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웃기는 일이 있었다. 조경태 의원이 친노보고 민주당에서 나가라고 했다. 게다가 지금 안철수 의원과 당을 합하는 꼴에 친노보고 나가라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나 내 책상에는 조경태 의원이 저술한 세상과의 소통이 있다. 그나마 내가 예전에 조경태 의원을 좋게 본 것은 그가 토목공학 출신자고, 게다가 대학원출신이라 테크로라이트라는 이른바 기술관료가 없는 이 정치체제에서 공학출신자인 만큼 정확한 도시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그가 문재인 의원에 대한 비판까지 좋다.

 

하지만 자신이 노무현의 후광을 얻고, 그 책에는 노무현의 이름으로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려 했다. 그런 그가 하던 말이 무엇인가? 요새는 정치에 염증이 나서 이제는 거의 어둠의 오덕세계에 깊이 열반을 들어가고 있다. 하루 평균 애니메이션 시청시간 2시간 정도, 물론 주말이 아닌 평일에는 일도 하고, 야근도 하고, 이래저래 하다보니 주말에 몰아보나, 오덕을 위한 오덕으로서는 충실한 라이프를 즐기고 있다.

 

물론 책도 읽고 하고, 서평도 적기도 하지만, 그런 정신적 스트레스를 벗어나고 한다. 그럴 때에 안철수가 바보 노무현이란 이름을 들먹이고 있다. 솔직히 안철수 의원이 지난 대선부터 총선까지 봉하마을을 오고가고 한 것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한 명제에서 어긋난 이유는 그 주변의 인물이다. 그의 측근과 민주당 요원들이 노무현과 친노라고 하는 사람에 대한 말을 생각해보자. 정말 표리부동하다. 바보 노무현이란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지지도가 불리하기 때문이다. 친노를 뺏자고 해도, 과연 민주당에 친노는 몇 %? 라고 되묻고 싶다.

 

최근에 봉하마을의 권양숙 여사가 봉하마을 사저를 노무현재단에 위탁기부하고 자신은 다른 집에 간다고 한다. 노무현재단이라고 해보았자, 거의 자원봉사로 이루어진 재단으로, 봉하마을에 가면 봉하사저를 제외하고 어디를 누벼도 통제하는 곳은 없다. 사람들이 미치지 않은 이상 남의 가게나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어디든 누빌 수 있다.

 

전에 봉하마을에 갈 떄 권양숙 여사가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이 생각난다. 딱 경호차량 1대 후에 본 차량이 등장한다. 처음에 오는지도 몰랐다. 알고보니 지나간 것이다. 정치적 명제를 위해 권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명제조차 사실은 권력유지라고나 혼자만의 숭고한 의지라거나 또는 빛 좋은 개살구, 요새 안철수 의원 주변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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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윤선도 평전 - 정쟁의 격랑 속에서 강호미학을 꽃피운 조선의 풍류객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고미숙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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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자 유흥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권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남도기행이다. 그리고 그 기행의 시작점은 강진군이고, 다음으로 해남군이다. 강진과 해남, 왜 그는 그곳을 선택했을까? 그 책에는 이런 문구가 은근히 기억난다. 한국에서 먹물을 좀 먹었다는 인간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아마 우리 한국역사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가치를 물어보자면, 2012년 세계 유네스코 인물에서 우리나라 첫 인물로 선정되었으며, 학문적 연구 가치로 따지자면 한국 역사와 철학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고, 동아시아권의 국가에서 다산의 학문을 연구한다.

 

그런 점에서 다산 정약용이란 인물이 얼마나 후대에 이르기까지 깊은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정약용 선생이다. 유흥준 교수나 혹은 먹물을 좀 먹었다는 사람들처럼 존경하는 게 아니라 다른 루트로 통해서 나는 그분을 존경하게 되었다. 약간 중간에 길을 벗어나는 것처럼 들리지만, 내 아버지는 나에게 말씀하기를 지금은 힘이나 돈이나 되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과거에 있었던 그 흔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나, 결론적으로 그것이 지금도 이어지고 앞으로 간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보수와 진보라는 말을 떠나 그것은 하나의 전통을 말하는 것이다. 보통 한국 사람들이 자기집안이 족보를 보는 시점이 언제냐고 생각하는지 생각하면, 아마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제법 일가친척들 사이에서 행사에 참여하여 어느 정도 발언권을 가질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나는 집안 족보를 고등학교부터 봤고,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었다. 솔직히 나도 처음 보고 정말 놀란 사실이고, 아직도 그것이 딱히 누구에게 자랑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 문중의 족보에는 다산 정약용이란 이름이 2번 들어가 있다.

 

한 문중에 같은 사람이 2번이나 올라가 있다니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과거 어느 권력자는 자신의 딸을 시집을 보내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또 다른 여자가족 1명을 시집보낸 일이 있다. 그런다고 그런 부당한 일도 아니고, 전부 가족 간의 친분이 있었던 사람끼리 혼인을 정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학연과 학유라는 아드님이 계셨고, 그 외에도 따님이 있었다. 정약용 선생의 아드님의 후손은 아직도 경기도에 살고 계시고, 따님은 정약용 선생이 귀양살이하시던 강진에서 자신의 친구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냈다. 2사람은 결혼하여 조선후기 고전문학자인 방산 윤정기 선생을 태어나게 했다.

 

바로 그 다산 정약용 선생의 따님이 결혼하신 곳은 해남윤가고, 다산 정약용 선생의 외갓집 역시 해남윤가다. 그리고 나 역시 해남윤가다. 물론 핏줄이 직접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해남윤가 내에서 8대 공파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따님이 시집가신 곳이 나하고 같은 공파였다. 그래서 집안 족보 중에 파보를 보면 정약용이란 이름이 내 이름과 같은 책에 올라가 있다. 집안내력에서 내 직계의 할아버지가 그 당시 다산초당에서 정약용 선생에게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돌아가신 친할아버지가 다산초당의 주인이던 윤단의 후손분과 친구였다고 한다.

 

이런 관계를 두고 조금 의아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지금 다산초당의 주인이고, 찻집 다신계 주인인 분은 윤단의 후손으로 지금도 다산초당 인근에 자란 야생차를 따서 녹차로 만들어 다산 정약용 선생의 머나먼 후손에게 보내주고 있다고 한다. 다신계라는 것은 정약용 선생이 해배될 때 그분의 제자 중에 18분이 계를 만들어 스승인 다산 선생에게 차를 보내고, 서로 간의 우애를 다지자는 모임이었다. 한국 다도문화에서 다신계절목이란 기록은 매우 중요하고, 다도문화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가치는 매우 높다. 실제로 다산 선생의 시조 중에 탁월한 시들이 많으나, 차시들이 상당히 많다.

 

그런 점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 살이 하던 강진 귤동마을, 그곳 산장 주인 역시 해남윤가다. 그런데 그 윤가는 다산 선생의 외갓집의 공파에 속했다. 그리고 그 공파 안에도 나와 다산 선생의 관계처럼 작은 파가 형성되어 있다. 그래도 다산 선생을 위해 다산초당을 제공하고, 음식과 술, 그리고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게 해준 이유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외증조부가 조선화가 삼재 중인 하나인 공재 윤두서였고, 윤두서 선생은 고선 윤선도의 후손이었다. 즉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인생에서 해남윤가의 영향은 엄청났고, 그곳은 아직까지 유효했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 선생의 당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역시 고산 윤선도의 영향이 컸다. 그는 조선 병자호란 전후의 남인 영수였고, 예송논쟁으로 우암 송시열과 다툼하다가 귀양살이한 사람이다. 다산 선생이 존경하던 성호 이익의 경우, 그의 큰형은 장형으로 죽고, 아버지는 귀양살이하다 죽는다. 당파싸움에서 남인과 노론의 관계에서 고산 윤선도가 벌인 싸움은 매우 컸다. 성호 이익 선생의 형인 옥동 이서가 공재 윤두서와 친구였고, 해남 녹우당의 현판의 휘호는 옥동 이서의 작품이다. 해남의 녹우당은 아직도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 살고 있다.

