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시르와 왈츠를 - 아웃케이스 없음
오리 시완, 아리 폴만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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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영화나 혹은 애니메이션을 보고 분노를 느낀 적이 있었는가? 그 분노에 지나치다 못해 이런 일들을 저질른 인간들을 정말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해보았는가? 나는 수 없이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정말 죽이다 못해 인간의 사지마저 찢어 버려 불로 태우고 싶을 정도로 깊은 분노와 슬픔을 느낀 것이다. 바로 이번에 내가 적어 보려고 하는 애니메이션이 바시르와 왈츠를이다. 바시르와 왈츠라는 말도 웃기지만 과연 무엇을 위해 이 작품에서는 왈츠 춤을 추는 것일까?

 우선 이 작품의 계기가 되는 시기적 배경이 있다. 1982년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을 실제로 확살한 일들을 일종의 다큐멘터리 식으로 제작하였다. 이 작품을 감상함에 있어서 결코 재미나 작화로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나 이 작품 내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전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만약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면 이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매기기는 정말 어렵고도 난해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작품을 보면서 항상 생각하지만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자신들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광기에 의해 미쳐가고 있다. 그러나 정작 미쳐가고 있는 인간들은 자신들이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정말 미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이 무차별적으로 행동하는 광기를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광기를 부려 미치광이 역사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그들이 미쳐 있지만 자신들이 미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미친 사람이 미치지 않았다는 집단적인 합리성에 의해 그들은 자신의 합리성 즉 집단의 광기에 어긋나거나 비켜가는 존재가 등장할 경우 아주 사납고 잔인하고 비겁한 응징의 철퇴를 가격한다. 그 응징의 대상은 아주 강력한 군에서 비록하여 아무 힘도 없는 여자, 아이, 노인들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광인들이 만들어논 역사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광인들이 너무 많고, 그 광인을 뒤에서 조장하는 존재가 너무 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 광기어린 인간들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기보단 오히려 거기에 대해 옳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보자 예전에 광기의 역사중에서 중세유럽시대에 마녀사냥이란 유명한 미친광이들의 향연이 있었다. 아무 죄없는 인간들을 마녀나 마도사로 몰아넣어 아주 가혹하고 처절한 고문으로 통해 거짓자백을 받아 무참하게 죽인 사건들이 있었다. 

이런 미친광이 사건들은 권력이라는 존재가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결탁하여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이 마녀사냥 사건으로 인헤 수십만명의 평범한 인간들이 고문장의 고기나 화형장의 고기로 변해 버렸다.

아주 잔인하고 처참하여 고대 문헌자료를 보면 팔에서 떨어져 나간 손목, 발에서 떨어져간 발목, 얼굴에서 나온 눈알이 고문장 주변을 채워 있었고, 가시가 달린 신발, 의상, 허리띠 들로 인간을 학대하였으며, 잠도 재우지 않고 계속 고문만 하여 인간을 인간이 아닌 죄악덩어리로 만들었다.

이렇게 고문에 지친 죄없는 인간은 자신이 편안한 죽음을 위해 아무 죄없는 이웃 2명을 거명하고, 다시 그 이웃 2명은 잡혀와서 고문당하고 2명은 4명이 된다. 그렇게 거짓자백을 하게 될 경우 마녀인 사람은 화형대에서 아주 편안하게 죽는다고 한다. 인간이 죽는 것 중에서 불에 타서 죽는 것이 아주 괴로운데, 왜 불타는 것이 행복할까? 얼마나 인간이 광기로 가득차서 이런 미친일들로 이어질까? 

