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보낸 한 철 민음사 세계시인선 3
랭보 지음, 김현 옮김 / 민음사 / 1974년 5월
평점 :
절판


 

 무심코 혹은 우연히 잃어버렸던 시간들과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한 잔의 홍차와 마들렌이 과거의 기억으로 되돌아가게 하듯, 그 시간들은 나의 '무의지적인 기억'들을 이끌어낸다. 하여 그 기억 속의 언어에 빠져들 때, 나는 "랭보가 좋아" 라고 곧잘 말하던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한때 그토록 사로잡혔던 목소리를 통해, 나는 "태양과 섞인 바다"를 갈망하며 죽어간 한 소년의 뜨거운 심장을 움켜쥐게 되었다.



  랭보(A. Rimbaud)는 그의 시를 읽는 이들을 끊임없이 달려가게 만든다. 어디로? “회개의 도취경 속에서 웃는 아름다운 입술”(16쪽)로?  “여러 세계들과 천사들이 가로지르는 침묵”(18쪽) 속으로?  어쩌면 그는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온갖 술이 흐르는 축제”(20쪽) 속으로 우리를 몰고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구역질 나는 손수건으로 랭보의 입을 틀어 막아버렸던 세계 속에서 그가 원했던 것은 단 하나, 자유였다. 자본과 인간의 욕망이 들끓는 이 세계 속에서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도 자유다. 그럼, "바람구두"를 신고 자연 속으로 달려갔던 랭보를 통해 자유를 마셔보자. 랭보와 자유를 위하여 건배!
  
 누군가는 인간의 역사가 자유를 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했던 자유에는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전제되었지만, 랭보에게 있어 자유는 1870년 보불전쟁 이후 부패와 악취가 들끓는 세계 속에서 프랑스인들이 잃어버렸던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랭보는 우리에게도 잃어버렸던 그 목소리를 들려준다. 악덕으로 뒤덮인 세계 속에서 그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목소리를 굶주림과 취한 꿈 그리고 삼키는 순간 내장이 타들어가는 지독한 독을 통해 되돌려준다. 랭보는 우리에게 묻는다. 언어가 없는 세계의 꿈을 꾸게 되었는가? 고갱이 찾아들어 갔던 타히티의 자유를 볼 수 있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영광의 오솔길"을 향해 앞으로 갓!
 
  랭보의 전기가 담긴 <랭보 지옥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삐에르 쁘띠피스(P. Petitfils)는 17살 랭보의 혁명적인 선언을 들려준다. 푀비우스 아폴로의 신비로운 신탁의 결정판인 ‘운명’이 랭보에게 시인이 되라고 했다는 것. 랭보에게 시인이 된다는 것은 “나무가 바이올린으로 깨어나고, 구리가 나팔로 깨어나”듯, 타인의 육체 속에서 깨어나는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후 시인이 된 그가 재발견 한 것은 영원이었다. 그 영원 속에서 랭보는 "고독한 밤과 불타는 낮에 개의치"(106쪽) 않고 감금당한 광기에 취한다. 
 
 이제 우리는 랭보를 따라 영원의 세계로 달려간다. “재발견 되었다. 무엇이? 영원이. 그것은 태양과 섞인 바다이다.” (106쪽) 너무 낡아 관념적이게 된 외투에 손을 집어넣은 채, 앞으로만 달려갔던 랭보가 보았던 영원의 세계로 우리는 그의 시를 통해 달려간다. 하여, 우리가 잃어버렸던 그 뜨거운 기억 속에서 랭보와 함께 자유와 영원의 춤을 추어보자. “굶주림, 목마름, 외침, 춤, 춤, 춤, 춤!” (44쪽)

 

 감각 전문 p. 10

<감각>
 
여름 야청빛 저녁이면 들길을 가리라,
밀잎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며.
하여 몽상가의 발밑으로 그 신선함 느끼리.
바람은 저절로 내 맨머리를 씻겨주겠지.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
그러나 한없는 사랑은 내 넋속에 피어오르리니,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계집애 데려가듯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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