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주의자 생각의나무 우리소설 4
마르시아스 심(심상대)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예술가가 진실로 아름다움을 성취할 만큼 높은 경지에 이르면, 그 아름다움을 사람들 감각에 맞도록 하는 상징물 자체에는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게 된다. 그의 정신은 이미 상징물이 아닌 실체 자체를 즐기게 되는 법이니까.
- 나사니엘 호손,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인가?  여기 그 아름다움에 대해 곰곰이 고민한 이가 있다. 그가 말하기를 미(美)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과 그 본능으로 빚어지는 욕구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며, 종국에 그것은 모호함이라는 벽을 짚어보고서야 그 막다른 골목을 되돌아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301쪽) <심미주의자>에서 작가는 그러한 '모호한 가치'들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고백하고 있는 것만 같다. 다시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는 '모호함'을 향해 그는 왜 달려갔던 것일까?


  사티로스의 하나인 마르시아스는 아폴론과의 연주 시합 끝에 지게 되자, 거꾸로 매달려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지는 형벌을 받게 된다. 마르시아스는 "그런 참혹한 형벌을 아름다움 자체로 받아들이고" (73쪽), 참다운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신에게 도전하는 것이자 그러한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73~74쪽)  이렇듯 아름다운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를 추구하기 위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신에게 도전할 수 있는 오만(hybirs)이 필요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은 인간의 삶 속에 들어와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욕정을 보여주고 지독한 시기와 질투에도 휩쌓인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그러한 신들의 자리를 탐할 수 없다. 즉, 오만을 부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가질 수 없는 불멸의 세계가 신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신들의 분노는 '죽음'을 부른다. 요컨대 인간은 '죽음'으로써 유한한 인간의 삶을 증명하는 것이다.  마르시아스는 예술을 통해 불멸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고, 그러한 오만의 대가는 오직 예술가만이 맛볼 수 있는 고난이었던 것이다. 
 

<심미주의자>에는 붉은 피와 꽃 그리고 죽음과 쾌락이 흘러넘친다. 작가는 삶과 죽음의 공존을 허용하고 말해질 수 없는 본능에 당당하게 답한다. 다시 말해 <심미주의자>에는 "동백 꽃잎과 같은 붉은 핏덩이"가 만발하고, 탱탱한 알갱이와 같은 욕정이 터지고, 관능의 불꽃이 낼름거린다. 그러나 읽는 이에게 원초적인 희열과 광기를 시종일관 관음케 하지는 못한다. 시차를 두고 쓴 단편들을 모아둔 탓일 수도 있고, 여전히 고민 중이었던 그의 치기어린 정념의 소산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의 탄생은 축복이 아닐까. 종국에는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는 그 길을 그가 오만하게 계속 걸어갈 수 있기를, 오직 진정한 예술가만이 가질 수 있는 형극의 고통이 그와 영원히 함께 하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