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론 - 어떻게 마주 앉아 대화할 것인가
최재천 지음 / 김영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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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숙론(熟論)

지은이:  최재천

   : (hell)조선에서 힐(heal)조선으로. 숙론은 답이 될 수 있을까?



 

'최재천'하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과학자 이면서 학문 간의  경계를 허물고  통섭(統攝) 이란 용어를 만들어서 서로 다른 영역의  학문을 통합 발전 시킨 분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상아탑에만 갇혀 있지 않고 현실 속으로 뛰어 들어 사회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시는 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최교수님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나 역시도 팬심을 가지고 이분을 존경하면서 이 책<숙론>을 읽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이상하다.

최재천 교수님을 좋아하는 독자로 이 책<숙론>을 읽고 난 후 뭔가 떠오르는 감응이 있을 줄 알았다.

, 숙론이란 바로 이런 거였구나. 그래, 교수님의 뜻은 잘 알겠는데...

그런데 뭐 어쩌라는 거지한편으로는 그래서?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의  현실적인 많은 문제와 갈등을 소통으로 풀어내야 하고 우리 시대엔 숙론이 꼭 필요하다건 알겠는데 그런데 왜 난 공감이 안되는 거지?



 

책의 주요 요지는 숙론(熟論)으로 우리시대 사회적 갈등의 문제를 풀어내자고 한다.

숙론은 토론(討論)의 동의어로 최교수가 이 책에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신조어이다.

10만 제곱 킬로 평방 면적에 약5100만명의 인구가 사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엔 이념 갈등, 지역 갈등, 계층과 빈부 갈등, 남녀갈등, 세대 갈등, 환경 갈등, 다문화 갈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다양한 갈등은 점점 심각해지고 급기야 대한민국을  (hell:지옥) 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언제 부터인지 대한민국을 소위 '헬조선'이라 부르는 것이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헬조선이 싫어서 대한민국을 떠난다거나 빨리 망해 버려야 한다는 사람도 일부 있지만 대한민국이 정말 걱정 스럽다면 얼른 헬조선이란 처지에서 벗어 나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대한민국에서 '갈등' 은 반드시 풀어내야만 하는 숙제(宿題)이기도 하다.

숙제가 되어버린 갈등의 문제를 저자는 '숙론(熟論)'으로 풀자고 제안한다.

숙론이란 '누가 옳은가? who is right? 가 아니고 무엇이 옳은가? what is right? 를 찾는 과정' 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토론은 '누가 옳으냐' 는 말싸움에 가까웠다 

끝장 토론, 100분 토론 같은 시사 프로그램에서 토론은 나와 다른 입장의 상대 의견을 깨부수어야 하는 도구 역할을 했다.

내가 옳다, 너는 틀렸다는 식의  내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만이 최고의 토론으로  여겼다.

, 말로 상대를 이기는 것이 토론이라고 우리는 은연중에 이해해 왔다.



 

원래 토론(討論)<논어, 헌문편>에서 '자세히 살펴 의견을 제시하는' 뜻이라고 했다.

() 라는 글자는 '치다, 공격하다, 두들겨 패다. 비난 하다, 정벌하다.'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토론 한다고 하면 말로 상대로 이기는 것을 연상 시킨다는 것이다.

이처럼 토론이란 뜻이 변질이 되어버린 시대에서 저자는 '토론'이란 단어 보다 '숙론' 이란 표현을 쓰자고 제안한다.

'심사숙고해서 의견을 제시하자' 는 뜻으로 토론이 가진 본래의 뜻을 되 찾자는 것이다.

상대의 의견을 깨부수는 전투적인 말 싸움이 아닌 평화적으로 상대와 의견 차이를 조율하는 것을 뜻하는 셈인 것이다

나와 다른 상대의 견해를 무시하거나 제압하는게 아닌 경청을 하며 왜 나와 상대의 생각이 다른지 숙고해 보면서 자기 생각을  다듬는 숙론을 벌이자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에게 소통은 협력의 수단이 아닌 밀당의 과정으로 본다.

숙론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참으로 일리가 있다.

