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 조조와 채문희에 관한 관노트를 올렸더니 알라딘 이웃이신 잉크냄새님께서 흥미로운 댓글을 남겨주셨다. 삼국지를 새롭게 해석한 만화 《창천항로》를 추천하시면서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러 여성 인물도 소개해 주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삼국지> 는 오랫동안 남성들의 소설처럼 여겨진 면이 많다. 조조와 유비, 손권을 중심으로 수많은 영웅호걸이 등장하고 그들의 무력과 지략, 권모술수가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나는 영웅들의 무용담 속에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여인들의 이야기도 함께 있다.
유비에게는 미부인과 감부인이 있었고, 훗날 손권의 여동생인 손부인과도 정략결혼을 했다. 제갈량에게는 황월영이라는 외모는 비록 못하지만 재능이 제갈량에 버금갔다고 여겨진 부인이 있었다.
그리고 7번 잡아놓고 다시 7번을 풀어준 이야기로 유명한 남만의 맹획에게는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서는 축융부인 이라는 여인도 있다.
적벽대전의 주무대였던 강동에는 대교와 소교라는 두 미인이 있었다. 대교는 손책이, 소교는 주유가 아내로 삼았다. 조조가 100만 대군을 끌고 강동을 정벌하려는 목적이 두 미인 때문이었다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도 있지만 그건 모두 후대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이리라.
그리고 조조에게는 노래와 음악을 생업으로 삼던, 오늘 날로 치면 연예인 출신의 변부인이 있었다. 변부인은 훗날 황제가 되는 조비와 중국 문학상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시인 조식을 낳았다.
하지만 조조는 변부인 외에 남의 아내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가 큰 낭패를 본 적이 있었다. 항복한 장수 장수(張繡)의 숙모이자 장제의 아내를 받아들였다가 장수의 기습을 받아 장남 조앙과 맹장 전위 등을 잃었던 것이다.
이처럼 삼국지에는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았던 여인들이 등장한다. 이들 중 실제 존재했던 여인도 있고, 소설과 전승을 통해 유명해진 여인도 있다.
지난번 관노트에서 초선과 채문희를 이야기했으니, 이번에는 조금 특별한 이력을 가진 여인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를 아버지로 두었고, 황제의 아내가 되었으며, 친오빠가 남편에게서 황제 자리를 이어 받았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조절(曹節)이다.
조절은 조조의 딸이자 후한의 마지막 황후였다. 그녀가 황후가 되기 전, 그녀의 남편 즉 한황실의 마지막 황제 유협을 잠시 소개해 본다.
189년, 후한 말 십상시의 난으로 낙양은 혼란에 빠졌다. 황제 유변과 동생 유협은 환관들에게 끌려갔다가 가까스로 조조와 원소의 추격 끝에 무사히 구원해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때 군사를 이끌고 그들 앞에 나타난 사람은 동탁(董卓)이었다.
<삼국지연의> 에 따르면 동탁의 살기등등한 군대를 본 어린 황제 유변은 두려움에 떨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생 유협은 달랐다.
당시 여덟 살이었던 유협은 동탁을 향해 당당하게 물었다.
“그대는 황제를 보호하러 왔느냐, 아니면 황제를 겁박하러 왔느냐?”
동탁이 황제를 보호하러 왔다고 대답하자 유협은 다시 꾸짖었다.
“황제를 보호하러 왔다면 천자가 여기 있는데 어찌 말에서 내리지 않는가?”
순간 동탁은 황급히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어 절을 했다.
이 장면은 소설의 묘사이지만, 정사 <후한서> 에도 동탁이 형 유변보다 동생 유협의 총명함을 높이 평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결국 동탁은 유변을 폐위하고 유협을 황제로 세웠다. 그가 바로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당당한 기개와 달리 황제가 된 유협에게는 실질적인 권력이 없었다.
동탁에 의해 황제가 된 유협은 자신의 이복 형이었던 유변이 동탁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직접 보았다.
그래서 조조가 결국 동탁을 토벌하고 난 후 자신의 운명은 조조에게 달렸음을 감지 했을 것이다.
조조가 헌제를 맞아들인 뒤 황실은 안정을 찾았지만, 여전히 군사와 정치를 움직이는 사람은 조조였다.
황제는 유협이었지만 천하의 실권자는 조조였던 것이다.(196년)
당시 유협의 황후는 복수(伏壽)였다. 복황후라고 불리었는데 조조의 권세에 눌려 늘 불안 속에 살았다.
조조의 높은 권세에 불만을 품은 동승 일파는 조조를 제거하려고 모의를 했다.
하지만 조조를 제거하려던 동승 일파의 계획이 발각되자, 동승의 딸이자 헌제의 후궁이었던 동귀인도 처형되었다. 당시 그녀는 임신 중이었고, 헌제가 조조를 향해 살려달라고 간청했지만 소용없었다.(200년)
이를 지켜본 복황후는 두려움을 느껴 아버지 복완에게 조조를 견제할 방도를 마련해 달라는 비밀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복황후의 아버지는 행동하지 못했다. 아니 행동할 수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약 14년이 흐른 그 편지가 발각되었다.(214년)
이에 분노한 조조는 복황후를 폐위하도록 했고, 군사들이 황궁에 들어와 그녀를 끌어냈다.
<후한서>에는 복황후가 머리를 풀어헤친 채 맨발로 끌려가면서 헌제에게 애원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제는 저를 살려주실 수 없습니까?”
