일독을  마친  <낭송 18세기 소품문>을 언급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나의 일년간 독서 활동 중에서 손 꼽을 만한 가장 좋은 책 중 한권이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기전에  나는 18세기 조선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만난 이용휴, 이덕무 , 박제가의 소품은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니, 무슨 남자들이 이리도 섬세하지?  그들의 글은 너무나 참신하고 정갈하다.

글과 사람의 마음, 인격의 진실됨이 그대로 일치하다니....

글이 곧 그 사람이 된다는게 신기했다.



 

보통 조선시대 문장은 고문(古文)이라 하여 중국의 선진(先秦)시대, 2000년전 사용하던 문체를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  글을 써왔다.

더구나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에서는 고문외에 다른 어떤 문체는 존재 하지도, 아니 존재 할 수도 없었다.

그 깐깐한 유학자들 사이에서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불리는 이단(異端) 으로 취급 당하지  않으려면 고문체만을 써야 했다.

그런 철옹성 같은 당시의 유학 시스템은 18세기에 이르러 실사구시(實事求是) 실학이  떠오르면서  소품문이  유행을 하기 시작하자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 소품문의  대표적인 인물이  이 책 <낭송 18세기  소품문> 에서 소개하는 해환 이용휴(1708~1782), 무관 이덕무(1741~1793), 초정 박제가(1750~1815)  이였다.

그들이 즐겨 사용했던  소품이라  불리는 문장은 당시의 주류 문체였던 고문에 비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글쓰기였다고 한다.

고문은  화려하지만  형식적이고 긴 글인데 반하여 소품문은 글이 짧다.

글은 짧지만 글의 내용은 오히려  풍성하고, 파격적이지만 잔잔하고, 강렬하지만 평범하다.

소품은 한가지 고정된 시각이 아닌 참신한 마음으로 자유로운 생각을 가능하게 했다.

 



'책만 보는 바보' 라서 간서치(看書痴)란 별칭이 붙은 이덕무의  '책을 팔아 배고픔을 면하다' 는 글에서 이덕무는 오랜 굶주림 끝에 결국 집에서 가장 값이  나가는 <맹자> 7권을 200냥에 판다

그 돈으로 쌀을 사서 밥 지어 실컷 먹고  친구 유득공에게 자랑한다.

그 소리를 들은 유득공도 <좌씨전>을 팔아 술을 사와 둘이 함께 먹고 마신다.

이에 이덕무는 맹자가 밥지어 주고 좌구명이 손수 술을 따라 주었다며 기뻐한다.

또한  혹독하게 시린 겨울밤에   <한서> 로 이불을 삼고, <논어>로 병풍 삼아 추위를 견뎌내는  삶도 그에게는 즐거움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조선의 18세기를 두고 ' 낭만의 시대' 라고 부르고 싶다.

물론 노론과 소론 같은 정쟁이 끊이지 않아 당시를 살았다면 당파 싸움에 치를 떨었겠지만... 그건 뭐 지금도 다르지 않나?  시대가 바뀌어도 정치권과 권력을 향한 마음은 어찌 그리 변함이 없는지.... .... 한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낭만의 시대라 부를만 한 이유가 있다.

이 시대는 지금도 자주 회자되는 역사적 인물들이 살았던 시기였다.

이들 인물들의 관계는 서로  좌우종횡으로  연결 되어 이어져 있다.  

우선 이 책에 등장하는 이용휴, 이덕무, 박제가를 비롯 하여  조선 제일의 무사(武士) 야뇌 백동수(1743~1816),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소품의 일화에 등장 한다.

 



어느날 연암이 박제가에게 편지를 보내 먹을 것과 술을 구한다.

이때  연암은 박제가 보다 연배가  높은 선배임에도 "내 자네에게 구차 하더라도 무릎 꿇어 먹을 것을 구하네.  벼슬을 구하는 것 보다 그게 더 낫네. 여기 호리병을 보내니 술을 가득담아 보내 주심이 어떤가" 하고 구차 하다면서 전혀 구차 스럽지 않은 글을 보낸다.

이에 초정 박제가는 " 하인편으로  이백냥을 보냈습니다만 호리병까지 채우지는 못했습니다. 먹을 것을  얻고 양주에서 학까지 즐기는 복락을 한꺼번에 누리는 일은 없는 법이지요" 란 글로 답한다.

