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철학 - 이야기 탐구의 아이리스
김용석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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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와 오덕, 덕후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끝이 없다. 아니 몇 십년이 지나도 풀수 없을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답없는 이야기다. 나는 솔직히 나는 건방진 말로 대중들은 가치를 무시하지 않지만, 대중이 생각하고 말하는 대중의 가치는 존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그들이 알고 있는 상식수준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사실이나 원본이 분명히 백과사전적인 의미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오타쿠와 덕후, 오덕에 경계는 모호하다. 솔직히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모호한 게 오타쿠라는 단어의 용칭이다.

내가 대중의 입장을 인정해주기 싫은 이유는 그런 모호함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보는 순간 너 참 유치하구나 혹은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것이다. 그런 그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 만약 내가 서양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에 그의 친구인 크리톤과 대화를 나눈 것을 중심으로 한 테트라로기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란 단어를 꺼내면 어떻게 될까? 물론 나도 그렇게까지는 잘 알진 못한다. 서사철학이란 책을 보고 정확한 단어의 의미를 알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신화편에 들어가면 오이디푸스 신화와 아가메논왕을 중심으로 나오는 아트레우스 가문이야기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심리현상)의 반대인 일렉트라 컴플렉스(딸이 어머니를 죽이고 싶은 심리현상)가 등장한다.

이런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현대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학자들과 그들의 이론과 서적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 나에게 오타쿠다, 덕후다, 오덕이다라고 하는 이들은 침묵을 지키고 만다. 물론 거기에 대한 정확하게 아는 것도 아니고 완전 이해하는 것도 아니지만, 단지 그런 이론의 대한 존재성과 그것이 살짝 무엇을 말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파악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애니메이션에도 철학과 사상, 이념, 이상 등이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이다.

 

이 책인 서사철학이라는 서적은 김용석 교수님이 저술한 책으류 현재 영산대학교 정치, 철학, 경제학을 가르치는 문과대학의 교수로 활동중이다. 서사철학이란 제목을 보다시피 서사 즉 이야기가 있는 것은 텍스트가 있고 텍스트가 있는 것은 거기에 삶의 가치나 존재에 대한 철학이나 사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모든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미쳐 파악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수두룩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서사철학이라는 도서에 총 7가지 텍스트를 분석했다.

1번 신화이다. 신화는 신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그것은 인간을 신에 빚대어 이야기한 서사이다. 특히 신화에서는 비극이 많고 비극을 1인 노래, 2인 대화, 3인 이상 연극으로 발전하면서 연극이라는 새로운 예술문화가 나왔지만, 신화에 등장하는 비극으로 통해 우리 인간이 이런 것들을 직면할 수 있는 존재임을 부각한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 라는 것도 이런 신화적인 구조로 통해 우리 인간을 조명해 본다는 것이다. 그리스신화에서 본다면 당연히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비극, 아트레우스-아가메논-오레스테스로 이어지는 3대 부자에 대한 비극으로 인해 근친상간과 살인은 얼마나 인간에게 고통과 저주스러운 인생을 살게 해주는가를 알게 해준다. 서양 신화를 보면 이런 근친상간과 살인이 참 많은 것 같다. 게다가 그리고 그리스 신 중의 신인 제우스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의 아버지인 크로노스와 그의 할아버지인 우라노스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기가 찬다.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신(아내)에게 가혹한 행위를 하는 점과 태어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거나 혹은 남근을 절단하는 모습이다. 그 의미는 아버지와 아들은 권력관계와 어머니라는 여성을 두고 경쟁을 하는 존재이다. 그런 근친상간 신화가 유럽신화에서 많이 등장하고, 실제 유럽역사에서 어머니와 아들, 아버지와 딸은 아니더라도 남매끼리 피를 나눈 자녀들끼리의 이야기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것은 근친에 의한 관계와 살인은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프로이드-융과 같은 정신심리학 쪽과 라캉과 같은 후기구조주의 학자들로 의해 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구조를 파악하면서 이것이 서구 자본주의 사상 안에 백인우월주의와 연계가 깊은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신의 전쟁에 부자의 다툼은 권력이 남성에게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번은 대화이다. 말 그대로 대화를 나눈 이야기다. 대화의 상대는 소크라테스 중심인데,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인 플라톤처럼 서적을 남기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기록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저술한 것이다. 그런 소크라테스가 당시 그리스 공화국의 미움을 받아 독배를 받고 죽을 때의 이야기다. 여기에 총 4편의 이야기가 모아 하나의 거대한 서사구조체를 이루는데, 에우티프론-변론-크리톤-파이돈 순으로 그가 재판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기 전 1달이란 기간안에 이루어진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에우티프론편에서는 에우티프론이라는 사내가 아버지를 살인죄로 고소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서사로 아버지의 하인이 다른 사람과 실랑이를 거치다가, 그 다른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사람을 창고를 가둔채, 그의 대한 처분을 알아보기 위해 하인을 시켜 심부를 보냈다. 그러나 돌아오는 사이 그 사람은 기아로 죽었다. 거기에 대한 살인죄를 물어 고소하는 참에 소크라테스와 토론이 시작된다. 다음 변론에서는 재판장에서 배심원과 재판장을 두고 이야기하면서 그에 대한 철학적인 사고를 보여준다. 다음 크리톤편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소중한 친구 크리톤과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 장면에서 소크라테스가 죽는 이유는 악법에 의해 죽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신념과 철학적인 자세로 당당히 받아들인 것을 주목해야한다. 파이돈편에서는 소크라테스는 그의 친구와 제자들과 대화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한 위대한 철학자 이야기는 비극적이지 못해 신성함이 느껴지는 이야기다. 인간의 대화와 대화 사이에는 인간의 사상과 사고가 그대로 언어로써 표현한다. 언어를 흔히 우리는 language로 표현하지만  language는 쌍방향보다는 일정한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쪽으로 전달하는 언어다. 그러니깐 책, 영상, 음악 등을 보고 듣는 것이 곧 language이다. 그러나 langue는 양방향적인 이야기로 알고 있다. 스위스 언어학자이면서 최초로 기호학을 만든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라는 서적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런 대화를 통해 인간의 인생과 거기에 담긴 철학이 있다는 점이다.

