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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 한비자 ㅣ 낭송Q 시리즈
고미숙 기획, 한비 지음, 구윤숙 옮김 / 북드라망 / 2015년 2월
평점 :
(마힐 나레이션) 어제 마벨리 선생과의 토론에서 군주가 어떻게 권력을 유지하고 신하들을 다스릴 것인지, 한비 선생의 설명은 치밀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아무리 훌륭한 통치술이라도 나라가 망해버리면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오늘은 조금 잔인한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마힐: 선생님, 선생님의 조국 한나라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한비: 제가 죽은 뒤의 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마힐: 선생님이 돌아가신 기원전 233년으로부터 3년 뒤, 한(韓)나라는 진나라에 멸망했습니다.
한비: 음... 짐작은 했지만 그렇게 빨리...
마힐: 네, 당시 진나라가 여섯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멸망시킨 나라였습니다.
한비 선생은 잠시 말을 잃었다.
마힐: 선생님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통치술을 고민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한나라는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사상은 실패한 것이라 생각하시는지요?
한비: 선생께서는 좋은 약을 먹고도 환자가 죽으면 그 약이 반드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마힐: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요.
한비: 약을 제때에 쓰지 않았거나, 이미 너무 늦었을 수도 있습니다. 나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 글이 한나라를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제 생각이 모두 틀렸다는 주장은 다릅니다.
마힐: 그렇다면 나라가 오래 살아남았다고 해서 그 통치술이 반드시 옳았다는 뜻도 아니겠군요.
한비: 바로 그겁니다.
마힐: 그런데 선생님, 더 기묘한 일이 있습니다.
한비: 무엇입니까?
마힐: 선생님의 조국을 멸망시킨 진나라에서 오히려 법가적 통치 원리가 강력하게 활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비: 원래 진나라는 저보다 앞서 상앙의 개혁으로 강해진 나라였습니다.
마힐: 맞습니다. 선생님은 그 법가적 전통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지요. 선생의 글을 읽고 진왕이 선생을 먼저 만나보자고 한 것은 기억하시죠?
한비: 네, 그때 전 영문도 모른 채 결국 진의 감옥에서 죽었죠. 그런데 진나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힐: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12년 뒤에 진은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하고 왕은 스스로를 시황제라고 불렀습니다.
한비: 짧은 시간 안에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으니 그렇게 칭할 만 합니다.
마힐: 네, 하지만 진 나라도 불과 15년 뒤인 기원전 206년에 멸망하고 말았지요.
한비: 아, 천하를 얻고도 오래 지키지 못했군요.
마힐: 네, 강력한 법과 상벌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지만, 시황제 사후에는 권력투쟁과 가혹한 통치, 반란이 이어졌습니다. 어제 이야기했던 호해와 조고가 나라의 멸망을 재촉하게 한 도화선인 셈이죠.
한비: 군주가 측근에게 휘둘렸다면 제가 경계했던 문제가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마힐: 하지만 법과 형벌에 지나치게 의존한 통치 방식 자체에도 문제도 간과할 순 없습니다.
한비: 네,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법을 세우는 것과 법을 잘못 운용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마힐: 그런데 진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법가적 통치 방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비: 후대의 군주들도 법을 중시했습니까?
마힐: 그렇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선생님께서 생전에 그토록 비판 하셨던 유가가 국가의 주요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한비: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이 말입니까?
마힐: 네. 하지만 유가를 내세운 왕조들도 법률과 관료제, 인사와 상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를 설명할 때 외유내법(外儒內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한비: 겉으로는 유가, 안으로는 법가라…… 하하. 묘한 일이군요.
마힐: 다만 유가와 법가가 단순히 겉과 속으로 나뉘었던 것은 아닙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법가적 통치 방식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한비: 결국 제 조국도, 진나라도 사라졌지만 법과 제도로 나라를 운영해야 한다는 문제는 남았군요.
마힐: 그렇습니다. 사상은 반드시 원래 모습 그대로 살아남는 것은 아니니까요.