저자는 소통이란 원래 안되는 게 정상이며 소통이 잘 되길 바라는 게 오히려 착각이라고 한다

그래서 숙론을 통해서 조율이 될  때 까지 소통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하버드 시절어떻게 숙론을  배웠고 교수 시절, 숙론을 어떻게 체화(體化) 시켰으며  학생들에게는 어떻게 숙론을 해야하는지 자신의 숙론 경험을 들려 준다.

또한 돌고래 제돌이를 야생으로 돌려 보낸 과정, 기획재정부 시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적 개혁을 어떻게 개입해서 풀어냈는가 하는 경험등 숙론을 통한 이루어낸 성취들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자의 숙론에 대해 의아한 감정이 드는 것은 숨길 수 없다.

과연 숙론이  수많은 갈등을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최재천 교수님은 과학자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과학은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무수히  많은 실험을 통해 검증을 해야 한다.

그러한 검증은 수 천, 수 만번 반복을 거쳐야만 하나의 학설을 세울 수 있 게 된다.

검증의 습관이 몸이 벤 과학자인 최교수님은 인내가 필요한 숙론을 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가 아닌 나 같은 일반 대중은 숙론의 방식을 최교수님께 원포인트 레슨으로 배운다고 해도  최교수님 처럼  멋지게 해결 할 수 있을까?

특히 대한민국 국회위원 300명에게 이 책을 건네 줘서 읽게 만들어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많은 갈등과 문제를 풀고 싶다고 하는 저자의 희망 사항은 그저 순진한 동심의 바램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알면 사랑 할 수 있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라는 구절 처럼 저자에게 갈등은 좀 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과정으로 여겼으리라 생각 된다.

하지만 갈등 해결을 위한 숙론의 스킬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숙론의 숙련 보다 필요 한 것은 무지(無知)를 깨닫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무지는 소크라테스와 공자가 말했던 그 무지, 불교에서 언급하는 탐진치 삼독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마음을 뜻한다.

존재하는 모든 갈등은 서로가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는데 어떻게 상대를 알 수가 있는가?

알면 보이고 알면 사랑 한다고 했는데 참으로 알아야 되는 것은 상대를 억지로 알아야 되는게  아니라 나 부터 우선 알아야 하는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상대를 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사실 착각이며, 그 착각이 바로 무지하다는 것이다.



 

좋은 책이란 '독자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 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이 책은 좋은 책이 맞다.

그런데  독서후 독자를 변화 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기준으로 보면 이 책에서 전하는 숙론에 대한 메세지는 공허한 울림처럼 감응이 없다. 



 

헬조선에 대해 최교수님은 '재미있는 지옥'이라 표현했다.

지옥은 지옥이지만 재미있는 지옥인 대한민국, 어쨌든 헤븐(heaven:천국)조선은 못 되더라도 힐(heal: 치유)조선은 될 수 있지 않을까?

힐조선이 되려면 나부터 마음을 힐링해야만 되는 것이다.

나로 부터 시작하는 세상, 갈등도 나로 부터 시작 된다.

그렇다면 해결도 상대가 아닌 나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 마음 부터 힐링하는 것. 그것이 헬조선을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숙론은 그 다음이다.


우리 삶에는 모든 갈래마다 그 끝에 결국 글쓰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중략...
내가 모르는 분야의 책을 붙들고 씨름하는 독서가 진정한 독서다. - P79

다윈의 자연선택론은 철저하게 ‘상대성‘ 이론이기 때문이다.
자원이 풍족하면 아무도 도태하지 않는다. - P86

평생 생물학자로 살며 깨달은 결론은 자연이란 손잡은 생물이 미처 손잡지 못한 것들을 물리치고 사는 곳이라는 점이다. - P116

질문에는 순진한 질문, 지루한 질문, 부적절한 질문, 지나친 자기비판을 앞세운 질문들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질문은 다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이 세상에 멍청한 질문이란 없다.
진짜 멍청한 질문은 묻지 않는 질문이다. - P180

이청득심(耳聽得心), 즉 귀 기울여 경청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지혜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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