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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세트 - 전10권 ㅣ 삼국지 (민음사)
나관중 지음, 이문열 엮음 / 민음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제목: 삼국지
지은이: 나관중 지음/ 이문열 평역
제 목:
불멸의 시간 동안 불려질 의(義)를
위한 노래
'마크
트웨인(1835~1910)' 이란 작가는
'고전은 누구나 잘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 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 비유에 들어 맞는 책중의 하나가
삼국지(三國志)가 아닌가 싶다.
삼국지 덕후들에게는 동의가 안되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삼국지는 너무나 잘 알지만 50이 다 되도록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는 책중의 하나였다.
나에게 삼국지는 살아오면서 인형극이나 만화 그리고 드라마, 영화
속의 장면들을 통해 머리통 속에 짜집기 된 이야기들이 전부였다.
그래서 책으로 굳이 읽지 않아도 삼국지의
거의 모든 내용을 대충 다 안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솔직히 책으로는 읽어볼 엄두가
안났다고 하는게 맞다.
왜냐면 책으로 읽기에는 삼국지는 진입 문턱이
너무나 높기 때문이다.
일단 요약본이 아닌 제대로 된 삼국지는
한 두권만으로 전 내용을 담아 내질 못한다.
이번에 읽은 <이문열
평역 삼국지>만 해도 10권이다.
제대로 편역,
번역한 다른 작가들의 책도 거의
10권 정도 수준이 기본이다.
내용이 방대하고 등장 인물도 일반적인 다른
소설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일단 주인공으로 치는 유비,
관우, 장비를 비롯해서 제갈량, 조조,
손권 같은 역사 속의 주인공 급 인물만 해도 수십명이나 된다.
게다가 매 에피소드 마다 등장하는 조연급
인물도 수십명이 훨씬 넘는다.
또한 잠깐 등장 하는 조연이라도 캐릭터의 서사 까지 있어서
정독하지 않으면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
아마도 이런 높은 진입장벽 때문에 제대로
된 삼국지를 읽어 보려는 엄두가 안났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일단 삼국지를 제대로
한번 정독을 하게 되면 삼국지 덕후로 거듭 나게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왜 삼국지 덕후들이 삼국지를 고정된 한가지
판본만 읽는게 아니라 여러 버젼으로 읽게 되는지 이해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이번에 어쩌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읽어 보니 '왜 이제서야 읽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삼국지의 가치가 새롭게 느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대부분 삼국지 하면 '삼국지'라고
부르지만 삼국지의 본토, 중국에서는 '삼국연의(三國演義)' 라고 부른다.
'삼국'
뒤에 '지' 를 빼고 '연의' 를 넣는 것이다.
원래 연의(演:
멀리 흐를 연 , 義:
옳을 의) 란
말은 역사적 사실을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는 소설이란 뜻으로 썼다고 한다.
내가 25년
전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어느날 TV를
보는데 어느 한 프로에서 사람 혼자 나와서 삼국지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야기꾼 한명이 부채 하나를 들고 나와서
삼국지의 각각 에피소드를 마치 구연동화 (口演童話) 하듯이 들려주는 것 이었다.
이야기꾼은 삼국지의 모든 내용을 혼자서
상황 연기와 말빨로 풀어내는 것 이었다.
그때 그걸 보면서 '와
대단하다. 저걸 어떻게 다 외워서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식으로 연의란 뜻은 '어려운
역사적 사실을 쉽게 풀어서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공연(?) 해주는 데서 유래 된 것' 이라
이해하면 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연의'
라는 말이 들어 가게 됨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항우와 유방의 천하
쟁탈전인 '초한지(楚漢志)' 는 왜 '초한연의' 라고 부르지 않는 것 일까?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니 삼국지와 초한지는
서로 같은 류의 전쟁 소설이지만 초한지는 삼국지에 비해 역사적 사실의 비중이 더 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마천(BC
145~86)이 사기(史記)에서 정사(正史)로 확실히 자세히 남겨 놨기 때문에 초한지를 소설적 허구라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결국 유방과 항우의 이야기는 '7푼
사실, 3푼 허구' 로 불리는 삼국지 보다 허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초한연의'
란 제목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중국에서는 삼국지 하면
'위나라 진수(233~297)'가 쓴 실제 역사 삼국지,
즉 정사(正史) 삼국지'를 가르키고 '나관중(1330~1400)'이
쓴 소설은 '삼국연의'라 구분하여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 이문열 삼국지 평전을 읽으면서 삼국연의를
쓴 작가 나관중이야 말로 진짜 천재라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이문열 작가가 평역이란 형식으로 잘 풀어냈고 1990년대 출간 이래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삼국지 판본들 중 가장 대중적으로 읽힌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내게는 약간의 아쉬운 점도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문열 작가가
평역을 하며 쓴 문장들은 그의 명성에 비해 너무 평범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예전에 읽었던 일본 소설가
'야마오카 소하치(1907~1978)' 가
쓴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대기인 <대망> 하고 자꾸 머리 속에서 비교가 되었다.
