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여성 명배우 메릴 스트립이 영화 <서프러제트>에 아주 중요한 인물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를 맡은 점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과거 영화 <철의 여인>에서 영국의 총리 대처 수상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찬사를 받은 대처이었으나, 대처 정권 때 가해진 아일랜드 독립운동가에 대한 탄압, 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영국 노동자 계급은 결국 영국 대다수 국민이다. 그들의 경제적 내수붕괴는 영국의 경제악화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찬사와 비난이 오가겠지만, 메릴 스트립이 영화주인공으로 등장한 <철의 여인>과 그리고 이번에 등장한 <서프러제트>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그녀가 맡은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는 자신의 여성운동을 기록한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로 통해 열국 여성정치 참여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보여준다. 사실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와 영화 <서프러제트>는 공통된 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여성운동이 노동문제와 깊게 연결된 점이고, 많은 희생을 당하는 여성들이 공장에서 심각한 노동착취를 당하는 점이다. 그녀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이유는 가난 때문이고, 그녀의 어머니들은 10대에 애를 낳고, 그것도 모자라 아이들조차 7세 정도가 되면 공장에서 일을 한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의 팽크허스트 여사는 그나마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고, 그녀의 남편은 인권운동에 매우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팽크허스트 씨는 비록 그녀와 같이 운동 초반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는 자신의 남편 사이에 딸 3명을 낳았다. 그리고 그 딸들도 서프러제트 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소설은 팽크허스트 여사 중심으로 흘러가나, 영화 <서프러제트>는 공장 노동자인 모드 와츠의 중심으로 진행된다. 처음에 공장에서 힘든 노동을 마치고 집에 오면 사랑스런 아들과 다정한 남편이 있다.

 

하지만 아들은 몸이 아프고, 공장 안의 분위기는 언제나 험악하다. 그녀가 서프러제트 운동에 참여한 것은 현실에서 느끼는 부당한 현실이다. 영화를 보면 잘 봐야 하는 장면들이 있다. 모드 와츠는 남편과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남편이 그녀를 뒤에서 안아주고 그녀의 등에 키스를 한다. 근데 와츠의 한쪽 어깨를 잘 봐야 한다. 그녀의 어깨는 화상을 입어 약간 흉측하게 변해 버린 것이다. 와츠의 어머니는 공장노동자였고, 그녀는 뜨거운 세탁물로 인해 사망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노동착취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자신도 노동착취에 몸을 다쳤고, 심지어 공장 내 감독관은 과거 그녀를 성폭행까지 한 것을 알 수 있다.

 

여성문제가 왜 노동문제로 이어지는가? 남편 혼자서 돈을 벌어도 해결되지 못하고, 여성도 공장에 가게 되며, 그녀들에게 주어지는 임금은 남성의 2/3 정도이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의 서평을 적으면서도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엥겔스의 도서를 봐야 한다. 마르크스의 <자본>1870년대 전후 영국 런던 공장노동자의 생활을 정확하게 묘사했고, 엥겔스는 맨체스터에서 공장을 운영하면서 당시 노동자들이 겪은 비참한 모습을 고발한다. 그리고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을 읽으면, 여성에게 가족의 일원으로 권한이 없었으며, 자신이 가진 돈조차 남편에게 갈취당한다고 했다.

 

밀의 책에서는 여성은 남성보다 뒤처지지 않고, 오히려 섬세한 일을 잘 할 수 있으므로 때로는 남성과 같은 일을 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남성보다 훨씬 더 우수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적었다. 물론 내가 가진 생각을 밀의 철학에 상당히 공감을 거기에 바탕으로 판단한다. 여성과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다르지 사회적 관계에서는 분명 공정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당시 남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성들을 억압했고(물론 여왕은 제외) 착취했다.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나서 최종 착취당사자는 인간이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와츠는 공장과 사회에서 겪는 모순에 딜레마에 빠진다. 원작인 책을 보면 영국의 대다수 노동자는 비참한 생활을 했지만, 남성 노동자들은 상당히 개선된 반면 여성에게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처음에 모든 노동자가 지배계급에 반항했지만, 이젠 남성노동자에게 여성을 지배한다는 명분을 살려 사회의 부조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츠는 우연히 의회에 대신 진술하면서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난한 여성노동자의 딸이고, 오랜 노동으로 인해 각종 질병을 이야기한다.

 

마르크스 <자본>에서 눈이 아프고, 가관지가 좋지 않으며, 휴식이 없어서 다리에 정맥이 생기고 관절이 불편하다. 그래도 그녀가 일하는 이유는 자신의 아이 조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와츠가 경찰에 간 후 다시는 서프러제트 운동에 참석하지 않으려 했으나, 남편과 대화에서 그녀는 투사가 되기로 결정한다. 만일 아들 조지가 아닌 딸을 낳았다면 이름은 무엇이 좋겠냐는 말에 남편은 자신의 할머니 이름인 마가렛을 주고 싶다고 한다. 할머니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마가렛이 태어나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라는 질문에 남편은 무심한 표정으로 아내처럼 살 것이라 한다.

