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로치 감독 작품 <보리 밭을 흔드는 바람>을 누군가에게 소개 받은 후, 나는 한국에서 개봉되는 켄 로치 감독의 작품을 보고자 했다. 그래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관람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미안해요, 리키>를 관람하게 되었다. 켄 로치 감독이 상당히 시대정신이 강하고, 진보성향이고,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를 자주 영화로 표현하는 분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관람한 <미안해요, 리키>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보다 더 현실적이고 비참한 모습을 영상으로 담고 있었다.
<미안해요, 리키>의 영어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 미안한 사람이 결코 리키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 영어제목이 영화마지막 부분에 등장할 때 마음이 너무 아팠다. “Sorry We Missed You”는 리키가 일하던 회사에서 고객에게 메모로 전달할 때 사용하는 종이에 적혀진 문구였다. “당신을 놓쳐서 미안해요.” 우리는 항상 일을 할 때 누군가에게 미안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이다. 가끔 나도 택배를 주문할 때 너무 늦지 않을 경우 대부분 택배를 그냥 그대로 기다린다. 가끔 쿠팡 총알배송이 온다고 해도 너무 재촉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에서 택배의 세계는 전쟁 그 자체였다.
어느 특정택배가 주문되면 배송주문 1시간 만에 고객에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리키가 새로 맡은 노선의 예전 담당자가 3번 늦은 것만으로 영업사장에게 큰 지적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그가 맡은 트럭이 자의가 아닌 누군가 의해 파손되고, 그 시점도 새벽인 점에서 불가항력적인 요소가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책임은 회사가 관리하는 게 아니다. 모두 택배를 해야 하는 사장 아닌 사장들이 처리해야할 문제였다.
<미안해요, 리키>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의 모순이 가득하다. 가령 회사가 있다면 오너가 있고, 관리자가 있을 것이다. 회사의 오너는 주주였고, 그들은 경영은 하지 않으나 멀레이라는 경영관리자에게 일을 맡긴다. 멀레이는 택배기사들의 불만을 들어도 그냥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오로지 회사의 규정만 강조한다. 분명 업무만 잘 하면 제법 돈을 벌 수 있으나, 택배기사가 처한 현실적 문제는 받아주지 않는다. 업무공간과 사적 공간 즉 가정환경은 별개의 세계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발상은 가정환경에도 큰 문제를 일으킨다.
가족이 아프거나 자녀가 학업에 문제가 있어도 회사는 오로지 업무만 강조한다. 심지어 택배기사가 다쳐도 대체기사를 구하지 않으면 과태료와 벌점만 부과한다. 그 어떤 문제가 발생되면 모든 책임을 택배기사에게 부과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면 운영진은 무엇을 하는가? 그냥 작은 기계를 주고 배송안내만 한다. 2분만 정체되면 바로 알림이 온다. 택배기사는 사장이란 개인사업자로 시작하나, 모든 책임을 면책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택배기사의 수당은 올라가겠지만, 그 이상으로 회사 주주에게 돌아가는 금액도 크다. 택배기사를 강제로 일하게 만들어 다른 회사와 경쟁하여 승리하는 체계, 이것이 현실이다. 일을 한만큼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일이 정리된 만큼 가져가는 것이다. 노동기준이 8시간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성과품을 내어야 수당이 지급된다. 리키의 아내인 터너는 마음이 아주 곱고 다정한 여성이다. 더 해 줄 필요도 없는 업무내용이나 자신이 맡은 노인들의 신변에 문제가 있으면 토요일이라도 가주는 사람이다.
돈인가? 인간성인가? 늙은 한 할머니가 몸조차 가누지 못해 화장실도 못 간다. 소변을 누지 못해 소파 위에 앉아 그대로 옷이 젖고 말았다. 그런데 할머니의 가족은 그녀를 돌보기는커녕 그녀의 집이 얼마나 팔릴 수 있을까? 하는 이익에만 집착한다. 인간의 정도 결국 돈 앞에서 무너지는 슬픈 현실이다. 영화는 인간이 기계보다 못한 현실에 살아가며, 여기에서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영화이다. 리키가 갱에게 폭행당해 병원의 치료가 필요해도 결국 그는 빚을 갚기 위해 그리고 회사에서 퇴출되지 않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나간다. 회사는 그에게 안정을 취하기보단 손해 보는 부분을 메워주기를 바란다.