즉 먹을 것은 줄 수 있지만 술까지는 못 주겠다는 초정의 익살이 담겨 있다.

요즘 시대 꼰대와  MZ 젊은 세대간의  갈등이나 차별이 없는 낭만이 느껴진다.

 



또한 이들은 조선에서 절대 음감을 지녔던 홍대용(1731~1783)과  조선의 명탐정이기도 했던 다산 정약용(1762~1836) 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더구나  당대 조선 제일 화가 김홍도(1745~1816)와 신윤복(1758~1814) 도 이 시대에 함께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인물들은 결국 마지막 단 한 사람에게로 연결이 모아진다.

이 연결의 정점에는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 정조(1752~1800)가 있었다.

이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 하나하나가 현대에  재창조 되어지는  드라마,영화, 소설 속에서 주인공 급들 캐릭터들이다. 그리고  이들 인물중 가장 끝판왕은 정조 였던 셈이다.

사실 정조는 그들의 든든한 배경이자 당시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다.  

 



그래서 18세기 조선은 실학과 소품의 시대로 조선의 르네상스로 불리운다.

확실히 조선 후기에 우리식의 문예 부흥을 맞이 할 수 있는 변화의 시기 였다.

글이 곧 그 사람이 되었고 삶의 태도와 가치관 마저 변화 시켜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던 시기였던 것이다.

소품문을 통해 접한 그 시대를 살다간 인물들의 소탈함과 글 속에 담긴 청초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

책 속에 소개된 소품을 여러번 낭송을 할 수록 마음이 맑아지고 영혼이 정화가 되는 듯 하다

어찌그리도 정갈한 마음을 가지고  담백하게 살 수 있었을까?

 



이제 파리 올림픽도 마무리 되어간다.

안세영 선수의 낭만 배드민턴 여정에 잘 마무리 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어른의 한 사람, 또 동호인의 한 사람으로서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해  미안스럽다.

그저 모든 것이 잘 매듭지어 지길 마음으로만 조용히 응원할 따름이다.

권력의 카르텔에 대항하는 것이 마치 조선시대  성리학 체제를  전복 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철옹성 같은 성리학도 결국엔 무너졌다.

지금은 난공불락(難攻不落) 같아 보이는 고인물들이 지키는 권력의 시스템도 마찬가지로 무너질 것이다.

모든 시대 역사의 주인공인 용기있고  빛나는 젊은이들이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선의 실학자들의 낭만은 지금까지 이어지며 앞으로도 이어질 것 임을 믿는다.

 


 <뒷날 성품과 기질이 이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있어 책을 통해 만난다면 서로 감동하고 끌리게  될 것이다. 이렇듯 신령스런 인연을 맺어 마음이 합치된다면, 그 신비스럽고 오묘한 경지가 반드시 세상에 드러나리라. > - 이용휴: 참된 소리,참된 색깔, 참된 맛 중에서..




낭만은 그렇게 전승 된다.

이 방안에서 몸을 돌려 앉으면, 방위가 바뀌고 명암이 달라진다네. 구도(求道) 란 생각을 바꾸는데 있다네....중략... 그대가 나를 믿는다면, 그대를 위해 창을 열어 주겠네. 한 번 웃는 사이에 어느새 환하고 툭 트인 경지에 오를 것이네.<구도란 생각을 바꾸는 것> - P36

마음은 눈을 잊고, 눈은 팔뚝을 잊고, 팔뚝은 손가락을 잊고, 손가락은 먹을 잊고, 먹은 벼루를 잊고, 벼루는 붓을 잊고, 붓은 종이를 잊는다.이때에는 팔뚝과 손가락을 일컬어 마음과 눈이라 해도 되고..중략... 먹과 벼루를 일컬어 붓과 종이라 해도 된다.<손가락은 먹을 잊고 먹은 벼루를 잊고> - P174

사람에게 벽이 없으면 사람이기를 포기한 것이다...중략...
벽(癖)이 있는 사람만이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며 수준 높은 기예를 익힐 수 있다.<꽃에 미치다> - P245