더욱 문제는 이런 미친짓을 저지른 인간들이 아무런 양심적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등장하는 주인공은 그런 광기어린 전쟁터에 참가하면서 광기어린 현장에 있었으나, 그 사실은 망각해 버린다. 전쟁이란 소용돌이와 전쟁에 일어나는 참극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양심만 아니라 자신의 기억마저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리(실제 감독이름이 아리 폴만, 화면 상에 안경끼지 않은 남자)는 잠을 잘때마다 계속 이상한 악몽을 꾸게 된다. 그런데 그 악몽의 출처를 알 수 없었다. 아리는 친구와 계속 만나면서 자신이 과거에 무엇을 하고 했으며, 어디에서 있었으며, 무엇을 보았는지 계속 자신의 과거를 찾아 떠난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를 찾는다는 것은 2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과거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망상이고 하나는 과거에 저지른 과오에 대한 반성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나 판단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판단기준이 혼자가 아닌 단체라면 그것은 하나의 진리와 이념으로 정립되며, 이 진리와 이념은 곧 모든 것의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광기의 역사가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광기가 빠진 인간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고발하기 시작한다. 어느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진군하기 시작하는데, 상황이 계속 폭격, 총격전 등이 발발하여 작은 인기척과 반응에도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군인들은 어느 지나가는 승용차가 보이자 무차별적으로 사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 차량안에는 적군이나 테러범이 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 민간인들이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적으로 간주하여 무차별 사격만 가할 뿐이다. 이런 극단적인 배타적인 심리는 인간의 잔인함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린다. 이런 심리상태는 잔인함만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다. 작품에 보면 어느 시내 총격전이 보이는데, 여기서 어느 병사가 기관총을 들고 건물 중앙 사이에 있는 도로에서 혼자 총을 들고 목표도 없이 사격을 시작한다. 

이 사격을 보는 감독은 자기는 마치 왈츠를 추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바시르라는 인물이 폭탄테러로 죽게 되어 전쟁이 발발하기 때문에 이 작품이 바시르의 왈츠를이란 제목을 가진듯 하였다. 어느 인물의 죽음이 불러온 죽음의 전쟁, 그리고 전쟁에 빠져 자신의 이성과 인간성을 상실한채 전쟁의 먹이로 되버린 인간들, 총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미친듯이 총을 겨누는 인간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할까? 



이 작품 말기에 흐르면 전쟁상황이 종료되어가려 한다.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팔레스타인 민간인마을을 접수하게 된다. 본래 민간인들은 아무런 힘도 없는 여자, 어린이, 노인들이었다. 그러나 과격한 이스라엘 민족주의자들은 민간인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방치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광기어린 모습으로 힘없는 팔레스타인 민간들의 머리에 총을 겨누거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눈앞에 보이는 건물은 모두 부서버리고 살아있거나 움직이는 존재는 모두 총으로 쏘아 죽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극악적인 광기를 말리는 것이 정상이나 오히려 방관하기 시작한다. 

이 레바논의 공습과 학살에서는 어떤 상당한 배후세력이 숨어있었다. 노암 촘스키의 불량국가를 보면 테러리즘에 대해 매우 강한 비판을 보여주는 사적으로 이슬라엘 과격분자가 저지른 범죄 뒤편에는 누군가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암묵적인 동의를 한 국가는 이스라엘이 실행한 인종청소를 위해 군사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쟁이 일어나면 무기를 전문으로 파는 이 국가에서는 자신들의 배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이란 작품과 약간 비슷한 속성을 가진 작품이 있다. 그것은 화씨911이다. 미국 911테러가 끝난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으나 아직도 그 상처와 아픔은 당시 희생자로 하여금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한다. 왜 우리는 이런 극단적이고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거기에 희생된 인간들은 얼마나 슬퍼해야 하는지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광기 그리고 그 광기를 만들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권력자들 역사는 언제나 이런 광기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가끔 보면 spectacle이란 단어를 여기저기 보기 시작하는데, 사람들은 뭔가 있어 보이면 스펙타클이라고 떠들어댄다. 그러나 정작 스펙타클은 영어 look on, remain a spectator, 즉 방관(하다)의 의미이다. 

