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낭송 한비자 ㅣ 낭송Q 시리즈
고미숙 기획, 한비 지음, 구윤숙 옮김 / 북드라망 / 2015년 2월
평점 :
(마힐 나레이션) 오늘도 어제에 이어 토론은 계속된다. 한비 선생의 마지막 의미심장한 미소에서 마키아벨리 선생의 질문에 대답해야 할 차례다.
그런데 마벨리 선생이 오늘 먼저 의견을 꺼낸다.
마벨리: 한비 선생, 어제 토론을 마치고 제 <군주론> 의 실제 모델 이었던 '체사레 보르자' 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비: 아, 선생께서 높이 평가하시는 그 체사레 보르자 말이죠? 음. 제 눈에는 패왕의 길을 걷다가 멈춘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마벨리: 패왕이라니요?
한비: 제가 살던 시대보다 앞선 춘추시대에는 여러 제후국을 이끌며 패권을 다투던 군주들이 있었습니다.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 송양공, 진목공 이라는 제후들이 있었죠. 후세에는 이들을 춘추오패(春秋五霸)라 불렀지요.
(마힐 나레이션) 그렇다. 춘추오패는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약해진 시대에 패권을 추구하거나 행사했던 다섯 제후를 가리킨다.
마벨리: 한비 선생이 보시기에 체사레는 그 정도의 업적도 이루지 못했다는 말씀이군요.
한비: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환공처럼 패업을 이룬 사람도 죽은 뒤 나라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군주 한 사람의 재능만으로는 나라를 오래 지탱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마벨리: 그렇다면 어제의 마지막 질문을 다시 드려야 겠군요. 군주가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나라가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호해의 무능한 방임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주시지요.
한비: 그 답은 무위(無爲)에 있습니다.
마힐: 무위라니요? 노장 사상에 나오는 무위를 말하는 겁니까?
마벨리: 그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 아닙니까?
한비: 노장사상의 무위가 맞습니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마힐: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되 하지 않는 어떤 경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한비: 쉽게 말하면 이렇죠. 군주가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한다면 신하는 자신의 책임을 잃습니다. 그러나 일을 맡겨놓고 확인하지 않는다면 신하는 군주의 통제에서 벗어나겠지요.
마벨리: 결국 일을 맡기면서도 통제해야 한다는 말씀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한비: 법(法)·술(術)·세(勢)가 필요합니다. 법은 통치의 기준이고, 술은 신하의 말과 성과를 검증하는 방법이며, 세는 군주가 가진 권위입니다.
마힐: 세 가지가 서로 맞물려 움직이는 것이군요.
한비: 그렇습니다. 여기에 군주가 반드시 놓지 말아야 할 두 손잡이가 있습니다.
마벨리: 그게 무엇입니까?
한비: 상과 벌입니다. 이병(二柄)이라 하지요. 상벌의 권한을 신하에게 빼앗기면 군주는 이름뿐인 군주가 됩니다.
마벨리: 하지만 군주가 신하의 보고에 속고 있다면, 누구에게 상을 주고 벌을 내려야 하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한비: 신하가 맡은 직분과 실제 성과를 대조해야 합니다. 말과 실적이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것이지요.
마벨리: 그렇다면 다시 조고의 문제입니다. 호해는 자신이 황제라고 믿었지만, 조고가 그의 눈과 귀를 장악했습니다. 군주가 속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면 선생의 법과 술은 누가 작동시킵니까?
(마힐 나레이션) 다시 한번 조고의 문제를 꺼낸 마벨리 선생의 물음에 한비 선생은 잠시 말을 멈췄다.
한비: 이거는 제가 쓴 글 주도(主道)의 한 구절입니다.
明君無爲於上, 群臣竦懼乎下(명군무위어상, 군신송구호하)
밝은 군주는 위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신하들은 아래에서 두려워하며 경계한다는 뜻 이죠.
마힐: 송구라면 혹시 사극에서 신하들이 “송구하옵나이다”라고 할 때, 그 말인가요?
한비: 비슷하지만 여기서는 죄송하다는 뜻보다 군주의 권위와 상벌을 두려워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마벨리: 군주는 가만히 있는데 신하들은 긴장하고 있다니, 생각보다 무서운 무위군요.
한비: 군주의 무위는 신하들의 방종을 허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말만 믿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 경로로 사실을 확인하고, 상벌의 권한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마벨리: 그러려면 결국 군주가 끊임없이 판단하고 움직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무위입니까?
한비: 신하의 일을 대신하는 것과 신하가 제 일을 하는지 살피는 것은 다릅니다.
마벨리: 그렇다면 무위란 군주의 판단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군요.
한비: 물론입니다. 군주는 직접 실무를 처리하지 않되 통치의 주도권은 놓지 않아야 합니다. 그 주도권이 바로 중심을 잡는 겁니다. 군주가 제대로 중심을 잡고 있으면 신하는 함부로 전횡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마힐: 듣고 보니 무위는 편안한 통치가 아니라 오히려 어려운 통치 같습니다.
마벨리: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만약에 군주가 자신의 무능을 무위라고 착각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비: 그럴 수 있죠. 하지만 그것은 무위가 아니라 방임입니다.
마벨리: 하지만 정작 군주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한비: 그렇기 때문에 군주의 무위는 참으로 어려운 경지가 되는 겁니다.
마벨리: 오호, 무위를 모르는 군주는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려 할 것이고, 무위를 안다고 착각한 군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어느 쪽이든 나라가 위험해지는 것 아닙니까?
한비: 맞습니다. 그래서 무위는 군주가 스스로 도달했다고 선언하는 순간 완성되는 경지가 아닙니다.