이 장면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대장 내 세균성 질환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병원 응급실에 누워 피검사와 CT검사를 할 때 상당히 지쳐있었다. 회사에 출근하기 힘들게 되어 나를 대신하여 부서장에게 연락 해달라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부서장은 내가 아픈 게 걱정하기보단 그냥 병이 뭔지 물어보고 더 이상 통화가 귀찮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고 한다. 퇴원 후, 사실 안정이 필요하지만, 단지 내가 퇴근한다는 것만으로 나와 별 다른 이야기 없이 사무실 다른 사람에게 퇴원 다음날 출근한다는 식으로 전했다.
다음날 출근해서 톡이 와서 몸이 괜찮은가? 라고 묻기보단 출근여부만 물었다. 사람이 어떤 일이 발생하면 그 사람의 안위부터 묻는 게 상식인지 아니면 회사 또는 부서의 일이 먼저인지는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후자를 선택하는 사람이라면 밑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곳에서 일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다른 회사에서 현재보다 더 좋은 대우와 환경이 된다면 옮기면 되기 때문이다. 뒤에 나는 여러 마찰로 인해 회사를 옮겼다.
영화에서 리키는 나처럼 옮길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건축회사에 근무했으나, 회사가 망했고, 이후 각종 건설현장에 갔지만, 상사와의 갈등, 극한 작업환경, 기타 문제 등으로 인해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성실하게 일하고 싶기에 선택한 개인사업자, 하지만 그것은 신기루에 불과한 허상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나와 저녁 늦은 시간까지 일해도 삶은 나아지는 게 없다. 아내 애비는 식사조차 거른다. 이른 불안한 환경에 아이들조차 힘들어한다. 딸은 아직 어리지만 어른 못지않게 생각이 깊다. 하지만 때로는 아이같이 행동한다. 부모가 옆에 없으니 항상 불안해하고 잠조차 잘 이루지 못한다.
아들은 공부도 잘하고 영리한 학생이었으나, 아버지의 현실을 보고 낙담한다. 그리고 비행을 저지르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다. 그가 길가에 스프레이로 남기는 그림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누군가 외치고 있으나 서로 그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대화가 되지 않고 공허한 메아리만 외치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낸다. 아들의 친구들을 보면 리키와 같이 힘든 상황에 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들의 여자 친구 하나는 가정불화로 집을 떠나 친구의 친구 집에 떠난다. 다른 친구는 흑인으로 등장한다.
리키가 택배를 배송할 때 택배를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 여러모로 넉넉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 우리가 처해진 현실은 시스템의 문제로 인해 발생되나, 막상 그 문제에서 트러블로 마주치는 존재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가진 것도 없고, 항상 외면된 존재, 길가에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개의 다리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온다. 개가 아픈데도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한 채 데리고 다니는 것이다. 리키와 리키가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은 늘 빈곤과 시간이랑 싸웠다. 먹고 살아야하기에 그 모든 것을 버려야 했던 리키, 그렇게도 다치고 운전대를 잡은 리키, 온 가족이 모두 말려도 나가는 리키의 모습에서 현실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 느꼈다.
영화 시나리오에서 리키에게 갈등의 대상이 되는 것은 크게 2가지 축이다. 하나는 회사의 운영방침, 다른 하나는 아들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어떻게든 리키가 해결했지만, 아들은 그러지 못했다. 서로 엇갈리고, 크게 다친 리키를 보고 아들과 화해하는 것으로 새롭게 끝날 것이란 모습은 너무 기만적이었다. 아들과 화해하고, 딸의 행동을 보고 다시 옛날처럼 되고 싶어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여전히 생계는 이어가야 하고, 누군가 그 부분을 책임져야 하는 게 우리의 현재 모습이다.
내일을 배달되고, 희망을 배달할 수 있는 누구인가? 리키의 마지막은 모습은 참으로 암담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암담하다고만 말할 수 없다. 그는 그 암담한 상황에서 눌러앉는 게 아니라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 내기 위해 운전대를 잡는다. 우리의 내일과 희망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100분이지만 순식간에 흘러갔다.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어서 그럴까? 심각한 분위기에 종종 등장하는 축구 만담이 기인하였기 때문일까? 영화 <미안해요, 리키>는 우리 삶을 그대로 비추어준다. 물론 100% 우리 삶이라고 볼 수 없지만, 예술은 삶을 굴절로 통해 본다고 하듯이, <미안해요, 리키>에서 보여준 예술성은 인생은 비극으로 보여도 그래도 희망이 작게나마 있다고 말해주는 희극적 요소를 살짝 곁들여 주며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