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원 - 꿈꿀수록 쓰라린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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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이란 소설은 상당히 개연적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는 좋은 것도 많으나, 그렇지 못한 것도 제법 많다. 어떤 사건에 내가 관련될 수 있으나, 만일 가족이 관여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딜레마에 부딪힌다. 소설 <염원>은 바로 그런 개연적 요소를 잘 보여준 작품이다. 우리는 TV나 인터넷으로 통해 범죄나 각종 사건에 대한 뉴스를 접한다. 뉴스를 접하면서 그 일들이 나하고 전혀 상관없이 무관한 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남에게 일어난 불행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기만적 태도가 우리를 지배한다.     


남의 비극은 분명 그들에겐 아픈 일이나, 그래도 나에게 닥친 일은 아니다. 그저 미디어라는 정보에 노출되어 우리의 시간 속에 흘러가는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어떤 범죄에 휘말리거나 사고에 얽매인 사람들은 모두 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을까? 이런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는데 말이죠.”라고 말이다. 물론 사건사고 피해 당사자가 본인이라면 어떻게든 혼자 감내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피해 당사자가 가족이고, 그중에서 자녀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염원>을 보면서 뜬금없이 세월호 사고에서 희생된 어린 학생들이 생각났다. <염원>에서 다다시군은 고등학생이고, 세월호 학생들도 고등학생이다. 제법 키는 성장하고 의지는 강하나 어른보다 몸과 마음이 작은 친구들이다. 하지만 꿈과 희망은 어른보다 더 웅장하고 거대하다. 그런 친구들이 세상에 발을 들이지 못한 채 이대로 꺾이고 만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지만 다다시와 세월호의 아이들은 다른 차이점이 있었다. 세월호 희생자는 완벽한 피해자이나, 소설 <염원>에서 다다시는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소설을 읽으면서 가즈토와 기요미, 그리고 미야비라는 세 명의 가족이 큰 아들 다다시의 실종에서 겪던 심적 변화와 주변의 환경 등은 분명 그 가족에게 큰 시련으로 다가온다. 당연한 일이나 사실 그 일들은 피해 당사자에게 당연한 일들이 아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개인이나, 범죄에 따른 책임문제는 그 가족과 사회 일원에게 같이 분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다시의 실종과 살인사건이 보도되면서 그렇게 화목하면서도 화목하지 않았던 평범한 가정은 파탄에 이른다.     


아들이 살인을 저지르면 그 자체가 삶의 파괴로 이어지고, 아들이 살인을 당하면 그 여파로 삶이 무너진다. 하지만 2가지 갈래에서 우리는 어디에 마음을 기대어할까? 아니면 주변 환경과 조건은 어떻게 만들어져 갈까? 작품에서 다다시가 살아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그 아이는 살인범이 되는 것이고, 만일 죽게 되면 살인 피해자가 되나 다다시는 남을 헤치는 사람이 아니게 된다. 가족이 만일 그런 일에 처해지면 참으로 곤란하게 될 것이다. 다다시가 정말 사람을 죽인 것도 판명되지 않았는데, 실종자가 곧 살해용의 후보자란 점에서 세간의 차가움은 피할 수 없었다.     


집 현관에 계란을 던지고, 명패에 페인트를 칠한다. 사업과 관련하여 거래처가 끊기고, 주변에 같이 사업하던 사람들의 인맥까지 사라진다. 생계와 친구까지 없어진다. 인간관계 모두가 파탄 난다. 다다시란 인물은 전형적인 남자 고등학생 같다. 친구를 좋아하고, 친구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손해 봐도 참아주는 유형이다. 그래서 부모님의 간섭에도 그는 자신의 길을 간다. 또한 부모님의 기대감을 버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절제하는 모습도 나온다. 삶의 구원에서 절망의 순간은 이렇게도 희비가 엇갈린다.     


