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차: 한국 정치, 무의식의 원형

 

한국 정치는 서구 민주주의와 닮았지만 같지 않고,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분명히 다른 형태를 가졌다.

나는 한동안 “왜 한국 정치는 국민에게 불안감을 주는가”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문득 떠올랐다. 지금 여당과 야당의 언쟁만 따라가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를 이해하려면 훨씬 오래된 흐름, 말로 설명되지 않는 집단 무의식의 지층으로 내려가야 한다.

 

글은 그렇게 시작된 개인적 사유의 여정이다.

나는 한국 정치의 ‘무의식의 원형’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그 지층을 뚫고 지나가다 만난 것은 다름 아닌 동학이었다.

 

구한말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은 단순한 농민들의 봉기가 아니었다.

양반과 상민, 지배층과 피지배층이라는 오랜 위계 질서를 흔든 쓰나미였다.

동학의 사람들은 이상 “누가 지배하느냐”만 묻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이 하늘이다”라고 외쳤다. 그 말은 분노이자 각성이었다.

억압의 체제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려는 선언이었다.

사람이 하늘이다

 

그러나 동학의 불길은 강제적으로 진압되었다.

실패는 조선의 자주권을 흔들었고 외세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꺼진 잿더미 속에서 독립운동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동학이 한국 정치의 무의식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해진다. 

실패의 기억은 억압과 보상의 감정을 남겼고, 그 감정은 이후 저항과 재탄생의 동력으로 바뀌어 자라났다.

 

동학은 현대 한국 정치의 원형이며 출발점이다.

한국 정치의 무의식은 ‘억압—폭발—좌절—재탄생’의 흐름으로 움직였다.

이후 해방과 전쟁을 거치고, 국가 재건과 산업화, 민주화가 이어졌지만 표면이 달라졌을 뿐 지층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 정치 진영의 정체성은 원형의 변주에 불과하다.

 

한쪽은 “나라를 세우고 살려야 한다”며 질서를 중시했고, 다른 쪽은 “사람이 먼저”라며 기존 질서의 재편을 요구했다. 겉으로는 경제성장과 민주화, 안보와 인권의 대결처럼 보이지만, 깊은 곳에서는 동학 이후 계속 이어진 ‘안정’과 ‘해방’의 균열이 충돌하고 있었다.

 

중요한 둘이 단순한 적대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쪽이 강해지면 다른 쪽도 강해진다. 한국 정치의 양극화는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두 힘이 서로를 존재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커져 왔다.

그래서 오늘의 갈등을 오직 “이념과 진영싸움”으로만 보면 현실을 너무 평면적으로 읽게 된다.

깊은 곳에서는 한국이라는 공동체가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100여 년 동안 반복해온 내적 진동이 움직이고 있다.

 

지층을 보지 못하면 정치는 끝없이 싸움으로만 보일 것이고, 국민은 서로를 끝내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의식을 알고 보면 지금의 혼란은 ‘갑작스런 일’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또 한 번 구조를 재편하려는 징후로 읽힌다.

동학이 그랬고, 해방과 전쟁이 그랬고, 산업화와 민주화가 그랬다. 폭발과 혼란은 늘 새 질서의 전조였다.

 

결국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미디어 속의 진영 싸움이 아니라, 그 말 뒤에서 움직이는 역사와 집단 무의식의 흐름일지 모른다.

정치는 표면에서 싸우겠지만, 진짜 흔들림은 더 깊은 곳에서 시작된다.

 

By Dharma & Mah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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