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윤선도 평전 - 정쟁의 격랑 속에서 강호미학을 꽃피운 조선의 풍류객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고미숙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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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자 유흥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권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남도기행이다. 그리고 그 기행의 시작점은 강진군이고, 다음으로 해남군이다. 강진과 해남, 왜 그는 그곳을 선택했을까? 그 책에는 이런 문구가 은근히 기억난다. 한국에서 먹물을 좀 먹었다는 인간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아마 우리 한국역사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가치를 물어보자면, 2012년 세계 유네스코 인물에서 우리나라 첫 인물로 선정되었으며, 학문적 연구 가치로 따지자면 한국 역사와 철학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고, 동아시아권의 국가에서 다산의 학문을 연구한다.

 

그런 점에서 다산 정약용이란 인물이 얼마나 후대에 이르기까지 깊은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정약용 선생이다. 유흥준 교수나 혹은 먹물을 좀 먹었다는 사람들처럼 존경하는 게 아니라 다른 루트로 통해서 나는 그분을 존경하게 되었다. 약간 중간에 길을 벗어나는 것처럼 들리지만, 내 아버지는 나에게 말씀하기를 지금은 힘이나 돈이나 되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과거에 있었던 그 흔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나, 결론적으로 그것이 지금도 이어지고 앞으로 간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보수와 진보라는 말을 떠나 그것은 하나의 전통을 말하는 것이다. 보통 한국 사람들이 자기집안이 족보를 보는 시점이 언제냐고 생각하는지 생각하면, 아마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제법 일가친척들 사이에서 행사에 참여하여 어느 정도 발언권을 가질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나는 집안 족보를 고등학교부터 봤고,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었다. 솔직히 나도 처음 보고 정말 놀란 사실이고, 아직도 그것이 딱히 누구에게 자랑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 문중의 족보에는 다산 정약용이란 이름이 2번 들어가 있다.

 

한 문중에 같은 사람이 2번이나 올라가 있다니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과거 어느 권력자는 자신의 딸을 시집을 보내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또 다른 여자가족 1명을 시집보낸 일이 있다. 그런다고 그런 부당한 일도 아니고, 전부 가족 간의 친분이 있었던 사람끼리 혼인을 정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학연과 학유라는 아드님이 계셨고, 그 외에도 따님이 있었다. 정약용 선생의 아드님의 후손은 아직도 경기도에 살고 계시고, 따님은 정약용 선생이 귀양살이하시던 강진에서 자신의 친구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냈다. 2사람은 결혼하여 조선후기 고전문학자인 방산 윤정기 선생을 태어나게 했다.

 

바로 그 다산 정약용 선생의 따님이 결혼하신 곳은 해남윤가고, 다산 정약용 선생의 외갓집 역시 해남윤가다. 그리고 나 역시 해남윤가다. 물론 핏줄이 직접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해남윤가 내에서 8대 공파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따님이 시집가신 곳이 나하고 같은 공파였다. 그래서 집안 족보 중에 파보를 보면 정약용이란 이름이 내 이름과 같은 책에 올라가 있다. 집안내력에서 내 직계의 할아버지가 그 당시 다산초당에서 정약용 선생에게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돌아가신 친할아버지가 다산초당의 주인이던 윤단의 후손분과 친구였다고 한다.

 

이런 관계를 두고 조금 의아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지금 다산초당의 주인이고, 찻집 다신계 주인인 분은 윤단의 후손으로 지금도 다산초당 인근에 자란 야생차를 따서 녹차로 만들어 다산 정약용 선생의 머나먼 후손에게 보내주고 있다고 한다. 다신계라는 것은 정약용 선생이 해배될 때 그분의 제자 중에 18분이 계를 만들어 스승인 다산 선생에게 차를 보내고, 서로 간의 우애를 다지자는 모임이었다. 한국 다도문화에서 다신계절목이란 기록은 매우 중요하고, 다도문화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가치는 매우 높다. 실제로 다산 선생의 시조 중에 탁월한 시들이 많으나, 차시들이 상당히 많다.

