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治世之能臣(치세지능신),亂世之奸雄(난세지간웅) 치세에는 유능한 신하요, 난세에는 간웅이다.> 

이것은 후한 말 인물평론가 허소(許劭)라는 사람이 젊은 조조를 두고 평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삼국지를 알고 있는 우리는 오랫동안 이 한마디로 조조를 기억해 왔다.

평화로운 시대라면 유능한 신하가 될 수도 있었지만, 혼란의 시대엔 간웅이 되어버린 사람,  '차오차오(曹操)' 그가 바로 조조다. 


요즘 나의 백수 생활의 즐거움은 낮 시간에 나 홀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재미난 영화가 개봉할 때 마다 극장으로 달려가 영화를 관람한다.  이렇게 보게된  중국 애니메이션 영화 《삼국, 제1부: 쟁낙양(三国第一部:争洛阳)》, 영어 제목으로 Three Kingdoms: The Beginning을 보면서 나는 이전에 알았던 조조가 아닌 새로운 조조를 만나게 되었다.


영화는 삼국이 정립되기 훨씬 이전, 후한 말 십상시의 난에서 시작한다.

젊은 조조와 원소는 한나라의 혼란을 걱정하던 젊은 관료이자 정치적 동지였다. 명문가 출신의 원소는 원칙과 명분을 중시했고, 조조는 자유분방하면서도 현실의 변화를 읽는 인물로 그려진다.

두 사람은 나라를 혼란으로 몰아넣은 원흉으로 십상시로 여기지만 환관 세력을 제거하는 문제에서는 생각이 달랐다. 원소는 만악의 근원인 환관들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조조는 그들을 제거한 뒤의 정국을 걱정했다.

권력의 공백을 과연 누가 통제할 것인가? 

결국 대장군 하진이 환관들에게 무참히 살해되고, 낙양의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동탁이 낙양에 들어왔다.

환관들의 전횡을 끝내려다가 오히려 동탁이라는 또 다른 늑대를 집안으로 불러들인 셈이 되었다. 


동탁의 전횡에 환멸을 느낀 원소가 낙양을 떠난 뒤, 조조는 동탁의 곁에서 환심을 산 후 동탁의 암살을 시도한다.

바로 <삼국지연의> 의 유명한 칠성보도(七星寶刀) 이야기다.

왕윤(王允)이 건넨 보검을 품고 동탁에게 접근했지만 조조는 암살에 실패하고 낙양을 탈출한다.

물론 이 장면은 정사에서 확인되는 사건이 아니라 후대 소설의 이야기다. 실제 역사에서 조조는 동탁의 관직 제안을 거절하고 낙양을 떠나 병력을 모았다.

젊은 시절 조조는 무너져 가는 한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유능한 관료에 가까웠다.

우리에게 각인된 간웅으로 불리게 되는 조조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에서는 동탁토벌이라는 명분으로 조조를 비롯한 원소, 원술, 공손찬, 손견 그리고 도원결의 삼형제가 등장하며 여포랑 맞짱뜨는 장면을 끝으로 엔딩을 맞는다. 그래서 제목이 삼국 더 비기닝이기도 한 것 같다. 아직 삼국이 안된 시기의 이야기니까. 


그런데 이들 무력을 가진 삼국지 영웅들과 달리 조용히 동탁을 제거하려고 했던 또 다른 인물 왕윤이 등장한다. 그에게는 삼국지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여인을 키우고 있었다.

바로 초선(貂蟬)이다.

<삼국지연의> 에서 왕윤은 자신의 집에서 자란 초선을 이용해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는다.

이른바 연환계(連環計)다.

조조가 보검을 들고 실패했던 암살은 결국 초선의 연환계로 인해 여포의 손으로 성공한다. 

역사적으로도 192년 왕윤과 여포가 동탁을 제거한 것은 사실이지만, 초선을 이용한 연환계는 문학적 전승이다.

그런데 동탁의 죽음이 곧 혼란이 종식되고 왕조가 안정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죽음으로 역사는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되었다.


