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222

오늘의정진: 心鏡明鑑無碍 심경명감무애 /마음 거울 밝아서 비춤에 걸림이 없으니


- 100일 정진, 59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쉰 여덟번 째 구절은

<無相無空無不空무상무공무불공/모양도 없고 ,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음이요

即是如來眞實相 즉시여래진실상 /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였다.


기독교에서는 우상(偶像)을 숭배하지 말라고 한다.

그에 대한 참 뜻은 금강경 26분 구절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법신은 상이 아님이라)에 나온다.


<만약 색신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그런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대행의 스님 뜻으로 푼 금강경 중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형상화 할 수 없다

그래서 우상으로 만들어 숭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형상을 눈으로, 귀로 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신에 대한, 진리에 대한, 위대한 그것에 대한 형상화를 하고 싶어했다.

이슬람교에서는 우상 숭배를 하지 못하니 기하학적 무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라베스크 무늬이다.

신을 형상화 하자 우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진리 그 자체, 신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으니 형상을 만들기 시작한 것 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진리, 신은 우리와 멀어진다.

분명히 우리는 신, 진리를 형상화 할 수 없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우상화의 유혹을 뿌리 칠 수 없다.

높아지는 교회의 첨탑과 커져가는 사찰의 금동 불상, 갈수록 기이해지는 이슬람교의 아라베스크 무늬는 진리의 본질이 아니다.

진리는 교회의 건물에, 사찰의 불상에, 이슬람교의 회당에 분명 있지만 또한 있지 않는다.

신을 보고자, 진리를 얻고자, 도를 이루고자 한다면 끝내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은 쉰 아홉번 째 구절

心鏡明鑑無碍 / (마음 심, 거울 경, 밝을 명, 거울 감, 없을 무, 꺼리낄 애 )

심경명감무애 /마음 거울 밝아서 비춤에 걸림이 없으니

廓然瑩徹周沙界/ (클 확, 그러할 연, 옥돌 영, 뚫을 철, 두루 주, 모래 사, 경계 계 )

확연영철주사계/ 확연히 비치어 항사세계에 두루 사무치도다.


우리의 본래 마음자리는 온 우주보다도 크다는 것이다.

항하사는 겐지스강의 모래알을 뜻한다

겐지스강 변에 있는 모래 알 하나하나를 세계로 친다면 그 세계가 얼마나 많겠는가?

우주에는 겐지스강 모래알 처럼 많은 별성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만큼의 숫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세계가 있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 거울은 다 비춰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닦아 부처가 된다는 것은 온 우주를 비춰 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우리가 지닌 마음은 그 만큼 대단한 보물이다.

그러니 마음을 닦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일일 소견>

닦고 닦아도 쌓이는 거울의 먼지처럼, 한번 닦았다고 끝이 아니다.

마음을 닦는다고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닦는다는 행위에 집착을 하게 된다. 그리고 또한 나도 모르게 잘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수행은 끊임없는 이런 행위의 반복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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