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3분기 애니메이션 중에 <아키메가 벤다>가 주목받고 있다. 그 작품을 처음 1화만 봤을 때 쳅터편 제목이 "어둠을 베다"이다. 2화와 3화는 각각 "권력을 베다"와 "응어리를 베다"로 나온다. 작품을 전반적으로 보자면 칼로서 베다라는 것으로 통해 무엇을 어떻게 베고 싶은가라는 목적의식이 드러난다. 그것은 1화부터 등장한 타츠미의 수도에 오면서이다. 수도라는 곳은 황제가 사는 곳으로 거대한 도시이며, 많은 사람들이 밀집하여 살고 있다. 그곳에는 왕족부터 시작하여 귀족들이 살고 있으며, 거리에는 하층민들이 주로 돌아다닌다.

 

타츠미는 처음 도성에 와서 나이트레이드 멤버인 레오네에게 돈을 털린 후 길거리에서 노숙하던 중 귀족아가씨의 도움으로 신세를 지게 된다. 문제는 그 귀족의 집에 가면서부터다. 귀족의 집안은 화목하고, 친절한 분위기로 타츠미는 안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타츠미가 머물던 다음날 밤, 나이트레이드가 침범하여 맨 처음으로 그 집안의 안주인을 칼로 베고, 다음으로 파수병과 귀족남자를 베어버린다. 그 뒤로 귀족의 딸을 베려고 할 때 타츠미는 그녀에게 죄가 없다며 말리지만, 알고보니 그 집안 전체가 시골에서 올라온 나그네들을 집으로 유인하여 약 탄 음식을 먹인 후 잔인한 고문을 한 것이었다.

 

작품에서 보이는 광기는 사드 후작의 <소돔의 120일> 3편과 4편에 나올 정도로 잔인했다. 그 가족들은 타인에게 고문과 생체실험으로 쾌락을 가진 것이다. 이런 일이 인간에게 가능한가? 라는 의문에 인류는 그동안 이런 잔혹한 일들을 계속 했었다. 20세기만 하더라도 일본에서 731부대 마루타 실험이나 독일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광기는 인간이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라고 회의감을 가질 정도다. 물론 <소돔의 120일>에도 그런 잔인한 살인마도 있었다.

 

부패한 정권과 각료 그리고 거기에 동화되어버린 국민들, 프랑스혁명 이전의 프랑스에서는 국민들은 귀족과 성직자의 과중한 세금과 향략에 시달렸으며, 그 분노가 촉발되어 바스티유감옥이 함락되었다. 그런 점에서 나이트레이드란 존재는 폭력과 불관용이라는 이름이 하나의 정의와 도덕이 된 사회다. 정의와 도덕에서 도덕은 윤리와 다르다. 윤리는 상대방의 입장과 조건 그리고 거기에 대한 자신의 사유가 필요하나, 이와 다르게 도덕이란 하나의 법과 제도적인 요건이다.

 

법과 제도는 권력층에 의해 조직되며, 법과 제도가 과연 하층민이나 대다수 국민에게 효율적으로 다가오는지 아니라면 역으로 고통과 분노를 전달한다면 그 사회의 도덕과 정의는 타락한 것이다. 타락한 윤리가 하나의 정의와 도덕이 되었기에 타츠미는 사디즘에 빠진 소녀의 파수병에게 도성의 현실을 듣는다. 어린 왕은 무력하고, 주변의 신하들이 권력을 조작하는데, 요괴보다 더 요괴같은 존재들이 그들이며, 만약 이런 애기가 밖으로 새게 될 경우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해결될 수 없기에 그 어떤 협의나 토론으로 그 사회는 구제를 받을 수 없다. 오히려 그대로 썩어들어가 결국은 내부의 붕괴로 이어지는 것이 정치적인 상황이다. 그런 어두운 권력이 만든 정의를 다시 정화시키려면 방법은 그 사회 자체를 붕괴해야 하는 것이다. 혁명이란 것은 바로 그렇게 피지배계급이 자신을 지배하는 계급을 전복하여 사회구조를 변모시키는 행위다. 문제는 혁명이란 것은 기존의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세력이기에 기존의 지배계급에겐 강력한 공권력 내지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일부 사람들이며, 무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 역시 그렇다. 무력을 소유한 곳은 대부분 국가권력기관과 왕족, 귀족들이다. 그렇다면 일반 국민들은 그들에 대해 대항할 능력이나 조건조차 되지 못한다. 그러면 혁명이란 어떻게 해야하는가? <아카메가 벤다>는 바로 그런 혁명을 다수의 국민이 아니라 소수의 반영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반영웅이라 칭한 것은 국가에 대해 하나의 정치적인 행위로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히 테러로서 혁명적 행위를 하기에 칭한 것이다.