 

팽크허스트 여사나 와츠나 그녀들이 목숨을 걸고 세상과 싸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불만인 것도 있지만, 앞으로 자신을 이어 살아갈 후손들이 그 부조리한 세상에 희생되는 게 너무 싫었던 것이다. 후반부로 가면 남편은 조니를 더 이상 돌볼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아 억지로 입양을 보낸다. 이 순간 와츠는 완벽한 서프러제트가 된다. 팽크허스트 여사가 수배 중 기회를 노려 많은 청중 앞에서 연설을 한다. 그녀가 하는 말은 여성의 권리를 찾는 이유는 미래를 위해서이고, 우리 아들딸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결국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모질게 싸우는 그녀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는 결국 자신의 권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다. 흔히 우리가 현재 남녀 모두 공평하게 투표를 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면 참으로 답답하다. 어느 누구는 그냥 누가 좋아서 무조건 , 누구는 나는 저 사람이 싫어서 저 사람 반대되는 자에게 투표라고 말한다. 또는 누가 되면 집값이 떨어질 것 같아 라는 말도 한다. 하지만 진정 투표를 실행하려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이후의 미래를 위해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인권 중심이 모권에서 시작되었고, 모권이 중요한 것은 아동인권이 어머니 처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여성인권을 두고 흔히 남녀평등이란 말을 사용하는데, 나는 그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성의 인권을 올리는 것은 남녀 사이의 성적인 양성평등으로 여기는 것은 서로 간의 프레임에 빠지기 쉬운 논리오류가 발생한다. 여성의 인권을 올리는 이유는 인간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고, 그것은 남녀평등보단 인간평등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는 점이다. 내가 이번에 이 영화를 보게 된 동기는 현실문화연구(담당자님 더운 날에 파이팅인 겁니다.) 직원이 운영하는 포스팅도 있지만, 최근 페미니즘 논쟁 때문에 그렇다.

 

내가 그렇게 많은 페미니즘 도서를 읽은 것도 아니고, 페미니스트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읽은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도 그렇고, 매릴린 옐롬의 <아내의 역사>를 봐도 현재 상황에 이해가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이 과거에서 받은 핍박과 부조리는 알고 있지만, 정말 이 영화 <서프러제트> 같은 상황이라면 페미니즘 논쟁에서 다소 시위자의 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나 많은 도서를 읽어도 페미니즘 이론에서 미래란 가치를 과거에 투쟁하던 여성들은 외면하지 않았다.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타개하는 자세는 좋으나 그 시작점은 이상하다. 누군가는 이 사건들을 두고 페미니즘 운동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결국 이게 페미니즘 논쟁이 되어 긍정적인 방향이 될 것이라 본다. 물론 내가 회의적인 이유는 나는 왕자가 필요 없다 에서 한국의 대부분 남성들은 왕자로 살아가기보단 거의 일개미로 살아간다. 일개미가 왕자일 수도 없고, 왕자가 될 수도 없다. 티 한 장이 아니라, 티 한 장에 숨어있는 전후맥락을 아는 분도 있고 모르는 분도 있다. 그런데 현재 진보적 매체에서는 티 한 장만 가지고 보려 하지, 그 뒤에 숨어있는 전후맥락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서프러제트>에서 주인공 와츠는 어린 아들을 가진 어머니다. 그녀는 아들을 볼 수 없는 게 가장 마음이 아프고, 입양되어가는 장면에서는 주변 관객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티 한 장의 수익금 일부가 다양한 범죄행위를 저지른 사람의 합의금 및 소송비로 이용된다는 점이다. 서프러제트 운동처럼 반인권적 여성탄압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위해나 모욕, 그리고 아동 성추행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한 지원금이다. 아동 성추행을 일으킨 사람은 유치원 교사였다면, 그 피해아동의 부모, 혹은 자신의 자녀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맡긴 부모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그것도 한국남자의 아이니깐 당해도 상관없다는 논리에서 저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에서 많은 국민들에게 어떻게 보일까(여전히 이런 문제에 대해 논하지 않고 계속 어려운 말만 내뱉는 지식인들에게 반대로 묻자면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말한 지식인의 오류는 이해나 심지어 느낌 및 열정 없이도 알 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 (중략) 즉 민중의 기본적 열정을 느끼고 이해함이 없이도 지식인일 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 그것도 그런 글을 적으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모두 달려드는 현상에서 말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남자들과 말만 잘 통하는 착한 페미니스트만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거칠게 싸우는 페미니스트도 페미니스트라고 말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이란 성적인 담론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란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싶다. 좋은 페미니스트이든 나쁜 페미니스트이든 그 당사자가 나쁜 인간이 되면 그들이 외치는 구호는 그저 가식과 위선에 불과하다.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많은 여성들은 아주 강하게 나간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는 자세로 말이다.

 

그러나 행동과 달리 사상적 근본에는 항상 자신들의 신념과 명분이 존재했다. 그 명분이 결국 언론과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여성들에게 정치적 자유주의가 부여된 것이다. 영화는 진짜 애밀리의 죽음과 장례식으로 끝나며, 마지막 장면은 흑백영상으로 기록된 그녀의 장례식이 등장한다. 우리 인간의 역사에서 부조리와 모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폭력과 희생이 수반되었다. 어느 누군가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없으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영화 <서프러제트>는 단순히 여성의 인권을 원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전 인류가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건 내 생각이 아니라 영화 원작자인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사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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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1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1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6-08-03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읽으러 올 때마다 많은 사색을 하게 됩니다 만화애니비평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인간이라는 공통의 대지 위에 서 있는데 왜 거기서 뭐가 다르고 뭐가 다르다 하면서 차별을 하는 것일까요? 여성 역시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권리에 있어서 정말 많은 피해를 직접적 구조적 폭력을 당해 왔어요 ㅠ 정말 좋은 글 입니다 ㅎ

만화애니비평 2016-08-03 11:01   좋아요 0 | URL
신해철 씨가 이런 느낌의 유고를 남겼죠.

대한민국 여자들은 정말 X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다고 남자들도 X같은 곳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찌보면 둘 다 X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데, 단지 그 차이는 사회구조적인 차이겠죠. 재벌 2세 따님이 불쌍할까요? 공사장 노가다 아저씨 아들이 더 불쌍할까요? 물론 공사장 노가다 아저씨의 따님이 더 불쌍하겠지만, 조금 생각해 볼 게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