두보를 배운자는 두보만 최고로 여기고, 그 나머지는 보지도 않고 무시해 버린다. 문장의 도는 그 마음을 크게 열고 견문을 넓히는 데 있을 뿐, 어떤 시대의 문장을 배웠나에 달린 것이 아니다.<시의 도를 터득 하려면> - P253

나의 벗 형암 이덕무, 그의 시 몇 수를 뽑아 놓고, 목욕한 뒤 향을 피우고 읽었다. 읽으며 내내 감탄했다.
<하늘과 땅 사이 모든 것이 시일세!>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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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08-09 19: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 정조와 정약용이 나왔죠...그러게요 그럼에도 낭만의 시대였나 봅니다 힘들지라도 여유를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마힐 2024-08-10 22:31   좋아요 3 | URL
네. 아무리 암흑 같은 시대라도 낭만은 늘 있었을 겁니다. 다산 정약용의 6대 직계손이 탤런트 정해인이라고 하더라구요. 과거와 현재가 어쩌면 그렇게 이어지는가 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시대의 낭만도 응원하게 됩니다. 서곡님 이번 주말 잘 지내시고요. 감사 합니다.

모나리자 2024-08-13 19: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18세기를 살았던 독서가, 문장가들의 이야기를 읽으시는군요.
저도 오래전 이덕무에 관한 책을 읽고 정말 감동했던 적이 있어요.
가난하고 추운 시절 책만 읽어도 행복해하던 그들의 순수한 마음을 접하고
뭉클했던 기억이 납니다. 각박한 이 시대를 사는 우리야말로 한 조각이라도
낭만을 떠올리는 여유가 필요할 듯합니다.
편안한 저녁 시간 보내세요. 마힐님.^^

마힐 2024-08-14 10:54   좋아요 4 | URL
안녕하세요. 모나리자님, 네, 18세기 실학자들의 글을 읽으며 아무리 힘들어도 여유를 가지고 낭만있게 살아가려고 마음 먹었어요. 그래서 독서도 낭만독서 하려구요. ㅎㅎ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숙론 - 어떻게 마주 앉아 대화할 것인가
최재천 지음 / 김영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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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숙론(熟論)

지은이:  최재천

   : (hell)조선에서 힐(heal)조선으로. 숙론은 답이 될 수 있을까?



 

'최재천'하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과학자 이면서 학문 간의  경계를 허물고  통섭(統攝) 이란 용어를 만들어서 서로 다른 영역의  학문을 통합 발전 시킨 분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상아탑에만 갇혀 있지 않고 현실 속으로 뛰어 들어 사회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시는 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최교수님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나 역시도 팬심을 가지고 이분을 존경하면서 이 책<숙론>을 읽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이상하다.

최재천 교수님을 좋아하는 독자로 이 책<숙론>을 읽고 난 후 뭔가 떠오르는 감응이 있을 줄 알았다.

, 숙론이란 바로 이런 거였구나. 그래, 교수님의 뜻은 잘 알겠는데...

그런데 뭐 어쩌라는 거지한편으로는 그래서?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의  현실적인 많은 문제와 갈등을 소통으로 풀어내야 하고 우리 시대엔 숙론이 꼭 필요하다건 알겠는데 그런데 왜 난 공감이 안되는 거지?



 

책의 주요 요지는 숙론(熟論)으로 우리시대 사회적 갈등의 문제를 풀어내자고 한다.

숙론은 토론(討論)의 동의어로 최교수가 이 책에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신조어이다.

10만 제곱 킬로 평방 면적에 약5100만명의 인구가 사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엔 이념 갈등, 지역 갈등, 계층과 빈부 갈등, 남녀갈등, 세대 갈등, 환경 갈등, 다문화 갈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다양한 갈등은 점점 심각해지고 급기야 대한민국을  (hell:지옥) 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언제 부터인지 대한민국을 소위 '헬조선'이라 부르는 것이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헬조선이 싫어서 대한민국을 떠난다거나 빨리 망해 버려야 한다는 사람도 일부 있지만 대한민국이 정말 걱정 스럽다면 얼른 헬조선이란 처지에서 벗어 나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대한민국에서 '갈등' 은 반드시 풀어내야만 하는 숙제(宿題)이기도 하다.

숙제가 되어버린 갈등의 문제를 저자는 '숙론(熟論)'으로 풀자고 제안한다.

