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8일차

<圓同太虛 /원동태허/둥글기가  허공과 같아

無欠無餘/무흠무여/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고요함에 집착하면 현지(玄旨) 영원히 길이 없어진다.

즉심즉불(卽心卽佛) 이든,  비심비불(非心非佛) 이든

마음이 바로 부처이든,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든, 마조가 했던 말이든 , 법상이 했던 말이든

이제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불식현지(不識玄旨),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도로염정(徒勞念靜), 공연히 고요한 생각만 하는구나.

 

이제 도를 닦는 곳이 고요한 속이 아니어도 상관 없다.

안의 마음이 시끄럽다면 어떤 고요한 환경도 소용이 없다.

소음으로 넘치는 대중교통 속에서, 분주한 마트 안에서, 아이들의 울음 소리 속에서, 아내의 끊임없는 잔소리 속에서, 그리고 내 안의 멈출줄 모르는 소리 속에서도 걸리지 않는다.

어디에서든 걸리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수레를 끌려면 수레를 치는 것이 아니라 소를 쳐야 되기 때문이다.

안의 소에 코뚜레를 꿰어 끌고 가리라.

 

虛心者福矣(허심자복의).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의 한문 성경에서는 허심자복의 라로 쓴다.

허심(虛心) 이란 마음 아니고, 마음이 가난한   더욱 아니다.

()는 단순히 비어 있음이 아니다.

반야심경의 (空) 마찬가지로 단순히 비어 있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허와 공은 눈으로 없는 작용의 상징이다.

공이 고정됨이 없는 작용을 상징하는 기호라면, 허 역시 고정되지 않는 틀을 상징하는 기호였던 것이다.

(道) 도리를 표현할 길이 없어서 기호를 썼을 뿐이다.

만약 도를 눈으로 있다고 가정한다면

둥근 원의 모양이 가장 적합할 것이고 크기가 너무나 크다고 가정한 것이다.

그게 실제 도는 전혀 아니지만, 도를 알지 못하는 범부(凡夫)에게 표현할 길이 그와 같이 밖에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원은 360도로 그 어디에도 모자라거나 남음이 없는 완벽한 체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원동태허(圓同太虛) 둥글기가  허공과 같아

무흠무여(無欠無餘)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마음이 가난한 , 허심자(虛心者) 바로 道心(도의 마음 가진자다.

허심자는 마음이 물질적으로 가난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떠한 틀에도 고정되지 않는 마음을 지닌자.

그자가 바로 허심자 이다.

허심자에게 모자란 것이 있을 있겠는가?

허심자에게 남는 것이 있을 있겠는가?

너무나 완벽한 마음 자리에 넘치고 모자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신심명의 구절과 마태복음의 구절, 서로 다른 종교, 다른 배경이지만 같은 도리를 나타냈다고 보는 것은 나만의 비약일까?



:圓同: 둥글 , 같을 동 : 둥글기가 ~와 같다.  둥글다는 마음 자리, 깨달음, 도를 상징한다.

太虛:  , 빌 허: 태허는 단순히 크게 비어있다 뜻보다 깊다. 비어있으면서 크다. 비어 있기에 걸림이 없다.

無欠: 없을 , 하품 흠: 흠이 없음이란 영어의 perfet와 같다. 원래 ()은 하품하다와 빚을 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빚을 진 상태가 흠이란 것이다. 현대 중국어에서 欠(qian 치엔)은 빚지다 쓰인다.

無餘:없을 , 남을 여:  남을 것이 없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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