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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내리던 저녁 - 중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스져춘 외 지음, 이욱연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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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근대적인 삶과 근대적인 삶 또는 전통 문화와 근대 문명의 사이에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있었고, 그들이 만들어 낸 가난과 모던보이 그리고 혁명이 1930년대 거리를 활보한다. 일제하에 이상과 박태원, 김유정, 정지용, 백석, 채만식 등의 문인들이 당시 조선의 거리를 재현했다면,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이하 <<저녁>>)을 통해 루쉰, 위따푸, 천충원, 빠진, 마오뚠, 스져춘, 리오셔, 띵링이 당시 중국의 거리를 옮겨온다. 신해혁명(1911년)과 신문화운동 그리고 이어지던 혁명과 변화 속에서 1930년대 중국 근대 문학의 절정기를 대표하는 8명의 작가를 통해, 우리는  "근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숙고하게 된다. 1930년대에 온 몸으로 삶의 근거지가 뿌리채 흔들리는 그 충격과 낯섦을 받아냈던 이들, 그 예민한 감수성으로 그 시대의 흐름을 포착했던 이들에게 '근대'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1.     

 <<저녁>>에서 첫 번째 작품으로 수록된 루신의 <아Q정전>은 그 시대의 절망을 보여준다.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승리했다고 착각한 아Q의 '정신승리법'과 허울 뿐이었던 혁명하에 죽임을 당하는 아Q를 통해, 루쉰은 기만적인 혁명의 결과와 그 시대의 모순을 통찰하고 있었다. 절망적인 당시 중국의 현실은 샹하이사변(1932)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마오뚠의 <린 씨네 가게>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 경제가 무너져가던 시기에, 소상인 린 씨는 밀려오는 일본제품과 고리대금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에 허덕이며, 제 살을 파먹는 대염가 세일을 단행하지만, 상인회의 횡포 속에 결국 도산하고 만다. 서구와 일본의 침략 속에 부패한 관리들로 인해 <린 씨네 가게>와 같은 소상인으로 대변되는 하층민들의 삶은 결국 붕괴되는 것이다.

라오셔의 <초승달>은 산업자본의 논리 속에서 생계를 저당잡힌 또다른 하층민의 삶이 모녀의 비극으로 재현되고 있다.  여덟 살에 이미 전당포에 물건 잡히는 것을 배워온 <초승달>의 화자는 어머니와 같은 매춘부의 길을 걷게 되고, 생명을 연장시키는(모녀가 입고 먹어야 하는) 돈을 벌수록 화자는 죽어간다. "돈은 무정하다"(270면) 돈이 지배되는 근대적인 삶 속에서, 도시의 하층 프롤레타리아에게 가난은 숙명과 같이 대물림이 되는 것이다.

2. 

  일본인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타락>의 화자에게 찾아왔던 성적 열망, 위따푸의 <타락>은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려 억눌릴 수밖에 없는 소년의 감성이 돋보인다. 끊임없이 조국의 부강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타락>의 화자는, 당시 역사적인 상황을 비관하고 그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청년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타락>의 화자가 이처럼 혼란스러움을 겪고 있을 때, 이미 사회주의로 대변되는 근대의식을 받아들였던 이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띵링의 <밤>에는 스무 가구밖에 되지 않는 산골 마을에 28명의 공산당원이 모여살고 있다. <밤>의 주인공은 현재 공산당원의 지도원이 되었지만, 그의 아내와는 더욱 소원해졌고, 아이를 낳지 못한 아내를 '물적토대' 구실을 못한다고 마음 속으로 비난하며, 가부장적인 구시대적 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산다. 그리고 그 스스로 혁명사업을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지 모른다.

"어떻게 농촌을 잘 만들 수 있을까? 이곳에는 혁명사업을 하는 사람이 없다. 그는 어떤가?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공부를 한 적도 없다. 글자도 모른다. 아들조차도 없다. 하지만 지금 그는 향 지도위원이고, 내일 회의가 지닌 의의에 대해 보고를 해야 했다."(287면)
지도원이 된 이후로 돌보지 못한 그의 밭은 잡초가 우거진 황무지가 되었고, 그는 엄마소를 빼닮은 송아지가 즐겁게 뛰어노는 환상까지 보지만 그의 소는 다음 날이 밝도록 새끼를 낳지 못한다. 이들에게 진정으로 풍요로운 근대는 언제 찾아오는 것일까?  

