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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송세월 - 김훈 문장 엽서(부록)
김훈 지음 / 나남출판 / 2024년 6월
평점 :
책제목: 허송세월
지은이: 김 훈
제 목: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기- 밥과 똥 그리고 죽음
어느 도(道) 통한 선사(禪師)에게 수행자 한 명이 찾아 왔다.
스님, 요즘 생활이 어떠 하십니까?
나야, 잘 먹고 잘 싸고 잘 잔다. 그게 전부다.
수행자는 미소를 지으며 합장을 하며 물러갔다.
이 간단한 일화는 선불교에서 유명한 '도(道)' 에 관한 이야기다.
보통 도(道)'라고 생각하면 높고 고상한 경지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직 가리고 택하는 마음만 꺼리면 된다. '고 승찬대사(?~606) 는 말했다. (至道無難 지도무난 唯嫌揀擇 유혐간택- 신심명(信心銘) 중에서)
또한 '평상심(平常心) 이 도' 라는 말도 있다. 바로 평범한 일상생활 중에 도가 있다는 것이다.
생활 중에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면 그게 바로 도에 부합되는 삶이란 것이다.
이번에 읽은 김훈 작가의 산문집 <허송세월> 이 바로
그런 경지를 보여주는 글이 아닐까 싶다. 바로 이 책에는 잘 먹고, 잘 싸고 , 잘 자며,
잘 늙어가는 작가의 면목을 잘 드러냈다.
나에게 ‘김훈’ 작가
하면 바로 떠오는 것이 <칼의 노래> 이다. 그리고 뒤따라 연상되는 것이 ‘탄핵정국’ 이다.
지금으로 부터 20년 전, 2004년은 (故)노무현 대통령(1946~2009)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탄핵이 된 해이다. 당시의
'대통령 탄핵' 은 한마디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탄핵의 소용돌이 속에서 노 대통령은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고 했다.
임진왜란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서 홀로 힘겨운 싸움을 하는 이순신 장군의 입장과 감정적으로 이입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탄핵정국 시기에 <칼의 노래>는 노대통령과 연관되어 지면서 당시 서점가에 돌풍을 불러 일으켰다.
마치 지금 한강 작가의 작품이 노벨상으로 큰 이슈가
된 것 처럼 당시의 김훈의 <칼의 노래>는 사회적 열풍이었다. 나도 그때 사회 분위기에 따라 읽게 되었다.
그러니 ‘김훈’ 작가
하면 <칼의 노래>가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1948년 서울 출생이다. 두 살
때 전쟁이 났다…중략… 내 엄마는 나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중략….
나는 엄마와 분리되지 않았고 죽지 않았다. 엄마는 늙어서 정신이 혼미해졌을 때도 6.25 때 피난 가던 얘기를 자주 했다.
“훈아, 그때 내가 너를 어떻게 업었는지 아니.” 엄마는 포대기 끈 묶는 시늉을 했다. 나는 울었다. >
<밥과 죽음이 섞어 있는 자리를 향해서 밥 없는 사람들은 가고 또 간다. 살려고 먹는 밥숟가락 속에 죽음이 들어 있다. 날마다 거듭되는 죽음이 빤히 보이는데 동료 인간의 목숨을 ‘유예’ 하는 조건으로 공장을 돌려서 나의 밥을 먹고, 내게 재수 없으면 나의 목숨을 동료 인간의 밥의 토대로 바쳐야 한다면 이런 밥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밥이 아니다.
> (세월호는 지금도 기울어져 있다)중에서
1948년 이면 쥐띠 생이다. 내가 사회에서 친분을 나눌 수 있는 쥐띠는
72년생 까지가 한계다.
72년생
쥐띠는 나에게는 형님 뻘이지만 48년 쥐띠의 김훈
작가는 나의 부모님 뻘이나 된다.
