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 내 메갈리안에 대한 문제로 많은 당원이 탈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여성 정의당 회원이 자신의 글을 올린 것을 링크를 타고 읽었다. 지금 내가 가장 열받는 사실은 이른바 지식인이란 자들이 정확한 전후맥락의 상실과 자신들의 발언에 대한 논리적 모순이 있다는 점을 간파하지 못한 점이다.


한국사회든 세계사회이든 남녀차별은 있었고, 여성은 억압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19세기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이 영국 서프러제트 운동에 큰 방향성이 되어주었다. 서프러제트 당시 그녀들은 돌을 단져 유리창을 깨고, 우체통에 폭탄을 집어 넣으며, 심지어 방화사건까지 일으킨다. 


그래도 그녀들이 인정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들이 주장하는 바가 언제나 한 가지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위한 과정에서 폭력이 수반되었다고 해도, 그 폭력은 대화를 원하는 것이다. 대화를 하는 것은 논리와 감성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지금 메갈리안 사태는 폭력만 있고 대화는 없다.


서브컬처 향유를 하면서도 리뷰와 학회논문을 쓰면서 지금 참 한심해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전후맥락성과 이번 사태의 가려진 폭력성의 인과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메갈리안 옹호자들의 글을 보면 한국사회와 세계사회에 대한 전후맥락은 맞다. 


그리고 일베의 여성혐오도 있다는 것까지는 사실이다. 문제는 무엇이냐? 일베를 한국남성이 가지고 있는 심리를 보여주는 표본이라 한다. 그리고 메갈리안의 극단성은 그동안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을 저항하여 보여준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일베는 한국남성이고, 메갈리안은 한국여성이라면, 결국 이번 사태는 한국의 모순을 남성 VS 여성이란 프레임으로 만든다.


일베가 저지른 문제는 여성혐오만이 아니라 외국인,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발언, 지역감정에 대한 부추킴 등 다양한 사회적 논란을 야기했다. 일베에 대한 문제성을 단순히 여성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다변적인 현재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그런데 메갈이 일베에 대항한 유일한 집단이라 말하는 정신나간 지식인을 보면서 그들이 진짜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간과하고 있는 알 수 없다. 메갈이 외치는 것은 여성의 이름이지 지역차별, 인종차별, 빈부격차에 침묵하기 때문이다.


내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그동안 메갈리안에서 판매해오던 티의 수익금의 출처이다. 그 수익금은 메갈리안 회원 중에 타인에 대한 명예훼손죄로 고소된 사람만 아니라 아동성추행을 저지르거나 커피에 여성호르몬제를 타서 상사에게 준 범죄자의 소송비용으로 나가는 점이다. 물론 페이스북 내 홈페이지 문제도 있겠지만,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지원은 반인간적인 행위가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순수하게 우발적 내지 기획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후원해주는 것이다. 영국의 서프러제트처럼 사회적인 모순과 부조리에 불만을 느껴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서프러제트 운동당시 여성들은 사람들 그 자체에게 그 어떤 폭력을 가하지 않았다) 단순히 개인에게 저지른 범죄를 두고 돈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서북청년단이란 말하탄 자가 자신의 신념에 맞지 않는다고 강연회 자리에서 폭탄을 던진 일베학생에게 돈을 주는 행위와 같다. 


일베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낙오된 남성이 강력한 남성권력층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심리에서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 즉 그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이에 반면 메갈리안의 범죄행위는 개인적 인성 문제점을 감추기 위한 저지르고. 그것은 수단을 위한 목적으로 왜곡한다. 일베의 여험에 따른 사적인 만행들은 전체주의적 발상에 따른 파시즘이고, 메갈은 그동안 축적된 불만이 사적인 영역에서 범죄를 저지른다. 그 행위에 대해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뒤덮은 형태인 것이다.


일베나 메갈이 비슷하게 보이면서도 서로 다른 점은 행동방식이 되는 사고방식의 차이나는 점이다. 지식인들의 최대 오류는 메갈이 하는 행동이 여성의 표현이고, 일베는 남성의 심리라 하자. 그렇다면 남성들은 잠재적인 성범죄자고, 여성은 잠재적인 아동학대자고 음독기도자이다. 한국사회의 모든 남자와 여자는 범죄자란 논리가 성립된다. 미러링의 수단이 혐오발언이나 표현까지라면 몰라도 혐오범죄가 되는 순간 미러링은 방법론적 가치에서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일로 한국사회가 얼마나 전후맥락을 안 보고, 누가 의문을 제기하면 한 번 더 알아보고 해야 하는데 이미 지식인부터 자신의 프레임 속에 갇혀 있다. 초반 사태부터 코미디는 여성 성우의 노동권을 말하는 분들이다. 만화애니메이션 산업에 대한 기본적 지식에 대한 논의는 없고 단지 불이익 당했다고 말한다(그동안 공장애서 부당해고 당하거나 산업재해를 당하신 여성노동자에 대해서 그래 신경써 주면 고맙겠는데). 우선 만화와 게임의 성우는 그 제작사의 직원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프리랜서나 혹은 소속사에 속해진 사람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 및 게임제작 시 성우는 자신이 출현한 작품에 목소리를 더빙하여 계약금을 받는다. 이것은 내 억지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관련 도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차라리 그 성우분의 노동권을 운운하기 전에 이번 사건으로 다음 더빙 계약건에 불이익이 없으면 좋겠다고 해야겠지만, 사실 그것조차 못하게 하는 것은 과연 넥슨일까? 네티즌일까? 아닌 넥슨 본사 앞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일까? 


일부문제가 생긴 것은 사회적 부조리가 있는 것은 맞으나, 일부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그 대상을 사회적 전체로 확대오류화 시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다. 그리고 지식인이나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오해는 더 위험하다. 이번 일로 한국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일어날 것이다 라고 하겠지만, 그들의 믿음에는 대중의 시각에 대해 배려성이 없다. 대중은 하나같이 어려운 책을 읽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납득할 수 있는 공감이란 단어를 원한다. 


일베가 처음에 애국논리를 내세워도 왜 지금은 대중사이에 혐오집단이 되고, 현실인간 사이에서 기피대상이 되었을까? 대중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레임 분석과 프레임 짜맞추는 것도 좋겠지만, 자신조차 프레임에 갇힌 것부터 인지했으면 좋겠지만, 지금 급하는 것은 어서 더운날 넥슨사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선 멈추고(또 다른 이유는 더운날 그러면 일사병에 걸림), 하나씩 근본부터 풀어가는 게 우선이다. 지금 인터넷을 보면 경찰 고소장이 그들에게 계속 넘어가고 있다. 


고소장 내용이 물론 넥슨사 항의에 대한 집회법이라면 민주주의 이념으로 반발이 가능해도 부동액을 타서 먹인 것이나, 남의 가족사진을 들고 가서 온갖 험담과 욕설을 퍼부은 사람들이 주로 고소장의 소환타임을 맞이했다. 그들은 그런 사건에 대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억울하거나 오히려 고소한 사람에 대해 찌질하다고 한다. 


