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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 한비자 ㅣ 낭송Q 시리즈
고미숙 기획, 한비 지음, 구윤숙 옮김 / 북드라망 / 2015년 2월
평점 :
어제는 법가와 한비자가 정확히 같은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다.
상앙은 法을 중심으로 강한 국가의 틀을 만들었고, 신불해는 術을 통해 관료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고민했으며, 신도는 勢, 즉 개인의 능력보다 그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서 나오는 힘을 중요하게 보았다.
마지막으로 전국시대 말 한비는 이런 여러 통치사상을 보다 종합적으로 받아들여 군주와 신하, 권력과 조직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훨씬 정교하게 고민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진나라는 왜 그렇게 강해졌고, 또 왜 그렇게 빨리 무너졌을까?
진나라는 정말 법가 때문에 무너졌을까?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법가적 국가운영은 실패하기 전에 먼저 크게 성공했다.
진은 법가적 운영을 통해 천하을 얻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상앙의 개혁 이후 진나라는 군공에 따른 보상, 농업과 군사의 강화, 호적과 행정체계의 정비, 엄격한 상벌과 강한 중앙집권을 통해 다른 제후국보다 강력한 국가동원력을 갖추었다.
전국시대처럼 수많은 나라가 생존 경쟁으로 싸우던 시대에는 이런 체제가 강력한 경쟁력이었다.
병력을 빠르게 동원하고, 군량을 확보하고, 명령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공을 세우면 확실하게 보상하고, 명령을 어기면 가차없이 책임을 묻는다.
이런 국가는 전쟁으로 경쟁하던 시대에는 강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기원전 221년 진왕 영정은 여섯 나라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한다.
그는 기존의 왕이라는 칭호를 넘어 '황제'라는 칭호로 스스로를 '시황제'라 칭했다.
통일 이후 진은 거대한 천하를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국가체제로 묶으려 했다.
문자와 도량형을 표준화하고, 중앙에서 지방을 직접 관리하는 군현제를 확대하며, 법과 행정조직을 통해 거대한 제국을 하나의 명령체계 아래 두려고 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법가적 국가운영은 분명 성공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속성이다. 어떠한 방향으로의 지속성이다.
전쟁에서 이기는 국가를 만드는 방법과, 통일된 천하를 오래 다스리는 방법은 과연 같은 것일까.
하지만 천하가 통일된 뒤에도 진은 여전히 강한 구속력을 사람들에게 요구했다.
대규모 토목공사가 이어지고, 군사적 동원과 부역이 계속되었으며, 엄격한 형벌과 통제 역시 유지되었다.
전쟁에서는 장점이었던 국가의 힘이 평화로운 천하를 오래 유지하는 데에도 똑같이 좋은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백성은 통일 후의 평화가 아니라 계속 되는 통제로 인한 부역과 세금에 지쳤다.
통제가 지나치면 사회에는 두려움이 쌓인다. 두려움이 공포가 되는 것이다. 그 공포는 이제 반작용을 불러 일으킨다.
법이 만든 질서가 어느 순간 처벌로만 느껴지게 되면 질서는 이미 불안해지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자신의 천하를 유람하던 중 죽는다.
이때부터 진나라는 예상치도 못한 문제에 부딪힌다.
후계와 정보의 문제다.
한비는 군주가 세상의 모든 일을 직접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통찰을 통해 간파했다.
군주는 결국 신하의 보고를 통해 세상을 본다.
군주 자신의 눈과 귀가 아닌 옆에 가까운 신하의 입을 통해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비는 군주의 눈과 귀가 특정 신하에게 장악되는 것을 매우 위험하게 보았다.
진시황이 죽은 뒤 한비가 우려했던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진시황이 총애했던 환관 출신 조고(趙高)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사기》의 전승에 따르면 조고와 이사는 진시황 사후의 후계 과정에 개입했고, 결국 호해(胡亥)가 진 2세 황제로 즉위한다.
그리고 이후 조고는 황제 가까이에서 점점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누가 황제에게 접근하는가.
어떤 상소가 황제에게 올라가는가.
누구의 말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가.
황제에게 통하는 모든 정보를 조고가 먼저 얻게 되는 것이다.
언뜻 사소해 보이지만 이것이 바로 권력이 되는 것이다.
군주가 세상을 직접 볼 수 없다면, 군주에게 세상을 보여주는 사람이 사실상 군주의 판단을 움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기》 〈이사열전〉을 읽다가 나는 예상치 못한 장면을 읽게 된다.
이 시기 한비는 이미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진나라 권력의 중심에서 여전히 살아 있었다.
더구나 한비를 죽이는 데 관여했던 이사가 바로 한비를 언급하는 것이다.
진승·오광의 반란 이후 이사의 아들 이유가 다스리던 삼천 지역까지 혼란에 빠지고, 이사는 자신의 지위마저 위태로워질 것을 두려워했다.