살인범이라도 세상 앞으로 같이 살아갈 건지, 아니면 죽음으로 통해 결백을 주장하던지 말이다. 물론 아들이 살아있으면 좋겠지만, 아들의 결백 역시 해명되는 것도 중요하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선택하기 어렵다. 만일 아들이 죽지 않았다면 가즈토의 인생은 사회적 매장당했을 것이고, 미야비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으며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 기요미는 가즈토와 미야비만큼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가사 주부로 지내며 교정 일을 맡고 하고, 그 일은 회사와 미야비만의 비공개적으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업가 가즈토, 학생 미야비, 구원이란 형태는 최악의 상황으로 돌아왔다. 사업도 가족도 외면당한 가즈토에게 다다시의 죽음은 3 사람의 새 인생을 시작하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이 원동력은 좋다고 해야 할까? 나쁘다고 해야 할까? 소설 <염원>은 스토리 적으로 결론은 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과정을 중시하는 소설이다. 결과론으로 모든 것을 성과로 보는 세상에서 과정의 성찰은 우리 삶에 필요한 요소이다. 내 생각에게 가즈토 가족을 괴롭히는 요소에서 주변 이웃의 집단 괴롭힘과 인간관계 단절보다는 언론이란 생각이 들었다.     


집 전화와 핸드폰이 방송국과 신문사 기자 발신으로 가득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생활을 염탐한다. 하다못해 2층 딸의 방 안에까지 카메라가 주시하고 있다. 완벽한 감시, 그리고 말꼬리를 잡아 악의적인 보도로 나간다. 개를 데리고 밖에 산책하는 모습을 방송으로 내보내 죄책감이 없는 부모로 묘사한다. 특종에 눈이 멀어 가족들을 마치 구경거리 조롱 대상으로 만든 언론을 보면서 가즈토 가족들은 더 힘든 시기를 보낸다. 그뿐만 아니라 범죄와의 문제는 단순히 조롱과 비난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징역이 얼마나 나올지도 모르고, 상대방에 대한 배상책임도 어디까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남은 것은 오명과 어둠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구원이 다다시의 죽음이고, 그 죽음을 바라야 하는 것이 진정한 <염원>일지 아니면 살아오는 게 <염원>일지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성적으로 보면 다다시의 죽음이 많은 것들을 지켜준다. 하지만 우리는 머리보단 마음 안에 숨겨진 무의식 내지 감정에 더 많이 마음이 간다. 다다시처럼 가족이 살인사건에 얽혀 들어가면 우리는 분명 직접적으로 살인과 무관하고 별 탈 없이 살아 돌아오면 좋겠지만, 현실이 그게 아니라면 어떤 것을 택하고 만족해야 하는가? 어떤 선택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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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1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31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9-12-31 2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애니비평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만화애니비평 2020-01-01 08:57   좋아요 1 | URL
언제 범띠가 오는 새해가 올까요?

어흥!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켄 로치 감독 작품 <보리 밭을 흔드는 바람>을 누군가에게 소개 받은 후, 나는 한국에서 개봉되는 켄 로치 감독의 작품을 보고자 했다. 그래서 <, 다니엘 블레이크>를 관람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미안해요, 리키>를 관람하게 되었다. 켄 로치 감독이 상당히 시대정신이 강하고, 진보성향이고,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를 자주 영화로 표현하는 분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관람한 <미안해요, 리키><, 다니엘 블레이크>보다 더 현실적이고 비참한 모습을 영상으로 담고 있었다.

 

<미안해요, 리키>의 영어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 미안한 사람이 결코 리키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 영어제목이 영화마지막 부분에 등장할 때 마음이 너무 아팠다. “Sorry We Missed You”는 리키가 일하던 회사에서 고객에게 메모로 전달할 때 사용하는 종이에 적혀진 문구였다. “당신을 놓쳐서 미안해요.” 우리는 항상 일을 할 때 누군가에게 미안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이다. 가끔 나도 택배를 주문할 때 너무 늦지 않을 경우 대부분 택배를 그냥 그대로 기다린다. 가끔 쿠팡 총알배송이 온다고 해도 너무 재촉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에서 택배의 세계는 전쟁 그 자체였다.