 

3번째는 진화이다. 아마 이 부분이 이 서사철학이란 도서에서 분량이 제일 많고, 내용이 가장 독특해 보였다. 진화는 무엇인가? 솔직히 필자는 가이낙스작품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천원돌파 그렌라간을 통해 보는 가장 중요한 작품연계성은 진화이다. 이 3작품에서 진화라는 코드가 확실히 잡고 있다. 인류의 최후의 진화는 모두 리리스에 흡수되어 LCA용액으로 되어 모두 어머니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화이다. 즉 모든 것을 파멸이다. END OF EVA에서 이런 점은 인간의 지나친 진화 즉 현재 사회에서 획일화되어 모두가 하나로 진화해버리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AT필드가 인간과 인간의 벽이다. 인간은 서로 벽이 있기 때문에 서로간의 객체와 주체가 확인되고, 게다가 성장과 발전의 차이가 생긴다.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는 참 독특한다. 추하고고 아름다운은 추미라는 미학이란 용어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미학에 대해 잘 설명하기 어렵다. 미학은 우리 인간이 아름답게 여긴다. 즉 참과 진리를 찾는 것이 미학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하게 제 생각에서는 그런 미학은 철학, 예술, 과학 등 다양한 학문이 연계가 된다. 절대적인 아름다운 추구하는 미, 그리고 추악한 면을 보여주는 추, 이런 미와 추가 공존하는 세상이야 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고, 거기에 진화는 과연 아름다운가 혹은 추한가? 아니면 인간은 멸망과 생존에서 추함과 아름다움을 어떻게 보는가를 이 작품에서 은근히 던진다. 철원돌파 그렌라간에서는 인간의 진화는 드릴과 같이 서사가 시작된다. 드릴로 인간은 문명을 손에 넣었지만, 드릴로 인해 멸망하고, 드릴로 인해 새로운 세상을 연다. 그러나 드릴이 지나가면 갈수록 열어가는 세상과 공간을 넓어지는 반면, 그렇지 못한 공간이 더 많다. 우리가 만약 부피가 한없는 직사각형에 원뿔을 계속 뚫어간다고 생각하자. 원뿔이 들어가는 만큼 공간이 나오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가득하다. 진화의 거부는 종족의 소멸이고, 가속된 진화는 살아남은 사람만큼 그 이상의 사람이 소멸된다. 이 3편에서는 그런 진화라는 과학적인 이야기를 다원의 진화론을 두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진화하니 최근 한국인의 신체구조를 보자. 최근 한국인들의 키와 몸무게는 한반도 전쟁이 일어난 때보다 10~20CM가 더 커졌다. 그만큼 신체적인 조건이 발달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미생물에 대해 항생력이 약해지고. 여성들은 키카 커진 반면에 2세를 출산하는 능력이 저하되었다. 전에 미국에서 나온 "금발이 너무해"라는 작품이 기억나는데, 그 주인공 여성은 금발의 미인이다가 가슴과 엉덩이가 큰 전형적인 글래머여성이다. 그란데 미국이나 유럽권에서는 이런 말이 존재한다. 금발의 미인은 머리가 나쁘다. 그런 편견과 고정관념은 산업혁명아래 여성의 신체가 점점 남성처럼 날씬해져가는 것을 문화인류학이나 인류진화학에서 다루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금발이 너무해의 주인공은 핑크색 옷과 가방, 차. 개옷, 물품을 가지고 다닌다. 여성에게 핑크는 핑크칼라는 남성들의 업종이 블루칼라 반대어로 주로 직업이 간호사나 디자이너, 통신안내원 등 여성들이 주로 하는 업무를 가리킨다. 핑크색으로 물든 여성이 법대와 법정이라는 전형적인 남성위주 사회에서 겪는 일들을 코믹하게 해쳐가는 이야기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본주의 논리와 여성의 관계 그리고 한편으로 인간(여성)의 진화가 과연 인간에게 진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가? 혹은 퇴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가도 생각해봤다. 물론 진화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아닌 동식물과 미생물들의 축제이다. 인간이 지구에서 차지하는 진화의 이야기는 아주 극소수이니 말이다. 진화를 아는 순간 인간은 자연을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 하지만 그 당시에 다원의 사고는 기존 인간은 신의 분신이라는 서구사고의 틀을 생각하면 엄청난 혁명이다.

