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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천사 1
히로유키 니시모리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건방진 천사는 개인적으로 내가 매우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다. 작가명은 니시모리 히데유키 초기작품으로 "오늘부터 우리는"라는 것으로 다소 코믹적인 요소에 학원물로 지금도 계속 꾸준히 작가활동을 보이고 있다.

니시모리 히데유키 작가 작품 대부분 보면 주로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란 사실과 그 주인공들이 주로 싸우는 일들이 나온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부분에 대해 다소 폭력적인 면이 부각되지 않을 수가 없으나 건방진 천사로 넘어오면서 폭력적인 상황이 연출되더라도 그 자체가 나쁘게 될 수만은 없다. 

이 작품 주인공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이나 가치가 그렇게 허무하게 넘어갈 내용이 아니라는 점이다. 건방진 천사에서 이 건방지다는 천사는 바로 아마츠카 메구미라는 고등학생이다. 그녀는 아주 완별한 외모와 두뇌, 게다가 마음씨도 매우 강하다. 게다가 메구미는 집이 부자라서 어느 그 누구라도 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완벽한 여고생에게는 다른 누구에게 털어놓지 못할 고민이 있다. 바로 자신이 원래 남자인데, 나쁜 마법사의 주문으로 인해 자기가 여자가 된 것과 그 여자가 된 사실은 자신과 자신의 친구인 미키만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완벽한 여자의 모습인 메구미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여자로 취급하는 것을 싫고 남자로 인정해달라는 사실이 매우 바보처럼 보이나, 사실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적인 갈등까지 연결될 수 있다고 본다.

 건방진 천사에서는 사회적인 통속이 잘 보인다. 여자아이는 무조건 이러야 해! 여자는 이렇게 하면 안되라는 대사나 상황이 묘사된다. 특히 메구미의 친구인 미키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집안사정으로 원하지 않은 결혼을 강요받을 때는 일본이란 사회가 아직까지 여성에 대한 권력적인 부분을 은근히 제시한다.

 그렇게 사회적인 권력의 희생자가 되버린 미키는 행복 대신 살아있는 인형으로 살아갈 운명에서 메구미와 메구미 친구들의 작전으로 그 결혼식은 무산되고 미키는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 하지만 여전히 미키를 노리는 상대 남자는 계속 미키를 납치 하려하고 미키의 친구들을 위협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메구미와 메구미의 친구들 사이에서 진짜 강한 것이 무엇인지 진짜 남자는 무엇인지 우리에게 슬그머니 질문을 유도한다. 메구미에게는 4명의 남자친구들이 생긴다. 바보같은 소가, 어리숙한 이치로, 변태같은 야스다. 무사같은 코바야시이다.

 어느 누구를 봐도 남자같은 사람이다. 소가는 바보같아서 남자다우며, 이치로는 너무 평범하여 남자다우며, 야스다는 뭔가 변태적인 부분에서 남자다우며, 코바야시는 신사적이면서도 강한 마음을 가져서 남자답다. 어느 누구도 남자라고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메구미는 자신이 남자라는 생각으로 같이 우정과 모험을 나눈다.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존재감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종의 성장물인 트렌스 섹슈얼(TS) 작품인 것이다. 그러면서 친구는 과연 무엇인가? 진정한 우정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에게 질문한다. 이 작품 최종장에 가면 메구미는 본래 여자이고,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소가는 어린 시절에 만났던 사람이다.

 메구미는 어린 시절 개구쟁이였으나 자신이 여자라는 점에서 또래 남자아이들부터 무시당하는 것이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시비거는 남자아이들을 모조리 혼내주었다. 어느날 메구미는 남자아이가 아닌 어른들에게도 창피주는 바람에 큰 봉변을 당한다. 그 나쁜 어른들이 건물 옥상에서 유리파편을 메구미에게 던진 것이다.

이때 메구미에게 혼난 남자아이 중의 하나인 소가가 메구미를 보호하며 유리파편을 막아준다. 대신 소가는 얼굴에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심한 출혈로 병원에 실려간다. 이때 소가가 메구미에게 이야기한 한마디로 인해 메구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굴욕을 당한다. 그리고 자신이 남자가 되지 못한 점을 분하게 생각했고, 그때 마술사를 만나 자신이 여자지만 남자가 되었다는 최면에 걸린 것이다.