작가의 나이에 새삼 놀랐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면, 소독약 냄새 풍기는 젊은 의사는 나를 '어르신'이라고 부르고 더 젊은 간호사는 날 보고 '아버님' 이란다. 나 뿐만 아니라 늙은이를 보면 닥치는 대로 '아버님'이다.
...중략.... 복도에 대기자가 많으면 김 아버님, 박아버님이라고 불러댄다. 이런
호칭을 들으면 모욕을 느끼지만, 아프니까 별 수 없이 병원에 간다. 내가 젊은 간호사를 "딸아"
라고 부르면 나를 미친 늙은이로 볼 것이다>
(말년) 중에서.
그는 이제 몸이 아파 병원엘 가면 아버님 취급 당하는 것에 모멸감을 느끼는 늙은이가 되었다.
그런 그가 자신과 엄마가 분리 되지 않고 살아 남은 기억속에서 작가는 '고박'을 끄집어 낸다.
고박(固縛)이란 포대기 끈을 X 자로 묶는 방식으로 영어로는 '레싱(lashing)' 이고 화물을 묶을 때 사용하는 묶음 법이다.
작가는 엄마의 포대기에 쌓인 채 오줌을 누었던 어린 시절 고박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여 삶과 죽음을 함께 묶는다.
세월호 참사와 경부고속 도로 건설에 희생된 산업전사들 그리고 현대 산업화된 노동 현장속에서 대책 없이 재해를 당하는 사회의 현실을 고박과 연결 시켰다.
책을 읽으며 탄복한 점이 있다.
문장은 간결하지만 사용하는 언어는 김훈식(式)의 독특한 화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김훈식이라 표현하자면 좀 이상하지만 단어와 조사를 재 구성하여 의미가 남다른 문장으로 변형 시켜 버린다. 그것은 평범한 문장이 뜻 깊은 문장으로 확 바꿔져 버린다.
마치 언어와 문장의 연금술을 보는 것만 같다.
<국보는 박물관으로 가지만, 생활은 박물관으로 가지 않는다. 생활은 국보에 미달하면서 국보를 넘어서고, 국보로 지정되기를 소망 하지 않는다.>
(박물관의 똥 바가지) 중에서
<4천 원이나 5천 원
짜리 밥을 먹는 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몽둥이' 이거나 '보이지 않는 쇠사슬' 이다.
> (먹기의 괴로움) 중에서
작가가 사용하는 이러한 문장을 이해하는 내 자신이 갑자기 똑똑해졌다는 착각을 느끼게 된다.
단지 몇 개 단어와 조사를 가지고 의미가 함축된 문장으로 만들어 내는 경지는 나에게는 신기와 같다. 역시
작가는 작가다.
일상에서 보고 듣고 행하는 모든 것이 작가의 사유를 거치며 의미있는 글로 변한다.
민속 박물관의 똥 바가지를 보거나, 가야 토기에 난 구멍을
보면서,
모화나무 위의 둥지를 튼
새를 지켜보고,
대중 식당에서 혼밥과 혼술을 하면서, 이제는 노년의 상대가 된 햇볕을 쬐면서, 수능
저녁 텅 빈 학교 운동장에서 울고 있는 학생을 지켜보면서 심지어는 혼수상태에 빠진 병원 침대에 누워 자신을 바라 보면서 까지 작가 특유의 사유는 작동된다.
<죽지 않은 자는 죽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알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알 수 없으므로, 인간은 죽음을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설명 받을 수 없을 터인데, 그날 밤의 혼수상태 속에서 나는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경험할 수 있었다.>(다녀온
이야기) 중에서
<백제 장인들의 흙 물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그들의
손이 수제비 반죽을 만들던 내 어머니의 손과 같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반죽에는 어머니의 이름이 붙어 있지 않고, 어머니라는 생명이 반죽 되어 있다.>
(수제비와 비빔밥) 중에서
김훈 작가는 밥을 특히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산문에는 먹는 것과 관련 된 소재들이 많이 나왔다.