한국의 여성들이 다 저런 사람들인가? 아니다. 물론 기존 사회의 문제에 대해 개선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저지르는 일탈행위에서 말과 행동은 서로 다르다는 사실과 그 행동이 분명 잘못되었다는 점을 반드시 말해야 한다. 메갈과 페미니즘이 동일시하는 순간, 한국여성들의 수준만 격하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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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5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6-08-05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수단과 결과는 동일하다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더러운 수단을 가지고 깨끗한 결과를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천사를 닮으려다 괴물이 되어 버린` 파스칼의 말처럼 불합리를 바꾼다고 그것을 똑같은 방식으로 푼다는 건 반대에요 ㅠ 왜이리 우리는 본질을 제대로 못보는지 모르겠어요

만화애니비평 2016-08-05 12:19   좋아요 0 | URL
수단(자신의 불만)을 숭고한 이데올로기로 덮는 것만큼 미친짓이 없죠

기억의집 2016-08-05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메갈의 후원금이 저런 범죄자들을 위한 건가요? 저는 메갈은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남성혐오라는 이유로 부동액을 타서 주었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게다가 그런 사람을 위한 변호사비를 대 준 다는 거죠. 이 글 사실인 거죠??????

만화애니비평 2016-08-05 12:18   좋아요 0 | URL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60803000810

부동액 사건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102&oid=014&aid=0003569312

아동문제..

사실 남성이나 여성 모두 아동에 대한 성적 발언은..
귀여워서 로리나 쇼타 정도까지 문제 없으나...
차라리 성적욕망을 하려면 성인을 해야하는 게 맞죠.

일부는 편향되었다고 하나 위키 메갈리안 사고사건 항목을 참조하면 더 나옵니다.

https://namu.wiki/w/%EB%A9%94%EA%B0%88%EB%A6%AC%EC%95%84/%EC%82%AC%EA%B1%B4%EC%82%AC%EA%B3%A0

메갈 사이트 내 자신들이 올린 글이 사실인지 아닌지 몰라도 저런 발상 자체가 문제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애비 님의 논리가 저는 이해가 안 가는군요.
메갈4는 메갈`과는 차이를 두고 시작하는 커뮤니티입니다.
메갈 4는 본격적으로 여성주의를 진지하게 논의하겠다고 출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애비 님의 논리는
성추행 목사가 잊을 만하면 등장하니 하느님은 그들과 다를 게 없다는 논리와 같습니다.
전형적인 확증 편향이죠.

만화애니비평 2016-08-05 13:03   좋아요 0 | URL
차이라고 하나, 결국 관점의 차이겠죠..

예전에 좃린이사건(아동성추행사건)의 후원을 메갈리아4에서 한다는 점에서(링크된 아카이브) 곰발님이 정말 그들이 옳은 취지로 간다고 여기시면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아카이브에 마인드C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글쎼요? 과연 누가 누구하고 같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http://archive.is/W7z1I
http://archive.is/L4cN7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5 14:07   좋아요 0 | URL
메갈 4의 취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 실행 과정에서의 오류는 있겠지요. 모든 운동이라는 데 시행 착오를 거치기 마련입니다.

하튼, 이것은 저와 만애비 님의 입장 차이라고만 정리해 두겠습니다.
우린 때 되면 막거리 마시는 사이 아닙니까. 건강 챙기시고요..

은령 2016-09-20 02:28   좋아요 0 | URL
메갈의 취지를 최선편향 해석하고 실체는 투영상의 오점의 일종으로 보는 건

비유하신 것으로 말하자면 기독교를 표방하고 있는 그 어떠한 반도덕적 종교집단도 그 표상을 감안하여 고려해야한다는 논리와 일치합니다. 더군다나 페미니즘의 해석적 권위를 누리는 일종의 교황권이 메갈에 있지 않음은 자명하고요.

취지를 키워드로 변환한 다음 그 키워드를 이끌어 낸 사상의 최고 가치를 찾아내어, 그것을 기준으로 삼은 다음,
그 취지를 명목상으로 표방한 것 만으로 그 특정 발언집단을 `그 기준`을 준거로 재단할 수 있다는 것은 비약의 극치가 되겠지요.
 
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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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회적인 영역으로 항상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 하지만 막상 우리가 사는 세상을 연구하는 사회학을 찾아가면 그래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눈으로 돌아가는 현실이나 그 원리는 눈에 보이지 않은 거대한 조류로 휘말려 있다. 마치 수수께끼로 얼룩진 미스터리 현상처럼 우리가 사는 일상은 늘 익숙하면서도 그 익숙함에 대해 조금이라도 궁금해지기 시작하면 머리에서 에러 신호가 깜빡인다. 사회학이란 영역을 내 개인적으로 독학을 했다.

 

사람들은 나보고 독한 놈이라 한다. 돈도 안 주고, 봐도 도움도 되지 않으며, 심지어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를 왜 하냐고 묻는다. 책을 읽으면서 넉넉하지 않은 시간을 내어야 하고, 초반에 책을 살 때는 박봉을 나누어야 했다. 지금은 도서사이트의 포인트가 총알이 되었지만, 그 총알이 장전되기 위해서 나는 수많은 총알을 공중으로 뿌려야 했다. 어째든 사회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란 결국 내가 모르는 세상에 대하여 내 스스로가 그 곳을 향해 걸어가는 하나의 투쟁이다.

 

책을 읽다보면 왜 그런 논리가 되는지가 이해가기도 하고, 가끔은 이해가 가지 않을 경우가 많다. 책이란 지식의 보고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읽혀지는 책도 있고, 그렇지 못한 책도 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읽히는 책들은 그 안에 무엇인가 숨겨져 있는 함의가 현재도 통용되고 앞으로 통용될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책을 읽은 후 세상 안의 인간들을 만나면 순간 낯선 나를 발견한다. 사회에 살아가는 것은 그 안에 머물러가는 존재지만, 안에 머무는 것은 그 안에서는 자신이 어떤 세상인지 제대로 생각할 수 없다.

 

사회학을 두고 현실적인 도구로 대체하자면 반투명 유리라고 생각한다. 자신 주변의 벽은 색으로 가려진 벽이나, 사실 그 밖은 안을 볼 수 있다. 단지 안쪽은 거대한 용기이기에 보는 사람은 그 벽에 너무 가까이 붙어 있으면 안에서 움직이는 인간을 볼 수 있는 규모가 작고, 너무 멀리 있으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멀리서 봐야지 다양한 인간군상을 알고, 세상만사를 알 수 있다. 만일 그렇게 멀리서 자세히 보려면 좋은 안경이 필요하고, 다시 확인하려면 녹화장치도 필요하다.