마힐: 그렇다면 군주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비: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신하에게 맡겨야 할 일을 구별해야 합니다. 법과 상벌의 권한을 지키면서도 신하의 직분을 침범하지 않아야 하지요.
마벨리: 결국 선생의 무위에도 군주의 역량이 필요하군요.
한비: 그렇습니다. 다만 저는 군주가 자신의 재능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벨리: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의 차이는 조금 더 분명해졌군요. 저는 변화하는 현실에서 군주가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할 것인가를 고민했고, 선생께서는 군주가 직접 행동하지 않아도 나라가 움직이도록 하는 방법을 고민하셨습니다.
한비: 그러나 어느 쪽이든 군주가 잘못 판단한다면 위험하겠지요.
마힐: 결국 완벽한 통치술은 없다는 말씀이군요.
한비: 적어도 군주가 자신의 통치술을 완벽하다고 믿는 순간부터 위험해질 수는 있습니다.
(마힐 나레이션) 이제야 한비가 말하는 무위가 조금 이해되기 시작했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법으로 기준을 세우고, 술로 신하를 검증하며, 세로 통치의 권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상과 벌이라는 두 손잡이를 놓지 않으면서도 신하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설이 숨어 있었다.
무위를 모르면 권력을 잃고, 무위를 안다고 착각해도 권력을 잃는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비르투가 필요하다고 했고, 한비는 군주 개인의 재능에만 나라를 맡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와중에 군주의 무위를 언급했다. 군주의 무위라니... 법가와 무위라... 쉽지 않다.
어쨌든 군주가 중심을 잃는 순간 그 군주의 모든 권세는 측근에게 옮겨가고야 만다.
이제 두 사람의 닮은 것 같지만 확실히 서로 다른 통치 방법이란 것은 알겠다.
그런데 여기서 문득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겼다.
마힐: 그런데 두 분께 한 가지 더 여쭙고 싶습니다. 애초에 왜 이런 책을 쓰셨습니까?
마벨리: 원래 저는 피렌체 공화국에서 외교와 행정 업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이 돌아오면서 관직을 잃었지요. 체포와 고문까지 겪은 뒤 정치에서 멀어졌습니다.
마힐: 그래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후 <군주론> 을 쓰신 거군요.
마벨리: 그렇습니다. 혼란에 빠진 이탈리아에서 권력을 얻고 유지하려는 군주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다시 정치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요.
한비: 그래서 체사레 보르자를 중요하게 보신 거군요.
마벨리: 네. 그는 권력을 획득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성공과 실패 모두 배울 만한 것이 있었지요.
마힐: 그렇다면 한비 선생님은 어떻습니까?
한비: 저는 본래 한나라 왕실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가 태어난 한나라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점점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왕실에서 자랐기 때문에 누구보다 더 저의 조국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늘 고민했지요.
마힐: 그래서 법과 술과 세를 말씀하셨군요.
한비: 군주 한 사람의 어짊이나 재능만 믿어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군주가 신하를 다스리고, 법과 상벌을 통해 국가의 힘을 유지할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마벨리: 결국 우리는 모두 위태로운 나라를 바라보며 글을 썼군요.
한비: 그런것 같군요. 하지만 선생께서는 혼란 속에서 군주가 어떻게 권력을 얻고 지킬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셨고, 저는 군주가 어떻게 신하를 다스리고 국가의 통치 질서를 유지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마벨리: 물론 저 역시 제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군주론>만으로 저의 모든 생각을 판단하지는 말아주십시오.
마힐: 하하, 또 <로마사 논고>를 읽으라는 말씀이시군요.
마벨리: 읽어보시면 손해는 없을 겁니다.
마힐: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두 분의 토론 잘 들었습니다. 오늘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다시 다음 기회에 두 분을 모시도록 하고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마힐 나레이션) 두 사람은 이제 사유의 공간에서 사라진다.
사유 속에서 문득 다시 생각난 의문.
왜 한비를 ‘동양의 마키아벨리’라고 부르는가?
두 사람은 분명 닮았다. 권력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았고, 인간의 선의만으로 국가를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출발한 자리와 도달하려 했던 곳은 달랐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에서 밀려난 피렌체의 외교관으로서, 혼란 속에서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군주의 역량을 탐구했다.
한비는 약해져 가는 한나라의 왕실 사람으로서, 군주가 신하를 다스리고 국가를 유지하는 통치의 원리를 탐구했다.
마키아벨리의 비르투와 포르투나, 한비의 법·술·세와 무위, 그것들은 서로 닮은 질문에 대한 서로 다른 대답이었다.
이제 나는 한비선생에 대한 수식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한비는 ‘동양의 마키아벨리’가 아니다. 그렇게 불러져서는 안된다.
한비는 한비다.
그렇다면 한비가 고민했던 통치의 원리는 실제 역사 속에서 얼마나 유효했을까?
군주가 바뀌고 왕조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 원리는 작동할 수 있었을까?
내일은 그 질문을 조선의 역사 속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5일차 마침.
작은 지혜를 가진 사람과 더불어 국정을 계획할 수 없고, 작은 충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법을 주관하도록 할 수 없습니다. - P46
군주는 지혜를 버림으로써 도리어 밝게 보고, 재주를 버림으로써 도리어 공을 세우며, 용기를 버림으로써 도리어 강해진다. - P53
군주의 권한을 해치는 다섯 가지 막힘이 있다. 첫째는 신하가 군주의 눈과 귀를 막는 것이요, 둘째는 신하가 나라의 재정을 장악하고 관장하는 것이요. 셋째는 신하가 마음대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넷째는 신하가 제멋대로 상과 벌을 주는 것이요. 다섯째는 신하가 사사로이 무리를 짓는 것이다. - P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