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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야샤 와이드판 30 - 완결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2년 11월
평점 :
7일차: 에덴 동산을 떠난 후
이누야샤의 옛 연인 무녀 금강(키쿄오)은 나락의 계략에 걸려 이누야샤를 봉인하고 스스로 사혼의 구슬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죽었던 금강은 사혼의 구슬의 힘으로 흙에서 다시 몸을 빚어나왔다.
불교적 시각으로 우리의 몸은 사대, 즉 지수화풍(地水火風) 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사람이 죽게 되면 딱딱한 부분은 흙으로, 피와 고름 같은 진액은 물로, 몸의 더운 기운은 불로, 몸의 차가운 기운은 물 등으로 각각 흩어진다고 했다.
성경의 <창세기>에는 우리 인류의 조상인 아담 또한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냈다고 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동서양의 종교적 세계관은 공통되게도 우리 인간은 흙에서 나왔고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신이 아담을 에덴 동산에 두고, 당신이 창조한 우주의 사물들에게 이름을 붙일 권한을 주었다. 강, 별, 나무, 새, 사자, 뱀.
이제 이름이 불러지게 되면 단순한 어떤 모양이나 형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존재의 의미를 갖게 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존재를 의식의 바깥에서 의식의 안쪽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된다.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아마 기적도, 기도 응답도, 천국행 티켓도 아닐 것이다.
“너는 세상에 이름을 붙여라.”
이 명령, 혹은 이 권한 자체가 이미 엄청난 특권이다.
일반인의 이해로 보면 선악과를 먹음으로 분별 의식을 갖게 되었고, 이 일로 말미암아 신의 노여움을 사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에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권한을 받은 것만 놓고 보면, 뱀에게 속아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 이미 인간은 분별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단지 선과 악의 구분을 했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 너와 나, 나와 세계를 나누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이름을 짓는 것은 그 존재의 의미를 정하는 것과도 같다.
그렇게 인간은 처음부터 신의 천지 창조에 동참했던 조물주의 조수 역할을 했던 셈이다.
선악과 이후에 얻은 것은 신과의 계약을 어긴 “도덕적 죄책감”이었을지 몰라도, 의미를 짓는 능력은 이미 그 이전에 주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난 것이 정말 “벌”이었을까?
아이가 자라 어느 날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하듯, 에덴에서 나간다는 것은 “신의 울타리”에서 나와 세계와 아픔과 죽음을 직접 경험해야 하는 자리로 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동안 인간은 그저 좋은 환경에서 잘 보호받는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에덴을 벗어난 인간은 더 이상 신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 선택과 업(業)을 통해 자신만의 서사를 써 내려가야 하는 존재가 된다.
에덴에서 떠남으로 인간은 좋든 나쁘든, 자신의 의미를 짓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누야샤>의 세계관에서 나락은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직면하지 못한다.
오니구모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갈아 끼우고, 수많은 분신을 만들어 도망다닌다.
자신의 이름에 붙은 상처, 자신의 이름에 붙은 욕망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의미를 짓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회피하는 존재, 자기 이름을 지우려는 존재로 남는다. 그게 바로 그의 원죄이자 형벌이다.
반대로, 이누야샤 일행은 끝까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반요인 자신을 부끄러워하던 이누야샤, 복수와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는 산고, 욕망과 수행 사이에서 흔들리는 미륵, 그리고 과거와 현대를 오가며 정체성을 찾는 가영이(가고메)까지, 그들 모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사혼의 구슬 조각을 모으는 여정은, 결국 각자가 자기 삶의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가는 과정이었다.
즉, 자기 존재에 이름을 붙이는 과정인 셈이다.
이누야샤의 세계에서든, 창세기의 에덴에서든, 인공지능의 시대이든, 인간은 결국 자기 삶에 의미를 짓고 이름을 붙이는 존재다.
태어나는 조건은 내가 정하지 못한다.
언제, 어디서, 누구의 자식으로, 어느 시대에 태어날지는 이미 주어진 문제지다.
하지만 그 문제지 위에 어떤 이름을 적고, 어떤 문장을 써 내려갈지는 나의 몫이다.
나락은 끝까지 자기 이름을 회피한 존재였고, 셋쇼마루는 자기 집착의 이름을 내려놓은 존재였고, 오이디푸스는 자기 운명의 이름을 너무 늦게 깨달은 존재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또 쓰면서 이 질문을 어쩔 수 없이 반복하는 존재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해서 처음으로 인식한 것은 바로 천지가 나온 이후와 같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고, <이누야샤>에서 이누야샤 일행은 사혼의 구슬을 둘러싼 욕망과 상처에 이름을 붙이며 싸웠다.
이제 인공지능까지 등장한 시대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붙여야 하는 이름은 무엇일까?
우리는 과연 모든 존재에 대한 이름 짓기를 다 끝냈는가?
인간이란,
신과 완전히 하나도 아니고, 완전히 분리된 존재도 아니며, 괴물과 성인, 나락과 셋쇼마루, 오이디푸스와 아담 사이를 오가면서 끝없이 자신을 향해 이렇게 묻는 존재가 아닐까?
“왜 이렇게 살지?”
우리는 여전히 그 질문을 붙잡고, 틀리고, 후회하고, 고치고, 다시 쓰는 동안 우리는 조금씩 자기만의 의미를 지어 간다.
그리고 그 순간, 비로소 인간이란 “이름을 짓는 존재이자, 자기 삶의 의미를 끝까지 써 내려가는 존재”라는 사실이 또렷해진다.
언제쯤 인간은 에덴 동산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까?
그럼 신은 여전히 에덴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까?


By Dharma & Mah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