 

<윤선도 평전>을 보고 적는데, 다산 정약용 선생과 붕당정치의 비극, 그리고 해남윤가의 이야기가 나와 조금 지나친 감이 없지 않은가 하나, 모두 <윤선도 평전>에 담긴 내용이다. 단지 나는 이 책을 보기 전에 이미 아버지와 집안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윤선도 평전>을 서평하기 위해 풀어놓았을 뿐이다. 이미 고산 윤선도라는 이름은 고등학교부터 아버지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유너머의 저명한 인문학자인 고미숙 선생이 과연 윤선도라는 인물을 어떻게 평전을 했을까 라는 의문에서 책을 구매하여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나왔다. 아는 것은 고산(孤山)이란 호가 외로운 산이란 것처럼, 그는 평생 외로움의 유배 살이를 보냈으며, 70대의 노년에도 귀양살이를 가야만 했다. 지금의 70대와 조선시대의 70대는 조금 다르다. 지금 70대 어르신들도 건강하고 정정한 분들이 많으나, 당시의 70대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귀양으로 인한 유배 살이를 한 이유는 너무 입이 강직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후에 광해군이 정권을 잡았을 때, 당시 실세인 이이첨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하여 미움을 샀고, 효종의 스승이어서 효정이 집권할 때, 많은 질투의 대상이 되었으며, 효종 승하이후 상복을 1년인가 3년인가에서 불리할 것을 알고도 싸웠다.

 

어떻게 말하면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아버지에게 화가 미칠 것을 알면서도 상소를 계속 올린 자가 고산 윤선도다. 그의 상소문을 보면 직설적이라 당시 권력의 실세가 보면 매우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다. 귀양을 인생의 반을 가야했던 그의 처지는 알면서도 싸운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성격이 아주 강직한 성품으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면이 있었다. 또는 엉뚱한 면도 있었다. 조선시대는 사대부가 집권계층이던 시대다. 그런데 그는 사대부라도 조금 특이한 면이, 종에게 심부름을 보낼 때 가정이 있는 노복에 대해서는 심부름을 시키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삶의 즐거움을 즐기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제일 가슴이 찡한 장면은 조선시대는 신분체계가 모순되고, 남존여비에다가 천한 신분의 여성은 양반에게 강제로 첩이 되어야 했다. 게다가 그 첩에서 나온 자식은 비천한 신분이 되어야 했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으로부터 사랑은커녕 학대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고산이 유배 가던 때에 첩에게 나온 8살 아이 미가 어린나이에 죽자, 매우 통곡했다고 한다. 그때 지은 기록과 시의 일부분을 보면

 

“미는 천출로 태어난 나의 자식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내 사랑을 온통 다 기울였다. 기묘년(53세) 중춘에 영덕의 유배지에서 귀양이 풀려 집에 돌아오던 중, 20일 아침 경주의 요강원에 이르렀을 때, 미가 천연두를 앓다가 이달 초하루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분통하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여 그 애통한 심정을 이루 다할 수가 없었다. 말 위에서 시어를 엮어 나의 슬픔을 토로했다.”

 

“(중략) 네가 없으니 감싸 쓰다듬어줄 수가 없고, 네가 병들었으나 약을 써보지도 못해, 이 때문에 내 슬픔 더욱 크고, 애통함은 비할 데가 없구나, 밥을 먹어도 눈물이 수저에 오르고, 말을 타면 눈물이 고삐를 적시네, (중략), 비록 나의 악업 때문이라지만, 하늘은 무슨 일로 가혹한 형벌을 내리시나.”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체면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았다. 특히 부인과 자녀들에 대한 가족과의 우애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아버지와 남편의 딜레마였다. 그런데 아직 어린아이인데도 그것도 첩의 자식인데도,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그의 모습에는 너무 인간적이었다. 지금도 이 정도의 부성애를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 성격인지 보길도에 기거할 때, 자신의 아들이 찾아오면, 배가 도착하기 전에 나루터에 먼저 도착하여 손을 흔들고 큰 소리로 아들을 반겼다고 한다.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희생자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뽑을 수 있는 인물이 고산 윤선도다. 그런 강직한 성격을 가진 자가 가족에 대한 애정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의 시조는 이율배반적인 요소를 가졌다. 그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그것을 넘어 자신이 보고 있는 어민과 백성에 대한 모습을 어부사시가로 표현할 때 한국의 국문학에서는 큰 업적을 남겼다. 그렇지만, 그의 자연미라는 것은 일반 조선선비들이 누리던 자연 그 자체를 두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자연의 조형미를 만들어서 자연미가 아닌 자연미를 만들었다. 작은 호수를 만들고, 조경을 꾸미는 모습에서 그만의 독특한 미학을 남긴 것이다.

 

시에서도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으나, 그가 접한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아니라, 그가 만들어진 자연이다. 자연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인위적인 자연성은 그의 정치적 미학이 반영되어 있다. 바른 쓴말과 직설적인 상소로 정치적으로 탄압받아 머물 곳이 없어 머물던 보길도에서 그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정치적 미학이 있었다. 그것을 이루지 못하여 대체할 수 있는 요건이 보길도의 자연미다. 자신이 추구하고 싶은 정치적 목적은 왕도정치였다. 조선시대 정치적 당쟁에서 왕권을 중심이냐? 혹은 신권을 중심이냐? 라는 문제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왕은 권력자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신하로부터 견제가 심했다. 임금의 정치적 색이 합당하지 않으면 반정이 일어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독살설도 나온다. 대표적인 인물이 정조이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에서 정조의 왕도정치와 남인의 목표가 나오지만, 문제는 그 이인화는 기호남인을 생각했어도, 다산 정약용 선생은 기호남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의 조선후기에서 노론의 후예가 조선 말기를 혼란하게 했는데, 그 연결고리가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다. 어째든 조선시대의 임금은 권세를 잡은 신하들과 잘 지내지 못하면 언제라도 내칠 위험이 도살아 있었다. 그리고 정권의 균형이 무너지면 어느 한 쪽은 참수와 유배, 형벌이란 무서운 보복이 살아있었다. 삼족을 멸한다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은 아니다.

 

예송논쟁은 바로 기년상과 3년상에서 효종의 죽음이 왕권을 얼마나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의 대립이었다. 지금 입장에서 붕당파벌이라고 하나, 당시로서는 국가의 대사가 걸린 문제였고, 거기에 목숨 걸던 사람들이 많았다. 한 마디로 세상이 사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당쟁에서 고산 윤선도가 택한 것은 왕권의 강화인데, 이이첨의 사례나 혹은 실세들이 지나치게 권력을 잡아 부정부패를 일삼고, 그로 인해 백성은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은 군주정이 아니라 민주정이라고 하나, 과연 민주정에서 국민의 대표가 국민 아무나가 될 수 있는 곳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그런다고 군주의 위치인 대통령에게 모든 것을 줄 수도 없다.

 

지나친 권력이 모이면 결국 독재정치로 가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하나가 지나친 권력을 잡아 자신의 이권만 누리면 정치적으로 혼탁하게 되어 결국 국가와 국민은 피해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문제는 당시나 지금이나 국가와 국민의 이름을 아주 미화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입맛으로 만드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와중에 혼자 돈키호테처럼 덤비는 것은 누가 봐도 알만한 결과이나, 그래도 멈추지 않았기에 역사에 이름을 생긴다. 단지 이이첨과 같은 간신배로 남지 않고, 조선시대 정치가나 또는 시조의 대가로서 말이다.

 

그런다고 고산 윤선도가 정치적 풍파를 많이 맞아도, 정치생활 자체는 길지 않다. 유배로 계속 살았고, 그 후로 몇 년씩 은거했기에 실제 정치적인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의 정치에서 학문을 연마하던 사대부였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인이면서도 문인이었다. 학문에 능통하지 않으면 과거에 급제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과거시험 문제가 이미 유출되어 그 자료를 고산 윤선도에게 달라는 어느 실세의 일화를 보면 참 웃기고도 안타깝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자료를 끝까지 주지 않기 위해 갖은 답변을 하던 고산 역시 재미있다. 이런 역사적 아이러니가 되풀이되니 고산 윤선도의 이름은 개인적으로 내 입장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잊어지기 어려운 인물이다. 물론 국어 교과서 국문학에서도 빠질 수는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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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키안입니다.