 

어느 특정택배가 주문되면 배송주문 1시간 만에 고객에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리키가 새로 맡은 노선의 예전 담당자가 3번 늦은 것만으로 영업사장에게 큰 지적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그가 맡은 트럭이 자의가 아닌 누군가 의해 파손되고, 그 시점도 새벽인 점에서 불가항력적인 요소가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책임은 회사가 관리하는 게 아니다. 모두 택배를 해야 하는 사장 아닌 사장들이 처리해야할 문제였다.

 

<미안해요, 리키>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의 모순이 가득하다. 가령 회사가 있다면 오너가 있고, 관리자가 있을 것이다. 회사의 오너는 주주였고, 그들은 경영은 하지 않으나 멀레이라는 경영관리자에게 일을 맡긴다. 멀레이는 택배기사들의 불만을 들어도 그냥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오로지 회사의 규정만 강조한다. 분명 업무만 잘 하면 제법 돈을 벌 수 있으나, 택배기사가 처한 현실적 문제는 받아주지 않는다. 업무공간과 사적 공간 즉 가정환경은 별개의 세계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발상은 가정환경에도 큰 문제를 일으킨다.

 

가족이 아프거나 자녀가 학업에 문제가 있어도 회사는 오로지 업무만 강조한다. 심지어 택배기사가 다쳐도 대체기사를 구하지 않으면 과태료와 벌점만 부과한다. 그 어떤 문제가 발생되면 모든 책임을 택배기사에게 부과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면 운영진은 무엇을 하는가? 그냥 작은 기계를 주고 배송안내만 한다. 2분만 정체되면 바로 알림이 온다. 택배기사는 사장이란 개인사업자로 시작하나, 모든 책임을 면책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택배기사의 수당은 올라가겠지만, 그 이상으로 회사 주주에게 돌아가는 금액도 크다. 택배기사를 강제로 일하게 만들어 다른 회사와 경쟁하여 승리하는 체계, 이것이 현실이다. 일을 한만큼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일이 정리된 만큼 가져가는 것이다. 노동기준이 8시간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성과품을 내어야 수당이 지급된다. 리키의 아내인 터너는 마음이 아주 곱고 다정한 여성이다. 더 해 줄 필요도 없는 업무내용이나 자신이 맡은 노인들의 신변에 문제가 있으면 토요일이라도 가주는 사람이다.

 

돈인가? 인간성인가? 늙은 한 할머니가 몸조차 가누지 못해 화장실도 못 간다. 소변을 누지 못해 소파 위에 앉아 그대로 옷이 젖고 말았다. 그런데 할머니의 가족은 그녀를 돌보기는커녕 그녀의 집이 얼마나 팔릴 수 있을까? 하는 이익에만 집착한다. 인간의 정도 결국 돈 앞에서 무너지는 슬픈 현실이다. 영화는 인간이 기계보다 못한 현실에 살아가며, 여기에서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영화이다. 리키가 갱에게 폭행당해 병원의 치료가 필요해도 결국 그는 빚을 갚기 위해 그리고 회사에서 퇴출되지 않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나간다. 회사는 그에게 안정을 취하기보단 손해 보는 부분을 메워주기를 바란다.

 

이 장면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대장 내 세균성 질환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병원 응급실에 누워 피검사와 CT검사를 할 때 상당히 지쳐있었다. 회사에 출근하기 힘들게 되어 나를 대신하여 부서장에게 연락 해달라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부서장은 내가 아픈 게 걱정하기보단 그냥 병이 뭔지 물어보고 더 이상 통화가 귀찮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고 한다. 퇴원 후, 사실 안정이 필요하지만, 단지 내가 퇴근한다는 것만으로 나와 별 다른 이야기 없이 사무실 다른 사람에게 퇴원 다음날 출근한다는 식으로 전했다.