방관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능동이 아닌 수동적인 인간이 되어 어느 일이 발생하든 말든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저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뭔가 멋지면 스펙타클이란 단어를 내뱉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컬 하지만, 바시르의 왈츠를이란 영어는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사회에 보여주는 방관적인 현실을 고발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의 감상에서 내가 정말 분노한 장면이 있는데,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영상만이 아니라 실제 카메라로 녹화하여 그 실제영상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영상에는 무차별 폭격과 사격으로 인해 죽어버린 죄없는 인간들과 힘없이 무너져버린 건물잔해를 볼 수 있었다. 이미 인간이 저지른 잔혹사극은 오래전 일이지만. 그 일들을 보는 내내 나를 분노의 화신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인간은 과연 자신이 똑바로 살고 있고 제대로 판단하는 이성의 동물일까? 나는 그 대답에 NO라고 대답한다. 인간은 정말 추악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존재라고 말이다. 단지 추악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역사와 국가, 민족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뿐이다. 인간이 추악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희생과 각오,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내게 일깨우친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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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로 메틱 Vol.1~6 전편 세트 - 할인행사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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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로매틱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마호로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원래 인간이 아니다. 단지 명령에 의해 싸우고 죽이고 파괴하는 그저 하나의 병기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기계인간 즉 안드로이드임을 자각하면서도 그 누구보다 마음이 바르고옳고 상냥했다.

어떻게 보자면 우리 지금 살아가는 인간보다 더욱 더 인간적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마호로는 한가지 슬픔과 한가지 절망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마호로의 슬픔은 자신이 존경했던 미사토 사령관을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했던 사실이고, 절망은 사령관을 죽인 속죄로 사령관의 아들 스구루군과 여생을 보내며 자기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음에 대한 절망이었다.

마호로는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분명 그녀 스스로가 옳은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책한다. 내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내가 아는 누군가를 죽이야 한다는 슬픔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을 살려냈지만 결국 스구루는 아버지를 잃었다. 스구루가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영정을 붙들고 우는 모습에서 마호로는 진정 자신이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랬는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으로 가고자 함은 많은 갈등과 시련을 안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마호로는 마음은 바르나 평범한 인간의 기분과 감정을 가지지 못한 점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 스스로 스구루의 메이드로 살아가며 남은 여생을 보내면서 진정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느끼고 비로소 자신도 한사람의 인간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안드로이드가 인간 흉내내면서 자기 존재에 대한 가치혼란을 겪는 마호로는 인간으로 범접하면 할수록 행복과 더불어 슬픔도 커진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명은 1년 전후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스구루가 마호로에게 아버지 묘 참배에 다시 오자는 말과 스구루가 내년에도 마을축제에 다시 오자고 할때 마호로는 머뭇거린다. 왜냐하면 마호로는 내년이란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여생을 받치면서 오히려 그곳에서 여생을 더 보내고 싶은 마호로는 인간의 가치를 느낀다.

그래서 이 작품은 마호로의 모습과 스구루의 모습에서 슬픈 감동도 짜아낸다. 물론 시키죠 선생과 옆에 친구들이 즐거운 재미도 안겨주지만, 사실 마호로에게 이 슬픈도 즐거움도 모두 소중한 인생임을 확인한다. 

인간과 기계 결코 연결될 수 없는 다른 존재랄지도 그 존재의 외적인 가치인가 아니면 그 존재에 대햔 내적인 가치인가는 이 작품으로 통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의 진정한 강함은 인간이 가진 물리적인 위력이 아니라 상대방을 진심으로 감동시키는 정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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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걸 마호로 1
디타마 보우, 나카야마 번즈로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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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호로매틱은 만화책 사이버걸 마호로을 각색하여 만든 작품이다. 원작은 소설을 쓰는 작가가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만화가가 그림을 입혀 만든 하나의 만화책이 된 게 사이버걸 마호로이다. 그런 다음에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제작하여 일본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애니메이션 오타쿠 문화에 한 획을 이은 가이낙스가 차기작으로 만든 작품이다.