대망속의 일본 작가의 문장력에 감탄을 하며
필사하고 싶을 정도로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물론 이문열 작가는 원본인 한문을 그대로
번역해야 하는 점 때문에 자신의 문장력을 표현 하려면 분명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그런식으로 두 작가의 비교
자체가 당연히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평역은 원문 번역을 작가적 역량으로 재해석 하는 것이라 작가 명성에 맞는 필력으로 독자의 마음을 파고 들 수 있는
구절이 눈에 띄지 않다는 것에 살짝 아쉽긴 했다.
어쩌면 그만큼 원전을 뛰어 넘는 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나관중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 것
같다.
아무리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썼다고 해도
어떻게 이런 방대한 내용을 소설이란 형식에 다 담아 낼 수 있었을까 하는 감탄만 들었다.
소설속에는 충(忠)과
의(義)라는 대의명분과 전쟁를 이기기 위한 전술과 병법 그리고 그 과정중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온갖 권모술수가 등장한다.
인간 관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해관계가
얽히고 섥혀 있다.
이러한 내용을 어릴때 봐서는 이해가 안되는 것이 당연하다.
고전이 어렵다는게 고전을 읽을때 나이와
경험치에 따라 이해의 정도가 달라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국지 같은 고전을 제대로 이해
하려면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삼국지를 가장 간단히 시간적으로 정리한다면
한나라 말기 183년 부터 282년 까지 딱 100년의 역사를 담아낸 것이다.
전체 100년의
역사는 183년에 발생한 황건적의 난에서 부터 삼국지는 시작된다.
그로부터 50년의
시간안에 우리가 잘 아는 유비,조조,손권을 중심으로 소용돌이 처럼 휘몰아 치는 삼국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러다가 232년에
제갈공명이 6번째 북벌중에 오장원에서 큰 별이 되어 지고 만다.
여기에서 삼국지 내용의 90프로가
끝이 나버린다.
이후 50년의 시간을 나머지 10퍼센트
이야기로 채운다.
그 나머지 내용은 제갈량이 죽은 시점
232년에서 30년 후 서촉(西蜀)이 망하고(262년) 다시 2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북위(北魏)와
동오(東吳)가 282년에 망하면서 삼국지의 100년
이야기는 끝이 난다.
어찌 보면 뒤의
50년은 앞의 50년과 비교하면 허탈하단 생각 마저 든다.
삼국지의 무대가 되는 실제 역사속 시간(183년)은
지금으로 부터 약 1800년 전이다.
나관중이 소설로 쓴 시점(650년
경)은 실제 역사에서 이미 1200년이나
지난 시점이다.
1800년전의
역사적 사실과 그 이후 1200년
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민간의 설화가 나관중에 의해 첨부 삭제등의 과정을 거치며 연의가 완성이 된다.
결국 시간적 차이로 인해 실제 역사와 소설은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때문에 많은 삼국지 덕후들은
실제 역사 즉 진수의 정사와 나관중 소설의 차이를 비교 분석해 가며 읽는데 집착하게 되는 것같다.
이문열 평역에서도 차이가 있는 부분들에 대한
비교 설명이 되어 있다.
연의에서 말한 내용은 실제 역사에서는 있다,
없다 , 혹은 맞다, 틀리다로 비교 부연 설명을 한다.
바로 이 점이 바로 수많은 작가들이 삼국지를
번역하고 평역을 시도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 예로 유비의 촉한 정통론이란 시점에서는
한 황실의 정통을 잇는 유비는 좋은 편, 그에 반에 조조는 간웅으로 보는 편향된 시각이 대세 였었다.
그런데 현대 시대에는 시대의 가치관이 변하자
과거의 편협된 시각에서 벗어나 조조에 대한 재평가나 손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월이 지날 수록 수 많은 삼국지 덕후를 양산해 내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삼국지는 어쩌면 내용을 몰라서 읽는 책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더 큰 의미가 있는게 아닐까?