 

다음날 출근해서 톡이 와서 몸이 괜찮은가? 라고 묻기보단 출근여부만 물었다. 사람이 어떤 일이 발생하면 그 사람의 안위부터 묻는 게 상식인지 아니면 회사 또는 부서의 일이 먼저인지는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후자를 선택하는 사람이라면 밑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곳에서 일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다른 회사에서 현재보다 더 좋은 대우와 환경이 된다면 옮기면 되기 때문이다. 뒤에 나는 여러 마찰로 인해 회사를 옮겼다.

 

영화에서 리키는 나처럼 옮길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건축회사에 근무했으나, 회사가 망했고, 이후 각종 건설현장에 갔지만, 상사와의 갈등, 극한 작업환경, 기타 문제 등으로 인해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성실하게 일하고 싶기에 선택한 개인사업자, 하지만 그것은 신기루에 불과한 허상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나와 저녁 늦은 시간까지 일해도 삶은 나아지는 게 없다. 아내 애비는 식사조차 거른다. 이른 불안한 환경에 아이들조차 힘들어한다. 딸은 아직 어리지만 어른 못지않게 생각이 깊다. 하지만 때로는 아이같이 행동한다. 부모가 옆에 없으니 항상 불안해하고 잠조차 잘 이루지 못한다.

 

아들은 공부도 잘하고 영리한 학생이었으나, 아버지의 현실을 보고 낙담한다. 그리고 비행을 저지르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다. 그가 길가에 스프레이로 남기는 그림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누군가 외치고 있으나 서로 그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대화가 되지 않고 공허한 메아리만 외치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낸다. 아들의 친구들을 보면 리키와 같이 힘든 상황에 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들의 여자 친구 하나는 가정불화로 집을 떠나 친구의 친구 집에 떠난다. 다른 친구는 흑인으로 등장한다.

 

리키가 택배를 배송할 때 택배를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 여러모로 넉넉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 우리가 처해진 현실은 시스템의 문제로 인해 발생되나, 막상 그 문제에서 트러블로 마주치는 존재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가진 것도 없고, 항상 외면된 존재, 길가에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개의 다리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온다. 개가 아픈데도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한 채 데리고 다니는 것이다. 리키와 리키가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은 늘 빈곤과 시간이랑 싸웠다. 먹고 살아야하기에 그 모든 것을 버려야 했던 리키, 그렇게도 다치고 운전대를 잡은 리키, 온 가족이 모두 말려도 나가는 리키의 모습에서 현실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 느꼈다.

 

영화 시나리오에서 리키에게 갈등의 대상이 되는 것은 크게 2가지 축이다. 하나는 회사의 운영방침, 다른 하나는 아들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어떻게든 리키가 해결했지만, 아들은 그러지 못했다. 서로 엇갈리고, 크게 다친 리키를 보고 아들과 화해하는 것으로 새롭게 끝날 것이란 모습은 너무 기만적이었다. 아들과 화해하고, 딸의 행동을 보고 다시 옛날처럼 되고 싶어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여전히 생계는 이어가야 하고, 누군가 그 부분을 책임져야 하는 게 우리의 현재 모습이다.

 

내일을 배달되고, 희망을 배달할 수 있는 누구인가? 리키의 마지막은 모습은 참으로 암담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암담하다고만 말할 수 없다. 그는 그 암담한 상황에서 눌러앉는 게 아니라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 내기 위해 운전대를 잡는다. 우리의 내일과 희망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100분이지만 순식간에 흘러갔다.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어서 그럴까? 심각한 분위기에 종종 등장하는 축구 만담이 기인하였기 때문일까? 영화 <미안해요, 리키>는 우리 삶을 그대로 비추어준다. 물론 100% 우리 삶이라고 볼 수 없지만, 예술은 삶을 굴절로 통해 본다고 하듯이, <미안해요, 리키>에서 보여준 예술성은 인생은 비극으로 보여도 그래도 희망이 작게나마 있다고 말해주는 희극적 요소를 살짝 곁들여 주며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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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인생 38년! 물론 아버지의 고향은 다산선생의 슬픔이 담긴 강진 도암면이고, 그곳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태어나시고, 증조부가 터전을 잡았다. 하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영도이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결혼 전까지 영도에서 자랐다. 영도인생 38년, 그동안 영도에서 살면서 느낀 점은 영도는 가난한 동네이다. 피난민들이 많이 모이고, 전남과 제주 각 지방의 가난한 시골사람들이 정착하던 곳이다. 물론 내가 살던 영도 동삼동 일원은 어촌이었다.