물론 가이낙스가 마호로매틱을 만들기 전에 다른 작품을 만들었으나, 이 마호로매틱이야 말로 가이낙스적인 코드와 흐름을 잘 반영한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마호로매틱 1기와 마호로매틱 2기인 더 아름다운 것에서는 인조인간 안드로이드인 마호로로 통해 새롭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마호로매틱과 만화책인 사이버걸 마호로를 비교해보면 기본적으로 스토리가 많이 비슷하면서 조금 다르다. 그것은 마호로매틱을 감독한 가이낙스 대표이사 야마가 히로유키 감독과의 관점 차이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가이낙스 대표감독 중의 하나인 야마가 히로유키는 원작에 충실하기 보다는 그 작품 내에 자신이 반영하고자 하는 담론에 충실한 감독이기 때문이다.

어째든 만화책 사이버걸 마호로은 애니메이션 마호로매틱과 동일한 가치관은 인간에 대해서이다. 물론 그 많고 많은 만화책 중에서 인간이 등장하지 않거나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도서는 많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이버걸 마호로는 그런 부분과 조금 다른 관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면서 오히려 인간보다 인간다운 마호로로 통해 인간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마호로는 기계인간으로 앞으로 살아갈 날이 겨우 1년 이상이었다. 그런 그녀가 전투에서 물러나서 여생을 마무리해야한다. 물론 기계로 된 안드로이드라고 해도 그녀에겐 인간이 가진 이성과 감성을 지녔다. 그리고 마호로의 이성은 그 어떤 인간보다 옳았으며, 그런 행동으로 자신의 기관인 베스퍼에도 인정받는다.

하지만 모든 세상일은 이성만으로 해결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기분과 양심을 외면해가면서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옳은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자신의 고뇌와 그런 고뇌 아래서 산화된 미사토 사령관의 기억은 마호로에게 상처를 주고 만다. 모두라는 공동체를 위해 자신이 좋아하고 존경한 상관을 죽여야 했던 마호로, 그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자신의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과 그 여생을 자신이 작전 중에 죽일 수밖에 없던 미사토 사령관 아들인 스구루에게 찾아가 스구루의 메이드로서 살아가려 한다. 죽기 전에 자신의 죄책감을 속죄하지만 그 속죄하면 할수록 자신이 안드로이드가 아닌 인간이 되어감을 느낀다. 분명히 그녀는 인간의 유전자가 아닌 기계로 되어 있는데 말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인간은 정말 인간을 볼 때 그 사람의 인간성이나 윤리적인 부분보다는 선입관이나 혹은 자신의 입장만 앞세워 볼지도 모른다. 물론 인간은 자기 개인에게 충실하고 그 충실한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조금 되돌아 보면 그런 개인이란 존재는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이란 존재도 있다. 그 타인이 낯선 세계로 발을 들인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소한 일상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 사이버걸 마호로이지만, 막상 다시 생각하면 조금 면이 보인다. 한번 이 사이버걸 마호로와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마호로매틱 1, 2기를 보고 인간 그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런다고 마호로매틱은 너무 어렵거나 난해한 작품이 아니다. 작품 전개상으로 재미도 있고 슬프기도 하다. 그러나 그 재미와 슬픔 속에 담긴 담론은 조금 깊이 파고보는 것도 하나의 작품 감상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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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 히메
미야자키 하야오 (Hayao Miyazaki) 감독, 다나카 유코 외 목소리 / 대원DVD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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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히메는 기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보여주던 여성캐릭터와 상당히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미야자키 감독 작품에 등장하는 중요 키워드는 하늘, 자연, 그리고 여성이다. 단지 미야자키 감독이 만들어낸 여성은 대부분 상당히 이성적이거나 아름답거나 혹은 강한 사람이란 게 특징이다.