"한국 애니메이션계는 많이 힘들다. 그렇다면 안녕하세요. 키안입니다.

"한국 애니메이션계는 많이 힘들다. 그렇다면 한국에 종사하는 많은 애니메이터들, 만화가들, 외에도 관련 종사자들(게임개발자,일러스트레이터)은 과연 한국을 떠나 해외로 나가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그래도 계속 한국에서 좀 더 나은 환경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좋을까?"
~라는 주제로 토론발의 해주셨으면 합니다.
한국 콘텐츠업계가 왜 힘든가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 주셨으면 좋겠고요.

회원분들 각자의 의견주장은 되도록 댓글이 아니라 게시글로 했으면 좋겠다는 것도 언급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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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키안님이 저에게 주신 내용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실제로 그 바닥에 근무하지 않은 지라 정확한 데이타나 통계는 알 수 어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에 종사하는 많은 애니메이터들, 만화가들, 외에도 관련 종사자들(게임개발자,일러스트레이터)이 한국을 떠나 외국으로 간다는 점입니다.

 

많은 인력들이 특히 일본에 집중되며, 때에 따라서는 미국이나 유럽으로 갑니다. 미국에는 디즈니와 같은 대규모 자본을 갖춘 업체가 있고, 유럽의 경우 예술성을 강조하기 그렇습니다. 다르게 본다면 만화애니메이션 콘텐츠가 우리로선 일본에 집중적으로 소비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으나. 프랑스 안시영화제나 앙굴렘 만화전은 세계적인 만화애니메이션 행사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도 만화규장각에서 운영하는 부천국제만화축제와 부천국제애니메이션축제 등의 행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밖으로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운영하는 서울애니메이션축제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프랑스 앙굴렘이나 안시와 같은 사례를 보면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그곳은 도시 전체가 축제라면 우리의 경우는 도시에서 축제하더라도 일부 구나 동으로 제한될 뿐만 아니라 많은 참여객들을 위한 인프라조차 부족합니다.

 

예전에 저도 부천국제애니메이션축제(PISAF)나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 행사에 참여할 때, 2011년 PISAF 떄는 숙소예약이 가능했지만 2013년 BICOF에서는 숙소를 예약하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방문객도 아니고, 표찰에 Guest 내지 VIP를 차고 있는데도 말이죠(여담이나 BICOF 2013년 행사 위원회 부위원장이신 교수님이 부산에 사시는데, 여관에서 제자들과 방을 잡아 주무셨다고 합니다).

 

종사자는 아니나, 비종사자로서 보는 입장이라면 그 만큼 유관행사에 대한 인프라 내지 편의시설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실제 만화규장각을 가면 주변에 식당이 부족하고, 여러모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부족합니다. 물론 내부에 전시관이나 상영관 등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나, 이용자에 대한 접근성이나 편의성을 보면 많은 불편함은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행사조차 불편함이 감내해야 하는 현실에서 종사자에 대한 현실성은 당연히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행사는 그 개최를 위한 기획과 예산, 실행이 필요하지만, 이와 반대로 이런 특별한 이벤트가 없다면 종사자들의 일상적인 부분은 어떤가라는 의문입니다. 분명히 그들은 우리가 즐기는 콘텐츠를 생산하고 기획하는 입장이나, 평소 전반적인 상황을 보자면, 그들은 우리에 비해 매우 심각한 상황에 놓인 것은 분명합니다.

 

자세한 통계까지는 아니나 대략 년간 애니메이션 관련 인력배출을 고려하면 천 명 이상이 될 것입니다. 각 지역별에 있는 만화애니메이션고등학교 및 영상영화예술고등학교(하단 참조, 자료출처 :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http://www.koscas.com)에서 배출디는 인원이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예전에 비해 만화애니메이션 전공을 다루는 대학교는 점점 늘어가는 추세고, 만화애니메이션을 다루는 특화고등학교 역시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해마다 인력이 증원되는데, 이 많은 인원이 국내에서 활동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결론은 만화작가 내지 라이트노벨작가, 게임제작진 내지 애니메이터 등으로 활동하는 것이 이들의 직업일 것입니다. 디자인 내지 일러스트로 통해 활동할 수 있겠지만, 디자인 역시 만화애니메이션과 연계되므로, 이들이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확대적 방안은 매우 부실합니다. 애니메이션은 제작에서 화면에 대한 편집과 동화작업이 위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음향적 조건과 더불어 서사적 조건이 따릅니다.

 

특히 서사적 조건인 스토리텔링에서 지나친 규제와 여성가족부의 개입, 각종 시민단체(일부 여성 및 기독교단체)들에 의한 제재에서 창의력이 기본이 되는 만화애니메이션에 치명적입니다. 그림이나 영상으로 드러나는 모습 자체가 하나의 서사를 가지므로, 그 서사적인 담론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규제가 너무 심한 점입니다. 규제의 압력은 TV 애니메이션에서 상당히 치명적이며, 그에 대한 대안으로 OVA 내지 극장용으로 되돌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TV 애니메이션 이외에는 광고 내지 홍보수단이 열악하므로, 이에 대한 문제점이 따릅니다. 결국 한국 만화애니메이션 문화산업을 흥행하기 위해서는 TV 애니메이션 규제 문제와 더불어, 그밖의 매체에서 홍보할 수 있는 전략적 수단이 갖추어야 합니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러하나, 지금 대부분의 만화애니메이션 정책제안자 내지 창작들이 놓치는 부분이 바로 소비자에 대한 기호분석과 접근방법입니다.

 

최근 시드노벨과 같은 라이트노벨제작업체에서 라이트노벨 카페 내지 동호회, 사이트에 직접 활동하여 홍보하거나 또는 고객과의 만남을 주선하여 시장에 대한 전반적인 개발과 홍보를 병행합니다. 그리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빠른 정보와 명확한 발매소식을 접하므로 서로간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조가 되기 위해서는 결론적으로 만화애니메이션 정책제안자 내지 문화산업의 결정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전환이 시급합니다.

 

그 이유는 제 아무리 만화애니메이션 문화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국가 내지 지방자치단체에서 법률, 시행령, 시행규칙, 고시 및 공고, 조례 등을 내세워도 결론적으로 지원만이 모든 해결책이 아니라 그 지원 후에 얻을 수 있는 성과입니다. 결과론적인 세견과 성과주의적인 요소로만 분명히 문화산업에 대하여 판단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 성과나 결과에 대한 비판과 자숙은 필요합니다. 그 과정과 원인에서 정책제안자나 결정론자가 소비되는 시장구조를 제대로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가령 과거 하이텔이나 천리안 등과 같은 초기 전화모뎀 시절의 동호회들은 온라인활동과 동시에 오프라인 활동을 매우 중시합니다. 한국의 서브컬쳐 문화에서 대표주자인 ACA라는 동호회는 1990년대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규모 동호회였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 젊은 중학교 내지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지금은 30~40대에 이르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 당시보다 현재가 그들의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이 유리할 겁니다.

 

그러나 ACA라는 조직은 사라지고, 대신 여러 가지의 인터넷 동호회가 생기고, 그 동호회의 회원들은 ACA에 비해 활동범위가 주로 온라인에 머물려 있지만, 온라인이란 특성으로 많은 회원들이 가입하고 활동합니다. 특히 21세기에 이르러 모바일로 통한 스마트폰의 대두는 인터넷 동호회 회원들에게 실시간 활동이란 장점도 전달해줍니다. 그렇다면 대부분 젊은 계층인 10대부터 20대, 그 너머의 30대까지 동호회에 활동하고 그들만의 취미생활을 즐깁니다.

 

이들에게 늘 새로운 정보와 즐거움이 필요하고, 거기에 호응할 수 있는 콘텐츠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그런 콘텐츠홍보전략이 부족하며, 그들의 소비계층과 소비구조에 대한 정보가 부족합니다. 제가 딱 꼬집고 싶은 부분은 만들기 위해 인력을 배출한 것까지는 좋으나, 만들고 나서가 제일 중요합니다. 생각해보면 자신들이 만든 물건들은 창고에 재고로 쌓여 있으면서 아무도 사지 않으면 결국 부도가 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소비자에 대한 접근도가 떨어지고, 이들에 대한 정보력이 없다면 결국 무엇을 만들어도 소용없다는 점입니다.

