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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백범일지
김구 지음, 도진순 엮음 / 돌베개 / 2005년 11월
평점 :
책제목: 쉽게 읽는 백범일지
지은이: 김구/도진순 엮음
제 목: 백범의 소원과 우리의 소원
<1>
아라비안 나이트속의 알라딘이 램프를 문지르면 램프의 요정 지니가 연기처럼 피어 올라 나와 소원을 말하라고 한다. 알라딘은 램프의 요정 지니를 통해 세가지 소원을 성취한다.
어릴 때, 나는 알라딘 램프의 소원 이야기 보다 동화속에 나오는 어리석은 나무꾼의 세가지 소원의 교훈이 더 기억에 남았다.
어쩌면 나도 나무꾼처럼 쏘세지를 코에서 떼는데다
귀중한 소원을 낭비 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원을 멍청하게 함부로 빌지 말아야지.
누가 들어줄지도 모를 소원 세가지를 나 혼자서 심각하게 고민 했던 적이 있었다.
만약에 나 한테 알라딘 램프의 요정이 나타나서 소원을 빌라고 하면 나는 뭐라 해야 할까?
아주 큰 부자가 되는 것? 이쁘고 좋은 사람 만나는 것? 무병장수 하며 사는 것?
그런데 만약 램프의 요정 보다도 훨씬 스케일이 크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소원을 빌라고 한다면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까?
지금으로
부터 약 80년 전 백범김구(白凡金九:
1876~1949)선생은 하나님께 세가지 소원을 말 했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으로
시작 되는 <백범일지> 속, <나의 소원>에서 백범선생은 세가지 소원을 말한다. 그런데 그는 모두 다 똑 같은 바램을 말했다.
"나의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한 두개는
다른 걸 빌어도 되지 않았을까? )
개인의 부귀영화가 아닌 우리나라 독립을 말하는 스케일을 보면 범부인 내가 생각하는 소원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릴 때는 김구선생이 바라는 대한독립을 단순히 일제 치하에서 독립하는 것 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서야 읽게 된 <백범일지>를 통해 그가 바랬던 대한 독립은 단순히 일본에게서 나라를 되찾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니 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그가 진정으로 바랬던 대한 독립은 실제로는 이루어 지지 않았다.
우리
나라는 남한과 북한이 갈리는 분단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린 아직 '통일 대한민국'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란 노래를 부르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아,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는 백범 선생님과 우리의 소원을 언제쯤 들어 주실 려나?
<2>
보통 10월은 ‘문화의
달’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올해 2024년 시월은 예년에 비해 더욱 뜻 깊고 의미 있는 날들이 많았다.
먼저 10월 1일은 국군의 날 사열 행사를 통해 우리의 국방력을 세계에 알리는 하루 였었다.
광화문 광장 상공 위로 전투기가 날아 다녔고, 현무-5 미사일이 위용을
드러냈고, 대한민국 군인들의 절도있게 행진하는 모습을 이순신 장군께서 큰 칼 옆에 차고 지켜 보고 계셨다.
그 뒤로 10월 3일은 개천절, 하늘이 열리는 날이었다. 이번에 <백범일지>를 보고 알게 됐는데 원래 개천절은 1949년 이전에는 음력 10월 3일 이었다고 한다.
단군 할아버지가 나라를 세운지 4357년이나 되었는데 이제서야 세계 무대에서 우리나라가 점차로 중심이 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월 9일은 한글날. 요즘
방송에 나오는 외국인들의 한국어를 구사 능력을 들어 보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수준이 높아져 깜짝 놀랐다.
얼굴을 보지 않고 말만 들으면 한국인이 말하는 것과 전혀 분간을 할 수가 없을 정도다.
원래 우리나라 말이 외국인들이 배우기가 쉬운 언어 였었나? 우리말과 글을 너무도 쉽게 배울 수 있다니. 세종대왕님의 위대함은 시간이 갈 수록 높아만 가는 것 같다.
바로 그 다음날, 10월 10일 저녁,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소식을 들었다.