그래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붉은 돼지에 등장하는 소녀들은 대부분 강인하고 아름다움을 내세운다. 이런 점은 미야자키 감독이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미소녀 캐릭터에 대한 강한 집착이라는 한 가지의 비판대상이 되기도 한 요소로도 보였다.




그런 점에서 모노노케히메 즉 원령공주에서 등장하는 산의 모습은 상당히 도발적이고 기존 미야자키 감독 작품에 등장한 여성 캐릭터에 큰 변화를 준 건 사실이다. 그래도 미야자키 감독은 이성적인 여성을 배제하고 감성적인 존재인 산을 대신하여 반대되는 캐릭터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산과 같이 여성이나 그 마을사회에서 하나의 지도자인 에보시를 보면 여전히 미야자키가 이성적이고 육체적으로나 혹은 정신적으로 강한 여성을 원하는 것은 사실이다. 단지 2명의 여성을 통해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자연의 세계인 산과 인간문명사회의 에보시로 통해 자연과 문명사회의 비극적인 소통불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기존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는 나우시카 공주로 통해 자연세계와 인간세계의 구심점으로 작용하여 오염된 그 세계에서 인간의 파괴행위를 저지하고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었다고 본다. 그러나 모노노케히메는 반대였다. 오히려 자연과 인간은 소통이 불가한 채 그대로 서로 배제해 버렸다.




작품 서사 내의 발단이 되던 아시타카는 그런 자연과 문명사회의 비소통에서 발생된 왜곡현상으로 팔에 큰 병을 얻었다. 그 병은 신적인 영력을 가진 멧돼지가 재앙신으로 변해 아이타카의 손에 죽으면서 그에게 저주를 걸은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재앙신은 재앙신이 아니었다. 그 재앙신으로 만든 것은 인간의 손으로 탄생된 문명의 철탄총알이었다.




결론은 아무런 죄도 없는 자연부락인 아시타카 마을이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사회에서 희생된 자연에 의해 재앙을 맞이한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반드시 이 작품세계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일어난다. 가령 우리 한국의 경우 봄철 황사현상으로 고생하는데, 예전의 황사는 단지 황하강의 모래와 분진으로 이루어진 입자였다면 최근에는 중국의 공업화로 인해 황사모래 안에 다양한 환경오염물질이 함유된 점이다.




이것은 분명 우리 한국에서 일어나서 생긴 폐해라기 보단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문제로 인해 우리가 피해보는 것이다. 자연이란 것은 아주 작은 소규모로 오염되어 어느 정도 정화되어 그 환경오염에 대한 위해성을 비켜갈 수 있으나, 어느 일정 수준이 누적이 되기 시작하면 소규모이던 환경오염이 대규모적인 현상으로 바뀌어 그 지역만이 아닌 다른 지역까지 죽음의 손길을 뻗친다.




그런 점에서 모노노케히메는 에보시의 철광산업으로 통한 자연파괴가 당연히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 없었다. 그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여자, 병자, 어디로부터 쫓겨 온 사람 등등,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에보시의 중심으로 서로 협력하고 살았다. 작품 내에서 야마토 왕조에게 버려진 자들이 유일하게 발을 붙이고 살 수 있는 곳이 에보시의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제력과 무력이라는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총을 만들어 마을을 지키고, 철을 생산하여 경제력을 키웠다. 그런 에보시와 마을주민의 협력으로 그 마을은 무사히 지켜진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에 대한 희생과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자연에 대한 농락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의 신이었고, 존경의 대상이었다. 일본의 종교사상 역시 애니미즘(Animism)으로 다양한 신들이 존재하고 무형의 존재라도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봤다. 자연의 위대함은 동양국가에서는 하나의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존재한 것이다. 그러나 에보시는 그런 전통적인 사상과 달리 자연을 파괴하고 짐승들을 멀리 보내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짐승들은 총탄으로 숨을 끊게 하였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연의 희생을 합리화한 것이다. 그것은 환경윤리적으로 분명 문제가 있겠지만,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문명의 행동이었다. 그런 내용을 이 모노노케히메에서 다룬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작품 마지막까지 자연과 문명사회는 조화로이 살 수 없었다. 오히려 인간이 지나친 자연정복욕구로 인해 문명 스스로 인간 스스로가 자연에 의해 먹힐뻔 했던 것이다.