지금이야 매립과 개발로 많이 발전했으나 초등학교 시절 통통배가 다니고, 갯벌이 있었고 숲으로 덮힌 곳이 더 많은 곳이다. 가난한 분들이 많아 도개공 아파트도 많고, 태풍불면 휘청거리며, 하수처리장도 생긴지도 얼마 되지 않은 곳이다.


도로도 좁았고 병원도 많이 없었으며, 아버지란 불리는 이들은 육지보단 바다에 나가 거친 삶을 살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북에서 월남하여 거제를 거쳐 평생 영도에서 살고 머물렀다. 나는 가지 않으나 신선성당에서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살았고, 나는 가톨릭신자는 아니나 부산가톨릭대학교를 졸업했다!


아니 부산천주교 교구의 수장이 손삼석 신부님이다. 내가 대학시절 총장님이시다! 기억이 나는 것이 있다. 문재인 국회의원 후보시절 나는 사상캠프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그리고 당선 후 우리형이 KTX를 타고 가는 와중에 문재인 국회위원을 우연히 만났다. 같이 사진찍다가 우리형이 영도에서 자라고 학교를 다녔다고 하니 문재인 국회위원이 매우 반가워했다. 


그리고 우리형님은 한국해양대학교를 나왔다. 해사대학 출신이 아니나, 문재인 대통령 형제분이 해사대 출신이다! 우리 작은아버지도 역시 해사대 출신이다. 삼춘과 문재인 대통령 동생이 해양대 다닐 때 같은 해사대 선후배였다! 직접적으로 관계는 없지만 많은 접점이 스치는 것 같았다. 이번에 강한옥 여사님이 영면할 때 깜짝 놀랐다. 형이 갑자기 톡이 와서 강한옥 여사님의 소천소식을 나에게 보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부산에 왔다. 중구에 있는 병원이라 하여 가톨릭신자이니 분명 메리놀병원이라 여겼다. 어머니와 전화하며 오늘 KBS노래교실에 갔는데 KBS 옆에 남천성당이 있다는 것을 이제 제대로 알았다. 거기에 문재인 대통령이 오셨고, 강한옥 여사님의 마지막 육신이 있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나는 가톨릭신자는 아니나, 초기 한국천주교회사 쪽으로 보통 가톨릭신자보다 많이 공부한 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 아닌가? 정약용 선생의 바로 위의 형님이신 정약종선생과 정약종 선생의 따님 2분은 천주교에서 위인이 아닌가? 정약용 선생의 이종사촌형님인 윤지충은 한국 최초 가톨릭순교자가 아닌가?


정약용선생의 친구와 그리고 친구 아들은 사위가 되었다. 정약용 선생의 아버지의 친구가 정약용 선생 친구 아버지였다. 그분은 당시 내 할아버지의 친척이었다. 지금도 다산 선생의 사위의 후손과 우리 집안문장과의 왕래는 계속되고 있다(파시조 세사를 시골에서 계속 지내고 있으니).  


어째든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나, 이런 우연의 산물 혹은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연결고리가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버지에 의해 삶의 가치를 많이 받았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진짜 못먹고 못살고 못배워 무시당하고 억압당한 하층민의 원한을 고스란히 나에게 넘겨주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자식은 부모라는 존재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려운가보다. 