 작품 마지막 마법의 최면이 깨어지고 메구미는 다시 예전의 기억을 찾지만, 그 부분이 약간 재미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남녀 사이에서 왕자가 공주에게 키스를 하여 마법이 풀린다면 여기서는 공주가 왕자(왕자가 아닌 일반 건달이지만)에게 키스하여 마법이 풀린다. 기존에 있던 수동적인 여자아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능동적인 여자아이로 묘사된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메구미와 메구미의 남자친구 4명이 펼치는 남자다움에서 최종승자는 메구미가 된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남성 안에 완벽한 여성성인 아니마와 여성 안에 완벽한 남성성인 아니무스에서 메구미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겉으로는 여자지만 그 메구미는 세상 어떤 남자보다 더 남자다운 사람인 점은 분명하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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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발리에 1
우부카타 토우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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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가 처음에 슈발리에라는 작품을 잘 몰랐습니다. 단지 예전에 프랑스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있다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제가 아는 분이 이번 서코에서 슈발리에를 한다고 하길래 한번 날잡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습니다. 슈발리에라는 작품은 루이 15세의 배경으로 프랑스 전제왕권이 한참 무릇익을 시절에 있었던 가상의 사건입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보면서 저는 감상해 보았습니다.

우선 슈발리에 서사구조에서 주인공 데온 드 보몽은 자신이 그렇게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누나가 시체가 되어 강가에 떠내려옵니다. 게다가 그 시체는 수은으로 중독되어 더 이상 부패하지 못해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누나에 대한 강한 사랑을 가진 데온은 누나의 죽음과 그리고 뒤에 가려진 배후와 음모를 밝혀내기 위해 다른 동료들과 같이 러시아, 독일, 영국을 돌아다니면 모험을 합니다.

작품 구조상 비극 플롯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라 죽음, 배신, 이별, 추격, 도망, 쟁취 등등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가장 갈등감과 분노, 슬픔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작품을 보면서 그런 극적으로 가장 심하게 느낀 부분은 바로 배신입니다. 배신이 참 무섭죠. 자신이 믿고 있던 인간에 배신을 당하는 만큼 슬프고 화가나고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기 때문입니다.

그런 배신과 음모, 죽음, 이별의 모든 기점은 바로 이 루이 15세가 살아가던 프랑스 전제정권입니다. 나라는 이미 왕족과 귀족의 횡포로 국민들은 배고프고 춥고 분노와 절망으로 살아가고 그에 반해 국민들을 억압하는 진정한 폭도는 잘먹고 잘자고 항상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한채 살아갑니다. 보통 나라에서 정치적으로 불안하면 상대국가하고 전쟁이나 혹은 외교정치군사적인 마찰을 많이 빚어낸다고 합니다.

국민을 그렇게 상대적인 존재로부터 위협을 받게금 하여 자신들의 정치권력 정당화를 내세우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루이 15세이 정치수단은 결코 바르지 않았습니다. 조금 스포일러적인 느낌은 강하지만 데온의 누나인 리아는 작품 내에서 억울하게 삶을 마감하는데, 그 삶을 마감하게 만든 사람은 다른 국가나 프랑스 반역세력이 아닌 리아가 충성했던 임금 루이 15세입니다. 루이 15세의 욕심과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권력자에 의해 억울하게 심장에 차가운 비수같은 칼에 찔리고 맙니다.

그 원인이 되는 사유는 이름하여 왕가의 시라는 비밀에 쌓인 도서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시인이라는 인물이 나타나어 시를 외우면 그것이 하나의 마력주문으로 통해 상대방을 제압을 합니다. 여기서는 말로서 하는 시가 왜 중요할까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이렇게 적어놓았다고 합니다. "시는 인간에게 역사보다 철학적이다"라고요. 이 의미는 역사는 이미 지나가 개인의 이야기라면 시는 허구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야기로 지금 살아가는 인간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차후에 왕가의 시는 데몽의 동료인 로빈에 의해 민중의 시로 바뀌고 민중의 시는 1769년 프랑스혁명으로 이어집니다. 개인적으로 1968년 5월 프랑스에 일어난 68혁명에도 많은 감동받은 적이 있어서 그런 점에서 슈발리에가 나름 작품의 전달요소는 좋았다고 봅니다. 과거 묶은 썩은 정치를 물리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것으로 말이죠. 로빈이란 존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청소년이고 새싹이기 때문이죠. 프랑스 혁명이 최종결론이고 프랑스의 새 미래를 그린 것이 슈발리에의 최종 목표이나 그래도 작품 내의 주인공은 데온과 리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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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비평의 선구자들 만화규장각지식총서 4
김성훈 지음 / 부천만화정보센터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현재 글을 적고 있는 본인은 만화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오타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애니메이션이란 문화를 그렇게 낮게 보는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른 시점과 관점에서 보자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본인은 만화애니메이션도 영화, 연극, 문학소설과 동일하게 작품적인 가치를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기존에 만화애니메이션을 본다는 것은 마치 봐서는 안될 것을 본다는 부정적인 관점보다는 만화애니메이션이라도 얼마든지 그 텍스트를 분석하면 명작 영화나 소설 못지 않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던 나에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부분을 한국에서 오래전부터 예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놀라우면서 감격하게 되었다. 한국 만화 100년사에서 만화라는 것은 그저 애들이나 청소년들에게 공부방해하거나 혹은 어른들의 킬링타임용으로 사용되는 저급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소개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이 만화애니메이션에 대한 비평공부를 하면서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한창완교수님에 대한 존재에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며,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만화평론가 박인하 교수님도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현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일부만 알고 있었지 그 시초와 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부청만화정보센터에서 구입한 한국 만화비평의 선구자에서는 본인이 알지 못하는 많은 만화비평가분들이 소개되어 있지 않은가?

