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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시르와 왈츠를 - 아웃케이스 없음
오리 시완, 아리 폴만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영화나 혹은 애니메이션을 보고 분노를 느낀 적이 있었는가? 그 분노에 지나치다 못해 이런 일들을 저질른 인간들을 정말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해보았는가? 나는 수 없이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정말 죽이다 못해 인간의 사지마저 찢어 버려 불로 태우고 싶을 정도로 깊은 분노와 슬픔을 느낀 것이다. 바로 이번에 내가 적어 보려고 하는 애니메이션이 바시르와 왈츠를이다. 바시르와 왈츠라는 말도 웃기지만 과연 무엇을 위해 이 작품에서는 왈츠 춤을 추는 것일까?
우선 이 작품의 계기가 되는 시기적 배경이 있다. 1982년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을 실제로 확살한 일들을 일종의 다큐멘터리 식으로 제작하였다. 이 작품을 감상함에 있어서 결코 재미나 작화로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나 이 작품 내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전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만약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면 이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매기기는 정말 어렵고도 난해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작품을 보면서 항상 생각하지만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자신들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광기에 의해 미쳐가고 있다. 그러나 정작 미쳐가고 있는 인간들은 자신들이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정말 미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이 무차별적으로 행동하는 광기를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광기를 부려 미치광이 역사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그들이 미쳐 있지만 자신들이 미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미친 사람이 미치지 않았다는 집단적인 합리성에 의해 그들은 자신의 합리성 즉 집단의 광기에 어긋나거나 비켜가는 존재가 등장할 경우 아주 사납고 잔인하고 비겁한 응징의 철퇴를 가격한다. 그 응징의 대상은 아주 강력한 군에서 비록하여 아무 힘도 없는 여자, 아이, 노인들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광인들이 만들어논 역사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광인들이 너무 많고, 그 광인을 뒤에서 조장하는 존재가 너무 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 광기어린 인간들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기보단 오히려 거기에 대해 옳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보자 예전에 광기의 역사중에서 중세유럽시대에 마녀사냥이란 유명한 미친광이들의 향연이 있었다. 아무 죄없는 인간들을 마녀나 마도사로 몰아넣어 아주 가혹하고 처절한 고문으로 통해 거짓자백을 받아 무참하게 죽인 사건들이 있었다.
이런 미친광이 사건들은 권력이라는 존재가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결탁하여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이 마녀사냥 사건으로 인헤 수십만명의 평범한 인간들이 고문장의 고기나 화형장의 고기로 변해 버렸다.
아주 잔인하고 처참하여 고대 문헌자료를 보면 팔에서 떨어져 나간 손목, 발에서 떨어져간 발목, 얼굴에서 나온 눈알이 고문장 주변을 채워 있었고, 가시가 달린 신발, 의상, 허리띠 들로 인간을 학대하였으며, 잠도 재우지 않고 계속 고문만 하여 인간을 인간이 아닌 죄악덩어리로 만들었다.
이렇게 고문에 지친 죄없는 인간은 자신이 편안한 죽음을 위해 아무 죄없는 이웃 2명을 거명하고, 다시 그 이웃 2명은 잡혀와서 고문당하고 2명은 4명이 된다. 그렇게 거짓자백을 하게 될 경우 마녀인 사람은 화형대에서 아주 편안하게 죽는다고 한다. 인간이 죽는 것 중에서 불에 타서 죽는 것이 아주 괴로운데, 왜 불타는 것이 행복할까? 얼마나 인간이 광기로 가득차서 이런 미친일들로 이어질까?