헌제가 대답했다.
“나 역시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오!”
어린 시절 천하의 동탁을 꾸짖었던 유협이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황후조차 구하지 못할 정도로 황제의 위엄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복황후는 결국 죽음을 맞았고, 그녀가 낳은 두 황자와 복씨 일족 대다수가 희생을 치뤄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15년, 새로운 황후가 책봉되었다.
바로 조조의 딸 조절이었다.
조조에게는 많은 자식이 있었다.
조비는 훗날 위나라의 황제가 되었고, 조창은 무예가 뛰어났으며, 조식은 중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시인이 되었다.
조절은 이런 쟁쟁한 오빠들과 어릴 때 부터 함께 자랐다.
그녀의 어린 시절이나 성격에 관한 기록이 남은 것은 별로 없다. 다만 당대 최고 권력자의 딸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로열 패밀리 정도가 아니라, 국가의 군사와 행정까지 움직이는 가문의 일원이었다.
조절은 본래 213년에 조조가 자신의 세 딸 조헌, 조절, 조화를 헌제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이후 복황후가 죽자 세 자매중에 조절이 새로운 황후로 책봉되었던 것이다.
이 혼인은 사실상 정략적 권력관계를 만들어 낸 셈이다.
조절의 아버지는 한나라의 실권자였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 실권자에게 의존하는 황제였다.
겉으로는 황제에게 시집간 영광스러운 혼인이었지만, 정작 황제에게는 자신의 황후조차 지킬 힘이 없었다.
그렇게 조절은 조조의 딸이자 한나라의 황후로 살아가게 되었다.
220년, 아버지 조조가 세상을 떠났다.
조조의 뒤를 이은 아들 조비는 야심이 아버지 조조와 달랐다.
조조는 끝내 황제가 되지 않았지만 조비는 아버지가 죽자 바로 그 해, 220년 헌제에게서 황위를 넘겨받아 위나라의 황제가 되려 했다.
이를 선양(禪讓)이라 한다. 선양은 피를 부르지 않는 명목상으론 평화적인 정권이양에 가깝지만 사실상 정치적 압박에 의한 권력이양이다.
조비에게는 새로운 왕조의 탄생이었지만, 하지만 여동생 조절에게는 남편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이었던 것이다.
당시 황위의 이양을 위해서는 한나라 황제의 옥새와 인수(印綬)가 필요했다.
조비는 사신들을 보내 이를 요구했다.
그러나 조절은 화를 내며 내주지 않으며 끝까지 저항했다.
사신들이 거듭 찾아오자 조절은 그들을 불러 꾸짖었다. 그리고 마침내 옥새를 아래로 내던지며 눈물을 흘렸다.
“天不祚爾!”천부조이!
“하늘이 너희를 보우하지 않을 것이다!”
<후한서> 에는 곁에 있던 사람들마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녀의 저항은 모순에 가깝다. 자신의 오빠가 황제가 되려는 순간, 자신의 남편은 이제 황제가 아니게 된다.
옥새를 던진 그 행동은 과연 남편을 위한 행동이었을까? 한나라 황후로서의 책임감이었을까?
그녀의 속마음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조절이 옥새를 내주지 않고 저항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물론 그녀의 저항으로 역사가 바뀌지는 않았다.
조비는 결국 황제가 되었고, 그렇게 유방이 세웠던 약 400년의 역사를 지닌 한나라 왕조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사실 유협의 목숨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유협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비는 그에게 산양공(山陽公)의 작위를 주었고, 유협은 자신의 마지막 황후인 조절과 함께 14년 동안 더 살았다.
이후 234년 남편 유협이 세상을 떠지만, 조절은 그보다 오래 생존했다.
그 사이 오빠 조비가 세운 위나라에서도 권력의 주인이 바뀌기 시작했다.
249년 사마의는 고평릉 사변으로 조씨 황실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사마씨의 권력은 더욱 강해졌고, 260년에는 위나라 황제 조모가 사마씨 세력에 맞서다가 살해되었다.
그리고 265년 위나라는 사마염에게 나라를 바쳤다. 두번째 선양을 이룬 것이다. 유씨에서 조씨로 그리고 사마씨로 나라가 바뀐 것이다.
자신의 오빠를 저주했던 天不祚爾(천부조이, 하늘이 너희를 보우하지 않을 것이다) 의 말 대로 위나라는 고작 50여년 만에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에 의해 나라의 주인이 바뀌었다. 조절의 말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후한서>에 따르면 260년 아직 사마염에 의해 나라의 주인이 바뀌기전 그녀는 수명이 다했다고 한다. 그녀가 죽은 뒤 남편 유협과 합장되었으며, 장례는 한나라의 예법에 따라 치러졌다고 기록한다. 한나라가 사라진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마지막 황후의 장례에는 여전히 한나라의 예법이 남아 있었던 셈이다.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었던 영웅들의 이야기에 비하면 지극히 피동적이며 아무런 실권도 없던 황제 유협과 그의 황후 이야기에 불과할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그러한 운명을 받아들였던 인물이 아니였을까 싶다.
역설적이게도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등장했던 수 많은 영웅들의 흥망성쇠를 그녀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지켜 보았다.
언제 어디서 죽을 수도 있는 불안한 시대 속에서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자의 운명.
이런 삶은 비극이었을까? 아니면 축복이었을까?
한나라의 마지막 황후, 조절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