 

인간이 살고 있는 거대한 반투명용기에서 사람들은 출구가 있다는 사실은 알아도, 그 문을 여는 것은 주저한다. 문을 열면 시간을 괜히 낭비해야 하고, 그 문까지 찾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게 귀찮다. 그래서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학은 참으로 난감한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자신이 이미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에 자신이 느끼는 바를 이야기하는 것과 멀리서 바라보는 인간이 말하는 것과 너무나 큰 차이점이 있다. 물론 멀리서 보는 인간들도 다 좋은 의도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하이에나 같은 시시탐탐 기회를 보면서 자신의 잇속을 채울 수 있는 사냥감을 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회에 살면서 부조리와 모순에 부딪힐 때 아무 것도 모른 채 바보처럼 가만히 있어야 할 경우, 그 위기를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살며 걱정을 한다. 돈을 벌고 연애를 하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말이다. 단지 눈앞에 이익과 즐거움만 원한다. 나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이기심과 쾌락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아무리 원하고 찾으려 해도 마치 신기루처럼 자신의 손에서 멀어져 간다. 신기루는 사라져가도 그 이미지의 상을 더 크게만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헛된 욕망과 스펙타클의 열렬한 선수가 되어 허상 위의 경기장에서 미친 듯이 뛰어다닌다. 현대사회는 모든 척도가 돈이다.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경제적인 빈부는 인간의 인성과 가치마저 형성하고, 그 사람이 가진 의식과 판단력조차 돈으로 결정된다. 좋은 옷과 좋은 잡화류는 자신의 신분이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이미지에 상당히 집착한다.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기호는 상품이고, 상품은 기호이다.

 

백화점 고급핸드백에 빚을 내고 구입하는 여성들, 기름 값과 보험료에 고민하면서 고급 차량을 구매하는 남성, 이 모두가 자신의 처지와 실용성보단, 세상의 조류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다. 하지만 그 애절한 움직임은 이미 무의미한 것이다. 단지 그것은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자신이 마치 낙오되지 않았다는 것을 억지로 보여주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이 널려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 위한 하나의 기만이다. 기만의 세계는 언제나 열려 있다.

 

사회성에서 책에서는 인정투쟁을 말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인정받지 못한 채 언제나 주변인으로 머물러 있는 게 현대인들의 슬픈 초상이다. 책에서 오타쿠가 차라리 나아보이는 이유가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 없다. 힘없는 사람 앞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위에 권력자에겐 바른 말 한마디 못하고, 아부를 밥 먹는 것과 유사할 정도로 잘 한다. 자신의 세계를 만들지 못해 고립된 상태이기에 남의 이목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남에 시선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싶지 경계나 이형의 존재로 보이기는 싫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움직이는 이상한 세계의 인정투쟁,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해야지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한다. 대놓게 내가 입고 싶어서 혹은 지나가는 누군가 잘 보이려 입은 게 아니라 하나, 막상 그들의 정신분석을 해보면, 그들의 입장을 옳으나 그 입장에 숨어있는 타인에 대한 욕망은 인정하기가 싫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도서모임에서 이런 대화를 자주 나눴다. 한국인은 개인주의화가 덜 된 나라 사람이다. 개인주의보단 오히려 개인적 이기주의와 집단적인 이기주의가 활보치는 세상이다.

 

따라서 뭔가 이익이 목적되지 않은 이상, 뭔가 자신을 돋보이거나 더 좋은 것이 오지 않은 이상 더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인간이란 존재에서 타인의 입장보단 나의 이익에 포커스가 맞추어진다. 문제는 포커스가 남에게 무의식적으로 사소한 피해가 아닌 생존의 박탈 앞에서 무덤덤할 수 있는 자세다. 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의 세계다. 주변을 돌아보기보단 자신의 주변을 스스로 뱅글뱅글 돌아야 한다. 한국사회가 가진 공동체 사회에선 인간은 소외되지 않은 존재였다.

 

태어나면 마을에서 크고, 마을에서 일을 하며, 마을에서 결혼하여 아이를 가졌다. 죽어서는 마을에서 장례식을 지내고, 마을 산자락에 있는 언덕에 시체를 묻었고, 그 과정을 되풀이 했다. 그런다고 과거의 유산이 모두 좋다는 게 아니다. 적어도 과거의 인간에게 외로움이란 고독에 스스로를 보내지 않았다. 지금은 부모와 자식 간에도 직장과 학원으로 소원해지고, 아파트 이웃은 다정한 사람보단 집값을 위한 동원될 정예군이고, 층간 소음에 따른 불천지 원수가 되었다.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만족해야 하나, 막상 감옥은 같은 규격이 아니라 돈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와 오브제로 구성되어 있다.

 

서평을 적어가는 동안, 사람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지? 왜 말이 연결되는 것처럼 적어가나, 내용은 계속 여기저기 튀는 것일까? 사회학을 연구하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순은 사회란 것은 단순하고 명쾌한 영역이 아니라 매우 복잡 다양한 미로라는 것이다. 미로를 찾아갈 때 미로를 향하여 발자국을 남길 수밖에 없다.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새처럼 다 볼 수 있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신이 아닌 이상, 새는 새대가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꾀꼬리가 노래 한 수 불러주면 감사할 따름이나, 도시에는 꾀꼬리 대신 닭 같이 생긴 비둘기만 펄럭거린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이런 복잡 다양한 사회상의 문제를 파트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러나 작가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고, 더구나 자유롭게 서평이나 적는 독자이기에 이렇게 적을 뿐이다(나보고 이딴 식으로 글 적는 것에 불만 있는 분은 나에게 월급을 주면 된다. 적어도 내 글이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이상 말이다). 사실 사회학 관련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엘리트의 시선은 왠지 피곤하게 느낀다. 이 책은 엘리트가 적은 글이나 그나마 엘리트라도 수면 아래서 코와 입을 밖으로 내놓은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한 글이다.

 

어떤 사건과 문제가 발생하여 거기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최대한 중립적으로 비판하여 최종적으로 어떤 대안과 가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전혀 상관없거나 상관하기 싫거나 또는 별천지에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판단내릴 수 없다. 사회학은 위에서 보는 게 아니라 차라리 아래로부터가 더 좋은 것이다. 거대한 반투명유리에서 위에 보다는 아래에서 보는 게 좋다. 빛이 내리면 모든 사람들이 일광욕을 하는 게 아니라 일부는 그늘에 가려 태양에 가린 채 살아간다. 그래서 사회학은 아래서부터 바라보는 시각이 있어야 문제의 원인과 해결대안을 찾을 수 있다.

 

이미 자신은 어떤 문제에 대해 겪을 일도 없고, 겪을 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공감이란 단어는 물 건너갔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직접 노동자의 삶을 보고 저술했다면, 현대인 중에 엘리트들은 그저 마르크스의 저서가 어렵고 엘리트로서 볼 책 중에 하나로 취급당하면 난감한 상태가 발생된다. 물론 마르크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하는 실천적인 연구자세가 필요하다. 이론이 있어야 생각을 할 수 있는 판단력이 갖추어지나, 그 판단력이 어떤 판단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 글을 보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잘 때까지 세상살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거리는 많다.