숙론이란 '누가 옳은가? who is right? 가 아니고 무엇이 옳은가? what is right? 를 찾는 과정' 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토론은 '누가 옳으냐' 는 말싸움에 가까웠다 

끝장 토론, 100분 토론 같은 시사 프로그램에서 토론은 나와 다른 입장의 상대 의견을 깨부수어야 하는 도구 역할을 했다.

내가 옳다, 너는 틀렸다는 식의  내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만이 최고의 토론으로  여겼다.

, 말로 상대를 이기는 것이 토론이라고 우리는 은연중에 이해해 왔다.



 

원래 토론(討論)<논어, 헌문편>에서 '자세히 살펴 의견을 제시하는' 뜻이라고 했다.

() 라는 글자는 '치다, 공격하다, 두들겨 패다. 비난 하다, 정벌하다.'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토론 한다고 하면 말로 상대로 이기는 것을 연상 시킨다는 것이다.

이처럼 토론이란 뜻이 변질이 되어버린 시대에서 저자는 '토론'이란 단어 보다 '숙론' 이란 표현을 쓰자고 제안한다.

'심사숙고해서 의견을 제시하자' 는 뜻으로 토론이 가진 본래의 뜻을 되 찾자는 것이다.

상대의 의견을 깨부수는 전투적인 말 싸움이 아닌 평화적으로 상대와 의견 차이를 조율하는 것을 뜻하는 셈인 것이다

나와 다른 상대의 견해를 무시하거나 제압하는게 아닌 경청을 하며 왜 나와 상대의 생각이 다른지 숙고해 보면서 자기 생각을  다듬는 숙론을 벌이자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에게 소통은 협력의 수단이 아닌 밀당의 과정으로 본다.

숙론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참으로 일리가 있다.

저자는 소통이란 원래 안되는 게 정상이며 소통이 잘 되길 바라는 게 오히려 착각이라고 한다

그래서 숙론을 통해서 조율이 될  때 까지 소통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하버드 시절어떻게 숙론을  배웠고 교수 시절, 숙론을 어떻게 체화(體化) 시켰으며  학생들에게는 어떻게 숙론을 해야하는지 자신의 숙론 경험을 들려 준다.

또한 돌고래 제돌이를 야생으로 돌려 보낸 과정, 기획재정부 시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적 개혁을 어떻게 개입해서 풀어냈는가 하는 경험등 숙론을 통한 이루어낸 성취들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자의 숙론에 대해 의아한 감정이 드는 것은 숨길 수 없다.

과연 숙론이  수많은 갈등을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최재천 교수님은 과학자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과학은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무수히  많은 실험을 통해 검증을 해야 한다.

그러한 검증은 수 천, 수 만번 반복을 거쳐야만 하나의 학설을 세울 수 있 게 된다.

검증의 습관이 몸이 벤 과학자인 최교수님은 인내가 필요한 숙론을 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가 아닌 나 같은 일반 대중은 숙론의 방식을 최교수님께 원포인트 레슨으로 배운다고 해도  최교수님 처럼  멋지게 해결 할 수 있을까?

특히 대한민국 국회위원 300명에게 이 책을 건네 줘서 읽게 만들어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많은 갈등과 문제를 풀고 싶다고 하는 저자의 희망 사항은 그저 순진한 동심의 바램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알면 사랑 할 수 있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라는 구절 처럼 저자에게 갈등은 좀 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과정으로 여겼으리라 생각 된다.

하지만 갈등 해결을 위한 숙론의 스킬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숙론의 숙련 보다 필요 한 것은 무지(無知)를 깨닫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무지는 소크라테스와 공자가 말했던 그 무지, 불교에서 언급하는 탐진치 삼독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마음을 뜻한다.

존재하는 모든 갈등은 서로가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는데 어떻게 상대를 알 수가 있는가?

알면 보이고 알면 사랑 한다고 했는데 참으로 알아야 되는 것은 상대를 억지로 알아야 되는게  아니라 나 부터 우선 알아야 하는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상대를 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사실 착각이며, 그 착각이 바로 무지하다는 것이다.



 

좋은 책이란 '독자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 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이 책은 좋은 책이 맞다.

그런데  독서후 독자를 변화 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기준으로 보면 이 책에서 전하는 숙론에 대한 메세지는 공허한 울림처럼 감응이 없다. 