 

4번째는 동화이다. 동화로는 월트디즈니사가 다시 재구성한, 백설공주, 신데렐라, 안데르센 원작인 미운오리 새끼는 겉보기에는 엄청 단순해 보일지도 몰라도 거기 안에는 다양한 이념적인 문제와 인간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채우져있다. 특히 신데렐라의 이야기 원작은 아주 잔인하다. 얼마나 잔인하면 신데렐라 언니들이 왕자를 만나기 위해 신데렐라 유리구두를 신으려 했는데, 발이 작아서 못신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신발에 발을 맞추기 위해 발뒤쪽을 잘라내었다고 한다. 아마 당시 미인의 기준에서는 발이 작은 여자가 주요 포인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감수하고 왕자를 만났지만, 계모와 언니는 그런 계략을 들통나서 결국 사형을 당하는데, 그 사형하는 삽화부분에서 사형방법이 참수형이라는 점이다. 교수형이나 혹은 독약이 아니고 사람의 목을 벤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목을 베는 것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 단두대가 설치되어 대부분 사형수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하지만 여기서는 도끼를 든 도부수가 모녀의 머리를 나무통에 올리고 형을 집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신데렐라이야기는 중세유럽시대에 전해온 민담이라는 점과 모녀의 간계를 가지고 사형을 집행할 정도로 벌이 심했다면 이야기가 만들어질 당시 국가는 상당히 백성들에게 가혹한 법을 적용한 시절이란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이 서적에 없지만 원래 신데렐라 이야기를 올라가면 그렇다. 다른 공주이야기로 백설공주가 등장하는데, 우리가 보는 동화에서는 백설공주가 아주 착하고 억압받는 존재라면 원래 신화적인 이야기에서는 아버지와 딸이 간통을 나누는 존재고, 어머니로써는 그런 공주가 아주 불쾌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깐 옆에 있기에는 부적절한 것이다. 그래서 성에서 내친것이고, 그런 근친상간적인 이야기가 월트디즈니에 의해 어머니는 마녀로 탈바꿈했고, 백설공주는 아주 착한 아가씨가 된 것이다. 현재 등장하는 신데렐라 컴플렉스의 이야기는 디즈니메이션에서 많이 작용하는 것을 보면 서구인들의 추악함을 감추는 행위는 동화로 인해 엿볼 수 있다.

 

5번째는 혼화, 즉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이 왜 혼화인가란 말에서 솔직히 애니메이션 보는 사람 중에서 애니메이션의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자세하게 알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은 것으로 안다. anime는 무형의 존재에 혼을 불어넣어 마치 살아움직이는 존재로 만드는 것을 뜻하고 그런 단어가 결국 animation이란 단어가 탄생했다.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원래의 단어의 의미의 차이는 상당하게 다르다는 걸 확인해준다. 이 책에서 보여준 작품은 백설공주, 그리고 토이스토리, 공각기동대와 이노센스, 이웃집 토토로가 나온다. 애니메이션 속에 보여주는 비현실 세계는 현실을 다시 돌이켜 봐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과연 이런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 과연 이런일들이 존재할까? 애니메이션 화면 안의 캐릭터는 영화와 드라마처럼 실재인물이 아니다. 그런 인물이 아니기에 작가와 감독의 의도로 충분히 이끌어 갈 수 있다. 왜냐면 영화와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배우와 연기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이미지가 대중이나 혹은 스텝진에게 박혀있어 그들과 작품에 대한 연계점을 찾아 가야하는 입장이라면 애니메이션은 말 그대로 새로운 세계를 연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작업이 영화보다 어렵다. 영화배우는 애시당초 존재하니 거기에 맞출 수 있으니 말이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이 서사철학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생각하는 일반대중과 사고가 다르다. 철학과 교수가 오히려 애니메이션 안에서 철학적 사고를 유발하는 것은 우리가 현재 애니메이션을 보고 오타쿠가 오덕과 덕후라는 경계가 모호하게 되버린 현 시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하는 가를 여기서도 읽어볼 수 있다. 오타쿠, 오덕, 덕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대중이지만 이런 존재가 어떤 존재로 각인하게 만드는 것은 그런 단어로 지칭되는 존재이다. 일반대중의 사고방식은 바꾸기 어렵다. 그들은 미디어의 지배를 받아 미디어가 제공하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뭐든지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유명한 후기구조주의 학자는 대중은 무지하다를 위로 올라가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인간은 무엇을 알기 전에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칸트는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상으로 생각한다고 하는 것처럼 단어와 용어자체가 모호하면서 마치 아는 듯하게 말하는 대다수 대중들에게 희생당하는 우리같은 존재를 보면서 참 모순적인 현실을 직감한다.