그 내용을 넘어선 어떤 가치,
즉 삼국지에 등장 하는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나 인간 관계
,처세술, 전략 같은 것을 넘어서는 더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내가 조심스레 살펴보니 삼국지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의(義)가
아닌가 싶다.
삼국지가
1800년 동안 끊임없이 재생산 하는 이유는 義에
대한 가치를 부여한 작품이란 것이다.
이에 대해 삼국지 보다 약
700년 앞선 2500년전에 나온 <논어>를 먼저 거론 해야 겠다.
논어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시 하는
사상은 '인(仁)과 의(義)' 사상 이다.
물론 충효예(忠孝禮)도
공자가 강조 했지만 그럼에도 유교의 핵심은 '인과
의'를 가장 중시한다. '인과 의' 안에 충효예가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공자가 말한 인은 수양(修養)을
통해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인(仁 어질 인)은 다분히 개인적으로 갈고 닦아야
하는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의(義 옳을
의)는 개인의 영역 보다 남들과의
관계에서 더 중요시 된다.
우리가 만약 의리를 지킨다 한다면 그것은
남과의 신의를 지킨다는 뜻이고 ,
의를 저버렸다는 것은 남을 배신
한다는 것을 뜻한다.
나의 義는
즉, 나의
옳음은 반드시 타인과의 관계에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는 관계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항상
옳은 것 끼리 뭉쳐서 집단을 형성 하는 경향이 있다.
각자의 옳음은 서로 비슷한 옳음끼리 뭉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비를 중심으로 모인 집단,
조조를 중심으로 모인 집단, 손권을
중심으로 모인 집단이 형성이 되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각자 옳음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국지의 의(義)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의리(義理)를 말한다는 것인가? 나는
그렇다고 본다.
내가 본 삼국지의 義(옳을
의)는 즉 '옳다는 가치' 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 였던 것이다.
유비도 조조도 손권도 모두가 각자가 옳다는
義를 가지고
천하를 다투었다.
아니 삼국지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옳음 , 즉
義를
지니며 등장했다.
누구는 도원결의로 의를 지켰고 누군가는
의를 저버리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
했다.
관우는 유비에 대한 의리 때문에 조조를
떠나기도 했고, 조조와의 의리 때문에 죽여야 할 조조를 살려 줬다.
제갈량은 삼고초려한 유비와의 의리를 지키고자
여섯 번이나 북벌을 추진 했다.
조조 또한 자기 나름의 옳음(義)을
가지고 쓰러져 가는 한(韓) 황실을
지키고자 했다.
이러한 관점으로 삼국지를 본다면 덕후들이 집착하는 삼국지 내용 중 어떠 부분은 사실이네, 지어낸 허구 였네 같은 비교 평가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의를 지키는가 지키지 못한 것인가의
시점으로 보면 좋은 놈, 나쁜 놈의 구분은 없어진다.
이는
각자의 신념에 따라 자신의 옳음 (義)을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삼국지는 義를
위한 노래와 다름 없다.
삼국지가 부르던 의(義)의
노래는 1800년전
과거에서 부터 현재를 거쳐 다시 미래에 까지 불려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지는 불멸의 작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演義연의,
멀리 흘러 가는 義 여!
인걸은 이미 가고 없지만,
시간만이 멀리서 부터 끝 모르게 흘러 간다.
도도히 시간속에 함께 흐르던 義는 노래가 되어 되돌아 흘려 부른다.
시공간을 하나로 잇는 演義 여!
과연 어떤 영웅들이 새로 태어나 다시 이어 부를까?
조조는 일생을 남에 대한 의심으로 고통 당했지만 자신을 향한 믿음에는 결코 흔들림이 없던 사나이 였다. - P84
유비를 힘으로 이기고 말 재간으로 속이고 학식으로 억누른 뒤에도 항상 그 상대로 하여금 정말로 지고 속고 밀린 것은 자기자신 이라는 느낌에 젖게 하는 어떤 것이 유비의 크고 환한 정신에서 우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 P129
정의일지라도 지나치게 독선에 흐르면 화가 따른다. - P230
대저 가장 못한 치자는 주식과 재물을 탐내고, 그 윗 길은 땅을 탐하며 가장 나은 치자는 사람을 탐한다고 한다. - P290
대저 영웅이란 간교함(奸)과 흉폭함(凶)과 꾀많음(計) 과 표독스러움(毒)을 다 품어야 한다던가
사고 팔았던 사람들의 사이는 거래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러나 주고 받았던 사람들의 사이는 그 주고 받음이 끝나도 이어지는 그 무엇이 있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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