 

단지 어떤 원리이고, 무엇이 문제인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처음부터 문제가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가 귀찮아진다. 이슈는 신경이 가지만, 현황에 대해 지겨워한다. 세상물정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세상물정에 대해 돋보기로 보는 것은 불편한 것들에 대한 연속적인 만남이다. 대신 눈을 돌리면 지금은 편하지만, 나중에 더 불편한 것들이 찾아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세계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세상물정은 어떤 맛인지는 직접 보고 판단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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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여성 명배우 메릴 스트립이 영화 <서프러제트>에 아주 중요한 인물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를 맡은 점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과거 영화 <철의 여인>에서 영국의 총리 대처 수상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찬사를 받은 대처이었으나, 대처 정권 때 가해진 아일랜드 독립운동가에 대한 탄압, 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영국 노동자 계급은 결국 영국 대다수 국민이다. 그들의 경제적 내수붕괴는 영국의 경제악화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찬사와 비난이 오가겠지만, 메릴 스트립이 영화주인공으로 등장한 <철의 여인>과 그리고 이번에 등장한 <서프러제트>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그녀가 맡은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는 자신의 여성운동을 기록한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로 통해 열국 여성정치 참여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보여준다. 사실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와 영화 <서프러제트>는 공통된 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여성운동이 노동문제와 깊게 연결된 점이고, 많은 희생을 당하는 여성들이 공장에서 심각한 노동착취를 당하는 점이다. 그녀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이유는 가난 때문이고, 그녀의 어머니들은 10대에 애를 낳고, 그것도 모자라 아이들조차 7세 정도가 되면 공장에서 일을 한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의 팽크허스트 여사는 그나마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고, 그녀의 남편은 인권운동에 매우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팽크허스트 씨는 비록 그녀와 같이 운동 초반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는 자신의 남편 사이에 딸 3명을 낳았다. 그리고 그 딸들도 서프러제트 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소설은 팽크허스트 여사 중심으로 흘러가나, 영화 <서프러제트>는 공장 노동자인 모드 와츠의 중심으로 진행된다. 처음에 공장에서 힘든 노동을 마치고 집에 오면 사랑스런 아들과 다정한 남편이 있다.

 

하지만 아들은 몸이 아프고, 공장 안의 분위기는 언제나 험악하다. 그녀가 서프러제트 운동에 참여한 것은 현실에서 느끼는 부당한 현실이다. 영화를 보면 잘 봐야 하는 장면들이 있다. 모드 와츠는 남편과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남편이 그녀를 뒤에서 안아주고 그녀의 등에 키스를 한다. 근데 와츠의 한쪽 어깨를 잘 봐야 한다. 그녀의 어깨는 화상을 입어 약간 흉측하게 변해 버린 것이다. 와츠의 어머니는 공장노동자였고, 그녀는 뜨거운 세탁물로 인해 사망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노동착취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자신도 노동착취에 몸을 다쳤고, 심지어 공장 내 감독관은 과거 그녀를 성폭행까지 한 것을 알 수 있다.

 

여성문제가 왜 노동문제로 이어지는가? 남편 혼자서 돈을 벌어도 해결되지 못하고, 여성도 공장에 가게 되며, 그녀들에게 주어지는 임금은 남성의 2/3 정도이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의 서평을 적으면서도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엥겔스의 도서를 봐야 한다. 마르크스의 <자본>1870년대 전후 영국 런던 공장노동자의 생활을 정확하게 묘사했고, 엥겔스는 맨체스터에서 공장을 운영하면서 당시 노동자들이 겪은 비참한 모습을 고발한다. 그리고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을 읽으면, 여성에게 가족의 일원으로 권한이 없었으며, 자신이 가진 돈조차 남편에게 갈취당한다고 했다.

 

밀의 책에서는 여성은 남성보다 뒤처지지 않고, 오히려 섬세한 일을 잘 할 수 있으므로 때로는 남성과 같은 일을 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남성보다 훨씬 더 우수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적었다. 물론 내가 가진 생각을 밀의 철학에 상당히 공감을 거기에 바탕으로 판단한다. 여성과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다르지 사회적 관계에서는 분명 공정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당시 남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성들을 억압했고(물론 여왕은 제외) 착취했다.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나서 최종 착취당사자는 인간이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와츠는 공장과 사회에서 겪는 모순에 딜레마에 빠진다. 원작인 책을 보면 영국의 대다수 노동자는 비참한 생활을 했지만, 남성 노동자들은 상당히 개선된 반면 여성에게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처음에 모든 노동자가 지배계급에 반항했지만, 이젠 남성노동자에게 여성을 지배한다는 명분을 살려 사회의 부조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츠는 우연히 의회에 대신 진술하면서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난한 여성노동자의 딸이고, 오랜 노동으로 인해 각종 질병을 이야기한다.

 

마르크스 <자본>에서 눈이 아프고, 가관지가 좋지 않으며, 휴식이 없어서 다리에 정맥이 생기고 관절이 불편하다. 그래도 그녀가 일하는 이유는 자신의 아이 조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와츠가 경찰에 간 후 다시는 서프러제트 운동에 참석하지 않으려 했으나, 남편과 대화에서 그녀는 투사가 되기로 결정한다. 만일 아들 조지가 아닌 딸을 낳았다면 이름은 무엇이 좋겠냐는 말에 남편은 자신의 할머니 이름인 마가렛을 주고 싶다고 한다. 할머니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마가렛이 태어나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라는 질문에 남편은 무심한 표정으로 아내처럼 살 것이라 한다.

 

팽크허스트 여사나 와츠나 그녀들이 목숨을 걸고 세상과 싸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불만인 것도 있지만, 앞으로 자신을 이어 살아갈 후손들이 그 부조리한 세상에 희생되는 게 너무 싫었던 것이다. 후반부로 가면 남편은 조니를 더 이상 돌볼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아 억지로 입양을 보낸다. 이 순간 와츠는 완벽한 서프러제트가 된다. 팽크허스트 여사가 수배 중 기회를 노려 많은 청중 앞에서 연설을 한다. 그녀가 하는 말은 여성의 권리를 찾는 이유는 미래를 위해서이고, 우리 아들딸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결국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모질게 싸우는 그녀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는 결국 자신의 권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다. 흔히 우리가 현재 남녀 모두 공평하게 투표를 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면 참으로 답답하다. 어느 누구는 그냥 누가 좋아서 무조건 , 누구는 나는 저 사람이 싫어서 저 사람 반대되는 자에게 투표라고 말한다. 또는 누가 되면 집값이 떨어질 것 같아 라는 말도 한다. 하지만 진정 투표를 실행하려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이후의 미래를 위해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인권 중심이 모권에서 시작되었고, 모권이 중요한 것은 아동인권이 어머니 처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여성인권을 두고 흔히 남녀평등이란 말을 사용하는데, 나는 그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성의 인권을 올리는 것은 남녀 사이의 성적인 양성평등으로 여기는 것은 서로 간의 프레임에 빠지기 쉬운 논리오류가 발생한다. 여성의 인권을 올리는 이유는 인간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고, 그것은 남녀평등보단 인간평등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는 점이다. 내가 이번에 이 영화를 보게 된 동기는 현실문화연구(담당자님 더운 날에 파이팅인 겁니다.) 직원이 운영하는 포스팅도 있지만, 최근 페미니즘 논쟁 때문에 그렇다.