 

6번째는 만화이다. 만화를 보면 사람들이 아주 낮고 알기 쉬운 존재로 생각하지만 사실 이 만화는 엄청난 예술이다. 원래 인간은 글자와 그림을 동시에 사용하다가 어느 순간 그림과 글자가 분리되어 버린다. 글자는 문자서사인 소설로, 그림은 회화로 되어버린다. 그런 글과 그림이 동시에 들어간 만화야 말로 인간의 문자와 그림을 동시에 이어주는 예술이다. 프랑스에서 예술이 총 9가지로 나누는데, 거기 9번째 만화가 들어간다. 예술과 철학의 나라인 프랑스에서는 만화가 예술인다. 그러나 한국에서 만화는 그저 심심풀이 땅콩보다 못한 존재로 낙인찍혔다. 마치 만화를 보면 질이 낮고 한심한 존재로 보는 것이다. 전에 꽃보다 남자가 TV에서 큰 히트를 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꽃보다 남자가 원작이 만화고, 그 뒤에 애니메이션과 영화로 나온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이 안다. 그런데, 이런 구조를 통해 신데렐라콤플렉스 캔디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은 모른다. 그리고 대중들은 그런 드라마를 보면 환호성과 즐거움을 자아낼 때 다른 만화책을 보는 이들보고 오타쿠라고 한다. 오타쿠들이 보는 미소녀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화보다 못한게 꽃보다 남자인데 말인데, 여기에서 몇 편 중에서 우리가 잘 아는 작품을 소개하겠다. 나이가 조금 있는 분이라면 이 만화와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을 알 것이다. 찰리 브라운과 스누피를 말이다. 만화책 피너츠가 원작인 작품에서 스누피의 대화로 본 인간사회의 모순과 현실은 아주 해학적으로 그린다. 기본적으로 말하는 개는 없지만, 개가 사람처럼 사고하고 행동하지도 못한다. 스누피가 주변 등장인물이 하는 이야기에 따라 혼잣말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대해 오류를 지적하게 해준다. 참고로 우리가 봤던 스머프를 아는가? 스머프를 내가 어릴적에 많이 봤다. 그 당시만 해도 마르크스의 서적들은 일반인들은 보는 것을 금지했거나 혹은 막 해제가 되었을 것이다.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이런 마르크스의 서적은 불온서적으로 간주되어 일반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 스머프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만든 작품이다. 더욱 놀라운 건 미술의 거장인 피카소를 아는가? 그도 마르크스주의자이다. 일본의 미야자키 하야오도 마르크스 주의자다. 그의 작품인 붉은돼지는 아나키스트 즉 무정부주의적,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면 원래 페미니즘과 관련된 학문에서 마르크스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현재 페미니즘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다고 하지만, 페미니즘 학문에서 마르크스는 중요한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그녀는 분명 공주이면서 백성과 동등한 권력아래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상대국 공주는 그런 수평적인 관계가 아닌 수직적인 관계로 이원화된 계급사회구조가 나온다. 수평적인 계급관념은 평화롭고, 수직적관계는 공격적이다. 즉 스머프에서도 등장하는 수평적인 계급과 직업이 등장하는 스머프사회와 비교해 보라. 