근대 즉, 모던(modern)이 피해갔던 혹은 모던을 거부했던 이들의 삶은 천충원의 <샤오샤오> 통해 그려진다. <샤오샤오>는 12살의 나이에 이제 젖을 땐 아이한테 시집가는 샤오샤오의 삶을 통해 전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마을을 지나다니던 "여학생"이라는 존재로, 근대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가치관을 엿보게 된 샤오샤오는 마을 인부 중에 한 명인 "바둑이"이와 함께 도시의 삶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바둑이"가 홀로 떠나버린 후, 샤오샤오는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다시 관례대로 기존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들에게 다가웠던 근대는 이처럼 한때 꿈꾸고 싶은 미래였지만(<샤오샤오>),  허울 뿐이었고(<아Q정전>), 삶의 터전이 붕괴되는 시기였으며(<린 씨네 가게>, <초승달>), 비극적인 역사 속에 여전히 구시대적 의식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이자(<타락>), 어떻게 다음 날을 맞이해야 할지(<밤>) 모른 채 밤을 새하얗게 지새울 수밖에 없는 암울한 시기였다.
 

3.  

  그러나 이 시기를 살아갔던 세대가 이 시대의 어둠과 혼란을 극복한다면, 이후의 세대들은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게 된다.  빠진의 <노예의 마음>에는 노예의 후손인 펑과 지주의 후손인 '나'가 나온다. 펑은 대물림되는 노예의 혈통을 끊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희생으로 맞바꾼 돈으로 학교를 다니지만, 훗날에 혁명당원이 되었고 결국 총살을 당하게 된다. "자기 행복을 모두 버려서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고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160면) '노예의 마음'을 펑은 처절하게 끊고 싶어했다. 펑의 죽음으로 그 노력은 좌절된 것이었을까? 필자는 오히려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주인(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노예의 마음"이라고 표현한 펑이, 끊임없이 그 "노예의 마음"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자유인이 되었다고 본다. 
  헤겔(G. H. F. Hegel )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노예와 주인의 관계가 어떻게 전도되는지 보여준다. 끊임없이 자기의식을 발전시키는 노예와 노예에게 모든 삶을 의지하는 주인의 관계는 마치 부끄러움을 곧 잊어버리고 32명의 노예를 거느린 삶에 만족하는 '나'와 펑의 관계를 보는 것 같다. 즉, 펑의 죽음은 단순히 노예의 마음을 떨쳐버리기 위한 펑의 반항적인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의식 투쟁을 해온 수많은 젊은이들의 시련을 대변한 것이다. 그들의 시련과 희생으로 인해, 오늘날 그들의 후손은 자유인이 된 게 아니었을까?  루쉰의 두 번째 단편 <고향>에도 역시 그러한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화자는 20년 만에 그리던 고향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화자를 "나리"라 부르는 룬투로 인해 개혁되지 못한 의식의 벽을 절감한다. 그러나 화자는(루쉰은) 희망이란 "땅 위의 길과 같다"(75면)고 말한다. 우리와는 반드시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하는 뒷세대들에 향해 던지는, 그의 전언이 깊이 와 닿는 단편이다.

 

4.
 
  지금의 우리에게 "근대"는 무엇이었을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모던'은 결코 충격적이거나 낯설지 않다. 마천루가 즐비한 거리 아래, 날마다 신제품이 출시되고,  최신 유행의 패션과 상품이 펼쳐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근대"가 과연 "무거움"이 될 수 있을까? <<저녁>>에 실린 9편의 작품들은 그 최초의 혼란과 어둠으로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의 탄식과 절망이 담겨있다. (표제작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처럼 서정성이 깃든 모던 시대의 풍경도 있다.) 이들의 글을 필두로, 중국에서 '근대'가 어떤 의미였는지, 새로운 세상을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고,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갔는지 살펴보는 것도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에게는 귀중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물론 1930년대 한국 문학과 비교해 본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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