 

내가 그렇게 많은 페미니즘 도서를 읽은 것도 아니고, 페미니스트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읽은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도 그렇고, 매릴린 옐롬의 <아내의 역사>를 봐도 현재 상황에 이해가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이 과거에서 받은 핍박과 부조리는 알고 있지만, 정말 이 영화 <서프러제트> 같은 상황이라면 페미니즘 논쟁에서 다소 시위자의 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나 많은 도서를 읽어도 페미니즘 이론에서 미래란 가치를 과거에 투쟁하던 여성들은 외면하지 않았다.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타개하는 자세는 좋으나 그 시작점은 이상하다. 누군가는 이 사건들을 두고 페미니즘 운동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결국 이게 페미니즘 논쟁이 되어 긍정적인 방향이 될 것이라 본다. 물론 내가 회의적인 이유는 나는 왕자가 필요 없다 에서 한국의 대부분 남성들은 왕자로 살아가기보단 거의 일개미로 살아간다. 일개미가 왕자일 수도 없고, 왕자가 될 수도 없다. 티 한 장이 아니라, 티 한 장에 숨어있는 전후맥락을 아는 분도 있고 모르는 분도 있다. 그런데 현재 진보적 매체에서는 티 한 장만 가지고 보려 하지, 그 뒤에 숨어있는 전후맥락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서프러제트>에서 주인공 와츠는 어린 아들을 가진 어머니다. 그녀는 아들을 볼 수 없는 게 가장 마음이 아프고, 입양되어가는 장면에서는 주변 관객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티 한 장의 수익금 일부가 다양한 범죄행위를 저지른 사람의 합의금 및 소송비로 이용된다는 점이다. 서프러제트 운동처럼 반인권적 여성탄압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위해나 모욕, 그리고 아동 성추행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한 지원금이다. 아동 성추행을 일으킨 사람은 유치원 교사였다면, 그 피해아동의 부모, 혹은 자신의 자녀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맡긴 부모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그것도 한국남자의 아이니깐 당해도 상관없다는 논리에서 저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에서 많은 국민들에게 어떻게 보일까(여전히 이런 문제에 대해 논하지 않고 계속 어려운 말만 내뱉는 지식인들에게 반대로 묻자면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말한 지식인의 오류는 이해나 심지어 느낌 및 열정 없이도 알 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 (중략) 즉 민중의 기본적 열정을 느끼고 이해함이 없이도 지식인일 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 그것도 그런 글을 적으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모두 달려드는 현상에서 말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남자들과 말만 잘 통하는 착한 페미니스트만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거칠게 싸우는 페미니스트도 페미니스트라고 말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이란 성적인 담론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란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싶다. 좋은 페미니스트이든 나쁜 페미니스트이든 그 당사자가 나쁜 인간이 되면 그들이 외치는 구호는 그저 가식과 위선에 불과하다.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많은 여성들은 아주 강하게 나간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는 자세로 말이다.

 

그러나 행동과 달리 사상적 근본에는 항상 자신들의 신념과 명분이 존재했다. 그 명분이 결국 언론과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여성들에게 정치적 자유주의가 부여된 것이다. 영화는 진짜 애밀리의 죽음과 장례식으로 끝나며, 마지막 장면은 흑백영상으로 기록된 그녀의 장례식이 등장한다. 우리 인간의 역사에서 부조리와 모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폭력과 희생이 수반되었다. 어느 누군가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없으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영화 <서프러제트>는 단순히 여성의 인권을 원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전 인류가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건 내 생각이 아니라 영화 원작자인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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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1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1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6-08-03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읽으러 올 때마다 많은 사색을 하게 됩니다 만화애니비평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인간이라는 공통의 대지 위에 서 있는데 왜 거기서 뭐가 다르고 뭐가 다르다 하면서 차별을 하는 것일까요? 여성 역시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권리에 있어서 정말 많은 피해를 직접적 구조적 폭력을 당해 왔어요 ㅠ 정말 좋은 글 입니다 ㅎ

만화애니비평 2016-08-03 11:01   좋아요 0 | URL
신해철 씨가 이런 느낌의 유고를 남겼죠.

대한민국 여자들은 정말 X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다고 남자들도 X같은 곳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찌보면 둘 다 X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데, 단지 그 차이는 사회구조적인 차이겠죠. 재벌 2세 따님이 불쌍할까요? 공사장 노가다 아저씨 아들이 더 불쌍할까요? 물론 공사장 노가다 아저씨의 따님이 더 불쌍하겠지만, 조금 생각해 볼 게 있겠죠.
 
해방된 관객 컨템포러리 총서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현실문화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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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관객>은 왠지 모르게 이때까지 내가 읽은 책들을 다시 되짚어 보는 기회가 되는 도서인 것 같았다. 물론 여기에 등장한 다른 저자나 책들 모두 읽은 것은 아니나, 많은 부분이 인용되고 연구된 점에서 랑시에르가 제시하는 현대적 미학이 무엇이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랑시에르의 책 중에서 과거 <무지의 스승>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랑시에르의 책은 쉽지가 않다. 제법 난해하고 어려운 개념이 등장하고, 번역자 입장에서 전공자이겠지만, 타 전공자 입장에서 매우 힘든 책이다.

 

그래도 읽는 이유는 이런 책들을 도전해야지 새로운 것들을 익히고 다른 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전해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솔직히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은 내 사고에는 이중적인 판단이 내린다. 하나는 해방된 관객이란 결국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대다수 인간을 말하고, 그들이 바로 새로운 문화적 주체자로 되어야 하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에 반대되는 의미는 이 책이 너무 적혀진 것이다. 랑시에르가 말한 지적인 권력에서 이미 이 책도 제법 지적인 권력이 담겨있다.

 

이런 모순 속에서 계속 우리는 모순과 역설적 관계로서 세상을 대할 수 없다. 만일 대중들이 일반적인 패턴에 익숙해진 이상 그들은 여전히 같은 모습과 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Sub-culture 계통 콘텐츠를 좋아한다. 대중문화에 최근 웹툰의 약진과 웹툰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와 드라마의 재구성에서 새로운 문화적 조류를 일으키는 것이 Sub-culture이다. 하지만 왜 Sub-culture의 등장이 중요한가?