 

7번째는 영화이다. 영화는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영상문화로 가장 친숙하다. 현재 대중문화에서 영화는 중요하다. 데이트하는 남녀가 있다. 그들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 주말에 영화 한편 할래? 이런 대화는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흔히 들을 수 있는 대화다. 영화야 말로 그런 대중들의 문화수준과 혹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적인 상황을 대해 잘 알 수 있다. 나는 영화만 보고 애니메이션 무시하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본다. 왜냐면 그들은 정말 영화의 요소와 구조, 텍스트의 의미와 해석은 잘은 모르면서 마치 자기가 우월한 존재인양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1999년 한국만화애니메이션 학회에서 엮음 일본애니메이션의 분석과 비판에서 현재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한창완 교수님의 논문을 참조하면 이런말이 나온다. 제목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스펙터클과 테크노오리엔탈리즘이다. 거기서 문화산업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단어의 용어적 정의를 보면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는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일종의 '이데올로기 조정기능'의 개념이다. 산업혁명 이후 갑자기 등장하게 된 신흥자본가들이 기계를 움직이기 위한 노동력과 반복적인 작업을 분업화하였고, 거기에는 발생되는 비인간화의 노동문제를 잠재우기 위해 고급문화에 국한되었던 문화라는 유형을 대중문화로 전환, 확대시키면서 문화는 대중적이고 상품적인 개념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결국 초기에 등장한 문화산업의 개념은 통제적인 이데올로기를 양사하기 위한 문화산업화의 매커니즘이었고, 연구자들은 그러한 개념을 통해 사회적 권력과 자본이 양산시키는 문화담론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여 왔던 것이다.> 이 말을 보면 대중문화에서 영화는 그런 자본주의적인 논리가 상당한 문화산업이다. 영화에서 내러티브적인 구조는 도식화된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조장과 거기에 따른 파괴와 폭력적인 문제해결 수간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최근 흥행한 아바타에서는 이런 내러티브적인 요소가 상당하게 강한점을 생각하고,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사례를 생각해보자. 나는 아바타에 대해 영상이미지와 사운드는 정말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외계인 별에서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관과 오리엔탈리즘, 선악의 이원화적인 구도로 통한 헐리우드 영화의 전형적인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은 여전하다. 참고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라는 지역에 모인 학자들을 지칭한 말로 프랑스 구조주의와 그 뒤를 이은 후기구조주의학자와 더불어 현대 철학, 미학, 인문학 등을 선도한 학자들이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서 이 프랑스와 독일은 상당한 역할을 하는데, 철학자 중에서 칸트와 쇼펜하우어, 칼 마르크스, 엥겔스, 막스베버와 같은 철학자들이 독일태생인데, 1차와 2차대전 이후 프랑스 구조주의학자와 후기구조주의학자들에게 명성을 넘겨주었다. 참고로 영화는 하나의 영상서사물인데, 이 영상서사물의 이미지, 소리, 스토리, 카메라 시점 등과 같은 다양한 체계와 구조를 통해 영화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영상기호학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정립한 사람이 프랑스 기호학자인 크리스티앙 메츠이다. 전에 영상기호학이란 책을 봤는데, 너무 어려웠다. 그의 저서인 상상적 기표란 책을 읽고 싶지만 아직 현실적으로 이해도가 낮고, 위에 철학자나 사상가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엘리트인양 문화인양하는 인간 중에서 그런 크리스티앙 메츠라는 인물과 영상기호학이란 학문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전공자나 영화에 아주 깊게 파고들어가지 않은 이상 어렵다. 영화에 깊게 파고들어간 사람들은 오히려 애니메이션을 우대해 준다.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나 야마가 히로유키의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가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보다 영화쪽에 파고드는 사람들이 더 많이 보고 글을 적는다. 그런 점을 보면 솔직히 씁슬하다. 200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극장판 신세기 에반게리온 서라는 작품이 퍠막식 때 방영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열린 프랑스 안시 영화제에서 극장판 신세기 에반게리온 파가 상영되는 것으로 안다. 게다가 공각기동대 감독인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신작도 나온 것으로 안다. 애니메이션은 위와 같은 7가지 텍스트와 함께 동일한 서사구조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게다가 깊게 파고들어가면 과연 홀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즐기고 보는 이유로만 억압을 당해야만 하는가이다. 물론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만화 등에 좋은 것과 나쁜 것만 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을 좋고 훌륭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나쁜점만 본다. 그게 제일 어려운 과제이다. 내가 이 더운날에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고 집에서 편하게 안쉬고 이런 눈아픈 글을 적는 이유는 현실은 아무도 만들어주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겪었기 때문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유토피아적인 세계가 많다. 하지만 현실이란 토피아는 그렇지 못하다. 결국 유토피아를 만들려면 이 현실인 토피아에서 구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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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1 대우고전총서 19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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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形而上學)이란 무엇인가? 솔직히 말해 형이상학이란 단어는 철학(哲學)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이며, 인간의 이성 사고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나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 너무 깊이 자세하게 시시비비 하나하나씩 걸고 넘어가면 더 이상 무지한 범인(凡人)으로서 해석가능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이성에 대해 깊이 통찰하고 거기에 대한 깊은 반성과 비판으로 통해 인간 이성을 돌아보게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런 어렵게만 느껴지는 철학이라는 학문과 거기에다가 형이상학이라는 뭔가 현학적인 단어에서 약간 움츠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 책을 읽고, 아직 페이지 전체가 아닌 일부만 보면서 이런 글을 적으려고 하는가? 그것은 이 책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과 행위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사건과 만남으로 통해 수많은 판단의 갈래에 서게 된다.


