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알 유희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3
헤르만 헤세 지음, 이영임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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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작품 <데미안>, <싯다르타>를 읽고 난후 느꼈던 감동으로 인해 선택한 책<유리알 유희>.

앞의 두 작품은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젊은 시절때 나는 읽지 못했었다.

인생의 중반이 넘어서야 알게된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통해 '내가 만약20대나 30대에 읽었다면 어쩌면 지금같은 감동을 못 느낄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독서를 하면 할수록 '삶의 경험치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그런데 이번에 읽게 된 유리알 유희는 헤르만 헤세의 앞의 작품들과는 결이 다르다.

처음 서문에서 부터 적잖이 당황했다.

책의 서문은 '유리알 유희의 역사를 일반인들을 위해 알기 쉽게 설명하는 글'이라고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냥 읽으면 이해가 안간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바흐, 모자르트, 대위법, 라이프니츠, 스콜라 철학, 베네딕스 수도회, 성 이그나티우스, 여씨 춘추, 우파니샤드 등, 철학과 종교, 인문학에 관련된 역사적 인물들의 언급과 여러 학문의 내용들이 서문에 인용된다.

게다가 작가가 창작을 위해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도 섞여있어 인물들이 실제인지, 가상인지 따지면서 읽으면 헷갈린다.

또한 유리알 유희에 대해 아주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속에 유리알 유희의 구체적인 형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서문을 읽으면서 내 자신이 난독증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종종 들었다.

그런데 다시 찬찬히 맥락만 살펴 보면 기실은 단순한 내용이었다.

 

결론은 유리알 유희는 '고도의 정신적인 유희라는 것' 이다.

유희(遊戱), 중국어로는 유희를 (游戏 youxi) '요우시' 라고 읽는데 뜻은 '게임','놀이' 로 해석된다.

즉 유리알로 하는 게임, 우리 말로는 '유리알 놀이' 라고 풀이 할수 있겠다.

그리고 '유리알'이란 말에서 나는 어릴때 '유리 구슬'로 놀이를 했었던 것이 생각 났는데, 아마도 그런 연상 때문인지 머리속에서 '구슬 놀이' 의 이미지로 이해 되어져 버렸다.

실제로 작품속에 등장하는 유리알 유희에 해당 하는 게임, 놀이는 우리 현시대 시점에서는 존재 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시점은 2400년경 미래의 시점에서 그보다 200년 과거에 존재했던 인물을 전기(傳記) 형식으로 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는 요즘 유행하는 이세계물(異世界物) 스러운 요소가 있다.)

 

전기의 인물은 당대 전설적인 '유리알 유희 명인' 에 관한 것이다.

즉 서문은 미래의 세계관에 존재하는 유리알 유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부터, 기독교 철학, 고전 음악과 인문학, 수학을 동원해 가며 설명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유리알 유희는 미래에 존재 하는 게임이며 현재 우리의 세계관에서 알고 있는 게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게임이나 놀이인것이다.

현대에 게임이라 일컫는 것은 컴퓨터 오락이나 가상 현실 게임과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적인 동양의 장기, 바둑, 서양의 체스나 보드 게임, 각종 카드 놀이가 있을것이다.

그런데 유리알 유희는 우리시대에 존재하는 게임의 틀로는 인식을 하면 안된다. 아니 인식 할수도 없다.

 

21세기 이후 미래의 인류가 내놓은 정신문명의 최상 단계의 게임인것이다.

형식은 음악, 사용 도구는 유리알, 내용은 세상에 존재 하는 모든 학문. 즉 수학, 철학, 언어학, 천문학, 종교학 과 최종적으로 명상으로 집대성한, 모든 인류의 지혜를 통섭화된 형태로 이루어진것이다.

한명, 둘, 셋이 할수도 있고 나중엔 대중이 함께 할수 있는 게임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게임이라고 해서 아무나 할수 있는게 아니다.

유리알 유희는 일반인이 접근하기엔 너무도 쉽지 않은 놀이이다.