 

헬조선에 대해 최교수님은 '재미있는 지옥'이라 표현했다.

지옥은 지옥이지만 재미있는 지옥인 대한민국, 어쨌든 헤븐(heaven:천국)조선은 못 되더라도 힐(heal: 치유)조선은 될 수 있지 않을까?

힐조선이 되려면 나부터 마음을 힐링해야만 되는 것이다.

나로 부터 시작하는 세상, 갈등도 나로 부터 시작 된다.

그렇다면 해결도 상대가 아닌 나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 마음 부터 힐링하는 것. 그것이 헬조선을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숙론은 그 다음이다.


우리 삶에는 모든 갈래마다 그 끝에 결국 글쓰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중략...
내가 모르는 분야의 책을 붙들고 씨름하는 독서가 진정한 독서다. - P79

다윈의 자연선택론은 철저하게 ‘상대성‘ 이론이기 때문이다.
자원이 풍족하면 아무도 도태하지 않는다. - P86

평생 생물학자로 살며 깨달은 결론은 자연이란 손잡은 생물이 미처 손잡지 못한 것들을 물리치고 사는 곳이라는 점이다. - P116

질문에는 순진한 질문, 지루한 질문, 부적절한 질문, 지나친 자기비판을 앞세운 질문들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질문은 다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이 세상에 멍청한 질문이란 없다.
진짜 멍청한 질문은 묻지 않는 질문이다. - P180

이청득심(耳聽得心), 즉 귀 기울여 경청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지혜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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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 활자중독자 김미옥의 읽기, 쓰기의 감각
김미옥 지음 / 파람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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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활자중독자 김미옥의 읽기.쓰기의 감각)

지은이:  김미옥

   :   공감()에서  깨달음( )으로



작년 부터 독서를 시작하면서 늘 가졌던 의문이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고, 또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처음에는 읽고 싶은 책을 어떻게 해서든 읽어 내기만 하면 독후감은 그냥 써질 줄 알았다.

그런데 일년을 해보니 전혀 그렇게 되질 않았다.

우선 내가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도 많았고 , 또 아직 읽기엔 부담이 되는 경지의 책도 참 많았다.

그리고 또한 내가 글을 참으로 못 쓴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독서법이나 글쓰는 법에 대한 책들에 대해 좀더 관심을 갖게 되어졌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읽고 잘 쓸 수 있을까?

그래서 접하게 된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이다.

제목만 봤을 땐  어떻게 읽으란 건지, 어떻게 쓰란 건지 얼른 이해가 잘 안됐다.

그런데 책 제목의 원뜻은 <感으로 읽고 覺으로 쓴다>     커버 뒤에 숨겨져 있다.

감각이라... 아이디어가 돋 보인다. 제목 부터가 의미 심장하다.

감정으로 읽으면 깨닫는게 있을 것이고 그 깨달음을 글로 쓰란 뜻인가?



이 책은 자칭 '활자중독자' 라 일컫는 저자 김미옥님의 독서 서평글이다.

얼마전에 읽었던 장영희 교수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와 같은 결의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에게 두 책의 분위기는 완연히 다르다고 느껴졌다.

둘 다 책을 소개하고 서평을 다룬 점은 같지만 장교수님이 보다 밝은 느낌의 서평이라면 김미옥 작가의 서평은 뭔가 '다크(Dark)' 한 것 같다.

아마 이 다크한 면이 미국 히어로 영화 <배트맨>의 다크한 분위기와 흡사한 것 같다.

이것은 어두워서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그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먼저 저자가  소개한 책들의 범위는 영미 문학에 한정했던 장교수님과는 달리 거론 되는 분야가 광범위하다.

저자는 문학뿐만 아니라 과학, 철학,음악, 미술, 정치, 사회에 이르기 까지 한정된 분량의 글 속에 폭 넓게 다룬다.

정말 '활자중독자' 란 별칭에 걸 맞게 이것 저것 가리질 않는 듯 하다.

내가 그녀의 글에서 감탄 했던 점은 소개하는 다양한 책들의 서평속에는 그녀 자신이 힘들게 지나온 어린 시절의 삶의 흔적이 곳곳에 뭍어 나온다는 점이다.