마힐: 이제 조선이라는 나라를 말씀드릴 차례가 되었군요.
한비: 연나라 동쪽의 그 조선입니까?
마힐: 이름은 같지만 다른 나라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조선을 고조선이라 부르는데 제가 지금 말하는 조선은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약 1,600년 뒤인 1392년에 세워진 왕조입니다.
한비: 얼마나 오래 이어졌습니까?
마힐: 오백 년 넘게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습니다.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지만, <경국대전>이라는 법전과 관료조직을 갖추고 나라를 운영했습니다.
한비: 그 나라 역시 유가의 이념과 법률을 함께 사용했군요.
마힐: 그렇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한가지 기묘한 모순이 있었습니다.
한비: 모순이라니요?
마힐: 신하들은 인과 덕, 충과 의를 논하면서도 서로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왕실에서는 삼촌이 조카를 혹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형제끼리 서로 정치적 위협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비: 정치 권력을 둘러싼 갈등으로 보면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죠. 사람은 본래 이익을 좇고, 권력이 있는 곳에 원래 다투이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마힐: 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의 왕실과 조정은 그렇게 살벌한 권력 투쟁의 무대이지만 오백 년이 넘게 지켜졌습니다.
한비: 오백 년이면 중국의 어떤 한 왕조보다 더 길게 유지되었군요. 그렇다면 그들은 권력을 탐했을지언정, 질서 자체를 없애려 하지는 않았다는 말이겠군요.
마힐: 네, 맞습니다. 신하들은 서로 공격을 하면서도 자신들이야말로 유교적 도덕과 올바른 왕조 질서를 지킨다고 믿었습니다.
한비: 어쩌면 조선이란 나라는 인의와 도덕이 관직을 얻고 잃게 하며,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정치적 기준으로 작용한 나라였겠군요. 이름은 덕과 의지만 실제로는 권력을 움직이는 힘이 된 거지요.
마힐: 역시 법가적 해석 답습니다.
한비: 그런데 그 나라의 마지막은 어떠했습니까?
마힐: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었지만, 1910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강압으로 국권을 빼앗겼습니다.
한비: 오백 년의 제도도 결국 나라를 지키지 못했군요.
마힐: 그렇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멸망은 선생님 시대의 한나라 멸망과는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한비: 무엇이 다릅니까?
마힐: 한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진나라의 강력한 황제체제가 들어섰습니다. 군주는 바뀌었지만 군주 중심의 통치라는 기본 질서는 이어졌지요.
한비: 네.
마힐: 그런데 조선 왕조가 끝날 무렵에는 세계의 통치 원리 자체가 변하고 있었습니다. 헌법과 국민의 권리, 국민주권이라는 생각이 발전하고 있었지요.
한비: 국민주권이라니요?
마힐: 군주가 아니라 국민이 국가의 주권자라는 뜻입니다.
한비: 군주가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마힐: 그렇습니다. 물론 한국이 그 체제로 곧바로 전환된 것은 아닙니다. 식민지 지배와 독립운동, 해방을 거쳐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긴 과정이 있었습니다.
한비: 그렇다면 단순히 왕조가 바뀐 것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릴 권리가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이군요.
마힐: 바로 그겁니다.
한비: 그렇다면 현대에는 제 법가가 필요 없겠군요. 군주가 없으니 말입니다.
마힐: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법은 존재합니다. 다만 형태가 달라졌습니다.
한비: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마힐: 현대의 법치주의는 선생님의 법가와 다릅니다. 선생님의 법은 군주의 통치를 위한 수단이었지만, 현대의 헌법은 국가권력 자체를 제한하고 국민의 권리를 보호합니다.
한비: 목적이 달라졌군요.
마힐: 네. 하지만 국가나 기업, 어떤 조직이든 사람의 선의만으로 운영할 수 없다는 문제는 여전합니다.
