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고>란 영화감상평을 보니 이런 글이 있었다. 천우희씨가 혼자 거의 진행하고 다 끝낸 것 같다고 말이다. 솔직히 천우희씨가 이 영화의 모든 키를 잡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천우희씨가 그 정도의 역량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버티고>보다는 <한공주>라는 영화를 보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다. 거기서의 천우희씨의 연기는 영화 그 자체를 응집하고 있는 여고생 캐릭터로 나온다. 내가 천우희씨의 영화팬이 된 이유도 바로 <한공주>에서 보여준 그녀의 연기력이다. 천우희씨의 연기 특징은 깊은 아픔과 슬픔을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 응축하여 그 부분이 결국 폭발할 때의 비극성이다.

 

<한공주>란 영화를 보면 밀양여학생 성폭행 사전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주인공 한공주는 낯선 학교에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오나, 결국 미디어에 의해 노출되고, 새로 전학 간 친구와 학급 학생들도 외면한다.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최악의 선택은 자살이었다. 수영을 배운 이유가 물에 빠져도 50m 정도 헤엄치면 살 수 있는데, 그녀는 결국 수영하지 못한 채 수면위에 둥둥 부유한 채 맥없이 흘러간다. <한공주>란 영화를 보면서 상당히 무겁고 답답한 영상미에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영화는 허구의 이야기지만, 사실의 이야기를 재편집하여 새로운 하나의 현실성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한공주> 특성상 집단성폭행을 당한 여학생은 그렇게 흔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니고(절대 흔해서는 안 될 이야기다), 매우 독특한 상황에 놓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관객은 받아들일 수 있어도 보편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렇다면 <버티고>는 어떤가? 어떤 극단적 상황이라도 영화에서는 개연적 상황을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우연히 마주친 게 단순히 발전하는 게 아니라 우연의 산물이 연속적 조우로 인해 큰 결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버티고> 주인공 서영은 매우 흔하고 흔한 인물이다. 지방에서 태어나 수도권에 왔으나,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 사원이고, 재계약이 다가오지만, 다시 재고용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앞선다. 게다가 사내연애 대상인 진수는 서영을 사랑하기 보단 그저 자신의 욕정에 채우는 편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만일 은밀한 성행위와 혹은 돌출적 성행위를 하려면, 선팅이 잘 된 차 안에서 하거나 혹은 행사가 끝난 후 따로 모텔에 가면 될 사항이다. 하지만 진수는 서영과의 성행위를 회사 휴게실에서 하고, 또는 산행장소 인근 건물에서 한다.

 

단순히 자신의 쾌락적 상황에 만족하기 위해서이다. 산행의 경우 화장실에서 남성 동성애자들의 애정행각을 보고 충동적으로 성행위를 한다. 그리고 진수는 자신의 직업적 위치에 대한 역할과 성공을 위해 일에 몰두하고, 서영은 자신의 삶의 중심이 아니라 그저 주변조건처럼 대한다. 서영이 진수에게 매달리는 이유는 그가 능력도 있고 인물도 좋지만, 유일하게 회사에서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 직장 내 계약직은 항상 불안하고, 입사동기인 예담은 다음 재계약에서 누락된다.

 

서영이 집에 오면, 집이란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어머니의 참견이 시작되는 장소이다. 회사에서는 업무가 있어 간섭하지 못하나, 집에 오면 괜히 전화해서 하소연을 풀거나 또는 용돈이 필요한 것을 간접적으로 강조한다. 새벽에 강아지가 태어난 이유로 전화할 이유는 없다. 돈을 빨리 붙이지 않아 그녀를 귀찮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남편과 이혼 후 다른 남자와 재혼하여 살아도 잘 지내지 못해 수도권에서 자취하는 딸의 집까지 찾아온다. 서영은 직장과 집 모두 자신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사람이 어딘가 편안하게 있지 못하면 매우 불안하다.

 



<버티고>는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있어도 그 장소가 자신에게 불편하거나 또는 외부인처럼 만드는 감옥 같은 곳이다. 게다가 서영은 어릴 적 아버지에 맞은 후유증으로 한쪽 귀가 불편하다. 고막이 손상을 입어 청각능력에 큰 문제점으로 다가왔고, 게다가 귀에 있는 진정신경의 불안함은 구토와 어지러움, 공간적 장애까지 일으킨다. 재계약 문제로 보청기착용도 망설이는 서영의 모습에서 비정규직, 장애, 고독, 독신여성 등 다양한 아픔이 겹친다. 그녀가 버틸 수 있는 이유가 현실에 없다. 자신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가 오늘 하루도 몹시 흔들렸지만 잘 견뎌냈다. 거리는 튼튼하니 이제 안심이다라는 것은 자기변명에 불과하다.

 

그런 서영의 삶에 들어온 자가 관우이다. 그의 집은 가난한 편이고, 늙은 아버지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불편하다. 로프에 몸은 의지하여 창문을 닦아내는 모습은 위태로우며, 집에 와서 강아지를 안고 여성 유튜버 방송을 열심히 본다. 서영의 상실감은 버틸 수 있을 곳이 없다면, 관우는 버틸 수 있는 공간이 있지만, 누군가를 버티게 하지 못했다는 미련이 있는 남자이다. 그가 왜 서영에게 이끌렸을까? 창문을 닦는데 자치 위험한 상황을 보자 서영은 매우 놀란다. 그저 창문을 닦는 노동자에게 어느 누가 관심을 보이는가? 자신에게 그런 관심을 갖은 서영에게 관우는 호기심을 느끼고, 우연히 회의실에서 마주친 그들은 서로에게 눈을 뗄 수 없다.