사마천은 이사가 2세 황제 호해의 뜻에 영합해 자신의 개인 영달을 보전하려 했다고 기록한다.
이사가 호해에게 올린 글 속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申韓之明術(신한지명술), 신불해와 한비의 뛰어난 통치술 ”
심지어 이사는 “韓子曰(한자왈)”, 즉 “한비가 말하기를”이라며 한비의 말을 직접 인용한다.
"어진 군주는 신하를 철저하게 감독하고 책임을 추궁해야 하며, 처벌은 반드시 집행되어야 하고, 군주는 신하에게 제어당하지 않아야 하며, 권력은 군주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야 한다" 는 논리였다.
《사기》의 이 대목에서 이사는 ‘독책(督責:엄격히 감독하는 책임을 추궁함)’을 강하게 주장하며 신불해와 한비의 통치술, 상앙의 법을 함께 끌어들인다. 사마천은 그런 이사의 상소가 호해의 뜻에 영합하려는 것이었다고 서술한다.
한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이사가, 한비가 죽은 뒤에는 다시 한비를 인용하여 황제를 설득하는 것이다.
어떻게 한비의 사상이 이미 진나라 정치권력 속에서 강력한 언어가 되어 있었던 것일까?
사실 이사가 호해에게 전달한 한비가 가지고 있던 본래 사상을 자신의 처지에 맞게 강압적 요소들을 선택하여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것에 가깝다.
군주가 자신의 욕망과 취향을 함부로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보다는, 독책과 처벌, 감시와 군주의 독단이 훨씬 강조되어 있었다.
즉 이사는 한비에게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에 좋은 부분을 끌어냈다.
신하를 더욱 철저하게 감시하고, 작은 잘못도 엄격하게 책임을 묻고, 군주의 뜻을 거스르는 간언을 멀리하며,
황제가 누구에게도 제어받지 않는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상소에는 실제로 ‘독단(獨斷)’, 엄격한 ‘독책’, ‘申韓之術’과 상앙의 법을 함께 등장시켜 자신의 논리를 강화했다.
호해는 그 말을 좋아했다.
결국 이사의 상소 이후 진나라 관리들의 독책은 더욱 심해지고, 백성에게 거두는 세금이 더욱 무거워졌으며, 형벌과 처형이 극심해졌다고 <사기>는 기록한다.
한비는 죽었지만 한비가 했던 말은 죽지 않았다.
그런데 살아남은 한비의 말은, 한비가 처음 고민했던 정교한 통치의 체계라기보다, 권력을 강화하고 처벌을 확대하는 논리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法보다 형벌이 앞서고, 術보다 감시가 앞서며, 形名보다 독책과 독단이 앞서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것을 모두 이사의 고의적인 ‘왜곡’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엄격한 상벌과 강한 처벌은 분명 한비 자신의 사상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한비의 사상에서 가장 강압적으로 활용하기 쉬운 부분만 떼어내 권력자의 욕망과 결합시키면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비 사상의 가장 어려운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한비는 무엇보다 신하의 전횡을 두려워했다.
유능한 신하가 군주의 눈과 귀를 장악한 후, 인사권과 상벌권을 빼앗아, 결국 군주보다 더 큰 힘을 가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래서 그는 군주의 勢를 강화하고, 術로 신하를 통제하고, 形名으로 말과 실제를 검증하며, 二柄이라는 상과 벌의 손잡이를 군주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논리적으로 보면 매우 정교하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그 군주가 무능하다면 어떻게 되는가?
군주가 신하를 감시하도록 만들어놓았는데, 정작 군주 자신이 현실을 판단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군주의 눈과 귀를 특정 신하가 장악했다는 것을 군주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다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에도 한비가 군주에게 집중시켜 놓은 강력한 권력장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법도 남아 있고, 처벌권도 남아 있고, 감시조직도 남아 있고, 황제라는 절대적인 권위도 남아 있다.
다만 그것을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이 황제에서 신하로 바뀌는 것이다.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여 신하의 전횡을 막으려 했는데, 군주가 무능해지는 순간 그 강력한 권력장치가 오히려 측근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진시황 사후 2대 호해 시대의 조고가 바로 그 역설을 보여줬다.
형식적으로 천하의 최고 권력자는 호해였다.
그러나 조고가 황제에게 전달되는 정보와 사람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실제 권력의 무게는 점점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결국 진나라 말기의 모습은 한비의 말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법가적 통제를 강화하고 있었는데, 정작 현실에서는 한비가 가장 경계했던 신하의 권력장악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은 결국 이사에게까지 돌아오게 된다.
이사는 결코 평범한 정치가가 아니었다.
진시황의 통일과 중앙집권적 제국 건설에 참여했던 당대 최고의 정치가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한비를 잘 알고 있었고, 한비의 말을 직접 인용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이사조차 자신이 참여하여 강화한 권력구조를 통제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조고와의 권력투쟁에서 패하고 아주 비참하게 처형되었다.(*<사기>에 따르면 오형에다 요참형을 당했다고 한다. 이후 삼족이 멸했다고 전한다.)