 

소비되지 않은 한국, 소비되기 어려운 한국, 어떻게 소비되도록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수요와 공급을 맞춘다면 인력이 증가하게 되는 겁니다. 아직까지 많은 현실적 어려움이 있습니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트노벨 등은 여가생활을 위한 문화콘텐츠입니다. 한 번 나오고 싶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문화적인 성과가 축적되어야 발휘되는 하나의 숙성된 장의 맛입니다.

 

생각해보면, 대부분 만화작가나 애니메이터를 꿈꾸는 사람들은 단순히 점수가 되어 누군가의 권유로 하여 들어온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가 좋아해서 어렵지만 그래도 좋아하니까라는 자신의 의지로 온 겁니다. 그들이 가지던 의지가 결국은 소비자라는 입장에서 생산자로 가게 된 겁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그들이 과거의 모습을 잊었을까요? 꼭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과거에 자신도 소비자에 있었는데, 결국 생산자로 간다고 해도 좋아하는 것은 포기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인력구조가 시작되었을까요? 개인의 능력과 역량, 물론 있을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천재인 월트 디즈니나 미야자키 하야오 등의 거장들이 있으니깐요. 그러나 그들은 정해진 인원이고, 그 사람만 볼 수만 없으면, 애니메이션 같은 경우는 만화나 라이트노벨처럼 소수정예로서 움직일 수 있는 미디어가 아닙니다. 대규모 자본과 인력이 동원되어야 가능합니다. 좋은 감독이나 애니메이터 밑에 우수한 직원이나 지원군이 있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직원이나 지원군이 누구일까요? 결론은 힘들게 고생하고 대접 못받는 것을 알면서도 한치 앞도 보지 못할 꿈을 찾는 소비자들이 아닐까요? 소비자를 배려하지 않으면 결국 추후에 그 소비자가 생산자로 될 경우, 많은 제약과 난관에 봉착합니다. 한국 만화애니메이션 문화산업이 쇠퇴하니 당연히 그것에 맞추어 소비자들의 입장이 곤란합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잘못 봐도 오타쿠라는 낙인이 이상하게 찍히는 세상이니깐요. 결국 약자는 누구일까요?

 

만화애니메이션 문화산업에 종사하는 고생하는 분들일까요? 아니면 그분들이 생산하는 콘텐츠를 보고 즐기고, 향후 그들의 자리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일까요? 우리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얼마 전에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문화산업 부흥을 위한 "애니메이션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두고 국회에서 방청객을 모시고 토론회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과연 무엇이 얻어지고, 무엇이 나올까요? 다들 중요한 지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특히나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국가에서 국회라는 곳은 국민의 대표자를 모아 국회의사당에 법률을 제정 및 개정, 그리고 여러 국가대사를 결정하고 운영하는 곳입니다. 막상 거기에 가도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대표로서 애니메이션을 위한 토론을 제대로 했을까요? 아니면 거기 참석한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나 제작사 관계자들이 국민 속에 있는 소비자를 생각했을까요? 저는 그 자리에 가고 싶어도 회사일로 또는 너무 멀어서 못갔으나, 주변에 아는 분의 소식통으로 조금 들었습니다.

 

덧붙여서 한국에는 만화애니메이션과 같은 서브컬쳐만 아니라 영화나 소설과 같은 대중문화도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원래 강대국과 같이 어느 정도 요건이 되는 국가들은 자신들의 위치가 어느 정도 찾게 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역사적 전통을 살리고, 문화예술을 발달시킨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프랑스, 독일, 스위스, 영국 등과 같은 유럽국가에서는 세계적인 관광소가 되고, 다양한 문화유산과 전통문화가 남아있습니다.

 

게다가 문학과 영화, 미술과 음악, 철학 등과 같은 학문적 역량도 탁월합니다. 그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마법이 아니라 그 마법을 이루기 위한 노력과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번역이나 암기는 잘 합니다. 그러나 창작이나 그 이상의 성과는 나오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최근 규제개혁이란 정치적 이슈에서 우리에게 반강제적으로 인입된 계몽 아닌 계몽부터 청산하는 게 바르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계몽이란 그 유명한 계몽주의 관념철학자 칸트의 말처럼 누가 깨우치게 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우쳐야 하니 말이죠. 그런 기회조차 부여하지 않은 이상 문화강국은 힘들겠지만 말입니다.

 

 

 

 

 
강원대학교 영상문화학과 http://vculture.kangwon.ac.kr
경기대학교 다중메체영상학부 애니메이션과 http://web.kyonggi.ac.kranimation
경동정보대학 게임애니메이션과 http://ga.kdtc.ac.kr
경민대학 카툰애니메이션과 http://kcms.kyungmin.ac.krcartoon
경북과학대학 포장디자인계열 산업디자인전공 http://www.kbcs.ac.kr
경북전문대학 영상미디어과 http://blog.naver.com/kbcackr
경성대학교 디지털콘텐츠학부 http://ks.ac.krDicon
계명대학교 미디어아트대학 영상애니메이션과 http://www.vakmu.co.kr
계원조형예술대학 디자인계열/애니메이션전공 http://www.kaywon.ac.kr
공주대학교 영상보건대학 만화학부 http://www.mongch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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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과 http://www.kdu.ac.kr
극동정보대학 영상컴퓨터과 http://home.kdc.ac.kr/motion/
 
남서울대학교 애니메이션과 http://ani.nsu.ac.kr
 
대구미래대학 예체능계열/애니메이션과 http://ani.dmc.ac.kr
대구예술대학교 디자인계열 애니메이션전공 http://www.tau.ac.kr
대불대학교 디자인학부 만화애니메이션과 http://class.daebul.ac.kr
동강대학 정보산업디자인과 애니메이션전공 http://www.dkc.ac.kr
동서대학교 디지털콘텐츠학부/애니메이션 전공 http://dicon.dongseo.ac.kr/VR
 
명지대학교 디자인학부 영상디자인전공 http://design.mju.ac.kr
명지전문대학 커뮤니케이션디자인과 http://www.mjc.ac.kr
목원대학교 미술대학 만화.애니메이션과 http://home.mokwon.ac.kr/~ani
 
백석대학교 디자인영상학부 영상애니메이션 http://community.bu.ac.kr/design
벽성대학 공업계열 VR 게임개발과 http://www.byuksung.ac.kr
부산경상대학 컴퓨터그래픽디자인전공 http://www.psks.ac.kr
부산예술문화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 http://ani.pia.ac.kr
부천대학 FX애니메이션과 http://club.cyworld.com/fxani
 
상명대학교 만화 디지털콘텐츠학부 http://web.smu.ac.kr/art
서울시립대학교 산업디자인과 http://design.ac.kr
선린대학 시각디자인계열 http://design.sunlin.ac.kr
성균관대학교 예술학부/영상학 전공 http://art.skku.edu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과 http://www.sejong.ac.kr
숙명여자대학교 디자인학부 시각영상디자인전공 http://www.sookmyung.ac.kr
순천대학교 조형예술학부 만화예술전공 http://cafe.naver.com/scartoonart.cafe
순천향대학교 공연영상미디어학부 영화애니메이션전공 www.sch.ac.kr/filmani
신라대학교 IT디자인대학 만화/애니메이션디자인전공 http://cadesign.silla.ac.kr
 
아주대학교 정보통신대학/미디어학부 http://media.ajou.ac.kr
안산 1 대학 디지털에니메이션과 http://ani.ansan.ac.kr
영산대학교 CT대학 시각영상디자인학과 http://vdmg.ysu.ac.kr
예원예술대학교 만화게임학부 만화애니메이션전공 http://www.yewon.ac.kr/Subject/cartoon
용인대학교 예술대학 디지털미디어과 http://dfam.co.kr
용인송담대학멀티미디어 콘텐츠과 http://www.multi.ac.kr
울산과학대학 디지털콘텐츠디자인과 http://c-design.uc.ac.kr
유한대학 애니메이션과 http://www.yuhan.ac.kr
이화여자대학교 디자인학부 영상디자인전공 http://mid2008.cafe24.com
인덕대학 만화영상애니메이션과 http://animong.induk.ac.kr
인제대학교 디자인학부/영상애니메이션디자인 http://design.inje.ac.kr
 