앞에도 언급했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학문을 깊이 있게 체득해야 하고 명상의 경지까지 갖춰야 한다.

즉, 작품속 세계관에서 최고의 천재들을 모아 더불어 명상의 경지까지 오른 정신적으로 최고의 수준이 된 사람만 참여 할수 있는것이다.

 

대략 이렇게만 맥락을 이해하고 서문읽기를 끝내면 책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가 시작된다.

소설 유리알 유희는 유리알 명인(名人)이라 불렸던 <요제프 크네히트> 의 전기문이다.

작가가 미래의 시대, 2200년경에 존재했던 전설적인 유리알 명인의 전기를 2400년에 쓴것이라 읽는 시점이나 보는 관점에서 글을 보는 독자는 혼동이 올수도 있겠다.

더구나 중세 유럽의 귀족스러운 분위기의 학교, 고풍의 수도원, 속세를 벗어난 죽림등의 배경으로 인해 작품속에 이세계물의 요소가 녹아있어 과연 미래인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소설의 줄거리는 의외로 정말 단순하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주인공의 성장기이며 또 다른 관점에서는 구도기(求道記)와 같다.

처음 서두에서 유리알 유희가 뭔지 장황한 설명에 읽는이의 진을 다 빼놓는다.

그리고 정작 작품이야기는 쉽게 읽힌다. 작가가 독자를 쥐고 흔들고 있다.

(달리 거장이 아니다. 작가가 명인이다.)

 

전기 형식을 띈 소설은 정말 담담하게 서술된다.

크네히트의 성장기로 보면 카스텔리엔에 들어가게 되는 과정과, 카스텔리엔에서 어떻게 정신적으로 성장하는지, 그리고 성장중에 만나는 인물들에 대해 시간순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리고 구도기적인 측면으로 보면 주인공이 대가나 명인들로 불리는 선지식들을 만나면서 점점 깨닫게 되는 과정이 순차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보통 소설에서 느끼는 엄청 스릴이 넘치거나 흥미진진하진 않다.

어찌보면 밋밋하게 진행된다. 그러면서도 여러 복선이 계속 깔리며 진행된다.

그러다가 전기의 마지막 부분, 소설의 마지막에 최고의 강렬함과 충격을 남겨놓는다.

그리고 곧 바로 크네히트가 남겼던 <유작들>로 이어진다.

여러 편의 시와 산문들, 요제프 크네히트가 마치 정말로 존재했던 인물인양 명인이 남긴 글들이 첨부되어 있다.

특히 책의 마지막 부분, 크네히트가 연구 시절에 작성한 이력서 3편은 따로 별도의 단편 소설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력서라고 해서 우리가 취업할때 내는 그런 이력서가 아니다.)

이 이력서 세편을 읽으면서 현시대의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가 떠올랐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이 책의 이력서의 3편과 결이 상당히 닮았다.)

 

작품을 읽고 난후에야 헤르만 헤세가 전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느낄수 있었다.

작가의 메세지는 작품속에 크게 세부분에서 언급한것 같다.

먼저 크네히트가 번역한 서문의 첫 문단, <알베르 투스 2세, 정신형성에 관한 논고> 에 나온다.

두번째는 크네히트가 카스탈리엔을 떠나기전 교육청에 제출한 장문의 편지글에 있다.

마지막 세번째로 3편의 이력서, <기우사, 고해사, 인도사> 를 통해 작가의 메세지를 확인해 볼수 있었다.

 '서문, 장문의 글, 이력서' 만 따로 다시 보면 전체 맥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실 정작 '유리알 유희'는 복잡해 보이지만 전하고자 하는 작가의 메세지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인것이다.

 

헤세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과연 무엇이었나?

후에 보니 변증법적 구도로 정리가 되어졌다.

먼저, 정()은 잡문의 시대를 논함, 반()은 정신으로의 극복, 합()은 세상속으로 , 이렇게 변증법적인 헤세의 사유체계를 엿볼수 있었다.