문제는 그 판단에 대한 양자선택에서 우리의 선택이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반의적인 질문이다. 예를 들면 어느 지역에 어느 시대에 어느 특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하나의 이념이나 가치관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게 된다. 그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이념이나 가치관이 어떻게 보면 옳을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옳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을 경우가 있다. 그저 그것이 하나의 정당한 가치관과 법적인 효율을 가진 인식으로 자리 잡혔을 것이다. 이런 인식론적인 교조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그 판단기준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 판단기준에 대해 비판하는 그 자체가 비판받을 것이라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인간의 인식에 대한 오류가 윤리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의 정당한 이념으로 정하여 인간의 가치가 윤리도덕적인 가치관이 아닌 이념의 잣대 아래 드리워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면 어떤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을 좀 더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방편이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의 사고를 오염시키며, 인간 자체에 대한 이성능력을 저하시킨다면 그것은 바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무엇에 의해 잘못 되었는지 생각하고 개선할 필요가 있다. 내가 처음 본 순수이성비판 1권의 흐름은 그렇게 느꼈다.


칸트가 처음 머리말에 주지한 인간 스스로에 대한 이성 비판 오류는 인간이란 칸트가 살았던 당시와 혹은 칸트가 태어나기 이전과 혹은 칸트가 죽어 현재 이 글을 적는 내가 사는 현대에서도 종종 보는 일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행동에 대해 언제나 생각하고 판단하여 본인의 이성아래 움직인다.


그러나 그 이성이 과연 정당한지 혹은 부당한지에 대해 결코 의미를 두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어느 일정한 흐름과 거대한 틀에만 맞추려고 한다. 특히 자신의 가치를 내세워 스스로 보여주기 보다는 거대한 벽과 틀에 숨어 가면을 쓰고 타인을 공격하는 무비판적인 인간들은 그들의 이성이 과연 있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마저 든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엄청난 과오와 행패, 불량한 태도를 보임에도 그것이 잘 못되었다는 반성보다 오히려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만 내세운다. 그게 과연 올바르고 정당하고 가치가 있는 일인가? 자신의 이성에 대해 비판하지 않고 그저 그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이성으로 비판하려고 드니 결국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이성능력 결함이다. 게다가 더욱 불행한 사실은 그들은 자신의 이성능력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결함이다.


이 결함으로 인해 또 다른 결함과 결함이 불러 우리는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누구나 동일한 조건과 환경, 그리고 성장과 기억, 경험을 소유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디서 태어나고 자라고 누구를 만나고 이야기하고 또한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조금씩 그 생각과 의견이 다르고 거기에 따라 판단능력과 행동범주도 다르게 된다.


그렇지만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모두 이성을 지닌 존재라는 점과 그 이성이 지닌 인간은 모두 자유와 평등을 누릴 권리와 지켜나갈 책임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소유한 이성능력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관계성까지도 영향을 주므로 인간의 무비판적인 이성능력은 결국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타인에게 보여준 행동에서 본인은 옳다고 보겠지만, 사실 엄청나게 잘못된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문제들이 실제 발생하더라도 그 과오를 범한 인간들은 그것이 틀렸다고 해서 반성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아닌 남을 비판하고 그것은 어느덧 비난과 비방으로 이어진다.


과연 인간은 자신이 정말 올바른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에 대해 진실로 그러한지 알아나가야 한다. 그것은 사회적 정치적 동물인 인간이 타인과 교감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안타까운 인간의 오류는 자신이 윤리적으로나 혹은 도덕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이성이 결국 그 이성을 지배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받는 것이 아닐까 라고 하는 의문이다.


만약 그런 교조적인 신념 아래 타인과 교류하려는 인간은 오히려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판단에 대해 오류에 빠진 인간들과 더불어 더 큰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라는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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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교양사상서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정영하 옮김 / 산수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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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으면서 1페이지 1페이지씩 넘어갈 때마다 그 의미와 내용은 마치 너무 당연하고 그래야할 주장처럼 들렸다. 그가 주장하는 인간의 자유라는 것은 모든 인간이 가져야할 재산이고, 모든 인간이 책임지어야 할 하나의 큰 숙제로 보였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하나의 천부권이므로 모든 인간에게는 자신의 자유 권리에 의해 자신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h통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다.