장안대학 게임전공 http://game.jangan.ac.kr
전주대학교 문화산업대학 만화애니메이션전공 http://club.cyworld.com/jeonjuani
조선대학교 미술대학/만화애니메이션학부 http://www.chosun.ac.kr
조선이공대학 시각영상콘텐츠과 http://www.chosun-c.ac.kr
중부대학교 예술체육대학 만화 애니메이션과 http://animation.dongmoon.kr
 
청강문화산업대학 http://www.chungkang.ac.kr
청주대학교 조형예술학부 만화애니메이션전공 http://www.chongju.ac.kr
 
카톨릭대학교 디지털 미디어학부 http://songsim.catholic.ac.kr/~dct
 
평택대학교 영상애니메이션디자인전공 http://www.ptuniv.ac.kr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영상만화과 http://www.knua.ac.kr
한국폴리텍 서울정수기능대학 컴퓨터애니메이션과 http://www.sjpc.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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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취성의 가르간티아>의 사전적 의미와 환경과학적 고찰

<취성의 가르간티아>에서 가르간티아의 의미를 찾아보니 스페인어로 gargantilla로 나타내며, 사전적 해석은 목 주변에 두르는 여성의 장식품, 목걸이, 염주 등이다. 즉 여자가 목에 두를 수 있는 장식품을 의미한다. 그리고 취성(翠星)이란 푸른 별이라는 의미다. 취라는 한자어는 푸른색과 물총새(조류) 등을 의미한다. 결국 <취성의 가르간티아>이란 의미는 푸른 별의 여성의 목에 장식하는 목걸이를 의미한다. 그럴 이유를 생각하면 취성은 푸른 별인데, 지구가 멀리 우주에서 바라보면 푸른색의 공처럼 보인다.

 

물론 중간에 녹색과 황새 그리고 흰색이 보인다. 녹색은 숲이고, 황색은 모래의 사막, 흰색은 구름과 얼음이다. 대규모로 조성된 도시지역에서 불빛이 가득해 보이나, 기본적으로 지구는 푸른 별이라고 한다. 그것은 태양에서 빛을 지구로 보내면 다른 색들은 전부 흡수할지어도 파란색의 파장은 반사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태양의 프리즘에서 푸른색을 반사하는 지구는 푸른 별로 보이는 것이다. 푸른색은 결국 지구의 생명이 넘쳐나는 생태계적인 별이라는 점이다. 물과 생명이 어울려진 생명의 푸른 별 지구, 그것만으로 지구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자연주의자 내지 환경론자들의 입장에서 지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고, 인간의 존재는 자연 앞에서는 그저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물론 그런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는 식량과 물 부족, 에너지자원부족, 환경오염 등과 같은 자연적 재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고, 각종 질병에 시달리지 않았어도 될 것이다. 자연재해라는 것은 결국 자연의 운동에 의해 발생되는 태풍이나 해일이 존재하나, 그것은 하나의 자연적 법칙에 의한 운동으로 볼 수 있다면, 이제는 인간의 지나친 개발에 의해 자연의 법칙과 운동은 무너지게 되어 지구는 각종 환경재난으로 가득하다.

 

<취성의 가르간티아>에서 지구에는 인간이란 생명체가 존재한다. 하지만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이에 따른 환경오염이 가중되고, 언젠가는 자원의 고갈로 인한 전쟁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지구에 심한 자연재해가 닥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환경과학적으로 지구환경시스템을 본다면, 우선 현재 우리는 지구대기 온난화로 인해 기온이 상승하고, 지구의 온도를 컨트롤하는 극지방의 얼음이 녹고 있으며, 지나친 산림파괴로 숲과 나무들이 사라진다.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밀림, 그런 밀림들이 조성된 곳에 대해 마구잡이로 벌목을 하고, 지나친 개간과 화전은 지구의 대기오염을 가중시킨다.

 

이런 연쇄적인 환경적 작용으로 인해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담수의 상당히 많은 양을 차지하는 극지방의 빙하가 사라지면, 그 작용으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한다. 매해 해수위를 측정하면 계속 상승 중이며, 그로 인해 군도와 같은 섬으로 이루어진 지역은 해수로 인해 육지부가 사라지고, 해수위의 상승으로 인해 바다의 파도의 힘이 강력해지기 때문에 그 만큼 해일에 의한 피해도 가중된다. 실제 미국 플로리다주에 닥친 해일피해나 동남아시아권의 쓰나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2. 분쟁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인가?

<취성의 가르간티아>에서도 그런 분쟁적 동기가 바로 지구환경시스템의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 온난화가 지속되면 지구의 기온이 계속 상승하기도 하나, 간빙기라는 빙하기도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지구의 미세먼지가 계속 대기권을 가리거나 또는 지구의 공전과 자전운동, 내지 자전축의 기울기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심지어 지구의 기온이나 기상학적 조건은 달의 인력이나 태양의 흑점까지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거대한 에너지가 지구 내만 아니라 지구 외부에도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취성의 가르간티아>에서는 바로 그런 지구환경시스템이 인간에게 좋은 환경이냐 아니냐의 문제에서 벌어지는 것이 사건의 시초다.

 

발단의 원인에서 처음에 인류은하동맹이란 인류가 만든 조직에 속한 레드 소위라는 청년은 오로지 동맹의 적인 히디어즈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다. 그는 오로지 히디어즈를 멸살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다. 그가 히디어즈와 대규모 전투 도중에 조난당하여 우연히 지구라는 별에 불시착하게 된다. 그곳에 사는 인간들은 문명사회(레드소위)의 거주자인 레드 소위 입장에서는 미개한 수준의 문명이었다. 레드 소위는 첨단화된 정보통신체계의 체임버를 조종했고, 그가 도착한 가르간티아라는 배는 디지털로 통해 자동으로 운영하기보단 인간이 직접 몸과 정신으로 노동하는 문명이었다.

3. 레드 소위가 바라본 가르간티아

문명적 수준으로 본다면 항공기는 없었고, 선박으로 해양을 이동하면서 물고기나 해산물을 낚시하여 생존하고 있었으며, 체임버라는 첨단기기보단 윤보로라는 인간이 직접 운전하는 로봇이 있었다. 여기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모두 문명의 혜택보단 자연의 공간에서 문명의 소유물로 통해 살고 있었다. 자연이란 인간에 대해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맞추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레드 소위는 가르간티아와 조우하면서 그들이 오랜 전에 자신과 같은 인류였고, 그들은 지구에 계속 남아 오랫동안 거주한 것을 알았다.

 

결국 진화라는 관점에서 레드 소위는 문명이 진화한 세계에 있었고, 가르간티아의 사람들은 문명이 진화보단 퇴화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미개했던 것이다. 가르칸티아이란 것은 대규모 선박들이 하나로 연결하여 선단을 꾸민 공동체로서 가르칸티아가 여성의 목걸이라는 의미에서 기본적으로 배는 여자의 이름을 붙인다. <푸른 강철의 아르페지오>에서 안개라고 불리는 배들의 인격을 나타내기 위해 보여준 모습은 모두 미소녀 내지 미녀였다. 그들이 여성이 나온 이유는 인간은 선박을 여성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적인 요소로서 모자, 신발은 여성성을 의미하는데, 배도 역시 담을 수 있는 그릇이란 점에서 여성으로 본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승무원으로 여자를 태우지 않은 이유는 배 자체가 여성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태우지 말아야 하는 관념(터부)이 있었다. 하지만 물질적 조건으로 여성은 주기적으로 배란에 의해 생기는 월경이 원인이었는데, 그 이유는 옛날 선박은 모두 엔진이 아닌 인력이나 풍력, 조류에 의해 움직이므로 해상 위에서 이동할 수 있는 여건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만약 바다로 출항하면 상어나 위험한 바다동물이 월경으로 인해 배출된 혈액의 냄새를 맡고 찾아와 공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자면 문화인류학적(마빈 해리스의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으로 이슬람문화가 돼지고기를 혐오하는 것은 자신들의 문화적인 관념이나, 오랜 고문서에는 돼지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던 만큼 그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는 이유가 결국 물질적 조건에 의해 되었으며, 그것이 하나의 금단의 조치가 된 것이다. 생각하면 간단한 것이, 돼지는 건조하고 마른 곳보다는 축축하고 습기가 많은 곳에 살기를 좋아한다. 따라서 사막지역에는 습기가 부족하기에 돼지를 키우기가 어렵고, 실제 키운다고 하더라도 그에 따른 경제적 비용은 막대하고, 그것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관건이 조성되지 않는다.

