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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22년 7월
평점 :

책 제목: 문학의 숲을 거닐다
지은이:장영희 문학 에세이
제 목:
문학의 힘으로 일어서다
작년
9월 부터 시작한 독서 활동이 이제 곧 일년이 다 되어 간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책을 읽으며 책으로 많은 인물들을 만났다.
내
50평생 동안에 사회에서 직접 만나서 감흥을 받은 사람들 보다 책을 통해 알게 된 인물들이 앞으로는 내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 같다.
이번에 읽었던 <문학의
숲을 거닐다> 의 저자 장영희 교수님(1952~2009)도 그럴 것 같다.
책을 읽을 때는 너무나 좋아서 읽고 난
후 쉽게 독후감을 쓸 줄 알았는데 막상 글을 쓰려니 여러가지 생각이 일어나서
쉽게 쓰질 못하겠다.
왜 그런지,
상당히 당황 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후감을 써야 한다면 맘에 들었던 것 부터 시작 해야 겠다.
먼저 이 책은 장영희 교수가 2001년
부터 조선일보에 영문학 고전을 소개했던 칼럼들을 모아 출판을 한 양장본 책이다.
책은 고전이라 불리는 영문학 작품들과 장교수님이 겪었던 일상 들이 조화롭게 구성 되어 있고 중간중간 여백의 미처럼 사색하게 되는 그림들의 배치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여지껏 읽었던 다른 책들에 비해 이 책
만큼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조심스레 책을 넘기며 보게 되었다.
마치 책이 장영희 선생님의 분신이나 되는 듯 책을 아주 조심 스럽게 대하게 된다.
아마도 책을 읽는 내내 작가 장영희 교수님의 입장에 서서 감정 이입이 되었던 것 같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은 후 평생 목발에 의지한 채 살았지만 항상 밝은 모습으로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지도 했다는 장영희 교수.
그녀가 소개한 영문학 작품들 대부분은 내게는 생소 했지만 나중에 읽어 보고 싶을 만큼 사랑과 희망을 말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 작품들중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칼럼은 에밀리 디킨스 작품과 작가의 일생을 소개하는 구절이다.
사랑은-
생명 이전이고
죽음-
이후 이며-
천지창조의 시작이고
지구의 해석자 -p.78 중에서
이 시를 쓴 에밀리 디킨슨(1830~1886) 에 대하여 알고 싶다며 어느 청송 교도소의 재소자가 장영희 교수에서 편지를 보냈단다.
장교수는 영미 문학 전공자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미국의 어느 여류 시인을 청송 교도소 재소자가 언급했다는 것에 놀랐었다며 에밀리 디킨스의 일생을 간략히 소개한다.
1886년
5월 , 55년 5개월 5일을 살고 나서 죽을 때 까지 표면적으로는 평범했지만 내면적으로는 가장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시인
이였다고 소개한다.
에밀리 디킨슨은 일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흰색 드레스만 고집해 입었고 30세
이후는 죽을 때 까지 자기집 밖으로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생전에 몇 편의 시가 그녀 몰래 발표가 되긴 했지만 디킨슨 사후에 그녀의 책상 서랍 속에서 그녀가 썼던 2천여점이 넘는 시가 발견 되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디킨슨 시에는 제목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시의 첫 구절을 제목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디킨슨의 시중에서 가장 알려진 시.
장교수가 생전 자신의 홈페이지 에 적어
놓았다는 시.
나에게는 어디선가 본 듯한 시. 그러나 꼭 외우고 싶은 시 하나가 생겼다.
내가 만약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내가 만약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주고
기진맥진해서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를
다시 둥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나는 이 시에서 장교수의 삶과 디킨슨의 삶이 서로 오버랩이 되는 것 같았다.
디킨슨은 한평생 은둔 생활을 했지만 그녀가 쓴 시 처럼 헛되이 살지 않으려고 내면으로 치열한 삶의 태도를 보여줬다.
그녀가 은둔을 했다고 해서 그녀의 삶의 철학 마저 감춰지진 않았던 것이다.
장교수 또한 신체적으로는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녀는 스승이 되어 자신의 제자들을 지도했고 희망을 주었다.
디킨슨과 장교수가 겪었던 외부적 육체의 속박은 그녀들에게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보다 정신적인 자유와 내면으로 성찰하는 삶의 태도가 그녀들의 삶을 더욱 가치있게 빛나게 한 것이 아니였을까?
이외에도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 소개와 장교수가 가르쳤던 멋진 제자들 과의 일화도 좋았지만 그녀의 스승인 브루닉 신부님(1917~1980)과의
일화도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우리나라 70년대는 장애인은 대학에 입학 할 수가 없었단다.