 

먼저 잡문(雜文)의 시대를 논하다.()

잡문의 시대란 무엇인가?

<그날그날의 모든 사건에 대해서 급하게 성의 없이 쓴 글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고, 이 모든 정보를 끌어모아서 가려내고 기사화하는 일은 급속도로 무책임하게 대량 생산되는 상품과 완전히 같은 길을 밝고 있었다. 1권 p.26>

<한편 강연 또한 성행했는데....중략... 당시 강연가나 정신의 도둑들은 너 나 할것 없이 논문을 쓰는것 말고도 엄청난 수의 강연을 했다.... 중략... 맹렬한 경쟁을 벌이면서 상상할수 없을 만큼 행해졌다. 1권 p.28>

<조각나고 의미를 상실해 버린 교양 가치나 단편적 지식의 홍수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은 이미 언어의 가공할 만한 가치 상실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1권p.29>

<우리가 보기엔 때로 '전쟁 시대' 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보통은 '잡문 시대' 라고 부르는 정신적 침체와 권력 투쟁의 주요 특징입니다. 2권 p.50>

 

이거 완전히 지금 우리 시대가 아닌가?

유투브의 수많은 동영상, 인터넷 매체의 헤아릴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 더구나 자극적이고 진실치 못한 정보의 오류들 까지. 현시대가 곧 잡문의 시대인것이다.

작품속의 시점으로 보면 과거의 시대, 잡문의 시대를 말한것인데 실제 소설이 쓰여진 1940년대로 보면 미래를 예측 한것이나 다름 없는것이 된다.

헤세는 정확히 예측했다.

인류 역사상 르네상스는 '인본주의'라 부르며 이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인간 중심, 이성 중심'인 세상이 되었다.

그동안 '신 중심, 종교 중심' 의 시대로부터 자유를 얻은 인류는 '인간 중심'은 산업화와 더불어 이기주의로 변질되고 '이성 중심'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물질 만능주의 폐단을 야기하게 되었다.

그러한 문제점은 개인, 집단 이기주의로 세계 곳곳의 정치와 종교, 사회 계층에서 양극화 현상을 심화 시키고 결국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두번째로 이러한 잡문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가는 방안을 정신 세계에서 찾고자 했다.()

소설에서는 유리알 유희로 설명하고있다.

그렇다면 왜 유리알 유희여야만 하는가?

 

<그 시대의 정신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도처에 그들의 새로운 사고 내용의 표현수단을 구하려는 뜨거운 열망이 살아있었다. 사람들은 철학을 동경 했고, 종합을 동경 했으며, 자신의 분과에만 틀어 박히는 종래의 행복을 불충분한 것으로 여겼다. 전문 분과의 한계를 깨고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학자들이 있었다...중략... 많은 유서 깊은 아카데미와 비밀결사가, 특히 아주 유서 깊은 동방 순례자들의 결사가 유희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1권 p.45~47>

 

<유희는 유희자에게 완전한 것을 찾아가는 어떤 상징적인 형식을, 숭고한 연금술을,모든 형상이나 다양성을 넘어서 내면의 고유한 정신 세계로, 즉 신에게 다가가는 것을 의미 했던것이다. 1권 p.50>

 

<‘비상시’에 사람들은 종종 지식인들이 정치적이 되기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후기 잡문시대에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정신의 정치화 또는 군사화에 대한 요구도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중략….

2곱하기 2가 무엇인지 권력자가 결정하도록 내버려 주는 자는 그 이상으로 비겁자이며 배신자입니다. 진리에 대한 지조, 지적 성실성, 정신의 법칙과 방법에 대한 충실성을 다른 이익을 위해 희생시키는 일은, 설혹 그것이 조국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 해도 배신 입니다.  2권 P. 60~61>

 

작금(昨今)의 시대, 즉 잡문의 시대엔 지식인들이 이미 정치화가 되어버리지 않았나?