특히 <물푸레나무 아래> 라는 글은 작가 개인사이지만 슬픈 단편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가난하고 못 배운 오빠들 속에서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했던 저자는 둘째  오빠의 폭력을 연민하고 또 맞으면서 이해 되는것이 슬펐다고 한다.

자신은 늘  부끄러워 했던 둘째  오빠였지만 정작 오빠는 오히려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었다

이처럼 가족에 대해 모순 되는 감정은 줄곧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훗날 죽은 둘째 오빠를 위해 물푸레나무 아래에 묻게 해주고 남은 가족들과의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마음속의  응어리를 풀어 낸다.

어쩌면 감추고 싶은 개인사일 수도 있지만 저자가 들려주는 진솔한 이야기에 무척 연민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소개하는 책들 속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아픔이나 절망, 그리고 고독한 일생을 산 인물들이 많았다.



노쉰의 본처였지만 유물 취급 당하며 일생을 살았던  주안(朱安) 이란 인물을 다룬 <주안 평전>,  러시아의 한국인 디아스포라(Diaspora: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였던 '김 알렉산드라' 이야기, 만주 윤동주 묘지옆에 있는 벗 '송몽규' 의 짧았던 일생이나 체로키족의 비애를 다룬 <에코타 가족>  같은  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이 책에는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고 화려하지 않은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 한 안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어쩌면 작가는 자신의 소개한 인물들에 무척이나 동질감과 연민을 느꼈던 것 같다.

그들의 아픔과 자신의 아픔이 둘이 아니였음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작가가 일찍이 경험했던 어렵고 힘들었던 삶과 책을 통해 소개 하는 주인공들의 삶이 같이 투영된 듯 하다.

이점이 나는 그녀의 서평이 '다크' 하다고 느껴진 이유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소개한 책들중 읽어 봐야 할 몇 권은 바로 주문을 했다.

<낯선 경험: 陌生的经验> <시간의 압력: 时间的压力>    중국 작가들의 책이라 중국에서 바로 원서로 읽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낯선 경험> 에는  송나라 때  <천리강산도> 12미터 짜리 회화를 그린 왕희맹(王希孟)이란 18살 소년의 작품을 소개 한다.

김미옥 작가의 책속에서는 <천리강산도> 의 그림 작품이 어떤 것인지 설명만 있지 그림이 없어서 아쉬웠다.

작가가 간절히 말하려고 하는 목소리를 찾아내는 것이 작가는 독자의 몫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정도 찾는 것은 인터넷이 발달된 지금은 별 어려움도 아닌데......)

그래도 작가가 소개한 책속에 나오는 그림들을 소개하면서 중간중간 사진이나 그림을 삽입이라도 해줬었으면 나같은 독자들이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점이 조금, 아주 조금 아쉽다.

(북경 고궁 박물관의 <천리강산도> )



그녀에게 위태했던 청춘은 독서로, 숨쉬기 조차 힘들 때는 오직 글쓰기로, 그렇게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한다.

저자에게 독서와 글쓰기는 옭죄는 삶의 해방구 였던 셈이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읽고 쓰기를 했던 것이 삶의 열망으로 바뀐 것 처럼, 나 같은 독자에게도 독서와 글쓰기는 지금의 나를 미래에서 구원해 줄 희망이 되리라 믿는다.



그녀의 서평을 읽고 난 후, 그녀가 말하는 감으로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타인의 이야기 속에 가슴이 뭉클해지면 남의 인생은 남의 인생만이 아니게 됨을 느꼈다.

전혀 상관없던 상대의 삶이 내안에서 상대의 삶이 그대로 느껴지면  내가 곧 남이 되어진다.

그래서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던 상대를 나한테 하나로 합쳐 내는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닐까?

나와 상대가 둘이 아님을 느끼는 것. 그것을 공감(共感)이라 하지 않던가?

바로 그것이 결국은 깨달음과 다르지 않은 것 이었다.

감은 온 마음으로 공감하고, 각은 온 몸으로 깨쳐야 한다.

읽기와 쓰기는 그렇게 둘이 아니었다.

그 둘은 연결이 된다.