 

그런 점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 살이 하던 강진 귤동마을, 그곳 산장 주인 역시 해남윤가다. 그런데 그 윤가는 다산 선생의 외갓집의 공파에 속했다. 그리고 그 공파 안에도 나와 다산 선생의 관계처럼 작은 파가 형성되어 있다. 그래도 다산 선생을 위해 다산초당을 제공하고, 음식과 술, 그리고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게 해준 이유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외증조부가 조선화가 삼재 중인 하나인 공재 윤두서였고, 윤두서 선생은 고선 윤선도의 후손이었다. 즉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인생에서 해남윤가의 영향은 엄청났고, 그곳은 아직까지 유효했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 선생의 당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역시 고산 윤선도의 영향이 컸다. 그는 조선 병자호란 전후의 남인 영수였고, 예송논쟁으로 우암 송시열과 다툼하다가 귀양살이한 사람이다. 다산 선생이 존경하던 성호 이익의 경우, 그의 큰형은 장형으로 죽고, 아버지는 귀양살이하다 죽는다. 당파싸움에서 남인과 노론의 관계에서 고산 윤선도가 벌인 싸움은 매우 컸다. 성호 이익 선생의 형인 옥동 이서가 공재 윤두서와 친구였고, 해남 녹우당의 현판의 휘호는 옥동 이서의 작품이다. 해남의 녹우당은 아직도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 살고 있다.

 

<윤선도 평전>을 보고 적는데, 다산 정약용 선생과 붕당정치의 비극, 그리고 해남윤가의 이야기가 나와 조금 지나친 감이 없지 않은가 하나, 모두 <윤선도 평전>에 담긴 내용이다. 단지 나는 이 책을 보기 전에 이미 아버지와 집안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윤선도 평전>을 서평하기 위해 풀어놓았을 뿐이다. 이미 고산 윤선도라는 이름은 고등학교부터 아버지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유너머의 저명한 인문학자인 고미숙 선생이 과연 윤선도라는 인물을 어떻게 평전을 했을까 라는 의문에서 책을 구매하여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나왔다. 아는 것은 고산(孤山)이란 호가 외로운 산이란 것처럼, 그는 평생 외로움의 유배 살이를 보냈으며, 70대의 노년에도 귀양살이를 가야만 했다. 지금의 70대와 조선시대의 70대는 조금 다르다. 지금 70대 어르신들도 건강하고 정정한 분들이 많으나, 당시의 70대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귀양으로 인한 유배 살이를 한 이유는 너무 입이 강직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후에 광해군이 정권을 잡았을 때, 당시 실세인 이이첨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하여 미움을 샀고, 효종의 스승이어서 효정이 집권할 때, 많은 질투의 대상이 되었으며, 효종 승하이후 상복을 1년인가 3년인가에서 불리할 것을 알고도 싸웠다.

 

어떻게 말하면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아버지에게 화가 미칠 것을 알면서도 상소를 계속 올린 자가 고산 윤선도다. 그의 상소문을 보면 직설적이라 당시 권력의 실세가 보면 매우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다. 귀양을 인생의 반을 가야했던 그의 처지는 알면서도 싸운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성격이 아주 강직한 성품으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면이 있었다. 또는 엉뚱한 면도 있었다. 조선시대는 사대부가 집권계층이던 시대다. 그런데 그는 사대부라도 조금 특이한 면이, 종에게 심부름을 보낼 때 가정이 있는 노복에 대해서는 심부름을 시키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삶의 즐거움을 즐기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제일 가슴이 찡한 장면은 조선시대는 신분체계가 모순되고, 남존여비에다가 천한 신분의 여성은 양반에게 강제로 첩이 되어야 했다. 게다가 그 첩에서 나온 자식은 비천한 신분이 되어야 했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으로부터 사랑은커녕 학대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고산이 유배 가던 때에 첩에게 나온 8살 아이 미가 어린나이에 죽자, 매우 통곡했다고 한다. 그때 지은 기록과 시의 일부분을 보면

 

“미는 천출로 태어난 나의 자식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내 사랑을 온통 다 기울였다. 기묘년(53세) 중춘에 영덕의 유배지에서 귀양이 풀려 집에 돌아오던 중, 20일 아침 경주의 요강원에 이르렀을 때, 미가 천연두를 앓다가 이달 초하루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분통하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여 그 애통한 심정을 이루 다할 수가 없었다. 말 위에서 시어를 엮어 나의 슬픔을 토로했다.”

 