와,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노벨상을 받는 날이 오다니….
그동안 노벨상을 받는 나라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워
하고 우리나라는 언제쯤 받을까 하며 한숨 내 쉬는 일이 없게 되었다. 이것은 노벨 문학상을 탄 한강 작가의 개인의 영광을 넘어서 대한민국의 경사가 된 것이다.
앞으로는 우리나라가 물리학이나 의학, 경제 같은 다른 분야에서도 받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10월 하순부터는 블랙핑크의 '로제' 와 미국 팝스타 '브루노 마스'와 함께 부른 <아파트>가 세계적인 히트를 치고 있는 중이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사회에 콩글리쉬 발음 'APT'가 그대로 불려지고 또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는 한국식 음주 문화도 유행 되어지고 있다.
올 10월은 정말이지 대한민국 '국뽕' 맛을 제대로 보여주는 달이 되었다.
이쯤 되면 '한류(韓流)' 가 세계적 주류(主流)에 들어가서 이제 곧 일류(一流) 가 될 것 같다.
앞으로 ‘한국의 물결은 주류로 흘려 들어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룬다’ 고 예언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류즉일류, 일류즉한류 !(韓流卽一流, 一流卽韓流
한류가 곧 일류다!)
사실 지금은 한류라는 용어보다 ‘K’ 를 붙여 K- pop, K-
드라마 , K- 영화 등 우리나라 문화 예술을 상징하는 용어로 많이 쓰이는 것 같다.
원래 한류는 90년말 밀레니엄이 다가 오는 시기에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유행하기 시작한 우리나라 문화 콘텐츠들을 말한다. 그 당시 전성기였던 장동건, 안재욱, 김희선 같은 1세대 한류를 주도했던 사람들의 아시아에서 인기는 지금의 BTS 급이었다.
내가
중학생 때인 80년도 후반만 해도 홍콩의 스타들이 신드롬을 일으키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급기야는 주윤발과 장국영, 왕조현
같은 배우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CF광고를 찍기까지 했다.
그 뒤로
약 10년 만에 상황은 역전되어 한류가 아시아 전체로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류 현상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이 아니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계속 진화를 하고 있는 중이다. 영화, 드라마, 노래 뿐만 아니라 지금은 전방위 문화와 산업 분야로 확산 되고
있다.
이제는 이제껏 한류를 주도했던 영상과 노래 같은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분야를 넘어선 문화와 연결된 산업으로 까지
전 세계인이 좋아하는 문화 콘텐츠들을 계속해서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백범일지>속 <나의 소원>
에서 백범은 우리나라가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부강한 나라가 되기 보다 오직 한 없이 가지고 싶은 문화의 힘을 가지길 원했다.
그는 왜 부강한 나라 보다 문화의 힘을 더 원했을까? 문화의 힘으로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남에게도 행복을 주고 싶어했기 때문이라 했다.
이제 당신이 그토록 바랬던 문화 강국이 된 우리 대한 민국의 지금의 모습을 본다며 백범선생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실까? 하늘에서 뿌듯해 하지 않으실까?
"우리 민족이 주연 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 앞에 보이지 아니 하는가?"
선생의 외침이 들리는 듯 하다.
<3>
23년전에 나는 상해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 간 적이 있다.
2000년 초반은 인터넷이 제대로 보급이 안 되었던 시절, 여행 안내 책과 지도를 가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중국인들에게 물어서 겨우 찾아 갔다.
지금의 주소는 상하이 황푸취 마당루, 당시 주소는 프랑스 조계 보창로 309번지,주위에 비슷하게 생긴 낡은 상해식 양옥집은 도로 옆 문 앞에 간판이 없었다면 정말 찾지 못 할 뻔 했었다.
처음엔 그 시절 일제의 눈에 띄지 않게 은폐를 위해서 중국인들이 밀집한 거주 지역에 위치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이 초라한 건물이 과거 우리 대한 민국의 임시정부 청사였다니! 나라
없이 살았던 우리 민족의 서글픔이 그대로 느껴졌었다.
