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송 한비자 ㅣ 낭송Q 시리즈
고미숙 기획, 한비 지음, 구윤숙 옮김 / 북드라망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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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게 한비자를 소개하는 글에는 심심찮게 등장하는 수식어가 있다.

‘동양의 마키아벨리.’

한비와 니콜라 마키아벨리 두 인물 모두 권력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인간의 선의보다는 이해관계를 중시했으며, 군주가 어떻게 권력을 유지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러니 그럴듯한 소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비자>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었다면 생각이 달라진다.

과연 두 사람이 정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과 한비가 바라 보는 이상적 군주는 닮은 듯하지만 어딘가 다르다. 

그래서 두 사람을 직접 만나서 토론을 가져봐야겠다.  


물론 이것은 내 상상 속의 대담이다. 

한비는 기원전 3세기 전국시대 사람이고, 마키아벨리는 15~16세기 르네상스 시대 사람이다. 

토론에 앞서 두 사람에게 서로의 책을 미리 읽어보도록 부탁했다는 설정까지 덧붙였다.


이제 곧 상상 속의 지상 최고의 끝장 토론회로 들어간다.


마힐: 오늘은 동양의 마키아벨리로 불리는 한비 선생과 니콜라 마키아벨리 선생을 모셨습니다. 마키아벨리 선생님 호칭이 길어 편의상 '마벨리' 라 부르도록 할테니 양해해 주십시오. 


한비: 잠깐만요. 제가 왜 마키아벨리 선생의 동양판입니까?


마힐: 두 분의 정치사상이 비슷해서 그렇게 부릅니다.


한비: 제가 먼저 태어났는데요?


마벨리: 하하. 그 점은 인정해야겠습니다.


한비: 그렇다면 마키아벨리 선생을 서양의 한비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벨리: 그 점에 대해서는 곤란합니다. 저에게도 제 생각이 있으니까요.


마힐: 아, 시작부터 두 분의 소개로 부딪히시는군요.


한비: 아니, 비교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비교한다고 해서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죠.


마벨리: 동의합니다. 우리가 왜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는지부터 살펴보는 건 어떨까요?


(마힐 나레이션)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한비의 전국시대는 강대국들이 패권을 다투던 시기였다. 마키아벨리의 이탈리아 역시 여러 국가가 경쟁하고 외세가 개입하던 혼란의 시대였다.


마벨리: 도덕적으로 훌륭하다는 말만으로 나라를 지킬 수는 없었습니다.


한비: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군주가 어질다는 소문이 국경을 지켜주지는 않았으니까요.


마힐: 그럼 두 분은 역시 같은 사상이군요!


한비: 잠깐 그렇게 속단하지 마세요. 같은 병을 보았다고 처방까지 같을 필요는 없지요.


마벨리: 게다가 저는 군주만 연구한 사람이 아닙니다. 공화국의 제도와 시민의 역할도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마힐: 그 부분은 <군주론>만 읽으면 놓치기 쉬운 부분이군요.


마벨리: 저의 다른 책 <로마사 논고>도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마힐: 이틈에 책을 홍보 하실 줄이야.... 아무튼 읽어야 할 책이 또 늘었습니다.


한비: 저는 사실 오늘 두 분이 제 책을 끝까지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마힐: 오늘은 제가 심문받는 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마힐 나레이션) 토론장 분위기는 웃음이 번지며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 오래가지 않았다.


마힐: 먼저 제가 마벨리 선생님에게 여쭙겠습니다. 선생의  <군주론> 에는 유명한 사자와 여우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군주는 사자처럼 강하고 여우처럼 영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마벨리: 정확히 말하면 사자는 함정을 알아채지 못하고, 여우는 늑대를 쫓아내지 못합니다. 그러니 군주는 함정을 알아채는 여우이면서 늑대를 물리치는 사자여야 합니다.


한비: 결국 군주 개인에게 상당한 능력을 요구하시는군요.


마벨리: 네, 현실은 무능한 군주에게 관대하지 않습니다.


한비: 그렇다면 군주가 사자처럼 강하지도, 여우처럼 영리하지도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벨리: 음... 군주로서 고민되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군주의 판단과 결단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한비: 나라의 운명을 군주 한 사람의 재능에만 맡길 수는 없습니다.


마벨리: 그렇다고 군주의 재능이 필요 없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한비: 물론입니다. 다만 군주가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해야 하는 나라와, 그렇지 않아도 운영되는 나라는 다릅니다.


마힐: 방금 두 분의 말씀을 정리해 보면 마벨리 선생은 뛰어난 군주를, 한비 선생은 뛰어난 통치 체계를 더 중시하시는군요.