 

문화인류학적인 관점에서 가르칸티아는 레드 소위가 보기에 매우 비효율적인 연합이다. 많은 배가 같이 있으면 행동하기 어렵고, 강한 무기도 없으며, 해적이 나와도 멸살하지 않고 최대한 희생을 줄이려고 한다. 게다가 자신들이 싸운 히디어즈와 비슷한 고래오징어가 나와도 아무도 싸우지 않는다. 오히려 레드 소위가 고래오징어를 죽이면 주변 사람들이 매우 불안한 표정으로 레드 소위를 바라본다.

 

4. 레드가 보는 가르칸티아의 삶

레드 소위는 단지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헤게모니, 즉 히디어즈를 모두 섬멸하는 것만이 전부고 그것을 위해 행동하는 전사이다. 그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었고, 오로지 전투를 수행하는 전투요원이었다. 하지만 레드가 가르간티아에 오자, 전투가 전부인 그에게 여기는 다른 가치관을 받아들이야 했다. 그것은 레드라는 인간이 오로지 전투를 위해 살았다면, 여기서는 전투가 아니라 삶이란 자체를 위해 살아갔다. 모두가 서로 돕고, 될 수 있는 한 모두가 자신만의 일을 하여 그 노동의 가치로서 생계를 이어갔다.

 

특히 <취성의 가르간티아>의 여자주인공인 에이미의 경우 그녀의 남동생인 베벨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한다. 베벨은 심장이 매우 약한 소년으로 조금만 무리하면 생명에 큰 지장을 줄 수 있을 만큼 약하다. 그래도 바벨을 위해 에이미는 열심히 일을 하고 그를 돌본다. 레드 소위는 그런 에이미를 보면서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런 힘도 없고 그저 자리만 차지하는 베벨을 보면서 쓸모없는 존재로 인식한다. 왜냐하면 레드 소위의 가족들은 연맹의 판단 아래 필요성이 없다고 여겨 모두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인류은하동맹은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행동한다.

 

즉 그곳은 인간이란 존재란 서로 간의 교류에 의해 존립되는 곳이 아니라 상하체계가 명확하고 오로지 명령과 복종만 강조되는 사회다. 문명발전 수준은 현재 과학기술과 비교조차 되지 않으나, 정치제도를 보면 전형적인 군국주의 내지 전체주의이다. 군국주의는 국가나 국가의 부속원인 국민이 모두 군대에 있는 것과 같은 사회체계이다. 그러므로 레드 소위는 계속 전쟁을 수행하며, 그의 가족들은 전쟁에 필요 없는 존재이기에 폐기처분 되었다. 인간의 존재적 가치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국가의 필요 여부에 따라 삶과 죽음이 나누게 된다.

베벨은 그런 레드 소위에게 보자면 새로운 존재였다. 베벨은 육체적 노동을 할 수 없으며, 군인으로 살아온 레드에게 군인은 적을 섬멸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육체적 노동력이 없는 베벨에겐 전투력이 없다.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인간이 속한 사회에서 필요한 인간이어야 하고, 카를 마르크스는 인간의 노동으로서 인간의 가치가 정해진다. 베벨은 사회적 가치 내지 노동력이 없으므로 어떻게 보면 에이미에게 짐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에이미는 오히려 자신이 여기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은 베벨이란 동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인간과 인간은 서로 마음을 의지하고, 도움을 나누며, 내가 아닌 타인과의 공존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레드 소위에게 인류은하동맹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거기서 죽으면 끝이고, 살아남으면 전투 중에 진급하고, 또는 그의 상관처럼 사라져갈 수 있다. 레드 소위가 본 가르칸티아에는 분명 신분적 차이는 있었다. 그래도 그 신분은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통제하기보단 선단을 운영하기 위해 선단장과 각 선주들이 모여 있으며, 이들 각 선주에게는 자치적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대규모 선단에서 각 선박 내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고, 이들 역시 사로 의지하고 살아간다.

 

5. ​가르칸티아라는 코뮌(Commune)

이런 사회적 공동체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프랑스어로 ​코뮌(Commune)이라 한다. 코뮌(Commune)이란 단어가 유명해진 시기는 1871년 코뮌혁명이다. 프랑스혁명은 루이왕정을 붕괴한 1789년 7월 프랑스대혁명 이후로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 그리고 1871년 파리코뮌이 발발했다. 역대혁명 중에서 가장 잔인하게 많이 희생당한 혁명이었으며, 당초 1789년 프랑스대혁명과 달리 부르주아 지식인보단 일반 시민들이 주축이 된 혁명이었다. 그런 코뮌이란 단어는 결국 공동체이고, 서로 경쟁하기보단 공존의 길을 선택한다.

 

그런 코뮌이란 체계와 유사한 선단이니 공존의 대상은 단순히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에게도 마찬가지다. 히디어즈의 동족이던 고래오징어에게 위협 내지 공격하지 않으면 고래오징어가 공격할 이유가 없으며, 심지어 해적이 습격해도 방어하여 도망치거나 물리칠 뿐이지 그 이상의 희생을 내지 않은 이유도 그렇다. 결국 공존을 잃게 되면 어느 한쪽이 무너질 경우, 단순히 그것이 무너진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피해가 막대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전쟁과 같은 무력충돌이 일어나면 수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고, 생존조건상 육상이 아닌 해상이기에, 해상 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살아갈 터전조차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결국 살아남는 방법은 경쟁이란 대립이 아니라 공존이란 방법이 우선인 것이다. 공존의식이 레드 소위에게 없는 것은 사회라는 조직이 그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인지, 아니라면 그 조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인지에서 차이점이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장 평화적으로 그리고 가장 민주적으로 생존할 수 있던 시기는 열악한 환경에 일정 무리만 존재하던 원시시대이다. 서로 돕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지금이야 냉장고와 같이 음식을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도구도 있고, 의약품이 보급되어 심한 질병이 아닌 이상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

 

그러나 원시시대에는 파상풍이나 이질 등과 같은 질병에 죽거나, 또는 어떤 충격에 의해 부상당하면 생존이 불가피하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였으며, 인간수명이 길지 않았기에 연장자들의 경험이나 지식이 없으면 많이 곤란할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부족이나 씨족단위로 서로 뭉쳐 같이 무리를 지어 식량도 나누어 먹고, 다치면 서로 돌봐주기도 했었다. 단 조건은 다른 씨족과 부족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정도로 활동범위가 넓고 자유로워야 했다.

설사 서로 조우해도 서로 공격해보았자 희생만 늘어날 뿐이므로 그냥 지나치는 경우도 많았다. 가르칸티아의 선단은 그런 점을 보면 다른 선단과 조우할 기회도 적고, 설사 조우한다고 해도 서로 가진 물건을 물물교환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도태될 뿐이고, 정보력이 부족하면 바다 위에서 생존이 힘들어진다. 선단에서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찾기 위해 누군가의 정보가 필요하고, 태풍이나 해일 등과 같은 자연재해의 정보도 알려면 누군가의 정보가 필요하다. 특히 마실 물이 귀중하기에 기상정보는 매우 중요할 것이다.

 

6. 야생의 사고의 <취성의 가르간티아>

왜냐하면 <취성의 가르간티아>에서 육지부가 나오는 장면을 제대로 못 보았기 때문이다. 레드 소위와 피니언이 고래오징어의 서식처가 있는 해저로 갈 때 거기는 어느 연구시설과 같이 보였으며, 주변에는 온갖 잔해물이 보였다. 환경과학적으로 보면 대기기상의 이변으로 처음에는 간빙기가 닥쳐 인류가 서로 갈등이 생겼다면, 그 후 지구는 온난화로 인해 해수위가 상당히 높아졌을 것이다. <취성의 가르간티아>의 의상을 보면 대부분 여름에 입는 옷이고, 베벨이나 에이미의 의상은 남미 전통복장이 생각나는 의상을 입고 있다.