그런다고 해서 모든 자유가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인일지라도 그 타인 역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 권리를 소지하고 있다.


우리는 자유라고 하면 마치 거대하고 웅장하고 상당히 철학적으로도 볼 수 있지만, 자유라는 것은 사실 알고 보면 무척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사용할 있는 하나의 행위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그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그는 자유로운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자유에는 의무와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어서 그 일을 하게 되면 그 일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무시한다면 다른 사람과 약속한 특수한 약속과 조건을 일방적으로 파기시키는 일로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약속을 파기시킨 사람으로서 어떤 특수한 이익이나 즐거움을 얻겠지만, 이와 다르게 그 약속이 파기될 것이라고 판단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정신적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해 마치 자신과 같은 입장을 고려하여 그 타인에게 합리적이고 바른 행동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것 역시 자유가 아니다. 사실 내가 생각하고 싶은 자유란 “내가 소중하면 남도 소중하다”라는 상대방에 대한 인격존중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을 적을 시에는 존 스튜어트 밀이 생각하기에 그렇게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남녀차별로 인해 여성투표권이 완전히 일반화되지 않았고, 공장에서는 노동자가 아닌 어린아이들이 고뇌 노동을 하고 있었으며, 아직 시대가 근대화가 되지 않아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잡아온 흑인들은 노예로 고통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유일까? 사람 위에 사람이 있는 것은 위에 있는 사람이 자신에 비해 능력이나 판단력이 낮은 사람들을 올바르게 지도하기 위해 존재해야하는 것이다. 그 위에 있다는 사람조차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의 이기심이 타인의 자유와 인권을 무시하는 처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권력을 마치 하나의 자유로 인지하여 자유라는 단어가 어느 순간 모두를 위한 자유가 아닌 특정을 위한 자유가 되어 버린 것일까?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혼자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정치적·사회적인 동물이므로 그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친분을 쌓고 서로 대화로 통해 자신들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관에서 남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은 남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 혹은 그 소속무리의 이기심에만 충성할 뿐이다.


자유 그것은 무엇인가? 나만 좋으면 자유일까? 아니면 타인의 시선 아래 살아가는 것이 자유일까? 최근 미디어의 발달로 인간의 소통방법은 예전보다 쉽고 간편해졌다. 그러나 정보의 유출, 개인 신상 해킹, 정보조작, 여론조작 등은 여전히 인간이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있다. 왜 인간들은 자유롭지 못할까?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는 것은 팬의 권리이기도 하나 그 연예인에 대한 인격을 존중해야하는 것은 팬의 의무이기도 하다.


인간은 항상 그 의무와 권리라는 두 가지에서 항상 뭔가 갈등하게 된다. 나를 위한 것인가? 남을 위한 것인가? 그 적절한 경계점으로 통해 해결해야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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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화
김익두 지음 / 한국문화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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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는 우연히 신화에 대한 매력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그 신화라는 신이 나오는 이야기에서 우리 현대에 살아가는 많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 생활, 습관, 일상들을 꾸준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한다.

오늘이 무슨날인데 왜 그렇게 정해지고 되었을까? 혹은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민속이나 풍속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상이나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고 말이다.

솔직히 그런 생각을 한두번 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나같은 유형의 사람은 신화라는 매개체를 연극, 문학소설, 영화보다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통해 접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신화라는 것에 가깝게 다가간 이유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 신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신화라는 거대한 인간의 유산으로 통해 과거의 인간을 보는 게 아니라 오늘날의 인간까지도 보게 된 것이다. 신화는 결정되어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끝없이 생기고 변화고 소멸하고 탄생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의 사실이란 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런 매력을 나는 처음에 에디스 헤밀턴의 그리스로마신화로 접해보기 시작했다. 거기서 느끼는 신화의 이야기는 재미있으면서 뭔가 당시 인간의 사고까지도 느끼기게 충분했다. 하지만 그리스로마신화는 우리 한국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닌 그저 서구사회에서 시작된 이야기라는 것이 조금 내 자신에게 부족한 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우연히 접한 김익두 교수님의 한국신화는 이 신화라는 주제가 뭔가 낯설게 보이기 보다는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마저도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 책이다. 건국신화와 무속신화에서 한국의 역사기록이나 혹은 당시 생활상, 그리고 인간 세계관까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제일 인상깊은 내용은 우리 민족은 무속신앙이 흐름이다. 그 무속신앙은 도교, 불교, 유교를 흡수하여 발전하고 최근에는 서구 크리스찬 문화까지 흡수할 수 있다. 우리는 무속신앙이라면 그저 미신이라고 하나 그 미신이 우리 일상생활에 미치는 생각을 한다면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예전에 집에서 문중제사가 있어서 시골에 갔는데, 그때 내가 조상신에게 절을 하고 난뒤에 따로 토지신에게 제를 올린 것이 있었다. 그리고 고시례라고 이야기하면서 제삿밥 일부를 땅에 뿌리는데 이것이 예전 한국 고대국가에서 고씨성을 지닌 사람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함 행위하는 점과 시골이나 공원에 지나가다 돌무더기가 많이 쌓여 있는데, 이것 역시 무속신앙의 하나였다는 점이다.