 

영웅과 반영웅은 같은 존재이나 시점과 세력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타츠미가 사는 국가에서 나이트레이드는 국가반역자고, 작품 내의 시점에서 정의를 가진 처형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에 대해 정치적인 단체가 아니라 일종의 테러리즘으로 대항하므로, <아카메가 벤다>라는 작품은 아나키스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아나키스트 중에서 단재 신채호와 이회영 선생이 유명한데, 그들의 방법은 소수의 아나키스트들이 목표대상에게 몰래 접근하여 암살을 기도한다는 사실이다. 1920~30년대 독립운동사에서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은 그렇게 테러리즘에 의해 입각한 것이다.

 

<아카메가 벤다>는 바로 반국가적 테러행위로 어두운 권력과 부패를 베려고 하는 것이다. 작품이 만들어진 계기는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조금 의아하나 제작사는 <슈타인즈 게이트>와 <슈퍼 소나코>를 제작한 업체로, <슈타인즈 게이트>에 일본이 한국을 강제통치한 것에 대하여 2CH에서 거기에 대한 조롱하는 내용을 작품 내에 그렸으며, <슈퍼 소나코>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자고 하는 것을 그리기도 했다. 이런 작품을 만든 제작사인데, <아카메가 벤다>는 위 2작품과 다른 관점으로 제작되었기에 조금 의아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일본에서 아나키스트로 고토쿠 슈스이가 있으며, 그의 저서인 <장광설>은 단재 신채호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는 1911년 천황 암살기도로 처형을 당한다. 또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안중근 의사를 칭송했다고 한다. 웃기는 이야기나 1930년대 동아시아 아나키스트 모임에서 각 국가별 대표가 나올 때 일본인도 있었다. 그런 역사적 맥락에서 <아키메가 벤다>는 작가 스스로가 아나키스트는 아니겠지만, 작품 그 자체적으로 아나키스트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작가가 작품으로 통해 일본이란 현실을 보는 것은 부조리와 부패로 가득한 것이고, 그런 문제점을 일반인들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약한 개인이 바꿀 수 없는 사회인만큼 <아카메가 벤다>처럼 누군가 그런 현실을 바꾸어주었으면 하는 욕망이 담겨있다. <아카메가 벤다>에서 나이트레이드는 국가라는 조직은 철저히 부정하며, 그 국가조직의 권력인 귀족들에 대해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한다. 그래도 일본에 대해 국화와 칼이라고 말할 만큼 <아카메가 벤다>는 칼에 대한 일본인의 집착을 볼 수 있다.

 

작품을 보면 사지가 절단되고 피가 유혈되는 하드 고어한 설정 속에서 칼로서 적을 베어 어두운 현실을 타파한다는 설정은 칼(도쿠가와 이후 메이지시대~현재)로 만든 일본이 이제는 칼로서 다시 베어야 한다는 무의식적 심리가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현재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 이후로 조선에 대한 강제통치시절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주요인사의 후예들이 여전히 일본정치계의 거물로 등장하고 있다. 일본 총리 아베의 경우 역시 그런 점범들의 후예들이고, 전범들의 후예들은 과거의 죄를 뉘우치기보단 오히려 영광의 역사로 알고 있다.

 

그들은 일본 정계에 진출하면서 각종 경제인사들과 유착하고, 거기에는 야쿠자 조직도 관여하고 있다. 과거 칼로서 지배하고 칼로서 침략하던 이들이 몰락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칼(일본 자위대 군사조직화)을 세우는 현실에서 일본 역시 우리나라처럼 사회적인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하다. 그런 모순과 부조리가 가득한 세계에 사는 만큼 <아카메가 벤다>는 과연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가? <아카메를 벤다>에서 아카메가 속한 나이트레이드는 무장테러를 감행하는 혁명조직이다.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처럼 일본이 점령당한 것도 아니고, 기존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개된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 주인공이 속한 국가를 부정하는 작품은 드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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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micah 2014-07-18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니메이션 쪽은 완전히, 100% 문외한입니다. 당시 누구나 읽던 <슬램덩크>가 가장 기억에 남는 만화입니다. 그건 애니는 아니죠?^^ 애니와 만화조차 구분 못하는^^;;
페이퍼의 수준이 대단하세요. 애니메이션에서 사회정치 구조적인 전반에 흐르는 문제제기 까지. 잡지에 실린 칼럼 읽는 것 같아요. 곰곰발님 서재 방문해서도 깜짝 놀랐었는데, 만애비님도 만만치 않으시군요. 진심으로 후덜덜입니다.
종종 들러 배워갈게요.

