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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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회적인 영역으로 항상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 하지만 막상 우리가 사는 세상을 연구하는 사회학을 찾아가면 그래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눈으로 돌아가는 현실이나 그 원리는 눈에 보이지 않은 거대한 조류로 휘말려 있다. 마치 수수께끼로 얼룩진 미스터리 현상처럼 우리가 사는 일상은 늘 익숙하면서도 그 익숙함에 대해 조금이라도 궁금해지기 시작하면 머리에서 에러 신호가 깜빡인다. 사회학이란 영역을 내 개인적으로 독학을 했다.

 

사람들은 나보고 독한 놈이라 한다. 돈도 안 주고, 봐도 도움도 되지 않으며, 심지어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를 왜 하냐고 묻는다. 책을 읽으면서 넉넉하지 않은 시간을 내어야 하고, 초반에 책을 살 때는 박봉을 나누어야 했다. 지금은 도서사이트의 포인트가 총알이 되었지만, 그 총알이 장전되기 위해서 나는 수많은 총알을 공중으로 뿌려야 했다. 어째든 사회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란 결국 내가 모르는 세상에 대하여 내 스스로가 그 곳을 향해 걸어가는 하나의 투쟁이다.

 

책을 읽다보면 왜 그런 논리가 되는지가 이해가기도 하고, 가끔은 이해가 가지 않을 경우가 많다. 책이란 지식의 보고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읽혀지는 책도 있고, 그렇지 못한 책도 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읽히는 책들은 그 안에 무엇인가 숨겨져 있는 함의가 현재도 통용되고 앞으로 통용될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책을 읽은 후 세상 안의 인간들을 만나면 순간 낯선 나를 발견한다. 사회에 살아가는 것은 그 안에 머물러가는 존재지만, 안에 머무는 것은 그 안에서는 자신이 어떤 세상인지 제대로 생각할 수 없다.

 

사회학을 두고 현실적인 도구로 대체하자면 반투명 유리라고 생각한다. 자신 주변의 벽은 색으로 가려진 벽이나, 사실 그 밖은 안을 볼 수 있다. 단지 안쪽은 거대한 용기이기에 보는 사람은 그 벽에 너무 가까이 붙어 있으면 안에서 움직이는 인간을 볼 수 있는 규모가 작고, 너무 멀리 있으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멀리서 봐야지 다양한 인간군상을 알고, 세상만사를 알 수 있다. 만일 그렇게 멀리서 자세히 보려면 좋은 안경이 필요하고, 다시 확인하려면 녹화장치도 필요하다.

 

인간이 살고 있는 거대한 반투명용기에서 사람들은 출구가 있다는 사실은 알아도, 그 문을 여는 것은 주저한다. 문을 열면 시간을 괜히 낭비해야 하고, 그 문까지 찾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게 귀찮다. 그래서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학은 참으로 난감한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자신이 이미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에 자신이 느끼는 바를 이야기하는 것과 멀리서 바라보는 인간이 말하는 것과 너무나 큰 차이점이 있다. 물론 멀리서 보는 인간들도 다 좋은 의도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하이에나 같은 시시탐탐 기회를 보면서 자신의 잇속을 채울 수 있는 사냥감을 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회에 살면서 부조리와 모순에 부딪힐 때 아무 것도 모른 채 바보처럼 가만히 있어야 할 경우, 그 위기를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살며 걱정을 한다. 돈을 벌고 연애를 하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말이다. 단지 눈앞에 이익과 즐거움만 원한다. 나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이기심과 쾌락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아무리 원하고 찾으려 해도 마치 신기루처럼 자신의 손에서 멀어져 간다. 신기루는 사라져가도 그 이미지의 상을 더 크게만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헛된 욕망과 스펙타클의 열렬한 선수가 되어 허상 위의 경기장에서 미친 듯이 뛰어다닌다. 현대사회는 모든 척도가 돈이다.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경제적인 빈부는 인간의 인성과 가치마저 형성하고, 그 사람이 가진 의식과 판단력조차 돈으로 결정된다. 좋은 옷과 좋은 잡화류는 자신의 신분이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이미지에 상당히 집착한다.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기호는 상품이고, 상품은 기호이다.

 

백화점 고급핸드백에 빚을 내고 구입하는 여성들, 기름 값과 보험료에 고민하면서 고급 차량을 구매하는 남성, 이 모두가 자신의 처지와 실용성보단, 세상의 조류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다. 하지만 그 애절한 움직임은 이미 무의미한 것이다. 단지 그것은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자신이 마치 낙오되지 않았다는 것을 억지로 보여주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이 널려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 위한 하나의 기만이다. 기만의 세계는 언제나 열려 있다.