이런 정책이 있었다는게 지금은 이해가 안 가지만 그때는 그랬단다.
그녀의 아버지 장왕록 교수가 혼자 대학들을
찾아 다니며 딸의 대학 입학 시험이라도 치루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모든 대학들이 거절했다고 한다. 그때의
절망감이 느껴졌다.
그런 부모의 절실한 마음이 결국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게 된다.
그후 찾아간 서강대 영문과 학과장이었던 브루닉 신부님은 "아니, 대학
시험은 머리로 치는 것이지 다리로 보는게 어디 있냐?" 면서 그녀의 대학 입학 시험을 승낙하게 된다.
열려있는 마음을 지닌 신부님의 감동적인 말씀이다.
만약 그 당시 브루닉 신부님께서 우리나라의
폐쇄적인 정책대로 처리 했다면 이후 장영희 교수는 '교수 장영희' 가 아닌 평생을 '장애인'이란 굴레를 벗어나지 못 했을 것이다.
아찔 하다. 한순간의 결정이 한 평생을 좌우 하게 된다는 게...
그렇게 그녀는 서강대 영문과에 진학을 하게
되고 후에 뉴욕 주립대 영문학 박사를 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엔 그녀는 자신을 받아준 서강대의 영문과 교수가 된다.
책의 마지막은 그녀가 척추암 진단을 받고 투병중에 쓴 칼럼인데 그냥 먹먹하다.
<뒤돌아
보면 내 인생에 이렇게 넘어지기를 수십번, 남보다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에 좀 더 자주 넘어졌고,
그래서 어쩌면 넘어지기전에 미리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 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p.334> 는 그녀의 고백에서 눈물이 맻힌다.
그녀는 책의 말미에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나가는가를 가르친다>라고
했단 윌리엄 포크너말을 인용한다.
문학의 힘이 결코 허상이 아님을 보여주려고 넘어진 가운데 또 다시 일어나려는 그녀의 몸짓에서 진정 그녀의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각오와 의지로 살아가고자 했던 작가가 믿었던 문학의 힘에 압도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내가 아마도 이 때문에 독후감을 쓰기가 어려웠던게 아닐까?
장영희 교수의 삶을 생각하니 중국의 작가 한명이 떠오른다.
중국의 현대 작가중에 '모엔'과
'위화'의 명성 보다는 못하지만 사철생(史铁生:1951~2010) 이란 작가가 있었다.
장영희(1952~2009)
교수와 비슷한 연령대로 같은 시간대에 비슷한 장애를 가지고 살다 갔던 작가이다.
사철생은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 때 뜻하지 않게 하반신 불수가 되어 버린다.
이때 부터 자신의 뜻하지 않은 운명을 원망하고 늘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는 늘 휠체어를 타고 자신의 집에서 가까운
지단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시절 그는 아무일도 없지만 늘 공원
구석 구석 돌며 관찰하고 사색 했다.
그의 대표작인 '나와 지단(地坛은 '디탄' 이라 발음, 지단은 청나라 시기 북경에서 토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을 말함. 참고로 천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을 말함 )(我与地坛) 에서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진심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또한 그와 같은 인내심과 사유의 방식으로
내가 왜 태어 났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몇 년을 생각한 후 마침내 깨달았다.
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 이것은 변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였던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주신 하나의 사실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생명을 주는 동시에 순리에 따른 그 결과까지도 보증한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은 급하게 바래서 되는 일이 아니였던 것이다. 죽음은 반드시 오게 되는 명절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 졌다. 눈앞의 모든 것이 다시는 두렵지 않게 되었다.....> 나와 지단
중에서.
그는 그에게 닥친 시련과 운명을 거부 하지
않고 그 운명에 따른 삶을 선택한 셈이다.
그도 역시 어쩌면 장영희 교수가 생전에
가졌던 문학의 힘을 믿었으리라 짐작 되어진다.
장영희 교수의 목발과 사철생의 휠체어.
그들에게 있어 목발과 휠체어는 평생 동안
장애를 상징하는 도구 였지만 동시에 장애를
극복하는 용기와 희망의 상징이 아니였을까?
문학은 삶의 교통 순경이다. 문학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진정 사람답게 제대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지킨다. - P43
애지,욕기생(爱之,欲其生)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다. - P71
애당초 글을 쓰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꼭 써야 한다면 무조건 써라. 재미없고 골치 아프고,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전혀 희망은 보이지 않고 남들은 다 온다는 그 ‘영감‘이라는 것이 오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기분이 좋든 나쁘든 책상에 가서 그 얼음같은 냉혹한 백지의 도전을 받아 들여라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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