만화애니비평 2014-07-18 20:57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제가 곰곰발님이 인정한다는 그 오덕입니다. 오덕을 위해 이 한몸 불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열심히 잉여적으로 글을 적고 있습니다.
슬램덩크 기억나는군여. 소년챔프 매화마다 본 기억이...형집에 애장본이 있어서 가끔 형집(멀리있지만)에 가면 오덕력을 보강하지요.
애니메이션으로 하나의 언어로서 글을 적고 있습니다. Imicah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당~!

2014-07-20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7-21 08:35   좋아요 0 | URL
오오 기사도 쓰시다니 대단한 분이 오셨군요! 반가워요!
저는 오덕이라고 자부하는 것까지는 아니고, 그냥 오덕을 즐기기 위해 오덕으로 살아가는 오덕입니다. 모든 오덕의 권리는 오덕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할까요~
서재활동은 저도 이제 2년차입니다. 하다보니 쏠쏠한 재미도 보고 있죠. 곰발님이 네이버블로그를 떠나 알라딘에 정착하면서 어떻게 하다가 활동중인데,
아이디가 만애비처럼 네이버 역시 만애비입니다. 애니메이션 리뷰하는 것이 취미다보니 이렇게 바꾸었죠.

최근 애니메이션을 주로 TV로 많이 봅니다. 애니플러스와 같은 정액제 사이트에서 실시간 동영상을 즐기는 편이죠. 물론 최근 빨간머리 앤과 같은 극장판도 보았죠.

참고로 제게 제시한 쓰르라미 울적에는 거의 다 보았습니다. 인간의 심리묘사(특히 성우의 연기력이 압권!)가 탁월한 작품이죠. 괭이갈매기 울적에라고 용기사07의 작품 역시 애니메이션으로 보았죠.....

게가 페인과 에르고 프록시 나중에 새겨야겠군요.
에우레카 세븐은 물론 보았지요. 프레이져 경의 황금가지가 그대로 써먹는 애니가 있다는 것을 보니 깜짝하고 놀랐습니다. 어째든 자주 들려주세용..우후후후

뷰리풀말미잘 2014-07-22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심으로 대동단결!! 즐찾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7-22 22:11   좋아요 0 | URL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아니라
스즈미야 하루히의 SOS단 선언!!!
 

1. 추억의 애니메이션 or 애니메이션의 고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를 처음 보던 것은 언제인가? 예전에 분명 본 기억은 있으나, 너무 어린 시절에 보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나는 것은 아이돌 가수 린 민메이라는 소녀다. 그리고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를 애니메이션보다는 팩을 게임기에 꽂고 실행하던 시절, <마크로스>라는 게임이 있었다. 단 1기의 로봇으로 변신할 수 있는 전투기 1대가 나와 일직선으로 날아가면서 적들과 싸운다. 그 당시 들었던 노래제목은 몰랐으나 알고 보니 노래제목이 소백룡(小白龍)이었다. 작은 백룡을 의미하는 이 노래제목은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에서 린 민메이와 그녀의 사촌 오빠인 린 카이훈이 등장한 영화 OST이다. 게임에 몰두할 때 머리에 춘권 모양을 한 소녀가 나온 것은 기억이 난다.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는 추억의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추억의 게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의 전설적인 고전이기도 하다.