 

특히 서영은 단지 로프 하나로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는 관우의 모습을 보고 놀란다. 자신은 안에 있으면서 의지할 곳이 없다고 봤으나, 관우는 의지할 수 없을 것 같은데도 로프에 관우 그 자체를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대비적이다. 관우는 창문닦이 아르바이트 이외에 서점 입구에서 피에로 분장을 하고 난간위에 앉아있다. 난간 위에서 서영의 모습을 지켜보고, 창문을 닦으면서 서영을 바라본다. 관우는 왜 서영을 그렇게 지켜보고 싶은 것일까?



 

관우는 하사시절 우연히 휴가를 나온다. 누나가 생일이라 누나가 자취하는 집에 가서 케이크를 들고 간다. 누나가 인터넷 방송을 하려고 한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누나는 죽어 납골당에 모셔져있다. 누나 왜 죽었는지 모르나, 적어도 그녀가 병으로 죽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여자 유튜버 방송을 보는 관우를 보면서, 옆에 와이프가 관우의 누나가 죽은 것은 악플러의 악플이 아닌가 라는 말을 했다. 생각하니 관우가 보던 유튜버 방송에 여자BJ가 덧글창에 이상한 말들이 나온 것을 확인하는 장면이 있다. 납골당에 관우가 아버지를 모시고 가고, 아버지가 누나의 납골함을 보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슬퍼한다.

 

관우가 유튜버 방송을 볼 때 안고 있던 강아지는 사실 누나가 키우던 강아지였다. 누나가 이루지 못한 그 꿈은 다른 유튜버로 통해 일시적으로 위로하고, 누나의 강아지를 만지면서 누나와의 기억을 공유한다. 그런 그에게 서영이 나타난 것이다. 위태로운 서영, 그런 모습을 보면서 관우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을 새롭게 채울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서점서 책을 나두고 간 서영의 책을 찾아주거나, 눈물 흘린 서영을 보며 손수건을 책상에 나눈다. 서영이 술에 심하게 취해 자신을 거의 포기한 상황에 처하자 어떤 낯선 남자가 서영에게 손대려 할 때, 관우는 서영을 지켜준다.

 

그가 서영을 지켜주고 싶은 이유는 남성이 여성에 대한 사랑도 있지만, 서영에 무너지는 모습에 자신이 그저 가만히 주저앉기 싫었던 것이다. 서영은 버틸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나, 관우는 자신이 누군가가 버티게 해줄 수 있는 게 자신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단순히 로맨스적인 요소보단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감정의 영역이다. 작은 존재로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따듯한 눈으로 연민의 정을 건네는 것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서영이 위기에 처해질 때도 그렇다. 이차장은 CCTV에서 자신이 한 행동으로 사직을 당한다. 단순히 서영만 성행위를 했다면 사내연애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지만, 남자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서영은 무엇이 되겠는가? 이미 사내에 소문이 퍼져 서영은 아무도 자신을 상대해주지 않은 채 고립된다. 그런 서영에게 관우는 창문에 힘내요라는 세 글자를 적는다. 서영은 그것을 보자말자 눈물이 넘치는 슬픔과 기쁨이 교차한다. 천우희씨의 연기는 여기서 빛을 발한다. 매우 우울한 모습, 홀로 괴로워하는 모습, 열정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에서 <버티고>의 명장면이 드러난다. “힘내요라는 글자는 서영에게 매우 드라마틱한 요소이다. 창문을 닦던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한다. 그 사망자가 관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한 서영이 힘내요라는 글을 보는 순간 자신이 혼자가 아니란 것을 깨닫는다.

 

게다가 자신을 재계약하는 조건으로 성폭행하려던 권차장의 위험에 빠지자 관우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관우가 자신을 계속 지켜본 것을 알고 있던 서영은 관우에게 찾아가 관우가 일하고 있는 세상을 보려 한다. 해가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빌딩 안에 갇혀 발버둥을 치는 것보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빌딩 밖에서 로프를 매달린 채 세상을 보는 게 더 행복해 하던 서영이다. 서영은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도 모진 말을 했다. 서영은 자살을 하려고 했으나, 안전로프에 의해 공중에 매달려 있었고, 관우는 그런 서영을 끌어올리며, “괜찮아요. 당신은 절대 떨어지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서영은 관우에게 기습적으로 키스를 하며, “이제는, 올라가고 싶다.”라고 독백한다. 그녀가 관우가 일하는 빌딩의 창문은 죽음을 택하려 했다. 내려가고 싶은 것은 결국 땅에 떨어져 죽은 청소노동자처럼 죽음을 선택한 것이고, 키스를 하고 올라가고 싶은 것은 다시 살기 위해 삶의 목적성을 찾을 것이다. 영화는 보는 내내 서영의 관점에서 카메라가 돌아간다. 어지럽고, 낯설고, 외롭고, 내몰린 그녀에게 석양이 지는 저녁노을은 아직까지 이 힘든 세상이라도 살아갈 수 있는 동아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서영이 같은 사람이 아니지만, 그래도 서영이 처한 현실에 대해 크게 공감할 수 있다. 우리가 버틸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없다면 어떤가? 외로움과 슬픔, 괴로움으로 하루하루를 견디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자신을 알아주고 봐주며,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아직까지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이 처한 불행은 자신의 문제일 수 있지만, 나의 의지와 다르게 닥치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자신에게 있어도 남의 문제로 돌리는 경우도 많다. “나 때문이야!” 또는 너 때문이야!”에 매몰되기보다 때로는 괜찮아요?”라고 물어보며 작은 위로를 전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우리의 삶은 작은 위로조차 받을 수 없는 각박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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