더욱 문제는 이런 미친짓을 저지른 인간들이 아무런 양심적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등장하는 주인공은 그런 광기어린 전쟁터에 참가하면서 광기어린 현장에 있었으나, 그 사실은 망각해 버린다. 전쟁이란 소용돌이와 전쟁에 일어나는 참극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양심만 아니라 자신의 기억마저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리(실제 감독이름이 아리 폴만, 화면 상에 안경끼지 않은 남자)는 잠을 잘때마다 계속 이상한 악몽을 꾸게 된다. 그런데 그 악몽의 출처를 알 수 없었다. 아리는 친구와 계속 만나면서 자신이 과거에 무엇을 하고 했으며, 어디에서 있었으며, 무엇을 보았는지 계속 자신의 과거를 찾아 떠난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를 찾는다는 것은 2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과거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망상이고 하나는 과거에 저지른 과오에 대한 반성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나 판단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판단기준이 혼자가 아닌 단체라면 그것은 하나의 진리와 이념으로 정립되며, 이 진리와 이념은 곧 모든 것의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광기의 역사가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광기가 빠진 인간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고발하기 시작한다. 어느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진군하기 시작하는데, 상황이 계속 폭격, 총격전 등이 발발하여 작은 인기척과 반응에도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군인들은 어느 지나가는 승용차가 보이자 무차별적으로 사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 차량안에는 적군이나 테러범이 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 민간인들이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적으로 간주하여 무차별 사격만 가할 뿐이다. 이런 극단적인 배타적인 심리는 인간의 잔인함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린다. 이런 심리상태는 잔인함만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다. 작품에 보면 어느 시내 총격전이 보이는데, 여기서 어느 병사가 기관총을 들고 건물 중앙 사이에 있는 도로에서 혼자 총을 들고 목표도 없이 사격을 시작한다.
이 사격을 보는 감독은 자기는 마치 왈츠를 추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바시르라는 인물이 폭탄테러로 죽게 되어 전쟁이 발발하기 때문에 이 작품이 바시르의 왈츠를이란 제목을 가진듯 하였다. 어느 인물의 죽음이 불러온 죽음의 전쟁, 그리고 전쟁에 빠져 자신의 이성과 인간성을 상실한채 전쟁의 먹이로 되버린 인간들, 총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미친듯이 총을 겨누는 인간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할까?
이 작품 말기에 흐르면 전쟁상황이 종료되어가려 한다.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팔레스타인 민간인마을을 접수하게 된다. 본래 민간인들은 아무런 힘도 없는 여자, 어린이, 노인들이었다. 그러나 과격한 이스라엘 민족주의자들은 민간인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방치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광기어린 모습으로 힘없는 팔레스타인 민간들의 머리에 총을 겨누거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눈앞에 보이는 건물은 모두 부서버리고 살아있거나 움직이는 존재는 모두 총으로 쏘아 죽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극악적인 광기를 말리는 것이 정상이나 오히려 방관하기 시작한다.
이 레바논의 공습과 학살에서는 어떤 상당한 배후세력이 숨어있었다. 노암 촘스키의 불량국가를 보면 테러리즘에 대해 매우 강한 비판을 보여주는 사적으로 이슬라엘 과격분자가 저지른 범죄 뒤편에는 누군가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암묵적인 동의를 한 국가는 이스라엘이 실행한 인종청소를 위해 군사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쟁이 일어나면 무기를 전문으로 파는 이 국가에서는 자신들의 배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이란 작품과 약간 비슷한 속성을 가진 작품이 있다. 그것은 화씨911이다. 미국 911테러가 끝난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으나 아직도 그 상처와 아픔은 당시 희생자로 하여금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한다. 왜 우리는 이런 극단적이고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거기에 희생된 인간들은 얼마나 슬퍼해야 하는지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광기 그리고 그 광기를 만들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권력자들 역사는 언제나 이런 광기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가끔 보면 spectacle이란 단어를 여기저기 보기 시작하는데, 사람들은 뭔가 있어 보이면 스펙타클이라고 떠들어댄다. 그러나 정작 스펙타클은 영어 look on, remain a spectator, 즉 방관(하다)의 의미이다.
방관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능동이 아닌 수동적인 인간이 되어 어느 일이 발생하든 말든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저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뭔가 멋지면 스펙타클이란 단어를 내뱉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컬 하지만, 바시르의 왈츠를이란 영어는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사회에 보여주는 방관적인 현실을 고발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의 감상에서 내가 정말 분노한 장면이 있는데,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영상만이 아니라 실제 카메라로 녹화하여 그 실제영상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영상에는 무차별 폭격과 사격으로 인해 죽어버린 죄없는 인간들과 힘없이 무너져버린 건물잔해를 볼 수 있었다. 이미 인간이 저지른 잔혹사극은 오래전 일이지만. 그 일들을 보는 내내 나를 분노의 화신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인간은 과연 자신이 똑바로 살고 있고 제대로 판단하는 이성의 동물일까? 나는 그 대답에 NO라고 대답한다. 인간은 정말 추악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존재라고 말이다. 단지 추악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역사와 국가, 민족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뿐이다. 인간이 추악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희생과 각오,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내게 일깨우친 작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