현재 매체에 나오는 소위 지식인들은 이미 정치화를 넘어서 권력이 되어 버렸다.

더 나아가 군사화까지 된다면 제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에 대해 작가는 그러한 지식인들에 대하여 진리에 대한 비겁자, 배신자라고 유리알 명인의 입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진리는 정치가 아니다.

그러므로 잡문의 시대 반작용으로 사람들은 정신 문명을 추구 하게 되는것이었다.

우리의 지금 현시대는 과도기가 아닌가 싶다.

물질 문명의 폐단에 대한 반성과 자성의 목소리가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나오고 있지 않는가?

그런한 바램이 소설에서는 유리알 유희로 완성되게 된다.

카스탈리엔이란 수도원과도 같은 교육기관을 통해 인류는 영재중의 영재를 선별하여 교육을 시킨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순수 학문들, 지혜들을 연구하고 통섭한후 다시 또 명상을 통해 완성되는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어찌보면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언급했던 철인이 다스리는 국가, 혹은 플라톤이 세웠던 아카데미와 같은 역할을 하는것인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듯하다.

유리알 유희는 단순히 학문 지식 연구만을 강조 하지 않는다. 지식 보다 한단계 위, 지고한 정신의 결정체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희를 신성과도 같은 개념으로 까지 발전 시켰다.

 

유리알은 한마디로 구슬이다.

옛부터 동양에서는 불로장생이라 하여 신선이 되길 갈망 했었다.

그때 빚어지는 영단(靈丹)은 구슬과 같은 환()이라고 한다. 지금도 한약재중에 구슬처럼 빚어서 환으로 만든 약들이 있다.  한약재를 농축 집적하여 구슬 처럼 둥글게 만든것이다.

그래서 둥근것은 또한 진리를 함축것이 되며 세상의 모든 학문을 응축한 결정체를 뜻한다.

게다가 유리의 영롱한 모습은 명상이라는 신비스러운 정신 세계한다.

그래서 유리알은 정신세계의 최고의 경지를 응축한 결정체의 상징이라고 볼수 있다.

그런데 유리는 쉽게 깨질수 있다. 정신세계의 총화도 쉽게 깨질수도 있는 단점이 있는것이다.

작가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메세지는 이런 단점을 극복하는 단계까지 제시하기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잡문의 시대를 거쳐 유리알 유희로 완성되는 정신의 시대를 거친후 반드시 다음 단계가 오리라 예견했다. ()

잡문의 시대를 극복한 정신의 시대도 영원할수 없는것이다.

정신의 시대에서 유리알 유희도 영원히 지속 될수 없으며 카스탈리엔이란 수도원도 결국엔 끝이 오리라고 내다 봤다.

그 시대의 마지막에는 잡문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군사적 혁명에 영향을 미칠수 있다고 보았다.

모든 현상은 고정되지 않는다. 항상 변한다. 그게 곧 진리다.

 

<카스텔리안의 존속의 문제가 될때는 유리알 유희가 가장 먼저 없어지게 될것 입니다…중략…유리알 유희는 우리가 지은 건축물의 최첨단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가장 위태로운 부위입니다. 2P.63>

 

<아무리 아름다운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역사가 되고 지상의 한 현상이 되는 즉시 무상한것이 되기 마련입니다. 2권 P.64>

 

<우리는 저 속세에 있는 학교에 겸손하면서도 막중한 책임을 지고 봉사하는일을 우리의 과제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명예로운 부분으로 인식하고 그 일을 완수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2권 P. 65>

 

결국 크네히트는 유리알 명인이란 최고의 직책과 자신의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카스텔리안을 떠나고자 한다.

지고한 정신의 수준도 결국 깨지기 쉬운것이고 모든것은 변하고 영원하지 않는 진리를 생각한다면 그 또한 덧없다는 것이다.

정신 세계의 최고의 경지라고 해도 역사가 있고 현실이 있는한 세상과 동떨어진 소수인들만 누릴수 있는 카스텔리안이란 곳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현실의 세계로,  대중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헤세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것이 아닐까?