한국 문학비평가의 대가인 故 김현 선생님으로 필두로 하여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한창완 교수님과 여성주의 만화비평가이신 백정숙 선생까지 존재하였다. 만화비평가들이 이렇게 많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으며 그분들이 얼마나 꾸준히 열심히 노력하고 활동하는지도 몰랐던 점에서 새삼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본인이 중학교 시절에 "반갑다 논리야(1992), 논리야 고맙다(1993), 논리야 놀자(1994)" 연속 3편 시리즈를 내시던 위기철 선생님도 만화비평가라는 사실이다. 이제야 본인은 만화애니메이션에 대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만화애니메이션은 결코 유치하거나 저속한 것만은 아니다라고.

단지 그 유치하고 저속하게 만든 것은 만화애니메이션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사람들과 사회적인식이라는 점이다. 특히 제일 기억나는 대목은 한국 최초 만화비평의 창을 여신 김현 선생님의 명언이다. "만화는 대중 예술이 아니라 대중들의 예술"이란 것이다. 만화는 일반 글에 비해 정보전달력이 빠르고 쉬우며 모두가 이해하기 편리하게 되어 있다.

특히 만화는 미술이나 회화쪽으로 많은 연관이 깊은데, 본래 근현대에 도래하기 전에 많은 대중들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래서 글을 읽을지도 쓸수도 없으니 그들이 남길 수 있는 언어적 수단은 오로지 그림이었다. 말을 할 수 있어도 말은 기록될 수 있는 녹음장치가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하더라도 쉽게 대중들에게 보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회화적인 기법이 많이 들어간 만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하기 좋은 하나의 매체이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의 한국이야 문맹의 해결이 잘 되어 있지만, 당시 자기 이름 석자조차도 쓰기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만화의 가치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만화는 그 표현력의 한계성이 없으므로 우리가 마음속으로 품은 생각이나 욕구를 얼마든지 그려낼 수 있다. 그렇게 그려진 작품은 대중들의 이야기와 생각을 그대로 내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독재정권과 언론탄압, 문화정책들은 만화산업에 부정적인 여파를 미쳤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시절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암울한 만화문화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바르지 않다. 만화를 제대로 보고 살피고 이해함으로서 우리가 갖는 값어치를 얻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바로 만화와 만화처럼 인식되는 애니메이션을 하나의 예술문화 범주로 넣는 것이 타당한 것이 아닐까?

예술과 철학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만화는 제9의 예술이고 영화(애니메이션은)는 제7의 예술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토록 멸시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철학과 예술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하나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그 안에 철학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부분을 인지할 만큼의 비평문화가 발달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만화애니메이션 문화의 올바른 정착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단순히 만화애니메이션을 많이 본다고 해서 그런 문화적인 부분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만화애니메이션을 올바르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을 성장하게 해야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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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 1
이시구로 마사카즈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나는 개인적으로 영웅적인 소재보다는 비영웅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영웅적인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극적인 플롯이나 웅대한 스케일도 좋은 내용으로 다가올 수 있으나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 막연한 이야기로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에게 엄청난 공감도 불러오겠지만, 적어도 우리 일상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보다는 못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리뷰할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라는 만화는 우리 일상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그리고 담백하게 담아내고 있다. 지금 리뷰적는 입장에서는 만화책보다는 shift사의 신보 아키유키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 버전으로 보고 적지만, 적어도 기본 인물과 공간, 흐름은 같다는 전제 아래 적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아라시야마 호토리는 고등학교 2학년을 다니는 평범한 여학생으로 우리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엉뚱한 소녀이다. 수학은 정말 싫어하고 엉뚱한 생각을 많이 하는 바람에 탐정놀이나 하는 소녀이다.

게다가 공부도 잘 못하고 체육도 잘 못하고 눈치도 느리며 때에 따라서는 상당한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아라시야마 호토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 일들 속에 함께하는 가족, 친구, 이웃에 대해서는 매우 훈훈하고 공감대가 느껴진다.