지나친 인간의 욕구 거기에 대한 문명사회와 기술발전, 그것은 인간에게 풍요와 안락함을 제공하나 한편으로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생명을 버리게 하는 자살행위와 같다. 자연은 공생이 가능한 것인가? 아닌 것인가?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이다. 자연은 그저 대답만 해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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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배달부 키키 (2disc)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사쿠마 레이 목소리 / 대원디지털엔터테인먼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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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의 거장 애니메이터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이 담아내고자 하는 이야기가 마치 흘러가는 동화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막상 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어낸 동화를 보면서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된다. 아무렇지 않게 보이던 인물과 사건들이 엄청난 담론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물론 원령공주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조금 격렬하면서 심각한 주제를 담아내어 다소 마음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하기에는 조금 많은 시간이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이 글을 적는 필자는 환경공학을 전공하였기 때문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보여주려는 환경과 인간 그리고 거기서 나타나는 가치관은 매우 흥미롭다.

그런 담론들이야 말로 현대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철학적인 사고를 이끌어내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철학적인 원천이 반드시 인간과 자연만이 아님은 분명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는 다양한 인간의 가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그런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한번 되돌아 보기 위해 마녀배달부 키키 한번 보기로 했다. 이 마녀배달부 키키는 13살 소녀인 키키가 마녀수행을 위해 자신의 집에서 떠나 낯선 마을에 가서 거기에서 자신이 마녀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 초반에 보면 키키는 자신이 13살이 되어 다른 마을에 가서 마녀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자신은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싶었으나, 키키의 어머니는 자신의 마법빗자루를 건네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다른 마을에 가라고 한다. 키키 어머니가 주신 이 빗자루는 그녀가 마녀이지만 그녀의 딸인 키키가 자신의 뒤를 이은 마녀임을 승인하게 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래서 키키는 자신의 어머니의 상징인 마법빗자루를 타고 바다가 보이는 큰 도시로 간다. 평소 작은 시골에서 자라나 아버지의 라디오로 통해 밖의 세상을 동경하던 키키에겐 큰 도시의 인상은 매우 흥미롭고 밝은 미래가 가득한 곳으로 생각했다.

그 미래가 가득한 곳에는 자신 이외에는 마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키키는 매우 만족한다. 하지만 그 만족감의 근본은 왠지 모르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여기는 다른 마녀가 오고 싶어한 것이 아니라 모든 마녀가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녀의 존재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녀라는 존재보다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비행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마녀는 그저 이 시대의 구시대적인 산물로 떨어진 것이다.  그 이유는 키키가 마녀배달부로서 이 마을에서 일을 할 때 어떤 할머니 집에 가서 파이를 만들 때에 그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키키에게 "나의 증조할머니가 마녀이셨지"라는 내용이 나온다.

곧 그 의미는 마녀라는 나이가 많이 든 노인들의 구시대적인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구시대적인 마녀는 곧 근대의 도래에 따라 사라져 가고 있다는 뜻이다. 할머니가 손녀에게 줄 파이를 구울 때 화로가 2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최신식으로 만든 화로였고, 하나는 나무를 태워 음식을 만드는 화로였다.



이 화로에서 할머니들은 기존 화로가 아무 소용없게 되었다고 하나, 막상 신식 화로를 사용하는데 그 신식화로가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 파이를 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키키는 자신이 구식화로를 사용할 줄 알기 때문에 옆에 할머니들이랑 힘을 합쳐 파이를 구울 수가 있었다. 여기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무리 새로운 문명이 좋다고 하나 과거에 사용되던 전통도 같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내보였다.