 

2. 오타쿠의 용어 탄생

오타쿠란 용어가 있다. 일본에서는 오타쿠라는 의미는 한자로 御宅로서 발음으로 보면 おたく(otaku)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이른바 오덕후로서 간단히 줄여 말하여 오덕 내지 덕후로서 불린다. 그러나 원래의 의미는 주인공 파일럿인 이치죠 히카루가 하야사 미사라는 상관에게 중위 내지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보단 오타쿠라고 처음 말한다. 즉 상대방의 칭호를 부를 때 그 사람의 댁이라는 의미를 높이 부르는 오타쿠가 이제는 만화, 애니메이션, 코스튬 플레이, 밀리터리를 비롯한 수많은 하위문화에 집착하는 매니아들에게 적용되었다. 현재는오타쿠라고 하면 사회적으로 조금 맞지 않은 부류로 만화, 애니메이션, 코스튬플레이, 게임 등에 흥미가 많은 사람으로 이어졌다. 본래의 오타쿠는 소비만이 아니라 생산의 영역에 직접 뛰어든 사람들에게 적용된 말이었다. 그러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등장한 오타쿠란 말은 이제 한국에서 상당히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언어가 되어버렸다. 이런 단어를 파생하게 만든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란 작품은 과연 어떤 작품인가?

 

3. 시대적 흐름과 탈(脫)자국주의적인 작품

<초시공요새 마크로스>가 나오던 시절은 1982년이다. 당시 세계는 미소 냉전시대였으며, 중공에는 모택동 사후 등소평이란 인물이 등장하여 개방화 정책을 펼치려던 시대다. 얼어붙은 냉전의 시기가 조금씩 풀리던 시절이다. 그런 점에서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는 시대적 흐름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고 볼 수 없다. 이른바 자유주의 시장국가에서 적대시 여기던 공산국가와 무역과 교류가 일어나던 시기다. 먼저 히로인이면서 여자주인공인 린 민메이는 일본인으로 나오지만, 본래 자신의 집과 그녀가 일을 도와주던 삼촌댁 모두 중화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린 민메이는 차이나스타일의 의상을 입었으며, 가게 일을 돕고 있을 때는 차이나 스커트에 헤어스타일 역시 춘권으로 만들었다. 중국과 일본의 과거 태평양전쟁의 앙금은 남아있었지만, 서로간의 교류가 점점 활발해지고 있던 것이다.

 

또한 당시 1980년대 일본만화의 흐름을 보면 중국이 배경이 되거나 또는 중국무술이 상당히 차용된 시기가 있었다. 제일 유명한 작품으로 <란마 1/2>이 있으며, <쿵후 소년 친미> 등과 같은 작품을 보면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특히 <란마 1/2>에서 란마와 그의 아버지는 중국에 무술수행을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란마의 의상은 일본의상보다는 중국 무술인들이 입는 복장이었고, 란마의 집에 찾아오는 불청객들 대부분 중국인들이란 점이었다. 미국 일본문화 전문가인 수전 J. 네피어 교수의 <아니메, 인문학으로 읽는 저패니메이션>에서 <란마 1/2>에서 작품배경이나 소재가 중국이 많은 이유가 과거 일본이 중국에 저지른 만행(난징대학살, 731부대 마루타실험, 만주국 괴뢰정부 등등)에 대한 죄의식이 깔려 있다는 내용이 있다.

 

중공과의 관계에서 어떻게든 그 당시 일본 만화 내지 애니메이션에서 중공은 적대적 관계보단 하나의 모티브 내지 설정이 되기도 했다. 중국무술의 경우 이소룡의 <용쟁호토>를 비롯하여 성룡의 <취권>이 흥행하면서 중국이란 국가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보이는 중국의 모습이란 린 민메이라는 아이돌가수가 도와주는 가게이고, 그녀가 중국식 의상을 입고 있는 점을 본다면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상당히 자국주의 요소에서 상당히 벗어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주인공인 린 민메이와 하야세 미사, 그리고 남자주인공인 이치죠 히카루는 일본인이지만, 주변의 주요인물들은 다양한 국가와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마크로스 함장이 브루노 J. 글로벌이란 장군처럼 지구에서 떠나 우주공간에 머무는 마크로스함이지만, 그 함의 선장이 흑인이고, 히카루의 상관과 더불어 조종선배인 포커 역시 동양인이 아니란 점이다.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 일본인 특유의 문화적 요소가 많이 배제된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사쿠라라는 이름은 많이 등장하는 법이다. 물론 등장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나. 사쿠라라고 하는 벚꽃을 최대한 강조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마크로스함의 함장 이름이 처음부터 글로벌이고, 글로벌은 세계이다. 하지만 그 글로벌의 함장의 이름처럼 세계화라는 것은 지구 전부가 아니라 일부의 통합이란 점이 아쉬울 뿐이다.