운명이란 서적을 봤을 때, 강한옥 여사님의 이야기를 보았고, 종종 뉴스에서 영도에서 그저 소탈한 영도할머니로 살아가는 강한옥 여사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를 넘어 증조할머니, 외증조할머니인 강한옥 여사님, 나이가 90이 넘어도 자식에게 손자들에게 슬픈 것은 슬프게 다가온다. 영도츨신 사람으로서 영도에서 할머니로 살다 세상을 떠나신 강한옥 여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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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리커버 특별판)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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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았다. 언더그라운더들의 인생. 우리가 모르는 세상, 르포르타주적인 영화
따듯한 눈으로 차가운 이 세상에서 살만하다고 말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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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고>란 영화감상평을 보니 이런 글이 있었다. 천우희씨가 혼자 거의 진행하고 다 끝낸 것 같다고 말이다. 솔직히 천우희씨가 이 영화의 모든 키를 잡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천우희씨가 그 정도의 역량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버티고>보다는 <한공주>라는 영화를 보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다. 거기서의 천우희씨의 연기는 영화 그 자체를 응집하고 있는 여고생 캐릭터로 나온다. 내가 천우희씨의 영화팬이 된 이유도 바로 <한공주>에서 보여준 그녀의 연기력이다. 천우희씨의 연기 특징은 깊은 아픔과 슬픔을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 응축하여 그 부분이 결국 폭발할 때의 비극성이다.

 

<한공주>란 영화를 보면 밀양여학생 성폭행 사전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주인공 한공주는 낯선 학교에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오나, 결국 미디어에 의해 노출되고, 새로 전학 간 친구와 학급 학생들도 외면한다.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최악의 선택은 자살이었다. 수영을 배운 이유가 물에 빠져도 50m 정도 헤엄치면 살 수 있는데, 그녀는 결국 수영하지 못한 채 수면위에 둥둥 부유한 채 맥없이 흘러간다. <한공주>란 영화를 보면서 상당히 무겁고 답답한 영상미에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영화는 허구의 이야기지만, 사실의 이야기를 재편집하여 새로운 하나의 현실성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한공주> 특성상 집단성폭행을 당한 여학생은 그렇게 흔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니고(절대 흔해서는 안 될 이야기다), 매우 독특한 상황에 놓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관객은 받아들일 수 있어도 보편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렇다면 <버티고>는 어떤가? 어떤 극단적 상황이라도 영화에서는 개연적 상황을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우연히 마주친 게 단순히 발전하는 게 아니라 우연의 산물이 연속적 조우로 인해 큰 결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버티고> 주인공 서영은 매우 흔하고 흔한 인물이다. 지방에서 태어나 수도권에 왔으나,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 사원이고, 재계약이 다가오지만, 다시 재고용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앞선다. 게다가 사내연애 대상인 진수는 서영을 사랑하기 보단 그저 자신의 욕정에 채우는 편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만일 은밀한 성행위와 혹은 돌출적 성행위를 하려면, 선팅이 잘 된 차 안에서 하거나 혹은 행사가 끝난 후 따로 모텔에 가면 될 사항이다. 하지만 진수는 서영과의 성행위를 회사 휴게실에서 하고, 또는 산행장소 인근 건물에서 한다.

 

단순히 자신의 쾌락적 상황에 만족하기 위해서이다. 산행의 경우 화장실에서 남성 동성애자들의 애정행각을 보고 충동적으로 성행위를 한다. 그리고 진수는 자신의 직업적 위치에 대한 역할과 성공을 위해 일에 몰두하고, 서영은 자신의 삶의 중심이 아니라 그저 주변조건처럼 대한다. 서영이 진수에게 매달리는 이유는 그가 능력도 있고 인물도 좋지만, 유일하게 회사에서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 직장 내 계약직은 항상 불안하고, 입사동기인 예담은 다음 재계약에서 누락된다.