신화에서는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짐승과 식물, 심지어 상상속의 존재까지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한다. 까마귀가 왜 아장아장 걸어다니는지 노루가 왜 꼬리가 짧은지도 말이다. 심지어 제주도 지형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도 나오니 신화라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가지고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든 혹은 하지 못하든 신화를 여전히 끊없이 흘러가는 물줄기와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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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 시공 아크로 총서 6
브라이언 매기 지음, 박은미 옮김 / 시공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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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우리 인간은 철학이 무엇인가? 하고 물어본다면 쉽사리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이란 우리 인간의 사고와 관념, 그리고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 매우 깊이있는 내용을 다루는 분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철학을 알고보면 그렇게 멀게만 혹은 어렵게만 볼 수 없는 것도 철학이다. 그 이유는 철학이란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고민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 예로써 최근 어려운 군사정치외교사항같은 거대한 사건 속에서 우리는 국가정책이나 외국의 반응을 두고 이것에 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혹은 이렇게 큰 일들이 아닌 작고 사소한 일들로도 철학을 음미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보편적인 부분으로서 인간의 가치와 사고, 그리고 이성과 감정을 얼마든지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언제나 철학적인 사항에 맞이하여 살고 있으나 본인 자체가 철학이란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일이기도 하다. 과연 지혜란 무엇일까? 우리 인간은 문명을 가지게 되면서 인간 혼자가 아닌 여러 인간이 모여 사회, 조직, 국가 등의 다양한 단체를 만들어 갔다. 그렇게 거대한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 그 자신마저도 깊이 생각하고 고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고찰하여 지혜를 사랑한다는 그 철학은 언제 어디서 시작되어 오늘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까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우리는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철학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진행되었다는 것은 아마 상당히 길고 긴 시간을 보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길고 긴 시간을 단번에 이해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무리다. 시간이 누적된 만큼의 여러 철학들이 누적되어 왔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이 누적되어 처음 철학을 접하는 사람들은 철학에 대한 접근을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할 지도 모른다. 그 시간에 비해 뭔가 흐름을 잡아 낼 수 있는 방법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브라이언 매기 교수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는 철학을 접근하고 또 어떤 철학자가 있는지 알기에 매우 좋은 서적이다.

대부분 철학도서들은 모든 내용이 문자텍스트로 이루어진 반면, 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에서는 말 그대로 사진과 그림으로 나와 있어 어려운 철학을 접하는 사람에게 다소 접근하게 쉽게금 작성하였다.

사진과 그림으로 당시 그 시대적 상황이나 배경, 그리고 현재 상태를 알려줌으로 우리가 상상을 유도할 수 있게금 해준다.. 우선 이 도서는 서양의 철학자인 브라이언 매기 교수가 집필했으므로 근본적으로 서양중심 철학역사이다.

모든 서양철학의 시작점은 고대 그리스이다. 그리스의 위대한 3명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이전과 이후, 그리고 중세로 넘어가면서 교부철학의 토마스 아퀴나스, 중세로 넘어가면서 데카르트와 임마누엘 칸트, 근대로 넘어가면서 헤겔, 쇼펜하우어,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존 스튜어트 밀로 오고 현대로 오면서 아이슈타인, 슈뢰딩거, 메를리 퐁티와 같은 철학자가 나온다. 물론 여기에 언급한 철학자 아니더라도 수 많은 철학자들이 나오고 그 철학자들이 일꾸어낸 위대한 책과 이론들이 알기 쉽게금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서적에서 약간 아쉬운 부분은 철학사 대부분이 고대, 중세, 근대 중심으로 되어 있어서 현대철학에 대한 분량이 조금 적어 보인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철학을 접하게 된 동기는 현대철학자이다. 특히 프랑스 후기구조주의학자인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에 흥미가 생겨 이쪽에 발을 담구어 보았다.

물론 전체적으로 철학에 대한 이해능력이나 학습수준은 이제 걸음마에 불과한 단계다. 그러나 철학이란 것이 매우 고상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매우 일상적이기도 하다. 오늘날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인간의 삶과 가치 그리고 이상과 이념들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한번 생각하기 전에 이 책을 보는 것으로 하여 그 실마리를 찾아 보는 것이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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