 

4. 환영받지 못한 공동체 마크로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가장 처음 전투는 젠트라디인들이 지구 마크로스함을 공격하면서부터다. 젠트라디인들은 지구인들이 고대 프로토 컬처라는 문화를 가진 존재로 각인하고, 지구를 침범하지 않는다. 그들이 목표로 삼은 것은 우주감시관의 배였던 마크로스였고, 그 마크로스를 파괴하기 위해 지구를 침공하고, 마크로스함은 우주로 향하여 워프하게 되고, 그 뒤에 젠트라디와 전투를 벌이게 된다. 전투를 벌이게 되면 전쟁영웅이 등장하고, 영웅의 활약은 전쟁의 흐름을 바꾸게 된다. 포커의 후배였던 이치죠 히카루는 전쟁에서 큰 전환점을 바꾸고, 젠트라디와 전투를 계속 유지하면서 지구에 다시 찾아오게 된다. 하지만 지구로 돌아온 마크로스함은 환영받지 못하게 된다. 마크로스함이 젠트라디의 목표물이고, 그들이 외부로 나가준다면 지구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으며, 젠트라디들은 프로토 컬처에 대한 공포로 지구를 함부로 침공하지 않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지구에 오게 되면서 마크로스함에 붙어있던 거주민들은 모두 사망 내지 실종자로 처리되어야 했으며, 그들의 생존이 알려지면 지구연합조직의 주요 권력자들에게 좋은 이익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조금 양보하여 같이 젠트라디와 동맹을 맺기보단 위험인자를 추방하거나 은폐함으로서 안위를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지구로 침공한 젠트라디군에 의해 그 목표는 사라지고, 오히려 마크로스함과 젠트라디군의 전투로 인해 지구가 큰 타격을 받고 만다. 지구인인데도 지구에서 환영받지 못한 마크로스함, 그들은 환영받지 못한 공동체였던 것이다. 물론 지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주함 불시착으로 대규모 전쟁 후 평화협정을 맺었다고 하나, 그 기나긴 전쟁의 구심점이던 마크로스함이 계속 머물 수 있는 것은 편하지 않은 일이었다.

 

전쟁의 원인이 마크로스함이었고, 그 전쟁의 종료 이후 마크로스 재건은 전쟁의 고통을 넘어 새롭게 시작하려 하던 상징이나, 젠트라디의 공격으로 무산된 것이다. 게다가 우주로 혼자 떠나버린 마크로스함은 지구방위사령부의 그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없었으며, 지구로부터 돌아온 연락은 혼자서 알아서 돌파하라는 것이다. 결국 지구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었다. 그들이 공동체로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공동체로부터 외면 받은 점이고, 마크로스라는 공간은 지구가 아닌 또 다른 지구가 되어야 했다.

 

5. 화합의 공간 <마크로스>

마크로스는 처음에는 젠트라디와 전투를 위해 존재하던 우주선이었다. 그러나 지구로부터 버림을 받고 나서 젠트라디와 계속 교전을 하게 되면서 서로에 대한 정보를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마크로스에 젠트라디 요원들이 침투하기도 하고, 그 이전에는 젠트라디에 의해 이치죠 히카루와 아야세 미사가 강제로 끌려오기도 하였다. 거대한 몸체를 가진 젠트라디는 우수한 전투력과 강한 육체를 가진 종족으로서 매우 호전적인 종족이었다. 젠트라디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전투가 아니라 프로토 컬처라는 것이었다. 과거 아주 우수한 문화였으나, 그 문화로 인해 과거 인류가 망했다는 전설이 유래되어 모든 젠트라디들은 프로토 컬처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오직 몇몇 중요참모들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이 프로토 컬처라는 것을 알게 된 계기는 이치죠 히카루와 하야세 미사 일행이 엑세돌이 탑승한 전투함에 오게 되면서다. 포로로 잡힌 이치죠 일행들에 대해 심문하려던 젠트라디 참모들인 여자와 남자가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했으며, 게다가 프로토 컬처가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란 점을 알게 된 이치죠와 아야세는 서로 내키지 않았으나 키스를 나눈다.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면서 젠트라디인들을 혼란에 빠지고, 프로토 문화라는 것은 남녀 간의 연애가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마크로스에 마이크론화하여 침투한 거인들은 처음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점점 마크로스 생활에 적응하게 되고, 특히 린 민메이의 노래에 빠지자 혼란이 오기 시작한다.