마벨리: 제가 볼 땐 그렇게 단순하게 나눌 수는 없다고 봅니다. 저 역시 제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한비: 저도 군주의 판단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마힐: 두 분, 싸우시다가도 너무 쉽게 합의하시는 것 아닙니까?


마벨리: 당연하죠. 상대의 말이 맞는 부분은 인정해야지요.


한비: 하지만 그렇다고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힐 나레이션) 그렇다. 두 사람의 차이는 개인의 능력과 제도 중 하나만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더 중요하게 여긴 질문은 여기에서 서로 달라진다.



마힐: 마벨리 선생의 <군주론>에 나오는 '비르투'와 '포르투나' 가 어쩌면 그 차이를 보여주는 개념이겠군요.


마벨리: 보통은 각각 '역량'과 '운' 이라 번역하더군요. 그러나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비르투(virtù)는 상황을 판단하고 기회를 활용하는 정치적 역량입니다. 포르투나(fortuna)는 인간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운명과 우연이지요. 


한비: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운이 따라주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마벨리: 그렇습니다. 그래서 변화에 대응할 능력이 필요합니다. 체사레 보르자가 그런 사례입니다. 상당한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었지만, 교황이었던 아버지의 죽음과 자신의 병환 등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물론 판단의 잘못도 있었지요.


한비: 그렇다면 더욱 한 사람의 능력에 의존해서는 안 되겠군요.


마벨리: 그럼 제가 선생께 반대로 묻겠습니다. 아무리 제도가 잘 갖춰져 있어도 위기가 닥쳤을 때 결단할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비: 물론 군주의 결단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국가의 모든 문제를 군주 개인의 지략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마벨리: 저는 군주가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해야 한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훌륭한 신하를 알아보고 활용하는 능력도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한비: 그렇다면 그 신하가 군주를 속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벨리: 그 정도는 군주는 사람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비: 사람을 판단하는 군주 자신이 속고 있다면요?


마벨리: 그래서 군주에게 비르투가 필요한 것입니다.


한비: 그래서 저는 바로 그 위험을 개인의 능력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힐: 이제야 두 분이 제대로 부딪히시는군요.


마벨리: 하지만 한비 선생, 제도나 규칙 역시 사람이 운영합니다. 그 사람의 판단이 잘못된다면 제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겠지요.


한비: 역시 그 문제는 피할 수 없어 보이는군요.


(마힐 나레이션) 마벨은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군주가 발휘해야 할 역량을 강조했다. 한비는 인간의 욕망과 이해관계를 전제로 통치가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이 차이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마벨도 제도를 중시했고, 한비도 군주의 능력을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어디에서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것일까?


마힐: 한비 선생님, 선생님이 주창하시는 法·術·勢를 군주가 가진다면 군주가 모든 일을 직접 하지 않고도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하셨지요? 


한비: 그렇습니다. 신하에게 직분을 맡기고, 그들이 말한 것과 실제 성과가 일치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마벨리: 그런데 신하가 군주의 눈과 귀를 장악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비: 군주가 한 사람의 말만 믿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 경로로 사실을 확인하고, 권한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해야겠지요.


마벨리: 그런데 진나라의 조고는 어떠했습니까?


(마힐 나레이션) 순간 한비의 표정이 굳어졌다.


한비: 조고라면…


마벨리: 그렇습니다. 진시황이 죽은 뒤 호해를 황제로 세우는 데 관여하고, 결국 이사마저 제거한 그 조고 말입니다.


마힐: 네, 조고는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르켜 말이라 부른다) 라는 고사성의 주인공이기도 하죠. 일본 사람들이 흔히 쓰는 '바카야로(馬鹿野郎)'라는 욕도 이 지록위마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있답니다.


한비: 그렇습니까? 조고가 일본의 욕설에까지 등장하는군요.


마힐: 다만 어원에는 여러 설이 있어 확실하지는 않답니다.


한비: 어원이 무엇이든, 사슴을 말이라고 말하게 만드는 권력은 참으로 위험한 것이지요


마벨리: 조고는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며 신하들이 누구의 뜻을 따르는지 시험했습니다. 황제의 눈앞에서조차 진실이 뒤집혔지요.


한비: 그거야 말로 군주가 신하에게 판단을 빼앗겼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마벨리: 바로 그것입니다. 선생의 통치술은 군주가 신하를 통제하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군주가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면, 그 방법은 누가 작동시킵니까?


(마힐 나레이션) 한비는 잠시 말을 멈췄다. 마벨리는 연이어 한비 선생을 몰아가는 것 같다.