“(중략) 네가 없으니 감싸 쓰다듬어줄 수가 없고, 네가 병들었으나 약을 써보지도 못해, 이 때문에 내 슬픔 더욱 크고, 애통함은 비할 데가 없구나, 밥을 먹어도 눈물이 수저에 오르고, 말을 타면 눈물이 고삐를 적시네, (중략), 비록 나의 악업 때문이라지만, 하늘은 무슨 일로 가혹한 형벌을 내리시나.”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체면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았다. 특히 부인과 자녀들에 대한 가족과의 우애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아버지와 남편의 딜레마였다. 그런데 아직 어린아이인데도 그것도 첩의 자식인데도,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그의 모습에는 너무 인간적이었다. 지금도 이 정도의 부성애를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 성격인지 보길도에 기거할 때, 자신의 아들이 찾아오면, 배가 도착하기 전에 나루터에 먼저 도착하여 손을 흔들고 큰 소리로 아들을 반겼다고 한다.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희생자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뽑을 수 있는 인물이 고산 윤선도다. 그런 강직한 성격을 가진 자가 가족에 대한 애정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의 시조는 이율배반적인 요소를 가졌다. 그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그것을 넘어 자신이 보고 있는 어민과 백성에 대한 모습을 어부사시가로 표현할 때 한국의 국문학에서는 큰 업적을 남겼다. 그렇지만, 그의 자연미라는 것은 일반 조선선비들이 누리던 자연 그 자체를 두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자연의 조형미를 만들어서 자연미가 아닌 자연미를 만들었다. 작은 호수를 만들고, 조경을 꾸미는 모습에서 그만의 독특한 미학을 남긴 것이다.

 

시에서도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으나, 그가 접한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아니라, 그가 만들어진 자연이다. 자연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인위적인 자연성은 그의 정치적 미학이 반영되어 있다. 바른 쓴말과 직설적인 상소로 정치적으로 탄압받아 머물 곳이 없어 머물던 보길도에서 그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정치적 미학이 있었다. 그것을 이루지 못하여 대체할 수 있는 요건이 보길도의 자연미다. 자신이 추구하고 싶은 정치적 목적은 왕도정치였다. 조선시대 정치적 당쟁에서 왕권을 중심이냐? 혹은 신권을 중심이냐? 라는 문제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왕은 권력자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신하로부터 견제가 심했다. 임금의 정치적 색이 합당하지 않으면 반정이 일어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독살설도 나온다. 대표적인 인물이 정조이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에서 정조의 왕도정치와 남인의 목표가 나오지만, 문제는 그 이인화는 기호남인을 생각했어도, 다산 정약용 선생은 기호남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의 조선후기에서 노론의 후예가 조선 말기를 혼란하게 했는데, 그 연결고리가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다. 어째든 조선시대의 임금은 권세를 잡은 신하들과 잘 지내지 못하면 언제라도 내칠 위험이 도살아 있었다. 그리고 정권의 균형이 무너지면 어느 한 쪽은 참수와 유배, 형벌이란 무서운 보복이 살아있었다. 삼족을 멸한다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은 아니다.

 

예송논쟁은 바로 기년상과 3년상에서 효종의 죽음이 왕권을 얼마나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의 대립이었다. 지금 입장에서 붕당파벌이라고 하나, 당시로서는 국가의 대사가 걸린 문제였고, 거기에 목숨 걸던 사람들이 많았다. 한 마디로 세상이 사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당쟁에서 고산 윤선도가 택한 것은 왕권의 강화인데, 이이첨의 사례나 혹은 실세들이 지나치게 권력을 잡아 부정부패를 일삼고, 그로 인해 백성은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은 군주정이 아니라 민주정이라고 하나, 과연 민주정에서 국민의 대표가 국민 아무나가 될 수 있는 곳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그런다고 군주의 위치인 대통령에게 모든 것을 줄 수도 없다.

 

지나친 권력이 모이면 결국 독재정치로 가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하나가 지나친 권력을 잡아 자신의 이권만 누리면 정치적으로 혼탁하게 되어 결국 국가와 국민은 피해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문제는 당시나 지금이나 국가와 국민의 이름을 아주 미화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입맛으로 만드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와중에 혼자 돈키호테처럼 덤비는 것은 누가 봐도 알만한 결과이나, 그래도 멈추지 않았기에 역사에 이름을 생긴다. 단지 이이첨과 같은 간신배로 남지 않고, 조선시대 정치가나 또는 시조의 대가로서 말이다.

 

그런다고 고산 윤선도가 정치적 풍파를 많이 맞아도, 정치생활 자체는 길지 않다. 유배로 계속 살았고, 그 후로 몇 년씩 은거했기에 실제 정치적인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의 정치에서 학문을 연마하던 사대부였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인이면서도 문인이었다. 학문에 능통하지 않으면 과거에 급제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과거시험 문제가 이미 유출되어 그 자료를 고산 윤선도에게 달라는 어느 실세의 일화를 보면 참 웃기고도 안타깝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자료를 끝까지 주지 않기 위해 갖은 답변을 하던 고산 역시 재미있다. 이런 역사적 아이러니가 되풀이되니 고산 윤선도의 이름은 개인적으로 내 입장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잊어지기 어려운 인물이다. 물론 국어 교과서 국문학에서도 빠질 수는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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