지금의 그에게 글은 밥이 되었다. 글로 밥에 대해 쓰고 글로 벌어 먹으니 그에게 글은 밥인 것이다. 더불어 밥을 먹고 싸는 똥은 또 다시 그에게는 중요한 밥벌이 소재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욱한 똥 냄새 속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이 똥 냄새 속에서 나는 밥과 똥의 순환이라는
운명을 알았고, 이 순환고리가 끊어지면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인생의 냄새 )중에서
밥과 똥과 그리고 죽음. 그에게 이것은 화두였다.
그에게 글쓰기는 밥과 똥과 그리고 죽음 이란 화두를 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곧 먹고 싸고 자는 행위가 그에게는 글쓰기이며 도에 이르는 삶인 것이다.
결국 작가에게 글과 밥은 둘이 아니였다. (文飯不二 문반불이)
<노스님의 말씀을 참으로 두려워 했기 때문에 담배를 멀리 할 수 있었다. 나의 금연 노력은 모두 실패했고, 두려움만이 성공했다...중략...중생의 어리석음은 한이 없는데, 나는 이 어리석음과 더불어 편안해지려 한다.>(늙기의
즐거움) 중에서
<두봉 주교는 자주 웃고, 크게 웃는다. 두봉 주교의 웃음 소리는 깊은 산속의 시냇물 소리를 닮아 있다. 맑은 소리가 잇달아서 흘러간다. 두봉 주교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의 몸속에서 기쁨의 엔진이 작동하고 있으리라는 느낌이 든다.>
(주교님의 웃음소리) 중에서
작가가 50대 중반 시절까지 끊지 못하던 담배를 노스님의 '내가 안 피우면 끊는 거다' 라는 단순한 말 한마디가 가슴 속 화두가 되어 결국
60대 중반에 담배를 끊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인 주교이신 두봉(杜峰) 주교님(1929~ )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기쁨에 동화가 되어지는 작가가 겹쳐 보인다.
밥 잘 먹고, 똥 잘 싸고, 잠 잘자는 경지에 이른 작가는 이제는 노스님과 두봉 주교님과 같은 노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지도 모르겠다.
허송세월 속에서 늙음을 즐기는 작가의 글을 읽고 난 후, 나도 그렇게 늙어 가고 싶다.
소주. 아아! 소주. 한국의 근대사에서 소주가 정신의 역사와 대중정서에 미친 영향을 사회과학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가공할 소비량에도 불구하고 소주는 아무런 아우라를 갖지 않는다. ...중략... 소주는 아귀다툼하고 희로애락하고 생로병사하는 이 아수라의 술이다. 소주는 인간의 기쁨과 슬픔, 소망과 좌절을 멀리 밀쳐 내고 또 가까이 끌어당겨서 해소하고 증폭시키면서 모두 두통으로 바꾸어 놓는다. - P14
새가 알을 품어서 새끼를 깨워 내고, 아득히 먼 곳에서 호롱불처럼 깜박이는 생명을 가까이 불러와서 형태를 부여해 주듯이, 나는 나의 체온을 불어 넣어 가며 단어와 사물들을 품어 본 적이 있었던가 - P70
일자리가 모자라서 밥 먹기 어려운 시대에 밥 없는 사람들을 밥으로 겁박하면, 사람들은 밥과 죽음의 기로에서 밥먹는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다.밥과 죽음이 섞여 있는 자리를 향해서 밥없는 사람들은 가고 또 간다. - P122
손잡이가 없으면 연장이 아니다. 손잡이가 있어야 인간은 세상을 다룰 수가 있다. - P189
지금 한국 사회의 문명화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은 소통 불가능한 언어의 창궐입니다. 지금, 언어는 소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을 완성해 가고 있습니다. - P289
똥 바가지는 전쟁의 야만성을 생활 속으로 용해시키면서 웃음 띈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느 산악고지 참호속에서 전사한 병사의 넋이 생활용구로 변해서 돌아온 것이라고 나는생각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나는"생활은 크구나"라고 글자 여섯 개를 썼다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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