마벨리: 군주가 움직이지 않는 동안 조고 같은 신하가 국가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일은 어떻게 막으시겠습니까?


한비: 군주는 신하에게 일을 맡길 수 있지만, 상벌과 임면의 권한까지 신하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마벨리: 물론 그렇게 말씀하시겠지요. 그러나 제가 묻는 것은 원칙이 아닙니다. 군주가 권한을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그 원칙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힐 나레이션) 이번에도 한비선생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마힐: 잠깐 만요. 마벨리 선생님, 살살 하십시요. 너무 한비 선생님을 몰아 붙이시는 것 같은데요? 


마벨리: 군주의 판단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제도는 어디까지 가능합니까?


한비: 제도가 군주의 판단을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마벨리: 그렇다면 결국 군주는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자의 힘과 여우의 지략이 필요하다는 제 주장으로 돌아오는군요.


마힐: 한비 선생님, 이번에도 마벨리 선생의 말씀이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마힐 나레이션) 한비 선생은 이번에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비: 조고의 사례는 군주가 신하에게 통치의 주도권을 빼앗겼을 때의 위험을 보여줍니다. 그 점은 인정합니다.


마벨리: 그렇다면 선생이 말하는 이상적인 군주는 결국 어떤 사람입니까? 신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감시해야 합니까? 아니면 신하에게 맡기고 물러서 있어야 합니까?


한비: 두 가지가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벨리: 아니, 어떻게 그렇습니까?


한비: 군주가 직접 모든 일을 처리하지 않는 것과, 군주가 통치의 주도권을 잃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마힐: 잠깐만요. 군주가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나라를 통제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한비: 그렇습니다.


마벨리: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군주가 움직이지 않아도 나라가 움직인다면, 그것은 뛰어난 통치입니까? 아니면 조고에게 권력을 빼앗긴 호해처럼 무능한 방임입니까?


(마힐 나레이션) 한비 선생은 순간,  마벨리 선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비: 마키아벨리 선생께서도 군주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하셨죠?


마벨리: 네, 물론이죠. 


한비: 그렇다면 제가 선생께 한 가지를 묻겠습니다.


(마힐 나레이션) 어눌한 듯한 한비 선생의 눈에서 갑자기 빛이 나기 시작한다.


한비: 군주가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나라가 제 스스로 움직인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높은 통치의 경지가 아닐까요?


마벨리: 그런 통치가 가능하다고요? 만일 그렇다면 그 경지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 설명해 주셔야겠습니다. 무엇보다 그 통치가 조고의 전횡과 어떻게 다른지도 말입니다.


(마힐 나레이션) 한비는 다시 잠시 침묵했다.


한비: 그 이야기는 조금 길어질 것 같습니다.


마힐: 아니, 한비 선생님,  이제야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데요?


한비: 오늘은 이미 충분히 말씀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내일 다시 이야기하시지요.


마힐: 지금 뭔가 중요한 말씀을 하실 듯 하면서 여기서 끝내시면 어떡합니까?


마벨리: 저 역시 궁금하네요. 어떤 답을 하실지...


마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토론을 하시고요. 내일 다 같이 한비 선생님의 답을 듣도록 하시죠. 


(마힐 나레이션)  한비 선생은 희미한 웃음을 띤다. 어쩌면 그 웃음에도 무슨 뜻이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 두 사람은 권력의 냉혹함과 인간의 이해관계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군주가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가에 이르자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물었다.

한비는 군주가 직접 움직이지 않고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지를 암시했다.

그러나 조고라는 이름 앞에서 한비의 설명도 잠시 멈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과연 같은 말일까?

이제 한비 선생의 답은 내일이 되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4일차 마침.

백성이란 참으로 권세에 복종하고, 권세란 진실로 사람들을 쉽게 복종시킨다. 그래서 공자는 오히려 신하가 되고, 애공은 도리어 군주가 된 것이다. 이것은 공자가 애공의 의에 감화된 것이 아니라 그의 권세에 복종한 것이다. 의로써 통치했다면 공자가 애공에게 복종하지 않았겠지만,권세에 의지했기에 애공이 공자를 신하로 삼은 것이다. - P134

현명한 군주의 나라에서는 죽간에 쓰인 글은 없고 법으로서 가르친다...중략...백성들 가운데 담론을 말하는 자는 반드시 법을 따르고, 움직여 일을 하는 자는 실제적인 공적을 목표로 삼으며, 용감한 자는 군대에서 힘을 다한다. 그러므로 전쟁이 없을 땐 나라가 부유해지고, 전쟁이 있으면 병력이 강해진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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