이야기의 발단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라시야마 호토리가 어린 시절부터 매우 친하게 지낸 마을 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할머니 가게에서 일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할머니는 어린 호토리를 계속 챙겨주던 사람으로 호토리가 어느정도 성장하자 자신의 가게를 메이드찻집으로 바꾸고 호토리를 가게 종업원으로 고용한다.

그리고 호토리는 학교에서는 학생으로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벌어지는 소동과 일들을 아주 잔잔하게 그냥 지나가지만 한번 다시 돌아보게 만들어주게 한다. 호토리가 일하는 메이드찻집이라도 사실 마을 주민이나 아저씨들이 들락달락 거리는 마을회관 같은 장소이다.

여기에는 생선가게 아저씨, 야채가게 아저씨, 호토리의 담임선생님, 호토리의 친구면서도 호토리를 좋아하는 생선가게 아저씨의 아들, 그리고 호토리의 단짝인 타츠노, 콘 선배 등 많은 사람들이 얽히고 설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사소하게 지나는 마을안에서 이야기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과 그 현실 속에 같이 하는 옆사람들은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은 일들이 많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다루어지는 이야기에는 호토리의 엉뚱한 일들로 마을 사람과 이웃들에게 민폐를 주겠지만, 그 민폐를 주고 받는 일들도 알고 보면 정겨운 이웃, 친구, 가족들 간의 이야기란 점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사람이 자라나고, 사람이 죽어가는 그 마을 속에서 자신의 존재는 세상에 비해 작고도 보잘 것 없을 지도 모르나, 그 마을 안에서 돌아가는 이야기에서는 매우 소중한 보물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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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메 우인장 1
미도리카와 유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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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츠메 우인장은 기본적으로 나츠메 타카기라는 한 소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 나간다. 나츠메 타카기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영혼과 귀신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며, 게다가 인간이 아닌 영적인 존재에게 물리적인 힘을 전해줄 정도로 강력한 영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보다 훨씬 월등한 신체능력이 다른 모습을 보이면 이상하게 보거나 배타적으로 대하기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나츠메 타카기는 자신의 이상한 능력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남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

단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 타인들에게 보이지 않은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남들에게 심한 배척과 따돌림을 받는다. 그의 따돌림에 가지는 상처는 타인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인간도 귀신도 피해 사는 외로움 인생을 살게 하였다.

게다가 그는 태어나기 시작하여 부모님들이 일찍 돌아가시어 주변 친척 손에 길러졌으나, 그의 이상한 행동에 다른 친척들까지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인간에게 외면당하는 진정한 외로움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날 자신의 먼 친척집에 오게 되었는데, 그 곳의 아저씨와 숙모는 슬하에 자녀들이 없었다. 아주 작고 소박한 마을에 위치한 작은 집이었으나, 매우 평화롭고 조용하고 인간을 느낄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나츠메에겐 이곳이 유일한 안식처이며 보금자리이었다.

그러나 그런 좋은 자리라도 그를 괴롭히는 귀신들에게 여전히 공격당하고 있었다. 그럴 때 우연히 고양이 모습을 한 야옹선생을 만나기 시작하였고, 그 뒤로 다른 친구들도 만났으며, 어느덧 인간과 귀신, 정령까지 나츠메 타카기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나츠메 타카기가 계속 귀신하고 어울리면서 그는 우인장을 발견되면서 우인장에 적힌 귀신들의 이름을 돌려주기로 한다. 그런데 그 귀신들과 만나면서 나츠메 타카기는 잃어버린 할머니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나츠메 레이코라는 사람은 나츠메 타카기의 친할머니다. 그녀도 타카기처럼 어린 시절부터 귀신을 볼 수 있었고, 게다가 영력이 강해 왠만한 귀신들은 다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도 너무 외롭고 불행했는지 나츠메의 아버지를 놓은 후에 일찍 세상을 하직한다. 나츠메가 우인장에 적힌 이름을 귀신들에게 돌려줄 때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할 때마다 할머니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추억이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할머니를 이해하고 아저씨와 고모의 소중함을 느끼고 주변 친구들도 만들며 주변 귀신과 정령들과 같이 친하게 지낸다. 이렇게 외로운 한 소년과 그리고 불완전한 존재들이 어울리면서 서로 돕고 하는 모습에서 나츠메 우인장은 하나의 잔잔한 소설처럼 다가온다.

 흔히 치유계 작품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인간의 무의식적인 심리나 욕구에 맞추기만 급급한 것이 현대 만화와 애니메이션, 소설, 영화의 추세이다. 그러나 나츠메 우인장은 인간의 욕구와 심리보단 그 작품 내에 함유되어 있는 그 이야기로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세상에 버림받은 존재들이 그리고 외롭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항상 서로를 의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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