 

과거 한국만화사 연구에서 문학비평가이신 김현 선생님은 만화란 민중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민중에 의한 예술이라고 말했다. 그분이 말한 것처럼 만화는 누구나 쉽게 만들고 접하고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인간의 삶을 하나의 굴절된 빛으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인간이 가진 모습을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전해줄 수 있다. 반드시 예술이 예술가의 자신만의 세계에도 있을 수도 타인의 모습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술은 시각과 청각으로 구성된 매체로 제작됨에 따라 남에게 보이기 마련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이 책의 가진 의문과 검토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그나마 다행인 게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어봤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 <해방된 관객>은 현실문화연구 출판사 직원 분에게 운 좋게 받은 도서이다. 내가 <스펙타클의 사회>를 본 것 사실 현실문화연구에서 나온 도서이나, 그 책은 절판되고, 대신 <울력의 책>에서 재출간 되었다. 스펙타클에 대해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관객이고, 관객은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 상황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다.

 

이른바 프레임에 갇혀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프레임이란 상황에 묶인 것이다. 그래서 드보르는 상황주의자로서 그 상황을 타파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던 것이다. 그들이 하는 행동들은 유쾌하거나 괴짜다. 가령 책을 전시하는 책장에 자신들의 책을 나두는데, 그 책의 표지는 사포로 되어 있어서 다른 책 커버를 손상시킨다. 야간에 에펠탑의 빛이 강해 잠을 잘 수 없으니 폭파하겠다는 협박을 한다든지 그렇다(물론 환경공학 전공자 입장에선 최근 경관위락에서 조명에 의한 수면부족 및 생태환경 변화는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미디어의 이미지에 얽매이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것에 탈출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드보르는 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매개가 되는 사회이고, 이미지는 고정된 게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한다. 따라서 스펙타클의 전복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이미지에 의해 붕괴되고, 또 다른 이미지로서 스펙타클의 재정립이 시작된다. 스펙타클은 멈추지 않고 계속 새로운 죽음과 탄생이 반복되는 영원한 굴레이다. 이미 현대인들은 TV, PC, 인터넷, 스마트폰으로 스펙타클에서 탈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수동적인 인생에 대해 생각하자면 내 가치관의 시작점인 장 자크 루소에서 생각할 수 있다. 루소의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를 직접 읽은 것은 아니나, <루소의 사상>이란 책에서 루소가 말하는 연극에 대한 글을 연구하는 파트를 보았다. 시간이 몇 개월 정도 지났기에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았으나, 연극이 가진 문제를 비판했다. 연극에서 권선징악적 요소에서 건전한 사회라면 좋은 작품이나, 그렇지 못한 세계에 나쁜 작품이라는 것이다.

 

즉 관객에겐 하나의 구경거리로 제공되고, 연극에서 나쁜 역할을 맡은 자는 관객에게 야유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 보면 된다. 즉 관객이 그런 나쁜 역할을 맡은 사람들 중에 하나의 표본이 될 수 있겠지만, 나쁜 사회는 그런 반성은 없는 것이다.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를 읽으면 루소의 반계몽주의적 요소를 볼 수 있다. 학문과 예술이 인간에게 도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도구로 되는 것을 설파하다. 이런 점은 추후 푸코의 <감시와 처벌>과 같이 지배계급이 지식이란 권력을 이용하여 통제시스템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분석하는 것과 이어진다.

 

대중문화는 일반 대중을 위한 미디어일 수 있겠지만, 그 안에는 담겨있는 내용은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중을 위한 여가생활보다는 대중으로 하여금 같은 사고를 자아내게 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가 책에서 나중에 영화로 나온다. 다양한 영상들이 짜 맞추어 육성에서 나오는(나는 불어를 모르니 무슨 말인지 모르고 영어도 잘 몰라 자막의 영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히 모른다) 내레이션을 따라가면 책을 읽은 것을 상기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각종 미디어에 집착하게 만드는 구조라는 점이다.

 

그러나 <해방된 관객>에선 재미있는 말이 나왔다. 어떤 군인의 돌격하는 장면을 두고, 우리에게 그것을 비판하기보다는 아방가르드의 반미학 운동가들의 유쾌한 논조가 상당한 아이러니로 다가왔다. 전장의 군인처럼 우리도 이 현실에 대한 수동적인 삶에 대하 돌격하자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돌격하자는 것은 우리 삶의 주인이 우리란 점을 만들기 위해서 관객 스스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스펙타클의 사회>와 걸맞게 점심시간 돼지국밥 한 사발을 하는데, 뉴스에서 재미있는 기사가 나왔다.

 

연극을 하는 장소에 관객석이 없다. 관객이 위치하는 곳은 연극이 이루어지는 무대 위에 작은 빈 공간, 10명 정도 되는 관객은 자신의 몸에 하얀 천을 가린다. 마치 그 모습은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보면 코러스가 뒤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관객이 이제 무대 위의 소품 내지 혼자 등장인물이 되었다. 급박한 상황을 구경하고 놀라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대변해주는 유기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연극을 몇 번 본적이 있었다. 무대를 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 말이다. 연극이나 공연은 무대 위의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청중이 있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청중조차 연극에서 필요한 소재로 된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의 브레히트의 연극에 대한 글을 보았다. 일반적인 연극이 아니라 연극을 보는 대중에게 충격을 주는 요법, 아방가르드란 반미학적 가치관에서 예술은 어느 일정한 목표를 향해 가는 게 아니라 그 목표와 별개로 각자에게 그 목표로 가라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서 아방가르드가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한다. 어차피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이전 모더니스트 단계에서 전환되는 과정에 아방가르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우리 대중은 우리 시선을 자극하는 것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하는게 아닌가?

 

작년문화예술 강의를 듣고, 어느 작은 아트갤러리에서 전시회 관람과 강연을 들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추억이다. 다양한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술도 마시고, 내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더 많은 인간과 대화할 수 있었다. 그때 내가 돌아다니면서 어느 예술프로젝트를 보았냐면, 서울 홍대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 이동식 포차를 움직이는데, 그 포차는 이상한 오브젝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기서 안주와 소주 1잔을 돈을 받아 판다는 점이다.

 

오브젝트를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은 돈을 주고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었다. 술을 나누는 포차가 하나의 예술적 기능은 무엇인가? <해방된 관객>에서도 비슷한 관점, 아니 우리보다 앞선 관점이 등장한다. 전시회를 여는데, 그 곳은 사람들이 잠도 자고 밥도 해먹을 수 있으며, 소파에 앉아 다양한 사람이 대화까지 나눈다. 인간이란 한자어를 보면 사람의 사이다. 결국 사람들이 모여 자신과 타인의 대화를 나누며 교감이 이루어지는 게 진정한 예술의 세계가 아닌가? 나는 예술의 최종목적을 두고 말한다면 결국 교감이다.