아무도 당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고 느낄 때, 나는 글을 쓰라고 말한다. 잘 쓰고 못 쓰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 P5

고통이 글을 쓰게 한다. - P30

책도 사람처럼 운명이 있어 인연이 닿는 것 같다...중략...
인연이란 강철보다 강하고 고무줄보다 유연하다.
잊었다고 잊힌 것이 아니고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항상 내곁에 있었다.단지 모를 뿐. - P58

어떤 구호를 외치든 궁극의 목적은 권력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어떤 대상을 ‘쥐‘ 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갈등을 조장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은 깨어있는 수 밖에 없다. - P92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여러 상념으로 몇 번씩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내가 살아온 어느 지점과 맞물린 기억 때문이었다.우리집은 왜 가난한가.나는 그 해답을 책에서 찾으려 했다. - P147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이나 숙련도가 아니라 직관과 본능이다.
그러니 ‘고귀한 무지( 無知)로 표현된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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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가는 자 - 익숙함에서 탁월함으로 얽매임에서 벗어남으로
최진석 지음 / 쌤앤파커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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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건너가는 자

지은이:  최진석

   : 건너가기는 나를 벗어나는 것



지난주 큰아이가 상해에 있는 외가댁으로 갔다.

아들이 18년동안 커오면서 생애 처음으로 스스로 마음을 내서 떠나는 여행이다.

대학 입학 결과가 나올 때 까지 몇 개월간 혼자 자유롭게 보내겠다고 한다.

올 초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묘소도 갔다 오고, 어릴 때 함께 해주셨던 외할머니, 외가쪽 친척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단다.

나에게 상해는 첫 직장을 통해 아내를 만난 곳이고,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에게는 동년(童年)의 추억이 담긴 곳이다.

앞으로 나와 아내는 두 아들과 함께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 경험을 비추어 보면 대학 들어가는 순간, 비로소 자기 인생을 살기 시작하는 것 같다.

가족 보다는 대학 친구, 선후배랑 가까워 지고, 그러다 군대 갔다 와서 복학하고, 대학 졸업후 사회에 진출 하게 되는 단계를 겪게 된다.

내가 그랬으니 말이다.



때 마침 읽게 된 <건너가는 자>는 익숙한 이곳에서 새로운 저곳으로 건너가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건너가는 자>의 저자 최진석 철학교수는 <반야심경>의 지혜를 철학적으로 통찰했다.

최진석 교수는 세상의 수많은 경전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반야심경>만을 선택하겠다고 한다.

<반야심경>은 불교의 방대한 경전중에서 글자수  260자로 구성된 짧은 경전이다.  

비록 짧은 경이지만 <반야심경> 안에는 불교의 핵심 사상이  농축 되어 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불교 신자라면 대부분은 <반야심경>을 외우고 있다.

그러나 최진석 교수는 불교 신자의 입장이 아닌 철학자의 입장에서 <반야심경>을 통해 인생 전체를  통찰하는 사유의 틀을 제시 한다.

저자의  철학적  시각으로 불교를 관계의 종교라고 보았다.



<차유고피유, 차생고피생,차무고피무, 차멸고피멸.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없음으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이는 불교의 연기법을 설명한 것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 형식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관계에 기반해서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의자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

의자를 구성하는 나무 판자나 받침, 나사, 못 혹은 바퀴 같은 것을 따로 떼어 내어 보면 의자라고 할 수  없다.

의자를 구성하는 여러 부품을 조립하여 의자의 형상을 완성 시켜야만 의자가 된다.

하지만 형상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의자가 가진 성질을 우선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의자를 '앉음' 이라는 성질을 가질 때에 의자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의자를 형성 하는 각각의 부품들이 합쳐져 의자라는 성질을 가질때 의자가 되는 것이다.

, 의자는 인연에 의해 잠시 부품이 모여 의자로 존재 할 뿐 따지고 보면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존재는 인연이란 관계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그래서  세상은 본래 본질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곧 '' 라는 존재의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 하고도 상통하는 것이다.



대행 큰스님께서도 하신 비유중에 내가 버스를 타면 승객이 되고, 식당에 가면 고객이 되고, 아버지 앞에서는 아들이 되고, 아들 앞에서 아버지가 되는 '' 란 존재를 어느것이 진짜 '' 라고 고정 시킬 수 있냐고 하셨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고정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뜻이 이해가 쉽게 된다.  

