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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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정 광고의 문구가 아니더라도 이 시대는 “쇼”가 이미 진행되고 있다. 아우라(Aura)를 상실한 시대에 요구되는 비판적 사고능력은 더 이상 원본의 의미를 되찾을 수 없는 무수한 복제품의 시대 속에서 그들의 '복제쇼'를 통해 유쾌하게 퍼진다. 복제품들은 진실과 그 진실만이 가질 수 있었던 권력과 감시를 조롱하면서 그들의 쇼를 시작하는 것이다. 김언수는 독자들에게 그 쇼를 보여줄 것임을 초장부터 천연덕스럽게 깔아놓았다. 화산재에 묻혀 마지막 인사를 할 틈도 없이 사라져간 상피에르의 주민들 속에서 유일한 생존자로 남아 그 곳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루저 실바리스가 되어!
 

  “돌로 변한 도시에 다시 도로가 나고, 그 위로 우유를 가득 실은 마차가 지나가는” (p.22) 상피에르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그들이 잃어버린 것, 그 이야기는 무엇일까?   「바벨의 시계」에서 우주는 “내가 각자의 특이성에 맞춰 시게를 줬는데 왜 아무도 그걸 사용하지”(p.200) 않느냐고 묻는다. 이 시대의 우리들은 “개별성이 아니라 대표성”(p.56)의 잣대로 사람을 대하고 살아간다.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존중”(p.57)이 사라진 시대에 김언수는 "성공한 은유로"(p.366) 우리가 잃어버렸던 삶의 한 자락을 보여주고 있었다. 심토머(symptomer)들의 이야기는 세상에 이런 일이나 해외 토픽용으로 등장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우리였던 것이다.


 이젠 천적조차 없이 먹이사슬의 최상층에 자리 잡은 자본주의는 그의 피라미드에서 먹이사슬의 순환을 막는 이들을 가차 없이 도태시킨다. 여기에 김언수는 이 정의를 무수히 복제 변형시킨다. 그들은 도태되어 제거되어야 할 인간들이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우리라고. <캐비닛>에 등장하는 다양한 심토머들  - 기계의 부품이 되어 끝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나사만을 조이던 자신만이 살아남은 샴쌍둥이(p.257), 자본주의가 선물한 최고의 유산이 불안이라 했던 토포러(p.72), 물건과 인간이 서로 닮아 있는 미래 사회를 암시하는 피노키오(p. 108), 인간에게서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여인을 위해 스스로 고양이가 되고 싶어했던 남자(p.130), 탄약과 수류탄보다 아니 문서 캐비닛보다도 구출 순위에 밀려난 화자의 군대시절(p. 222), 자신을 도시가 쏟아낸 배설물같다고 여기던 중년의 여성(p.287) - 불행이 부비트랩처럼 터지는 이 사회 속에서 김언수가 그려낸 심토머들은 적당히 직장생활을 즐기고 적당히 거짓 웃음을 지어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의 심토머들은 오로지 숭고한 목표인 돈을 위해 웃음을 그려내는 이 시대의 자화상들이 아닌 자본주의 폭력적인 이분법에 의해 분류된 사회 부적응자 혹은 덤핑된 가격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김언수는 우리의 삶 속에 ‘우리’라고 지칭한 울타리 자체가 얼마나 협소한 공간으로 그어졌는지 은유로서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IMF시절 자살한 어느 중소기업의 사장에 대한 뉴스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무감한 눈길로 고개를 저을 때, 김언수는 그 현장 속에서 토포러나 타임스키퍼가 되어 이 사회에서 퇴출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우리가 없었다. 적당히 이 사회의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잃어버린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이. 할인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고, 수없이 복제되는 나는 죽지만 정작 이 사회 속에 갇힌 나를 죽일 수 없는 이 시, 대, 에 갇힌 우리의 모습이.

   

  김언수는 분명 성공한 쇼 단장이다. 독자들이 침대 밑을 살펴보도록 만든 김언수는 무엇이 진실과 거짓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읽는 이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물론 후반부에서 반복되는 심토머들의 이야기로 진행상의 긴장감이 느려지거나, 권박사를 둘러싼 갈등구조들이 전체적으로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다소 동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언수의 <캐비닛>은 생동감 있는 큰 흡인력을 보여줬고, 그의 “성공한 은유”는 충분히 갈채를 받을 만하다.a


밑줄 긋기

 

22세기가 되면 모든 인간은 물건을 닮아 있을 겁니다.
아니라면 모든 물건이 인간을 닮아 있겠지요.   -p.119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요.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죠.
그래서 나처럼 살지도 못하고 당신처럼 살지도 못하죠.
나처럼도 아니고 당신처럼도 아닌.
그토록 아무것도 아니게.
그토록 어쩡쩡하게.
나는 그렇게 살고 있어요.   -p.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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