 

교감은 서로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의사와 판단을 나누는 곳이다. 개인의 의사와 판단은 사회적 고정관념과 편견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 간의 입장을 돌아보면 다른 가치관으로 이어진다. 예술의 기능을 두고 다양한 말이 있지만, 예술이 필요한 이유는 새로운 소통방법, 새로운 가치관, 기존 사회의 앞으로 다가온 사회의 대화라고 본다. 물론 나는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 모습이 있는 이유는 기존의 역사적으로 진행된 인간들의 축척이 존재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과거가 없다면 현재도 없다. 단지 미래를 위한 것이란 현재를 어떻게 구성하는가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관객이 해방된다는 것은 자기 삶을 무엇을 보고 있느냐이다. 19세기 노동자의 삶에 대해 랑시에르는 생각한다. 자신의 집이 아닌 노동자가 그 집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는 사실, 그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고생이 아닌 하나의 예술(물론 본인은 예술이라 여기지 않는다)을 만드는 과정이라 느낀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가치가 결국 그 자체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과저이라면 예술은 어디에 구속된 것이 아니라 주변에 손을 뻗어 어디든 잡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해방된 관객>에선 자꾸 대중에게 자신에게 갇혀진 세계에 나오라고 한다. 가령 베트남전쟁을 보자. 아직도 한국에서 베트남전쟁을 두고 이데올로기적인 가치관으로 평가절가 하려고 한다. 하지만 막상 통킹만사건이나 고엽제 같은 일을 보면 공정성은 보이지 않은 것 같다. 어째든 현대전쟁은 주로 폭격과 화생방 작전이 많이 수행되었다. 미국의 어느 부유한 가정에 어느 한 베트남 남성이 목숨을 잃은 딸을 안고 절규하는 장면이 나온다. 포토몽타주, 즉 서로 다른 사진을 이어 붙여 만든 작품이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가? 사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서도 전쟁은 진짜 이루어진 전장보다 우리가 보는 헐리웃 영화의 전쟁영화가 더 실감나는 전쟁이란 말을 한다. 대중이 보는 매체가 그렇게 만들어 현실적인 비극을 마치 산파극의 정당한 내러티브로 전환해버린다. 해방은커녕 자신이 현재의 스펙타클에 얽매인 사실조차 알기 어렵다. 그런다고 관객이 새로운 눈을 가지도록 하는 일은 멈출 수 없는 일이다. 다양한 가치관과 인간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대중은 한 가지 틀에 갇힐 수 없다. 누가 그랬던가? 모든 시민은 자신이 예술가와 작가 그리고 비평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으로 해방이 된다고 말이다.

 

물론 책을 보고 현실을 돌아본다면 무척 어려운 조건이란 것은 안다. 어렵다고 자신 스스로의 해방이란 단어란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다.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처럼 배우는 사람들, 즉 우리 대중은 무엇을 위해 그것을 배우는지 모른다. 그저 권력의 관계성에서 자신이 모르기에 단지 그 이유로 수동적인 삶을 받아들인다. 그게 곧 대중으로 이어지고, 우리에겐 스스로의 삶보단 통제된 삶을 강요하여 현재로 이어진 것이다. 그것을 멈추기 위해선 누가 강요할 수 없다. 칸트의 철학이 모든 게 맞을 수 없더라도 칸트는 계몽이란 자신이 스스로 그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과연 스스로의 알을 깰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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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빠 2017-04-10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사게 하는 리뷰네요. 멋집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04-11 08:44   좋아요 0 | URL
아이고 감사합니다.
아이디가 참으로 인상적이네요...
팔루스의 기표.....읽다말은 라캉이 생각납니당...
 

이제 드디어 서브컬처 사태가 트위토와 페이스북, 블로그에서 신문기사와 TV뉴스에 나왔다. 누가 그랬던가? No! Cut!가 이제 드리어 Yes! Cut!로 되었나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Yes Cut는 바로 웹툰작가들이 시초를 열었다. 이번 넥슨사태와 메갈리안 개입에서 나는 처음부터 사회구조적인 부분의 문제 특히 남여간의 문제를 단순히 남여문제로 감정대립을 하는 현실태에 대해 우려를 했다. 이건 단순히 남여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구조에서 시작된 것이고, 이것은 한국사회의 문제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대립이 이제는 남여의 사이의 프레임으로 변환되었다.


즉 이제부터 마녀사냥이 시작되는 것이다. <캘리번과 마녀>를 내가 자주 인용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인 페미니스트이다. 여성이 고대로부터 희생당한 것을 생각하면,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도 좋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전진과 퇴보 그리고 그리고 서로간의 충돌로 인한 변환운동이 발발한다. 이번 일에 대해서 가장 큰 원초적인 문제를 뭐라고 할까? 그 꼭대기 층에 남자 있는 것은 분명하고 사실이다.


하지만 남자라고 해서 한국사회 모든 남성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남성 권력층이다. 그리고 여성들도 사회적인 높은 입지를 차지해서 남자들도 거기에 대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나라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런 높은 위치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자리는 남자라서가 아니라 여자라서 아니라, 단지 그들이 그렇게 될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결혼문화에서 신데랄라 이데올로기나 온달신화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비슷한 계층이나 권력, 자본력을 가진 자들이 서로 계속 연속적으로 관계성을 맺는 것이다. 어디에 남자가 유리하거나 여자가 유리하다거나는 단지 그런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맞는 말이다. 전에 도서모임에 가서 다른 회원분들과 이야기했다. 대부분 결혼한지 오래되신 분들이다. 그분이 남성이 경제적으로 여성에게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현실적 대립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에 나는 다르게 답변을 했다.


"이미 경제적인 위치에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리를 잡았다. 아주 높은 자리나 계층은 일반사람이 갈 수 없고, 아주 극소수다. 문제는 경제적으로 올라간 여성이 자기보단 못한 남성이라도 함께 해줄 것인가?이다.", 직업이 여자만 하거나 남자만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닌 이상 어디든 남여가 같이 있다. 내가 일하는 엔지니어링 설계관련 업무도 여성의 진출이 많고, 분야에 따라서는 남성보다 여성의 중심이 될 떄도 많다. 이미 경제적인 대립은 늦었다. 


지금 임금수준에서 여성이 낮다고 해도, 그것은 20~30대가 아니라 40대 이상의 노동인력이다. 식당이나 공장의 여성임금 수준은 매우 낮다. 하지만 전문인력은 학위와 자격증으로 충분히 올라갈 수 있다. 기계의 발전, 프로그램의 진보에서 육체적인 업무는 정신노동으로 변환된다. 즉 여성과 남성에 대한 혐오대립은 이제는 남여의 관계성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에 따른 경제적 현실이다. 문제는 아직까지 회사 내 높은 자리는 40~50대 남성이 많고,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도 40~60대 남성이 주류를 잡고 있다.


하지만 20~30대 남성이 주류를 잡은 것은 아니다. 특권을 잡은 남성이 잡았다고 남성이 잡은 것은 아니다. 이런 부분을 간과하고 있으니 남여간의 대립각은 이상한 조류로 흘러간다. 서로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중심 사회가 불만이고, 남성에선 똑같이 대학에 갔는데 2~3년의 차이로 임금과 직급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사회구조에 의한 현실이 상대방에게 화살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대립의 각에 놓인 사람들은 주로 미혼이거나 학생인 남여들이다. 내가 결혼하신 분들하고 대화하는 것과 인터넷으로 보는 그들의 관점은 너무 다르다. 결혼하기 전에 여성에게 남성의 임금과 비교하면 부족하면 불만이 생기겠지만, 결혼한 여성에게 남편의 임금이 적으면 불만이 생긴다. 대부분 웹툰과 넥슨사로 대립각을 세우는 부류는 미혼인 경우가 다반사다. 한국 웹툰 소비자 중심이 누구일까?