 

사회성에서 책에서는 인정투쟁을 말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인정받지 못한 채 언제나 주변인으로 머물러 있는 게 현대인들의 슬픈 초상이다. 책에서 오타쿠가 차라리 나아보이는 이유가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 없다. 힘없는 사람 앞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위에 권력자에겐 바른 말 한마디 못하고, 아부를 밥 먹는 것과 유사할 정도로 잘 한다. 자신의 세계를 만들지 못해 고립된 상태이기에 남의 이목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남에 시선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싶지 경계나 이형의 존재로 보이기는 싫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움직이는 이상한 세계의 인정투쟁,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해야지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한다. 대놓게 내가 입고 싶어서 혹은 지나가는 누군가 잘 보이려 입은 게 아니라 하나, 막상 그들의 정신분석을 해보면, 그들의 입장을 옳으나 그 입장에 숨어있는 타인에 대한 욕망은 인정하기가 싫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도서모임에서 이런 대화를 자주 나눴다. 한국인은 개인주의화가 덜 된 나라 사람이다. 개인주의보단 오히려 개인적 이기주의와 집단적인 이기주의가 활보치는 세상이다.

 

따라서 뭔가 이익이 목적되지 않은 이상, 뭔가 자신을 돋보이거나 더 좋은 것이 오지 않은 이상 더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인간이란 존재에서 타인의 입장보단 나의 이익에 포커스가 맞추어진다. 문제는 포커스가 남에게 무의식적으로 사소한 피해가 아닌 생존의 박탈 앞에서 무덤덤할 수 있는 자세다. 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의 세계다. 주변을 돌아보기보단 자신의 주변을 스스로 뱅글뱅글 돌아야 한다. 한국사회가 가진 공동체 사회에선 인간은 소외되지 않은 존재였다.

 

태어나면 마을에서 크고, 마을에서 일을 하며, 마을에서 결혼하여 아이를 가졌다. 죽어서는 마을에서 장례식을 지내고, 마을 산자락에 있는 언덕에 시체를 묻었고, 그 과정을 되풀이 했다. 그런다고 과거의 유산이 모두 좋다는 게 아니다. 적어도 과거의 인간에게 외로움이란 고독에 스스로를 보내지 않았다. 지금은 부모와 자식 간에도 직장과 학원으로 소원해지고, 아파트 이웃은 다정한 사람보단 집값을 위한 동원될 정예군이고, 층간 소음에 따른 불천지 원수가 되었다.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만족해야 하나, 막상 감옥은 같은 규격이 아니라 돈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와 오브제로 구성되어 있다.

 

서평을 적어가는 동안, 사람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지? 왜 말이 연결되는 것처럼 적어가나, 내용은 계속 여기저기 튀는 것일까? 사회학을 연구하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순은 사회란 것은 단순하고 명쾌한 영역이 아니라 매우 복잡 다양한 미로라는 것이다. 미로를 찾아갈 때 미로를 향하여 발자국을 남길 수밖에 없다.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새처럼 다 볼 수 있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신이 아닌 이상, 새는 새대가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꾀꼬리가 노래 한 수 불러주면 감사할 따름이나, 도시에는 꾀꼬리 대신 닭 같이 생긴 비둘기만 펄럭거린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이런 복잡 다양한 사회상의 문제를 파트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러나 작가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고, 더구나 자유롭게 서평이나 적는 독자이기에 이렇게 적을 뿐이다(나보고 이딴 식으로 글 적는 것에 불만 있는 분은 나에게 월급을 주면 된다. 적어도 내 글이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이상 말이다). 사실 사회학 관련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엘리트의 시선은 왠지 피곤하게 느낀다. 이 책은 엘리트가 적은 글이나 그나마 엘리트라도 수면 아래서 코와 입을 밖으로 내놓은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한 글이다.

 

어떤 사건과 문제가 발생하여 거기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최대한 중립적으로 비판하여 최종적으로 어떤 대안과 가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전혀 상관없거나 상관하기 싫거나 또는 별천지에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판단내릴 수 없다. 사회학은 위에서 보는 게 아니라 차라리 아래로부터가 더 좋은 것이다. 거대한 반투명유리에서 위에 보다는 아래에서 보는 게 좋다. 빛이 내리면 모든 사람들이 일광욕을 하는 게 아니라 일부는 그늘에 가려 태양에 가린 채 살아간다. 그래서 사회학은 아래서부터 바라보는 시각이 있어야 문제의 원인과 해결대안을 찾을 수 있다.

 

이미 자신은 어떤 문제에 대해 겪을 일도 없고, 겪을 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공감이란 단어는 물 건너갔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직접 노동자의 삶을 보고 저술했다면, 현대인 중에 엘리트들은 그저 마르크스의 저서가 어렵고 엘리트로서 볼 책 중에 하나로 취급당하면 난감한 상태가 발생된다. 물론 마르크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하는 실천적인 연구자세가 필요하다. 이론이 있어야 생각을 할 수 있는 판단력이 갖추어지나, 그 판단력이 어떤 판단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 글을 보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잘 때까지 세상살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거리는 많다.

 

단지 어떤 원리이고, 무엇이 문제인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처음부터 문제가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가 귀찮아진다. 이슈는 신경이 가지만, 현황에 대해 지겨워한다. 세상물정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세상물정에 대해 돋보기로 보는 것은 불편한 것들에 대한 연속적인 만남이다. 대신 눈을 돌리면 지금은 편하지만, 나중에 더 불편한 것들이 찾아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세계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세상물정은 어떤 맛인지는 직접 보고 판단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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