 

린 민메이의 노래에 의해 병사들은 마크로스에 투항하게 되고, 심지어 젠트라디 내에서 여자거인이 밀리아는 그녀가 이길 수 없는 발키리 조종사를 찾기 위해 침투할 정도였다. 발키리에 침투한 밀리아는 젠트라디 내에서 아주 우수한 전투요원으로 그 어떤 전투에서 패배한 적도 없을 정도로 용감무쌍한 전사였으나, 오직 맥시밀리언 지너스에게 이길 수 없었다. 맥시밀리언을 찾아 자신의 원수를 갚으려던 밀리아 이었으나, 맥시밀리언을 직접 만나 칼을 휘둘러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맥시밀리언에게 패배를 시인하고 전사다운 죽음을 원했지만, 맥시밀리언이 밀리아에게 보여준 행동은 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품에 안고 키스를 나누게 된다.

 

마이크론화 된 밀리아, 그리도 엘리트 파일럿 맥시밀리언은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며, 최초로 인간과 젠트라디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기존의 지구에게서 추방당한 마크로스였으나, 새로운 상대방을 만나면 처음에 다투더라도 결국은 서로 화합의 길을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크로스가 새로운 가치라고 본다면, 기존 지구방위사령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구시대적 발상이라 볼 수 있다. 그 구시대적 발상을 가진 지구방위사령부는 젠트라디에 의해 파괴되고, 새로운 가치를 내세운 마크로스는 단 1척의 우주선과 발키리 부대로 거대한 젠트라디를 맞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6. 승리의 여신 린 민메이의 노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전쟁의 흐름을 바꾼 것은 이치죠 히카루의 활약이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단순히 무력투쟁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가 존재하였다. 그것은 바로 린 민메이의 노래였다. 1982년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애니메이션 안의 히로인으로서 상당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린 민메이라는 이름은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를 이어 <마크로스 7>과 <마크로스 프론티어>까지 세계관을 구축하게 된다. 모든 가수의 동경대상은 린 민메이라는 점이고, 마크로스 선단이 존재성은 린 민메이의 노래덕분이었다. 왜 노래라는 것은 그토록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것일까?

 

20세기에 들어와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투쟁의 역사였다. 20세기의 끔찍한 전쟁으로 1차 내지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란전쟁,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지금도 중국에서 일어나는 티베트 분쟁 등이다. 전쟁과 분쟁의 현장에서 인간은 서로 정의라는 이름 아래 상대방을 무차별 살해한다. 죽음의 폭력을 가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자신들의 정의 아래 실천하는 행동이고, 하나의 절대적 가치이인 반면, 그들의 폭력에 의해 희생되는 자들은 고통과 증오의 씨앗이다. 서로 간의 적대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까?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보여준 린 민메이의 노래가 바로 그 순간에 등장한다고 해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인간과 인간이 가진 갈등과 마음의 벽에서 노래로서 풀어나갈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에서 이른바 히피문화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카운터 컬처라는 반문화 역시 기존의 권위적인 문화에 대해 저항하게 된다. 가령 국가 내의 분쟁에서 아직까지 미국은 인종차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흑인에 대한 백인의 행위는 아주 끔찍하고 잔인했으며, 20세기 킹 목사와 말콤 엑스의 살해는 20세기 미국이 보여준 아주 폭력적인 사건이었다.

 

킹 목사나 말콤 엑스가 활동하던 20세기 경우 19세기 남북전쟁 이후로도 계속 인종차별이 쉽게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그런 시대에도 흑인과 백인 또는 많은 유색인종이 서로 화합하려고 했다. 그 중심에 바로 음악이 있었고, 특히 재즈음악이 있었다. 재즈음악은 본래 흑인들의 음악이며, 재즈는 스탠다드 재즈부터 시작하여 퓨전재즈 등, 다양한 장르로 나누어져 있으며, 음악스타일이 아주 격조 있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매우 자유롭다. 재즈음악이 연주되면 젊은 남녀들이 서로 어울려 춤을 추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아무 상관없이 같이 그 자리를 즐겼다. 미국의 유명한 우드스톡 락페스티벌은 베트남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에 인종차별, 남녀차별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이 거론될 때 젊은 사람들끼리 그 문제를 뛰어넘고자 만든 하나의 문화다.