 

서영이 집에 오면, 집이란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어머니의 참견이 시작되는 장소이다. 회사에서는 업무가 있어 간섭하지 못하나, 집에 오면 괜히 전화해서 하소연을 풀거나 또는 용돈이 필요한 것을 간접적으로 강조한다. 새벽에 강아지가 태어난 이유로 전화할 이유는 없다. 돈을 빨리 붙이지 않아 그녀를 귀찮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남편과 이혼 후 다른 남자와 재혼하여 살아도 잘 지내지 못해 수도권에서 자취하는 딸의 집까지 찾아온다. 서영은 직장과 집 모두 자신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사람이 어딘가 편안하게 있지 못하면 매우 불안하다.

 



<버티고>는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있어도 그 장소가 자신에게 불편하거나 또는 외부인처럼 만드는 감옥 같은 곳이다. 게다가 서영은 어릴 적 아버지에 맞은 후유증으로 한쪽 귀가 불편하다. 고막이 손상을 입어 청각능력에 큰 문제점으로 다가왔고, 게다가 귀에 있는 진정신경의 불안함은 구토와 어지러움, 공간적 장애까지 일으킨다. 재계약 문제로 보청기착용도 망설이는 서영의 모습에서 비정규직, 장애, 고독, 독신여성 등 다양한 아픔이 겹친다. 그녀가 버틸 수 있는 이유가 현실에 없다. 자신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가 오늘 하루도 몹시 흔들렸지만 잘 견뎌냈다. 거리는 튼튼하니 이제 안심이다라는 것은 자기변명에 불과하다.

 

그런 서영의 삶에 들어온 자가 관우이다. 그의 집은 가난한 편이고, 늙은 아버지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불편하다. 로프에 몸은 의지하여 창문을 닦아내는 모습은 위태로우며, 집에 와서 강아지를 안고 여성 유튜버 방송을 열심히 본다. 서영의 상실감은 버틸 수 있을 곳이 없다면, 관우는 버틸 수 있는 공간이 있지만, 누군가를 버티게 하지 못했다는 미련이 있는 남자이다. 그가 왜 서영에게 이끌렸을까? 창문을 닦는데 자치 위험한 상황을 보자 서영은 매우 놀란다. 그저 창문을 닦는 노동자에게 어느 누가 관심을 보이는가? 자신에게 그런 관심을 갖은 서영에게 관우는 호기심을 느끼고, 우연히 회의실에서 마주친 그들은 서로에게 눈을 뗄 수 없다.

 

특히 서영은 단지 로프 하나로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는 관우의 모습을 보고 놀란다. 자신은 안에 있으면서 의지할 곳이 없다고 봤으나, 관우는 의지할 수 없을 것 같은데도 로프에 관우 그 자체를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대비적이다. 관우는 창문닦이 아르바이트 이외에 서점 입구에서 피에로 분장을 하고 난간위에 앉아있다. 난간 위에서 서영의 모습을 지켜보고, 창문을 닦으면서 서영을 바라본다. 관우는 왜 서영을 그렇게 지켜보고 싶은 것일까?



 

관우는 하사시절 우연히 휴가를 나온다. 누나가 생일이라 누나가 자취하는 집에 가서 케이크를 들고 간다. 누나가 인터넷 방송을 하려고 한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누나는 죽어 납골당에 모셔져있다. 누나 왜 죽었는지 모르나, 적어도 그녀가 병으로 죽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여자 유튜버 방송을 보는 관우를 보면서, 옆에 와이프가 관우의 누나가 죽은 것은 악플러의 악플이 아닌가 라는 말을 했다. 생각하니 관우가 보던 유튜버 방송에 여자BJ가 덧글창에 이상한 말들이 나온 것을 확인하는 장면이 있다. 납골당에 관우가 아버지를 모시고 가고, 아버지가 누나의 납골함을 보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슬퍼한다.