<백범일지>를 보면
김구선생은 1919년, 44세의
나이에 상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에서 문지기라도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는데 선생은 경무국장에 임명된다.
그 후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요직을 맡으며 1931년(56세)에는 한인 애국단을 창단한다,
창단 다음 해인 1932년 1월 8일 에 '이봉창(1901 ~1932)'의사가 일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투척했다. 또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1908~1932)'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园)에서 물병 폭탄을 던져 의거를 일으켰다.
임시정부 청사건물은 그 시절 상해식 가정집을 사용한 것으로 당시의 물품이나 유품들이 전시 되어 있다. 좁은 공간을 유용하게 사용한 느낌이었다.
건물은 3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마지막 3층 공간에는
별도의 전시관이 마련 되어있다.
임시
정부 관련 문서와 사진들이 전시 되어 있는데 마지막 코스에는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일으키기 전에 남겨둔 사진이 걸려져 있다.
정말
밝게 활짝 웃는 모습의 31살의 이봉창 의사와 , 손에 수류탄을 들고 분연한 모습 속에 엷은 미소를 짓는 듯한 24살의 젊은 청년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교과서에서 보아왔던 사진이었지만 이곳에서 보면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들어 버렸다.
사진 속의 두 분을 바라보자 마자 울컥 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속 깊은 곳에서 펑펑 울고 싶을 정도로 서러움인지 안타까움 인지 모를 감정에 북받쳤다.
정말 내가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를 정도로 내 안의 울림은 요동을 쳤었다.
나만 이렇게 눈물을 흘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임시 정부를 방문 했던 내가 아는 지인 분도 나와 같은 경험을 말씀 하셨다. 아마도 한국인이라면 거의 모두가 두 의사분의 사진 앞에서 눈물이 나는 걸 경험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건
무슨 감정 이었을까?
나는 우리 나라 임시정부는 눈물의 정부 청사라고 생각한다.
나라 잃은 서러움과 일제에 맞서 타국땅에서 온갖 치욕을 견디며 살아야 했던 우리 선조들의 한이 맺힌 곳이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근거지 로서 온갖 어려움을 견뎌야 했다. 게다가 임시정부는 내부적으로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며 서로 다른 사상으로 일치 단결을 하지 못 했던 안타까운 곳이기도 하다.
결국 임시 정부는 서로 다른 사상의 분열로 무정부 상태의 국면까지 치닫게 되었다.
<백범일지> 상권
마지막 부분에는 이에 대한 안타까웠던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단결의 어려움이 그때나 지금 나라가 돌아 가는 상황이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것 같아 더욱 씁슬한 마음만 들었다.
우리는
위급할 때 마다 단결하는 민족이라 했는데 왜 우리 정치는 국익 보다 개인의 이해 관계에 따라 집단 이기주의를 내 세우는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항상 우리편 네편으로 갈라서 다투고 있다니. 아, 안타깝다. 우리 정치인들은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김구
선생님! 우린, 아직도 이러고 있으니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4>
<쉽게 읽는 백범일지>는 기존 김구선생의 <백범일지>의 원뜻을 훼손하지 않고 엮은이 도진순님이 현대의 대중들에게 쉽고 널리 읽힐 수 있게 이 시대에 맞는 언어로 다시 풀이한 책이다. 일지라고 해서 일지(日誌) 가 아니다.
백범일지에서
'일지(逸志)'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기록한 것' 이라는 뜻이라고 처음 알게 되었다.
또 김구선생의 호 백범(白凡)이란 뜻이 백성, 백정에 쓰이는 백(白)과 무릇 범(凡)이 합쳐져
우리나라의 평범(平凡)한 백성들을 모두 포함한 의미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반 백년을 살고 나서야 이제 겨우 백범선생의 백범이란 뜻을 알게 되었다니 참으로 부끄럽다. <백범일지>를 통해 김구선생과 우리 나라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던 선조들께 참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은 대한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내 던지셨는데.
역사
교과서 몇 줄의 내용을 외우고 다녔던 것이 전부였던 내 역사 의식이 부끄럽다.