 

남미권의 기후가 열대성을 띄고 있고, 인간의 몸에 열이 쉽게 빠져 나가기 위한 점과 더불어 작품 내 여성캐릭터의 모에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다소 노출도 높은 편이다. 대기기상을 생각하면 비가 잘 내리지 않는 건조하고 기온이 높은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상조건, 고래오징어의 정체성, 지난 인류의 역사 등을 현재의 가르칸티아의 선단에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레드 소위가 보기엔 그들의 행동이 너무 무의미하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체임버를 사용하면 효율적인 전투, 효율적인 어류공급, 잃어버린 보물인 과거의 문명까지 쉽게 습득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레드 소위의 방법이 더 이상하고 바르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가르칸티아 선단사람들에게 문명이 없는 것은 아니나, 레드 소위에는 야만 내지 미개한 종족으로 보았을 것이다. 특히 에이미가 레드 소위에게 처음 건네준 생선을 보고, 레드 소위는 어류의 시체로 여겼다. 어류의 시체를 먹는 것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먹고 난 뒤에 그것이 제법 먹을 수 있는 식량인 것을 알았다. 결국 그들은 레드 소위에게 있어서 야생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가르칸티아라는 선단은 문명이나,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인 바다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문명이 아니라 인간이 부유하고 있는 자연이란 거대한 존재다. 레드 소위 기준의 이성적인 사고에서는 도저히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무의미한 행동들이 알고 보면 오히려 그것에 대한 의미가 있었다. 무의미에 대한 의미에서 선단의 생활양식은 인간의 의식으로서 행동하기보단 무의식적인 생활양식에 의해 행동한다. 그러나 가르칸티아 선단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생활양식은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과학적인 요소가 담긴 것이다.

 

7. 쿠겔 중령의 망령

그런 공동체적인 코뮌 대신 다른 생활조건을 갖춘 조직이 있었다. 그들은 가르칸티아에 사는 사람들처럼 모두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행동양식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트라이커라는 인류은하동맹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후예들이다. 처음 인류가 간빙기의 도래로 인류의 멸망을 두려워하여 일류과학자들은 인간의 지능과 생존력이 높은 동물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 히디어즈와 고래오징어의 시작은 인간의 유전자조작으로 탄생이었다. 그것을 만든 자들과 반대하는 자의 대립이 시작되고, 결국 반대하는 자들은 우주로 나가 인류은하동맹을 만들었다.

 

그리고 쿠겔 중령과 레드 소위는 인류은하동맹 지휘아래 전쟁을 수행하였고, 2사람 모두 지구로 불시착했다. 지구로 온 레드는 운 좋게 살았지만, 쿠겔 중령은 목숨을 잃고, 그의 머신 캘리버가 쿠겔의 유령이 되어 스트라이커를 지휘한다. 스트라이커는 이른바 계몽이란 이름 아래 그들을 전체주의적인 광신도로 만들었으며, 계몽은 스스로 깨달아서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억압이란 이름으로 스트라이커를 지배했다. 그 결과 스트라이커들은 이상한 의례로 사람들을 강제로 물에 빠지게 하여 수장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누군가의 희생, 그리고 그 희생으로 인해 살아남은 자들의 위안과 조직의 결성은 전형적인 전체주의국가 형태였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그 조직을 결속하고 지배하며 이끄는 행위에서 가르칸티아의 생활과는 전혀 달랐다. 가르칸티아는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이 없었다. 하지만 스트라이커의 쿠겔 중령의 유령은 인간 위에 인간이 있기 보단 인간 위에 신이라는 존재로 있으려 했다. 인간의 집단에서 발생되는 군중심리는 논리적 이성이 사라지고, 군중심리로 작용되는 폭력적 성향조차도 하나의 정의와 도덕으로 변질된다. 유럽의 광기이던 나치의 잔인한 행위와 대동아공영이란 이름을 내건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하는 잔인한 행위와 폭력은 부당한 것이나, 그들에게 부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스럽고 당연하고 자신들의 우월성을 내보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런 망령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상징성이 필요했다. 그 상징으로 쿠겔 중령이었고, 쿠겔 중령의 망령은 그의 머신 캘리버가 조종석을 여는 순간 확인할 수 있었다. 쿠겔 중령은 병으로 사망하였고, 시체마저 부패되지 못했다. 이미 인류은하동맹의 정치구조가 군국주의 내지 전체주의이기 때문에 쿠겔 중령의 유령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스트라이커를 지배했고, 그들은 다시 다른 선단의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했다.

8. <취성의 가르간티아>의 작품적 의의

<취성의 가르간티아>은 작품성으로 보면 13화로 끝내기에는 조금 짧았다고 판단된다. 거기에는 다양한 담론이 숨어있다. 처음으로 인류의 위기에서 그 위기를 대처하는 방식에서 인간의 유전자조작이란 윤리적 문제가 처음이다. 과학의 윤리성이 현재 큰 문제로 부상하는 것이 유전자조작에 의해 탄생되는 생명체다. 복제되는 동물들이 탄생하고, 시험관아기도 이제 이슈에서 낯선 존재가 아니다. 생명의 윤리성에서 동물을 넘어 인간의 탄생까지 넘보게 되었다. 인간이란 신이 만든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존재인가? 인간의 영혼이란 진짜 보이지 않으나 그것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정신세계가 있는지 혹은 인간의 기억이란 단지 데이터이고, 그 데이터조차 위조 및 조작할 수 있는 것에서 인간의 존재성이 이 작품에서 큰 의의로 다가온다.

 

또한, 인류은하동맹과 히디어즈의 관계이다. 히디어즈의 유년 모습은 마치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다. 고래오징어의 어린생명이 처음 레드 소위를 볼 때, 그들은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손인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레드 소위는 두려움으로 그들을 죽인다. 붉은 피가 흐르는 순간, 레드 소위는 자신이 멸살시킬 괴물 히디어즈를 물리쳐서 임무를 수행 중인지, 아니라면 인류의 후손으로서 또 다른 인류를 파괴하고 있는가에서 심한 동요를 느낀다. 또 다르게 말하면 자신의 반대되는 것이라도 결국 그들이 가진 존재성과 의지를 무조건 부정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가르칸티아의 선단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점이라고 볼 수 있다. 코뮌이란 말은 공동체로서 서로가 서로를 돌봐주고 이끌어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유럽 선진국에서 볼 수 있는 민주주의 정치제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가르칸티아의 선단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거기에서도 갈등과 문제점이 없을 리가 없다. 세상에서 완벽한 정치제도를 가진 국가나 사회는 없다. 단지 그런 이상적 가치를 삼아 끊임없이 노력하고 이끌어갈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인류가 닥친 자연적 재앙이다. 히디어즈가 탄생한 원인도 가르칸티아의 선단들이 바다를 떠돌며 살아가는 것도 자연적 조건에 의해서다. <취성의 가르간티아>의 대립관계를 살펴보면 ① 유전자조작으로 통한 인류의 진화론자 ↔ 그것을 반대하는 도덕론자, ② 히디어즈 ↔ 인류은하동맹, ③ 명령과 임무에 의해 사는 레드 소위 ↔ 공존을 위해 자연적 조건과 평화적으로 살아가는 가르칸티아, ④ 가르칸티아를 지켜려는 레드 소위 ↔ 전체주의적 독재정치를 만들려는 쿠겔 중령의 망령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간의 가르칸티아의 선단과 해적의 전투, 피니언이 유물을 찾으러 갈 때 싸우던 고래오징어의 다툼도 있었지만, 중요한 대립은 위의 4가지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인간은 자연적 조건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누가 강제로 해야 하는지 다소 난감한 선택에 봉착한다. 인간이 자신 자유와 권리를 가질 수 있 결국 인간 모두 태어날 때 자연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물론 태어나면서 인간에겐 쇠사슬이란 억압을 받게 되나, 그 대안으로 인간들은 사회계약론을 맺게 된다.

