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90일차
여기 한 사내가 있다.
곱상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언제나 장검을 차고 다녔지만 늘 궁핍하게 살았다.
그는 오늘도 도박판에서 자신의 애인이 춤을 추며 번 돈을 전부 탕진했다.
아름다운 여인이 춤을 추고 노래해서 번 돈을 사내는 술과 도박으로 써버렸다.
사람들은 회음(淮陰: 지금의 강소성)지역 최고의 무희가 이런 기생오라비 같은 사내에게 빠진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날 회음의 건달 하나가 이 사내의 앞을 막았다. 그리고는 시비를 걸었다.
어이, 자네, 허리에 긴 칼은 왜 차고 다니나?
멀쩡하게 생긴 놈이 여자한테 빌어먹고 다니는 주제에 칼은 왜 필요한가.
어울리지도 않는데, 차라리 그 칼을 내게 넘기지 그래? 내가 그 칼로 진나라 놈들을 썰어 버릴테니.
자네가 그러고도 남자인가? 자네의 그 꼴은 도저히 봐 줄 수가 없어.
이봐, 자네 용기가 있다면 그 칼로 날 베고 여길 지나가던가, 아니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라구.
사내는 자신을 모욕하며 도발하는 건달 앞에서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듣고만 있다.
싸움이 일어날 기미에 주위의 사람들은 건달과 사내를 에워싸며 몰려 들었다.
사내는 천천히 자신의 장검에 손을 갖다 댔다. 뽑아서 단 칼에 베어 버리면 된다.
주위의 모든 이들이 긴장하고 사내를 주시했다.
사내의 손은 장검에서 땅 바닥으로 짚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건달의 가랑이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사내의 이런 행동에 사람들은 실망했고, 곧 놀림꺼리가 되어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 *과하지욕(跨下之辱)이라 불렀다.
내가 그 순간 모욕을 참지 않고 단칼에 상대를 베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필부의 용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봤자 난 사람을 죽인 죄인밖에 더 되지 않나? 그러나 그 순간의 굴욕을 참음으로써 난 더 큰 포부를 실현할 수 있었다.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그 사내가 이루어낸 성과를 당시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사내가 바로 당대에 아무도 이길 수 없다고 여긴 패왕 항우(覇王項羽)를 꺽고 천하쟁패의 결전에 종지부를 찍은 파초대원수 (破楚大元帥), 한신(韓信)이었다.
초한지(楚漢志)는 사실 초한대전이라는 전쟁의 무용담보다는 비극적 인물 역사에 가깝다.
유방을 제외한 항우 그리고 한신 모두 비극적 최후를 맞이 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항우의 천하쟁패의 실패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바로 한신의 마지막이다.
한신은 유방과 항우를 같이 비교하면 독특한 특징이 있다.
유방은 밑바닥의 감각으로 살아남은 사람이고, 항우는 귀족의 명예로 스스로가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한신은 그 둘의 성질을 묘하게 함께 지녔다.
바닥의 생활도 알았고, 귀족의 기개도 가졌다. 그래서 더 크게 떠올랐고, 그래서 더 위험해진 것이다.
유방, 항우, 한신 중에 자신의 개인적 능력으로 가장 자수성가를 이룬 인물이 바로 한신이다.
한신은 천하쟁패 시기에 항우와 유방의 편에 모두 서봤다.
그가 최종, 누구의 편에 섰느냐에 따라 천하를 쟁취하게 되는 주인이 달라지게 된다.
하지만 그의 출중한 개인적 능력과 전장에서의 화려한 공적도 결국 천하 통일 후 버려졌다.
즉 *토사구팽(兎死狗烹)이 된 것이다.
한신에 대한 안타까움은 출중한 개인 능력에 비해 너무나 자기 자신에 대해 인식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한신의 재능을 두려워하는 유방 앞에서 자신을 낮춰야 했거나, 아니면 항우와 유방과의 경쟁에서 제 3의 위치로 스스로를 자립했어야 했다.
즉 자신이 이루어낸 성과에 가려 자신의 처지를 살펴보지 못한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을 감추듯이 천하 통일 후에도 자신을 감춰야 했지만 유방을 너무 얕보았고, 너무 믿었다.
초한지의 가장 비극적 인물, 한신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한신은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강렬한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인물이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만이 아니라, 내려 놓음이 아니었을까.
By Dharma & Maheal

*초한지 속에는 한신과 관련된 많은 사자성어를 접하게 된다.
방금 거론된 과하지욕, 토사구팽 말고도 *일반천금(一飯千金), *배수일전(背水一戰), *다다익선(多多益善), *사면초가(四面楚歌), *십면매복(十面埋伏) 등이 모두 한신과 연관된 고사 성어들이다.
이들 성어는 현대 일상에서도 많이 쓰인다.
주: *과하지욕(跨下之辱): 가랑이 아래의 굴욕, 한신이 더 큰 포부를 위해 잠시의 굴욕을 견뎠다는 고사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 사냥이 끝나면 개는 삶아 먹는다, 한신이 마지막 죽음에 이르게 된 고사
*일반천금(一飯千金): 밥 한끼에 천금을 갚는다. 한신이 가난했던 시절, 얻어먹은 끼니를 훗날 천금으로 보답했다는 고사
*배수일전(背水一戰): 등 뒤에 물을 두고 전투를 벌임,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곳에서 사생결전을 벌인다는 고사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 유방과의 군사능력 문답에서 한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고사
*사면초가(四面楚歌): 사방에 초나라의 노래 소리, 한신에게 포위당한 초나라 병사들이 절망적 상황에서 고향 초나라의 노래를 부른다는 고사
*십면매복(十面埋伏) : 십면이나 되는 매복을 깔아 놓음, 한신이 항우를 잡기 위해 곳곳에 매복을 숨겨 놓았다는 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