 

관우가 유튜버 방송을 볼 때 안고 있던 강아지는 사실 누나가 키우던 강아지였다. 누나가 이루지 못한 그 꿈은 다른 유튜버로 통해 일시적으로 위로하고, 누나의 강아지를 만지면서 누나와의 기억을 공유한다. 그런 그에게 서영이 나타난 것이다. 위태로운 서영, 그런 모습을 보면서 관우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을 새롭게 채울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서점서 책을 나두고 간 서영의 책을 찾아주거나, 눈물 흘린 서영을 보며 손수건을 책상에 나눈다. 서영이 술에 심하게 취해 자신을 거의 포기한 상황에 처하자 어떤 낯선 남자가 서영에게 손대려 할 때, 관우는 서영을 지켜준다.

 

그가 서영을 지켜주고 싶은 이유는 남성이 여성에 대한 사랑도 있지만, 서영에 무너지는 모습에 자신이 그저 가만히 주저앉기 싫었던 것이다. 서영은 버틸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나, 관우는 자신이 누군가가 버티게 해줄 수 있는 게 자신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단순히 로맨스적인 요소보단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감정의 영역이다. 작은 존재로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따듯한 눈으로 연민의 정을 건네는 것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서영이 위기에 처해질 때도 그렇다. 이차장은 CCTV에서 자신이 한 행동으로 사직을 당한다. 단순히 서영만 성행위를 했다면 사내연애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지만, 남자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서영은 무엇이 되겠는가? 이미 사내에 소문이 퍼져 서영은 아무도 자신을 상대해주지 않은 채 고립된다. 그런 서영에게 관우는 창문에 힘내요라는 세 글자를 적는다. 서영은 그것을 보자말자 눈물이 넘치는 슬픔과 기쁨이 교차한다. 천우희씨의 연기는 여기서 빛을 발한다. 매우 우울한 모습, 홀로 괴로워하는 모습, 열정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에서 <버티고>의 명장면이 드러난다. “힘내요라는 글자는 서영에게 매우 드라마틱한 요소이다. 창문을 닦던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한다. 그 사망자가 관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한 서영이 힘내요라는 글을 보는 순간 자신이 혼자가 아니란 것을 깨닫는다.

 

게다가 자신을 재계약하는 조건으로 성폭행하려던 권차장의 위험에 빠지자 관우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관우가 자신을 계속 지켜본 것을 알고 있던 서영은 관우에게 찾아가 관우가 일하고 있는 세상을 보려 한다. 해가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빌딩 안에 갇혀 발버둥을 치는 것보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빌딩 밖에서 로프를 매달린 채 세상을 보는 게 더 행복해 하던 서영이다. 서영은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도 모진 말을 했다. 서영은 자살을 하려고 했으나, 안전로프에 의해 공중에 매달려 있었고, 관우는 그런 서영을 끌어올리며, “괜찮아요. 당신은 절대 떨어지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서영은 관우에게 기습적으로 키스를 하며, “이제는, 올라가고 싶다.”라고 독백한다. 그녀가 관우가 일하는 빌딩의 창문은 죽음을 택하려 했다. 내려가고 싶은 것은 결국 땅에 떨어져 죽은 청소노동자처럼 죽음을 선택한 것이고, 키스를 하고 올라가고 싶은 것은 다시 살기 위해 삶의 목적성을 찾을 것이다. 영화는 보는 내내 서영의 관점에서 카메라가 돌아간다. 어지럽고, 낯설고, 외롭고, 내몰린 그녀에게 석양이 지는 저녁노을은 아직까지 이 힘든 세상이라도 살아갈 수 있는 동아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서영이 같은 사람이 아니지만, 그래도 서영이 처한 현실에 대해 크게 공감할 수 있다. 우리가 버틸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없다면 어떤가? 외로움과 슬픔, 괴로움으로 하루하루를 견디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자신을 알아주고 봐주며,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아직까지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이 처한 불행은 자신의 문제일 수 있지만, 나의 의지와 다르게 닥치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자신에게 있어도 남의 문제로 돌리는 경우도 많다. “나 때문이야!” 또는 너 때문이야!”에 매몰되기보다 때로는 괜찮아요?”라고 물어보며 작은 위로를 전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우리의 삶은 작은 위로조차 받을 수 없는 각박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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