<벼랑에서
가지 잡고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고,(得樹攀枝無足奇)
움켜잡은 그 손마저 놓아야 대장부라 할
수 있으리,(懸崖撤手丈夫兒)>
백범은 청계동에서 만난 스승 고능선(1842~1926)에게 얻은 이 구절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다. 이 구절은
백범이 치하포 사건 때 일본인 스츠다를 죽이기전 마음속으로 되새겼던 구절이며 홍구 공원 의거를 일으키기 전 윤봉길 의사에게 전했던 구절이다.
한 때
백범이 마곡사에서 출가하여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아 승려로서 삶을 살았는데 불교의 선(禪)에서도 이와 같은 뜻의 구절이 있다. 무문관(無門關) 제 46칙(則) 에 나온다.
<백척간두진일보 (百尺竿頭進一步) 백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내딛어라>
이는 유교에서 대장부가 되는 것과 선에서 대자유인이 되는 법이 똑같이 통하는 것이다.
"저는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떠나는 것이니,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라고
했던 이봉창 의사의 활짝 핀 웃음은 이미 움켜잡은 손을 내 놓은 대장부의 미소 였으며 백척간두에 한 발 더 내딛은 자유인의 모습 이었다.
김구
선생의 드라틱한 인생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그의 전반부 인생은 1876년에 태어나서 44세 까지 우리나라에서 살았던 삶이다.
젊은
시절 양반이 되고 싶어 글 공부를 했고, 동학에 입교하여 동학혁명에 참가 했으나 실패 했다. 이후 치하포에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인 스츠다를 죽이게 된다.
그로 인해 붙잡혀 감옥 살이를 하게 되지만 많은 이들에게 그의 명성을 알리게 된다.
그 후 감옥을 탈출하여 신분을 숨기고, 한 때 승려가 되어 불교에 귀의 하였으나 다시 속세로 나와 기독교인
되어 교육으로 세상을 구하고 했다.
한 인물이 여러 생을 산 것 처럼 파노라마틱 하다. 선생의 전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 했다.
그의 후반부 인생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기 까지 26년 간 임시정부와 함께 했던 삶이다. 대한의 독립을 위해 남의 나라에서 서러움과 고난을 몸소 겪어야 했던 시절이다.
그 힘든 고난의 시절을 겪고 다시 1945년에 해방된 우리나라로 환국하여 우리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애썼다. 하지만 결국 1949년 안두희(1917~1996)에게
암살을 당하고야 만다.
그가 바랬던 우리나라의 완전한 자주적인 독립은 보지 못한 것이다.
백범선생이 소원했던 대한 독립은 우리나라가 남의 나라 도움없이 스스로 이루어내는 독립을 말한다.
미국의 도움도, 소련의 도움도, 중공의 도움도 필요 없이 내 나라 국민이 스스로 독립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먼 과거의
역사에서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 통일을 했었고, 가까운 역사에서 조선은 일본에게 치욕적인 식민지배를 당해야 했다. 해방
된 후에도 미국과 소련에게 남과 북이 각각 신탁통치를 당해야만 했다. 이 모두가 나라가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현대화가 성공적으로 정착되어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의 통일에 대해서는 간섭하는 나라들이 많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 같은 강대국들에 둘러 싸여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의문 스럽다.
우리는 스스로 일어 서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로 뭉쳐야 한다.
하나님께서
만일 지금 우리에게 세가지 소원을 말하라고 한다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입니다. 평화 통일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만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야 합니다. 대한 독립 만세! 들어 주실 꺼죠?"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난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눈 내리는 벌판 한 가운데를 걸을 때라도 어지럽게 걷지 말라.
오늘 걸어간 이 발자국들이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리니)>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 P4
나는 스스로 묻고 대답해 보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이 아니였더냐? - P69
굳은 의지를 다지는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라 하고 우리나라가 완전한 독립국이 되려면 조선의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 P184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 P306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 앞에 보이지 아니 하는가?....중략....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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