동탁이 낙양에 들어와 등용했던 관리중에 채옹(蔡邕)이라는 대학자가 있었다.

132년에 태어난 채옹은 경학과 역사, 문장과 서예, 음악에 뛰어났던 후한 말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155년에 태어난 조조보다 스물세 살이나 연상이었다.

두 사람의 친분은 <후한서> 에도 기록되어 있다. 

조조와 채옹은 아마도 단순한 동년배 친구가 아닌, 한 세대 앞선 대학자와 젊은 관료 사이에 맺어진 오랜 인연으로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동탁은 채옹의 재능을 알아보고 중용했다.

그러나 채옹이 동탁의 모든 행위를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독단적인 정치를 걱정하며 충고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동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채옹이 한숨을 내쉬었다는 이유로 왕윤은 그를 체포했다.

채옹은 자신의 역사서 저술을 마칠 수 있도록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간청했지만 왕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채옹은 192년, 예순의 나이로 옥중에서 생을 마쳤다.

그리고 왕윤 자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동탁의 옛 부하들이 장안을 함락하면서 살해되었다.

동탁도, 왕윤도, 채옹도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권력자들은 서로를 제거했지만, 그들의 죽음으로 어지러운 세상이 바로잡힌 것은 아니었다.


원래 채옹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채염(蔡琰). 훗날 채문희(蔡文姬)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여인이었다.

여기서 잠시 초선을 다시 떠올려 본다.

삼국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초선을 모르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

그녀는 경국지색의 미모와 기지로 동탁과 여포를 갈라놓은 여인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정사에서 그 실존이 확인되지 않는 문학적 인물이다.

그럼에도 초선이라는 이름은 수많은 소설과 연극, 드라마 속에서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

반면 실제 역사 속에 존재했던 채문희는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삼국지를 여러 번 읽은 사람에게도 그녀의 이름은 생소할 것이다.

초선은 소설 속에서 너무나 유명해졌지만, 채문희는 분명한 역사적 기록을 남겼으면서도 한국의 대중적인 삼국지 이야기에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다시피 하다.

사실 그녀의 삶을 살펴보면 오히려 초선 못지않게 극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채문희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채옹의 학문과 예술을 가까이에서 익혔다.

<후한서> 에는 그녀가 박학다식하고 문장과 음률에 뛰어났다고 기록한다.

아버지가 연주하는 거문고의 줄이 끊어지는 소리만 듣고 어느 줄이 끊어졌는지 알아맞혔다는 일화가 있다.

그녀는 18세에 하동의 위중도(衛仲道)와 혼인했으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자식 없이 친정으로 돌아왔다.

이후 아버지 채옹마저 정치적 사건으로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곧 이어진 전란은 그녀에게서 고향마저 빼앗았다.

이 시기 남편도 아버지도 잃은 채문희는 전란의 틈에서 흉노 기병에게 사로잡혀 남흉노의 좌현왕에게 속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열두 해를 보내게 된다.

그 사이 그녀는 두 아들을 낳게되었다.

그녀가 자신의 뜻으로 흉노 땅에 간 것은 아니었다. 누구와 살아갈 것인지, 어디에서 생을 마칠 것인지 선택할 자유도 없었다.

그녀가 흉노의 땅에서 보낸 그 열두 해는 생존이었다.

학자 집안에서 규수로 자란 여인이 황폐한 초원에서 말과 양을 몰며 억세게 버티고 또 버틴 삶을 산 것이다.

2000년 전 당시 여성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기조차 어려웠다. 하물며 전쟁 포로가 된 여인에게 어떤 선택권이 있었겠는가?

그렇게 채문희의 삶이 낯선 땅에서 끝나는 듯했을 때, 갑자기 조조가 사람을 보내 그녀를 찾았다.


조조는 죽은 채옹과의 오랜 인연을 잊지 않고 있었다.

<후한서> 에는 그가 채옹의 후사가 끊긴 것을 안타까워하여 흉노 땅에 사신을 보내 금과 옥으로 채문희를 속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이 전하는 것은 조조가 그녀를 다시 한나라 땅으로 돌아오게 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채문희는 남흉노에 두 아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했다.