남성도 많으나, 여성도 많다. 계층으로 보면 학생과 20~30대 직장인이다. 그나마 30대 세대는 한국만화가 제법 융창할 시대의 사람이다. <슬램덩크>나 <후르츠 바스케> 등 스포츠 및 소녀만화 쪽을 많이 접한 세대다. 지금 20대들은 웹툰이 시작된 시대에 같이 자라온 세대다. 10대들은 이미 구축된 콘텐츠를 즐기는 시대다. 그런 조건에서 한국의 웹툰은 한국 만화가들의 노력과 그들을 마지막까지 기다려주는 팬들이 있어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넥슨사건 이후 팬들과 넥슨사, 웹툰작가 그밖에 서브컬처 콘텐츠 내부관계자에 큰 파동을 일으킨다. 이 문제는 한국 서브컬처만 아니라 정치적 영역까지 이어지고, 이제는 혐오 사이트의 마녀사냥 명부까지 작성했다. 오늘 뉴스를 보니 분명 성적인 부분으로 작가를 매도하는 것은 문제이다. 본인은 그 메일을 보낸 자의 숫자에 따라 상처를 받으나, 그 작가는 자신의 한 말에 수많은 웹툰 향유자를 상처받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웹툰작가 편에서 방송했다.


물론 관점에 따라 방송하고 이야기할 수 있다. 문제는 자기에 반대하면 너는 일베니 메갈이니 하는 사태가 드디어 방송에 나온 것이다. 이번 문제에 대해 나는 신속히 정리하길 원했다. 만약 이게 넷이 아니라 대중매체를 타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자체정화가 되지 않아 대중문화 영역에 넘어가면 그야말로 국내 서브컬처는 공격의 대상이다. 예전에 화성인 바이러스 씹덕후의 별명이 붙어진 이진규 씨로 인해 국내 서브컬처 향유자들이 받은 상처는 이루어 말할 수 없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유로 이지메와 가혹행위를 당하고, 사회적으로 성숙되지 않은 부진아로 낙인 찍힌 것이다. 웹툰의 약진과 웹툰의 영화와 드라마화는 한국 서브컬처 힘을 다시금 찾게 해주는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은 안녕이라 말해야 하나? 현재 웹툰작가에 대하여 불만을 말하는 자는 극우성향 사이트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거나 전혀 무관한 자들까지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 남여간의 대립각을 세우는 게 이제는 한국의 서브컬처 생산자와 소비자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어둠에 숨어 조용히 지내야 하는 자들이 겨우 숨통을 열 수 있었는데 말이다.


여기에 가중된 문제는 미디어의 공정치 못한 방송이다. 진짜 이 문제가 어디서에서 시작되었는지 말하지 않고 단순히 프레임에 갇히게 만드는 상황만 만들었다. 1970년대 유산으로 인해 한국만화는 그야말로 검열과 폭력에 시름을 앓았다. 그때 그런 정부시책을 앞선 언론사들이 이제는 서브털처 소비자에게 정론의 언론사로 통한다. 전에 정부의 심의기준 강화에 반발하던 자들이 말이다. 


인터넷의 도서사이트 글을 보면 아쉬운 것들이 있다. 그분들의 논리나 상황파악은 나보다 훨씬 탁월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타쿠란 존재에 대해 잘 모른다.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말이다. 어쩌다 만화책 한두권이나 애니메이션(그래보았자 미국이나 미야자키 하야오 수준) 한두편 보는 사람들은 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기분을 잘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10~30대들이고, 기본적으로 학생이 많다. 내가 매일 챙겨 보는 일본애니메이션, 가끔 구매하는 만화와 라이트노벨은 대부분 10대 고등학생과 20대 대학생들이 많다. 


도서사이트의 탁월한 지성을 가진 분들이 만일 10~20대 학생을 대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 처음부터 10~20대들에게 기존 사회의 남성권력의 부조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은 지금 이 상황이 불쾌하고, 지금까지 믿은 것을 배신당했다고 믿을 뿐이다. 물론 어느 정도 사회학에 대한 기본지식이나 수준을 갖추면 충분히 대화와 토론이 가능하다. 그런데 현상황에서 그게 얼마나 통용될 것이라 보는 것인가? 박가분씨나 하지율씨가 아무리 글을 잘 적어도 그것은 자신들만의 이야기로 끝날 수 있다. 아는 사람들은 이해가나, 대부분 독자들이 이해갈 정도로 풀어쓸 수 있어야 하는 게 배려라고 생각한다.


독자에게 굴레를 씌우지 말자. 그들은 권력층도 아니고, 남녀 서로간에 사회적인 압력을 준 사람도 없다. 그들은 그저 사회적인 약자이다. 한국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그걸 이용한 강자가 만들어낸 프레임에 놀아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물을 엎지른 상태이다. 이번에 부천국제만화축제 가지 못한 것이 다소 아슀다. 내일 미국의 유명한 만화학자인 스콧 맥클라우드가 부천국제만화축제의 컴퍼런스 초빙인사로 오신다. 


한국의 토론과 진행을 청강대학의 박인하 교수님, 그리고 비평가라는 선우훈씨가 맡는다. 선우훈씨가 해놓은 트위터를 넷 상에 보며 참으로 답답했다. 비평가라면 논리적으로 해결해야지 공인으로서 보여서는 안될 글을 적었다. 항의차원에서 부천국제만화축제 운영단에 보냈으나 안 올 것이란 점을 안다. 내일 컴퍼런스 참 걱정된다. 웹툰시장에 대한 소비자의 불신은 부천만화규장각에서 실시하는 부천국제만화축제와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까지 악영향이 간다. 


행사에 유명작가를 초빙하여 사인회나 전시회를 하는데, 이번 일이 터지니 어떻게 될 것인가? 독자들도 지나치게 비난이나 욕설을 금지해야겠지만, 웹툰작가들이 자신이 말하고픈 글들을 보고 충격받았다. 제발 극히 일부이길 바란다. 이때까지 수면 아래 가려진 모든 폭발물이 동시다발적으로 계속 터지고 있다. 과연 누가 가장 피해를 볼까? 웹툰시장의 규모는 축소되고, 한국 서브컬처 콘텐츠 향유자는 한국 것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눈을 돌린다. 일반인들은 역시 오타쿠들은 안되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일베와 메갈은 어느 순간 비난의 대상과 영웅의 대상으로 교차할 것이고, 한국 서브컬처는 그야말로 최악의 인간만 모여 정신적 자위만 하는 장소로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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