그러나 그런 전통과 근대화에 대한 조화는 앞으로 살아갈 새로운 사람들에겐 그다지 필요 없었다. 키키가 파이를 만든 후에 궂은 날씨에 비를 맞고 할머니의 손녀를 찾아 갔으나 할머니의 손녀는 할머니가 해주신 파이를 보며 아무 필요없다고 키키에게 이야기한다. 즉 과거에 살았던 인간들의 풍속이나 문화에 대해 더 이상 필요없음을 키키에게 전달한 것이다.



키키는 여기서부터 큰 충격을 받는다. 또한 키키의 충격는 이런 과거의 전통을 무시하는 것이 다시 눈앞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키키가 마을에 와서 키키에게 관심을 가진 톰보라는 소년을 만나게 되는데, 이 톰보라는 소년은 하늘을 나는 것을 소원이었다. 그래서인지 톰보는 마법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키키가 매우 부러웠다.

키키는 원래 처음부터 날 수 있었던 특별한 마녀이나 자신은 날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톰보가 하늘을 날고자 하는 욕망은 결국 자신의 자전거에 달린 프로펠러에 모든 것었고, 톰보는 자신이 만든 기계가 하늘을 날때까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마을에서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시험비행에 탑승하기로 한다.



그런 톰보의 행위에 키키는 갑자기 망설이게 되고,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리고 이내 키키는 톰보와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인간적인 관계마져 낯설어하게 되고 결국 피하려고 한다. 키키가 가진 전통적 가치가 인간기술발달로 무너지려 할때 키키는 자신의 마녀능력까지 소실하게 된다.

마법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난다거나 아니면 자신의 검은고양이인 지지와 말조차도 통하지 않는다. 키키는 마녀라는 존재가 더 이상 근현대 인간에게 인정받지 못함에 절망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절망은 다시 그녀에게 하나의 배움이 되었다. 키키는 자신의 가치는 남에게 의지하는 것도 아니라 또는 자신만이 가지는 게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마녀가 그것도 자신의 마법빗자루까지 잃는 순간에 키키는 절망하지만 다시 일어서는 계기가 생긴다. 그것은 자신의 친구인 톰보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 탑승하다 불의의 사고로 큰 위기에 처해진 것을 무사하게 구출한 것이다.



이때 키키는 자신이 가진 마법빗자루를 잃게 되었으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마법빗자루의 겉모스빙 아니라 그 빗자루에게 자신을 맞추는 것이었다. 마을의 어느 한 중년의 남자가 근대식 청소용 빗자루를 들고 있자 키키는 그 평범한 빗자루를 빌리기로 한다. 마녀가 만들지도 않았고, 평소에 사용하지 않은 그냥 빗자루다. 그러나 그 빗자루는 키키의 의지에 따라 하늘을 날아간다.

그건 과거의 상징인 마녀와 그 마녀 옆에 존재하던 빗자루에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물에 같이 맞추어가서 전통과 근현대의 조화로 통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의미이다. 비록 키키는 과거 전통적인 마녀의 힘을 잃어 자신의 친구인 고양이 지지와 대화할 수 없었으나 대신 톰보라는 도시남자애와 톰보 옆에 있던 다른 친구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작품 마지막에 키키가 근대식 빗자루를 타고 옆에 톰보의 비행와 같이 초원을 달리는 모습은 키키가 가진 전통과 톰보가 가진 근현대가 서로 어울리며 미래를 향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키키는 자신의 어머니 품에 떠나 바다가 보이는 도시에서 마녀로 인정받는다.

키키가 마녀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자신의 부모님 밑을 떠나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가고 있다는 점과 아름다운 추억이 담긴 과거의 이야기가 앞으로만 나가는 도시와 같이 나가 모든 인간이 가진 가치관이 소중하고 인정받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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