한비: 규칙과 책임, 권한과 상벌이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마힐: 그리고 신하가 말한 것과 실제로 해낸 일을 비교했던 선생님의 형명(刑名)처럼, 오늘날에도 약속과 성과를 검증해야 합니다.
한비: 그렇다면 제 사상이 그대로 살아남은 것은 아니지만, 제가 고민했던 문제들은 여전히 존재하는군요.
마힐: 네. 다만 현대에는 한 가지 질문이 더해집니다.
한비: 무엇입니까?
마힐: 그 법을 집행하는 권력자 자신은 누가 통제하는가?
한비: 군주를 통제한다니요? 그 통제권은 누가 갖나요?
마힐: 네, 한 사람에게만 권력을 맡기지 않고 헌법과 제도로 권력을 나누고 서로 견제하는 겁니다.
한비: 권력을 나누면 분명 다툼이 생길 텐데, 그 다툼은 누가 통제 하나요?
마힐: 맞습니다. 바로 그 문제 때문에 현대의 제도 역시 끊임없이 수정되고 있는 중입니다.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리 권력자라도 현대에는 법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한비: 결국 시대가 바뀌면 법의 주인도 달라지는군요.
마힐: 네, 그렇게 볼 수 있죠. 법의 주인도 이제는 법의 통제를 받는 것으로 변한 것이죠.
한비: 그럼 저도 궁금한 것이 생겼어요. 아까 나라가 망하면 통치술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물으셨지요?
마힐: 네.
한비: 아시다시피 저는 제 조국 한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막고 싶었습니다. 후대에 제 글이 읽힌다고 해서 한나라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힐: 네.
한비: 그러나 제 나라가 사라진 뒤에도 제가 고민했던 문제들이 남아 있다면, 제 글이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니겠지요?
마힐: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비: 그럼, 조선이라는 나라가 멸망했을 때, 그 나라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힐: 나라를 잃었지만 사람들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웠습니다.
한비: 군주도 나라를 지키지 못했는데, 백성들이 나라를 되찾으려 했다는 겁니까?
마힐: 그렇습니다.
한비: 무엇을 위해서였습니까? 자신들을 지키지 못한 군주를 위해서입니까?
마힐: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선생님께 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비: 누구입니까?
마힐: 군주에게 버림받았지만 나라를 버리지 않았던 장수의 이야기 입니다.
한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까?
마힐: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순신입니다.
(마힐 나레이션) 한비의 한나라는 멸망했다. 그 한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법가적 통치 원리는 유가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후대의 제도 속에 남았다.
오백 년을 이어온 조선 왕조도 결국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에는 군주가 아닌 국민이 국가의 주권자라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국가의 수명과 사상의 수명은 같지 않았다.
한비의 법가와 현대 법치주의는 다르다. 그러나 명확한 규칙, 권한과 책임, 말과 성과의 검증이라는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라는 멸망하고 제도는 바뀐다. 사상 또한 변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은 시간을 초월하며 살아남는다.
그래서 어떤 질문은 이천 년을 건너 살아남았다.
내일은 한비 선생에게 이순신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한다.
군주가 나라를 지키지 못할 때, 누가 나라를 지키는가?
6일차 마침.
군주의 화는 사람을 믿는 데서 비롯된다. 다른 사람을 믿으면 그에게 이용당하게 된다. 신하는 군주와 혈육으로 맺어진 자가 아니라, 군주의 위세에 얽매여 섬기지 않을 수 없는 자이다. 그 때문에 신하는 군주의 마음을 엿보고 살피느라 잠시도 쉬지 않는다. - P116
유학자는 선왕의 도를 칭송하고 인의를 빙자하여 용모와 옷차림을 성대하게 하고, 변설을 꾸며 당대의 법을 의혹하게 만들어 군주의 마음을 동요시킨다. 합종 연횡의 담론을 만드는 자는 거짓을 늘어놓고, 외세의 힘을 빌려 사욕을 성취하며 나라의 이익을 저버린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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