한비를 죽인 이사가 한비의 말을 이용해 권력을 강화했고, 그 강화된 권력구조가 다시 이사를 죽였다.
누구보다 권력 구조의 위험을 간파한 한비도, 법가를 이용해 진의 통일을 주도 했던 이사도 결국 법가적 역설 구조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알고 있는 것과, 그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은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비의 사상이 왜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지도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한비는 신하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를 집요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한비의 체계에서도 최종 판단자는 결국 군주다.
결국 새로운 질문 하나가 생긴다.
신하를 군주가 감시한다면, 그 군주는 누가 감시하는가.
이것은 현대의 법치주의가 한비의 法과 갈라지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현대의 법치가 지향하는 것은 단순히 권력자가 법을 이용해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권력자 자신도 법과 절차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권력이 한곳에 집중되지 않도록 권한을 나누고, 법을 만드는 사람과 집행하는 사람, 판단하는 사람을 구분하며,
서로 견제하게 한다.
왜 그래야 할까?
법은 권력을 제한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지만, 권력이 법의 해석과 집행을 독점하는 순간 법은 권력의 무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법이 권력에 종속되면, 공정한 기준이 되어야 할 법이 정적을 제거하거나 보복하는 수단으로 바뀔 수도 있다.
2천 년도 더 전 진나라의 권력투쟁을 읽고 있지만 현대사회에서도 전혀 낯설지 않은 상황에 기시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나라가 단순히 법가와 한비의 사상 때문에 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진의 몰락에는 여러 문제가 겹쳐 있었다.
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의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통일제국 진은 급속하게 무너져 갔다.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했던 진은 불과 15년 남짓 만에 사수의 정장 출신인 유방에게 항복했고 이후 항우에 의해 완전히 무너졌다. 물론 최후의 승자는 알다시피 유방이다.
그리고 진나라 뒤를 이은 유방의 한나라는 흥미로운 선택을 한다.
우리는 흔히 진은 법가, 한은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했다고 배운다.
진이 강한 법가 때문에 망했기 때문에, 한은 유교를 받아들여 오래갔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한나라는 진이 만들어놓은 국가의 뼈대를 상당 부분 이어받았다.
관료제도 남았고, 법과 행정조직도 남았으며, 중앙에서 지방을 관리하는 국가체제도 상당부분 유지했다.
유방은 진나라를 무너뜨렸지만 진이 만들어놓은 국가운영의 기술까지 모두 버리지는 않았다.
다만 진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지 않았을 뿐이다.
초기 한나라는 오랜 전쟁과 강한 국가동원으로 지친 사회의 부담을 줄이고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였고, 황로적 통치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훨씬 뒤 한 무제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유학이 국가의 중요한 정치이념으로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렇다고 법과 관료제와 상벌의 행정기술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나라는 법가를 버린 것이 아니라, 법가만으로 국가를 운영하지 않기로 한 것에 가까웠다.
진이 남긴 국가의 뼈대는 이용하되, 그 위에 다른 사상을 더한 셈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유교는 정치의 명분과 윤리를 제공했고, 황로사상은 지나친 개입을 줄이는 여백을 제공했으며, 법가적 행정기술은 실제 국가를 운영하는 도구로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고 보면 한비의 사상은 진나라와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비가 던진 질문은 계속 살아남았다.
사람의 선의를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
권한과 책임은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보고되는 정보가 사실인지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상벌의 권한은 누가 가져야 하는가.
측근이 정보와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권력은 누가 견제할 것인가.
2천 년 전의 질문인데, 오히려 오늘 날의 국가와 회사와 조직에서도 그다지 낯설지 않은 질문이며 답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한비가 생각했던 가장 좋은 군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한비를 두고 흔히들 ‘동양의 마키아벨리’라고 불린다.
서양에서도 한비처럼 도덕적 이상보다 권력의 현실을 바라본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어떻게 군주를 봤을까?
두 사람 다 군주와 권력을 말하고 있지만 과연 같은 이야기를 했을까?
먼저 짚고 넘어가자. 한비는 마키아벨리보다 약 1,700년 먼저 살았다.
그럼에도 왜 한비자를 두고 '동양의 마키아벨리' 라고 부르는 것일까?
이제는 그 호칭을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내일은 두 사람을 직접 마주 앉혀보기로 하겠다.
3일차 마침.
진실을 아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아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 P91
대국의 우환은 중신의 권력이 지나치게 큰 것이고, 소국의 우환은 좌우의 측근들이 지나치게 신임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군주의 공통된 근심이다. - P101
망국의 군주란 나라를 소유하지 못한 자가 아니라 가지고 있음에도 그 나라가 실제로는 그의 것이 아닌 자이다. 만약 신하들이 외세를 이용하여 국내 상황을 제어하면 이는 바로 군주가 망한 것과 다름없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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