 

선불교에서는 십우도(十牛圖) 로 깨달음의 단계를 소를 찾는 비유를 통해 묘사한 그림이 있다.

소는 마음의 본성품, 불성을 말하고, 그것을 찾는 목동(동자승)은 수행자를 상징한다.

목동이 잃어버린 소를 찾는 심우(尋牛)로 시작하여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는 견적(見跡), 마침내 소를 보는 견우, 그리고 소를 얻게 되는 득우, 소를 기르는 목우, 소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잊고 사람만 남는 망우존인(忘牛存人), 소와 사람 둘다 잊는 인우구망(人牛俱忘), 본래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반본환원(返本還源), 시중에 들어가 중생을 돕는 입전수수(入廛垂手) 단계로 총 10개의 그림으로 묘사를  했다.

선불교의 관점으로 본다면 크네히트가 유리알 유희의 명인으로 깨달음을 얻은후 카스탈리안을 떠나 세속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십우도의 마지막 단계의 입전수수의 경지에 해당된다고 비교 할수 있겠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불교의 대의와도 부합되는것이다.

결론적으로 헤세의 이러한 메세지는 크네히트의 3편의 이력서를 보면 보다 쉽게 이해가 된다.

<소위 말하는 이력서로, 원하는 과거의 어느 시대로 자신을 옮겨 놓는 가상의 자선전이다. 1권  p.148>

 

3편의 이력서에서 특히 마지막 인도사는 우리의 삼국시대 설화 '조신의 꿈'을 연상케하고 중국의 설화인 '한단지몽'(邯鄲之夢)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우리가 현실에서 진짜라고 철썩 같이 믿는게 사실은 '다 공()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현실을 도피하지 않는다.

 

작품속에서 작가는 현시대에 무차별적 드러나는 서양 문명의 폐단을 예측했다.

그래서 그에 따른 대안으로 정신 문명의 승화, 동서양의 모든 정신세계의 조화라고 보았다.

그리고 또한 그러한 깨달음은 세상과 동떨어진 일부의 전유물이 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정신적인 경지는 모든 인류에게로 전파가 되어야 하고 인류 전체가 영적으로 한단계 올라서야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다시 한번 서문의 첫장을 보면 헤세의 뜻을 보다 분명히 읽을수 있다.

 

<즉 있음을 증명할 수도 없고, 있을것 같지도 않은 어떤 것을 경건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어느 정도 실제하는 것 처럼 다룸으로써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생겨날 수 있는 가능성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들 만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도 없지만 또 그만큼 절실히 사람들 눈 앞에 그려 보여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도 없다. 1권 p.12  알베르트 2세의 서문 구절.>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를 도라고 할수 없고, 이름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의 구절이 떠오르지 않는가?

있긴 있지만 증명할수 없고 이름 지어질수 없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할 그것, 그것을 도라고 할수도 뭐라 할수도 없는 그것, 헤세는 절실히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것이 불교의 공()이요, 도가의 도(), 기독교의 복음(福音)과 다르지 않는것이다.

헤세의 유리알 유희는 작가가 현대와 미래의 인류에게 전하는21세기의 간절한 메세지라 생각된다.

 

독서를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을 둘러싼 알 껍질에 금이 간다.

독서는 알 껍데기를 깨고 나와서 세상 밖을 비상(飛翔)하기 위한 몸부림이어야 한다.

 

 

 

 

 

참고로 작품속의 서문을 쓴 '알베르 투스 2세'는 가상인물이며, 역사적 실제 인물 알베르 투스는 '신학대전'을 완성한 스콜라 철학의 대부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승 알베르 투스에게서 '철학자의 돌' 이라고 불리는 연금술사가 사용하는 돌을 물려 받았다고 한다. '철학자의 돌'은 파울로 코엘류 '연금술사'에 언급된다.

 

동방 순례자들에게 바친다.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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