이때의 감정을 그녀의 작품 〈비분시(悲憤詩)〉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기쁨과 자식을 두고 떠나는 고통이 함께 담겨 있다.

그곳에서 낳은 두 아들에 대한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우리가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자식에 대한 마음과 그곳을 벗어나 자신의 삶을 되찾으려는 마음이 반드시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올 기회를 얻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이야기는 조조에게 구출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조는 돌아온 채문희가 동사(董祀)라는 젊은 관리와 다시 혼인을 시켜줬다.

남편 동사는 본인 보다도 나이 많고 흉노 땅에 아이까지 있는 늙은 여인인 채문희를 늘 무시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동사가 법을 어겨 사형에 처할 위기에 놓였다.

채문희는 직접 조조를 찾아갔다.

당시 조조의 주변에는 고관과 명사, 외국 사절들이 모여 있었다.

그 자리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로 나타난 채문희는 남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조조는 아무리 자신이 채문희의 후견인이 되었지만 이미 형 집행 명령이 내려졌다며 난처해했다.

그러자 채문희는 되물었다.

"공께서는 그토록 많은 말과 용맹한 병사를 거느리고 계시면서, 어찌 빠른 말 한 필을 아껴 죽어가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지 못하십니까"

조조는 그녀의 이 말에 마음을 움직여 동사의 죄를 사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또 다른 그녀의 일화는 어느 날, 조조가 그녀를 찾았다.

조조는 그녀에게 아버지 채옹이 남긴 많은 문헌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채문희는 아버지의 집에 약 4천 권의 책이 있었지만 전란으로 모두 사라졌고, 자신이 기억하는 것은 400여 편뿐이라고 답했다.

조조는 서리 열 명을 보내 기록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채문희는 당시에 남여 간의 예법을 고려해 남자 서리를 직접 대면하기 보다는 자신이 직접 기록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조조에게 종이와 붓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문헌들을 직접 써서 보냈다.

<후한서> 는 그녀가 쓴 글에 빠짐이나 오류가 없었다고 기록한다.

난세의 시기, 권력자들은 서로의 목숨을 빼앗았으며, 전란은 수많은 서적을 불태워 사라지게 했다.

하지만 한 여인의 머릿속에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학문이 그대로 살아 있었던 것이다.

조조가 되찾아온 것은 단지 채옹의 딸만이 아니었다.

사라질 뻔했던 한 시대의 학문 또한 그녀의 머리속 기억을 통해 다시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조조는 과연 간웅이었을까? 

그는 난세에 군대를 일으켜 수많은 전쟁을 치렀고, 때로는 냉혹한 결정을 내렸으며, 정치적으로도 가혹한 수단을 사용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와 음악을 사랑했고, 뛰어난 학자를 존중했으며, 죽은 선배와의 인연을 잊지 않았다.

그 오래된 인연이 비참한 인생의 끝 자락에 있던 여인을 돌아오게 했고, 그 여인의 지식은 다시 문헌으로 남았다.

물론 이런 일화 하나로 조조의 모든 행위가 정당했다고 할 순 없다. 대표적으로 그의 서주대학살이란 오명은 영원히 지우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을 간웅이라는 한마디로만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 설계된 조조를 기억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분명히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도록 근거를 제시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우리나라에서도 고우영 작가나 이문열 작가등이 저마다의 시대적 관점으로 다시 조조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 너머에는 실제 역사 속에서 훨씬 복잡한 삶을 살았던 조조가 있다.


초선이 <삼국지연의> 라는 문학의 힘으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면, 채문희는 자신의 삶과 학문을 통해 실제 역사에 흔적을 남긴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소설 속에서 유명해졌고, 다른 한 사람은 실제 역사 속에 존재했으면서도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낯설게 남아 있다.

오래된 삼국지의 이야기 속에서 오늘 나는 조조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 곁에서 '채문희' 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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