인연생기(因緣生起)에 의한 관계를 통해 우리는 존재를 드러 낼 뿐이다

그래서 인연은 소중한 것이다.



저자는 이를 본무자성(本無自性: 본래 자기 성품이란 없다)이라 표현하며 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을 노자의 유무상생(有無相生: 있음과 없음에서 서로 나옴) 과 주역의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謂之道: 음과 양이 도에서 나왔다)으로 그 뜻이 같음을 설명한다.

공이란 없음이나 텅빈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꾸 공 이란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서  공을 잘못 이해 한다고 밝힌다.

<공은 단지 기호 일뿐 실체가 아니며 세상이 인연으로 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논리적인 개념일 뿐> 이라 말한다.

이 표현은 저자가 북경대학 박사학위 과정을 밟을 때 학기말 과제에 쓴 답안이라고 했다.

공이 단지 기호 일뿐 실체가 아니라는 통찰에 당시 지도교수 탕이지에 (汤一介:1927~2014) 교수에게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 ()나 공() 이란 것은 본질이 아니라 단지 기호에 불과한 것이란 것이며 이는 관계를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뜻이다.

기호를 붙힌다는 것은 부르기 쉽게 이름을 갖다 붙힌다는 뜻과도 같다.

글자 그 자체에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닌 단지 부르는 이름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마치 '의자'  라는 이름이 의자와 아닌 것과 마찬가지 이다.



저자는 <반야심경>의 참뜻은 바라밀다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바라밀다' 란 본래 파라미타(Paramita) 라는 어원에서 나온 것으로 '저쪽으로 건너가게 되다' 는 뜻이다.

인간은 건너가도록 태어난 존재이며 멈추지 말고 사람이 사람으로 완성되는 길을 걷기 위해 건너가기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위스 조각가, 자코메티(1901~1966)의 작품 <걷는 사람> 이 책의 표지가 된 이유 이기도 하다.



저자는 또한 자신의 고삐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고삐를 잡고 건너가라고 한다.

자기만의 고삐를 쥔다는 것은 남들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길을 당당히 걸으라는 뜻이다.

붓다가 선언했던 '천상천하 유아독존' 은 비단 붓다만이 할 수 있는 선언이 아닌 것이다.

남이 보는 것을 내가 보는 것이라 착각하지 말고 나만의 심안(心眼)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때 자신의 무대에서  진정한 주인공이 되어  당당히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엄마의 나라 중국에서, 아빠의 나라 한국으로 건너가서 자신만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런 의미 에서 이 책은 큰 아이가 대학 입학 하기 전에 꼭 읽었으면 하는 책으로 추천해야 겠다.


공에 관한 공부 역시 양자역학처럼 감각과 직관으로 쉬이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또 재미있게도 <반야심경> 과 양자역학 사이에 상당한 유사점이 발견되기도 하고요. - P10

즉 manage, 경영이라는 단어의 근원은 ‘고삐를 잡고 무언가를 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다른 무엇보다 고삐라는 말 자체입니다.
여기서 고삐가 내포한 의미를 다른 말로는 철학philosophy 혹은 이상vision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P32

무언가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는 것은, 영혼의 성장판이 닫힌다는 뜻입니다.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지식도 그다지 쓸모가 없습니다. 모든 창의성, 삶의 생기, 친절,용기, 절제 등과 같은 지적인 활동은 지식에서 오지 않고, 알고 싶어 하는 의지로 가득 찬 자신만의 욕망에서 나옵니다.
- P42

세계의 진실을 진실로 아는 것, 이것이 해탈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업이 계속 쌓이고, 결국 윤회의 순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계의 진실한 모습, 실제 모습을 실상이라고 합니다. - P64

붓다도 브라만들의 비방과 폄훼를 견뎌야 했고, 예수도 율법주의자들이 가하는 치욕을 견디며 자신만의 진리의 세계를 구축하였습니다.
치욕에 무너지면 건너가지 못합니다. 건너가려면 치욕을 견뎌내야만 합니다. - P136

반복은 리듬이고, 리듬에는 감동을 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반복하고, 반복하면, 감동이 일어나고, 감동이 일어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중략..
지금의 내가 ‘이곳‘에서 벗어나‘저곳‘으로 건너가면서 나는 나 이상이 됩니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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