   

사회계약론으로서 인간은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와 평등, 더 나아가 박애정신으로 통해 서로 간의 공존과 평화를 도모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인간을 구속하고 착취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 이제 인간을 착취하여 자신의 이기심을 만족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욕구는 일시적으로 해소가 가능하나, 욕망은 끊임없이 그 이상의 요구하게 된다. <취성의 가르간티아>는 결국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을 넘어 인간이 자연까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대혁명에서 자코뱅당 출신으로 국민공회의 위원을 맡았던 로베스피에르가 했던 연설이 생각난다.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가 아닌 타인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만일 타인이 자유가 없게 되면, 그 타인은 다른 자의 자유를 박탈하려고 하는 점이다. 만일 누군가의 희생을 강조하는 사회라면 이 작품의 각본을 맡은 사람이 만든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처럼 계속 희생을 더 큰 희생으로서 씻어져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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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25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진짜 대단합니다.
일단 밥 먹고 읽겠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3-25 12:26   좋아요 0 | URL
이게 바로 오덕력이란 심오한 세계인 겁니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2 - Seed Novel
온점 지음, 모밍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2권을 보면서 문득 최근에 김월희 작가가 저술한 <2병 데이즈> 4권의 후기편이 생각난다. 김월희 작가는 <2병 데이즈> 1권 발매당시 여주인공 흑련과 린의 대화에서 괴벨스의 부분으로 인해 엄청나게 큰 곤욕을 치룬 적이 있었다. 정작 본인은 그것이 정말 옳은 게 아니라 단지 작품 전개상 중2병이란 속성에 대한 강화를 맞추기 위한 하나의 모티프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러나 그의 고충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인지해야 했다. <세계제일의 여동생님> 종료 이후 계속 진행 중인 <2병 데이즈>로 통해 자신이 내놓은 작품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보이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책임이 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가 쓰는 글이란 조심스러운 부분이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타인의 의견이 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물론 그것은 개인적 감상과 혹은 비평적인 관점으로 통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번에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2권에 대해 읽은 소감, 즉 라이트노벨을 직접 구매하고 읽으면서 서평까지 쓰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번 편은 유감스럽다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비평이나 감상적인 요건은 개인의 입장에서 나온다. 그 개인의 입장이 되는 사고와 판단은 물론 모든 것이 그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과 지식적 조건 등에 의해 좌우된다. 하지만 적어도 개인적 논평에서 나오는 부분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1권에 비해 재미, 감동, 의미 등과 같은 요소들이 전혀 와 닿지 않은 느낌이었다. 라이트노벨이 경소설이라고 하여 재미 내지 즐거움을 준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라이트노벨 역시 일반 소설과 같은 서사구조를 지닌 문자서사이므로 소설과 비교하면 안 된다는 점은 없다.

 

개인적 비평적 관점에서 보자면,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2권은 내 기준으로는 낙제점을 받은 것이다. 라이트노벨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라이트노벨이란 장르와 소재에 대한 기본적인 성향과 요건을 생각하면서 서평을 쓰지만, 그런다고 그것은 그 조건일 뿐이지 다른 소설과 비교하는 연장선상에서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2권은 무엇이 문제인가?

 

이번 편은 작품의 주인공인 에프 킬러의 주인공보다는 에프 킬러의 지역 점장에서 문제였다. 이야기 2편 전체의 주제는 에프 킬러 점장의 과거와 그녀를 찾으러 온 붉은 이리의 과장이 오면서다. 2사람은 자매이었고, 언니 쪽인 점장은 납치되어 10년 전에 에프 킬러 총장에게 구출 후에 계속 이 조직에 몸을 담고 있었다. 그때 쌍둥이 자매인 붉은 이리의 간부 시현은 이래저래 팔린 채 돌아다니다가 조직의 일원이 되어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악의 조직이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2권은 너무 클리셰적인 요소가 강했다. 뭔가 안 봐도 알 것 같은 느낌, 게다가 점장의 아버지가 조직의 두목인 것까지는 좋으나, 자매의 어머니가 어떤 정식부인이 아니라 숨겨놓은 애인이란 설정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 소녀?”라는 기준을 어디에 두고 볼 것인가? 소녀라는 기준을 명사적 의미로 살펴보면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아니한 어린 여자 아이. 그렇다면 성숙이란 기준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해당되겠지만, 어린 여자 아이라면 어느 기준으로 맞추는 것이 올바른가?

 

차라리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이제 갓 아가씨의 향기가 풀풀 나는 그녀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 어린 소녀의 티가 벗어나 있었는지 얼굴의 볼 살의 흔적이 보였고, 아직 마음이 어린지 눈가에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라는 표현이 조금 나아보일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2권은 점장을 찾으러 온 시현이 쌍둥이자매의 상봉이란 명제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언니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고, 그녀를 자신의 보호아래 두기 위해 에프 킬러를 자본력으로 와해하는 것에서 차라리 자본에 대한 부족을 우회적으로 돌리는 게 좋았겠지만, 속성이 빈곤 코미디이기 계속 그것을 고수했다.

 

물론 그런 점을 고수한 점을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이 작가의 본래 설정한 의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설정은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 글을 쓰면서 생각해야할 조건이다. 어차피 서사에서 어느 문제가 나오고, 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과업의 부여는 이미 정해진 틀이다. 그 틀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조합하고, 어떻게 이끌어가는 것이 작가 내지 스토리텔링의 숙제다. 조직의 살림을 궁핍하게 만들어 데려오는 것과 마지막에 점장을 두고 펼친 결투가 너무 클리셰인 점에서 신선한 맛은 없었다.

 

라이트노벨이 환상적 요건과 비일상적인 요소를 반영했으면, 그 자체로서 진행한다면 모르나, 적어도 현실적 요건인 등장한다면 그것에 대한 요건을 충족해야 하나, 그 조건이 어울리지 않으면 당연히 이야기 흐름이 먹먹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주연은 주인공과 하춘식이나, 하춘식의 등장은 그다지 나오지 않고, 마지막 부분 결투에서 사신처럼 보이는 모습, 그리고 주인공이 길거리에서 방황할 때 자신의 집에서 재워준 것 말고는 큰 활약은 없다. 물론 그것도 이야기 속에서 작은 이야기에 해당되므로 나쁘다는 점은 아니다.

 

하지만 마법소녀 하춘식이 사는 집은 혼자서 자기에는 큰 집이란 점이 조금 어긋난 것이다. 하춘식이 밤이 되자 잠을 자야 하는데, 자기 방이 아니라 거실이나 남는 방에 주인공을 재우면 그만이다. 굳이 자신의 방에서 침대에서 잔다고 해도, 밑에 주인공을 재워줄 이유는 없다. 그래서 작가의 설정 자체가 너무 흐름 속에서 어긋난 것이 문제였다. 재미요소는 여전히 같은 방식이 계속 나오는 점에서 이 라이트노벨 이외에도 다른 라이트노벨도 비슷한 내용이 매권마다 다른 상황에서 튀어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같은 권에서 계속 되풀이 되는 설정이라면 지겨운 것은 분명하다.

 

일단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의 모든 발단은 1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고, 그것을 아는 딥블루, 그리고 총장이란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2권을 전부를 먹어버린 시현의 등장과 주인공의 대립과 화해는 너무 질질 끄는 느낌이었다. 새로 등장한 인물이 1명인데, 그 등장으로 1권을 통째로 차지한다는 것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 예전에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에서 엔들리스 에이트가 방송에서 그 반복에 해당되는 편만큼 애니메이션으로 나왔다. 애초부터 설정부터 그렇다면 반복적인 요소와 그것에 대한 가십감은 작품 내의 주인공만 아니라 보는 관객들도 충분하다.

 

라이트노벨 원작에도 그런 반복이 있어서 지겨움을 느끼게 만든 것과 그렇지 않은데도 지겨움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엄연하게 다르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은 초반에 빈곤을 소재로 한 코미디지만, 어느 순간 하렘구조가 성립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주인공 자체가 생김새나 행동이 여자라고 하나 적어도 주변적 인식에서(모르는 사람 제외) 남자라는 것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진행된다. 3권은 조금 더 나은 이야기로 다가오면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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