 

카운터 컬처의 형태는 결국 기존 세대의 반항과 더불어 상대방과의 교감을 얻을 수 있는 커다란 장이었다. 우리가 만약 일본어를 이해하지 못하여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를 자막과 영상을 의존하여 감상하여도, 그 작품 속에 나오는 노래의 멜로디와 반주만큼은 쉽게 익히고 따라할 수 있다. 노래의 흥얼거림, 그리고 노래로서 전달되는 감정은 민족과 국가가 달라도 서로 공유하고 느낄 수 있던 것이다. 린 민메이의 노래는 바로 그런 인간이 가진 감정을 자극함으로써 노래로 통한 화합을 이룩할 수 있던 것이다. 모두가 즐기는 자리를 마련하여 폭력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서로 같이 연대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할 것이다.

 

그 결과가 젠트라디에 대한 전략을 단순히 폭력보다는 노래로서 서로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서로간의 친목은 서로 다툴 필요가 없기에 희생을 줄일 수 있으며, 희생을 줄이는 것으로 서로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폭력적으로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인간 스스로 동물화하게 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자연적 존재로서 자연 그 자체로 살아가는 동물이라면 그 자체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으나, 문명화된 사회에 감정이 메마르고, 삶의 목적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의 의지아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명령 내지 혹은 타의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인간 본연의 가치를 자신이 아니라 외부의 상황에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이 중심이 아니라 조직사회에 모든 것을 충성하게 되면 인간은 인간성을 가진 존재가 아닌 그저 부품에 불과한 소모품이 되고 만다. 특히 전쟁에서 인간의 개인성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가 얼마나 더 많이 적을 제거할 수 있는지가 평가될 뿐이다. 그래서 린 민메이의 노래는 전쟁에 참전하여 오로지 적을 더 죽일 수 있는 것만 생각하던 젠트라디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다. 음악을 들으면 취미생활을 가질 수 있었으며, 맛있는 요리를 서로 나누어 먹게 되며, 더 나아가 타인과 교류하면서 우정과 사랑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미적 감각을 살리기 위해서는 감수성을 가져야 하며, 인간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요소 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노래라는 것이다. 인간은 눈으로 보는 시각적 매체보단 귀로 듣는 청각적 매체에 더 많은 감정을 느낀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노래를 귀로 들음으로서 인간의 감정을 활발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감정을 느껴야 즐거움도 알고 슬픔도 알고, 무엇이 자신에게 좋은지 혹은 싫은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면 인간은 인간이기보단 단지 유기물질로 구성된 살아있는 기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린 민메이는 바로 그런 기계 같은 삶을 살던 젠트라디에게 새로운 삶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7. 새로운 갈등을 보여주는 마크로스 남녀관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는 단순히 인류의 내부적 갈등, 인류와 젠트라디의 갈등을 거대한 서사 안에서 보여주고 있으나, 한편으로 개인과 개인적 사이에서도 보여준다. 이치죠 히카루가 가장 많이 오타쿠라고 부른 하야세 미사의 관계는 남녀관계가 기존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선 이치죠는 하야세를 처음 무선으로 통신할 때 아줌마라고 불렀으며, 하야세는 자신을 아줌마 취급하는 이치죠에게 상당히 불쾌감을 느낀다. 게다가 하야세와 그 주변 동료들은 이치죠를 단순히 에이스 파일럿보단 어린아이로 취급했다. 이치죠는 나이가 하야세보다 어리며, 계급조차 낮았다. 하야세는 사관학교 출신인 장교고, 이치죠는 민간비행조종사에서 전투기조종사로 넘어온 사람이었다.

 

하야세는 중위부터 시작할 때 이치죠는 하사부터 시작했다. 물론 이치죠는 계속 전투에서 활약을 했기 때문에 하사관직위에서 정식장교로 임명되고, 추후에는 비행편대를 이끄는 영관급 장교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이치죠가 진급하여도 여전히 하야세는 상관이었고, 마크로스가 최후의 젠트라디의 내전을 지구에서 마친 후, 글로벌 함장이 미래에도 외계인들이 지구에 침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민선단을 꾸릴 때 그 이민선단의 최고지휘관으로서 하야세로 지목한다. 결국 기존 사회적 지위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여성이 남성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게 된다는 점이고, 특히 이치죠와 연인을 맺은 하야세의 경우 이치죠보다 나이나 계급이 높은 점에서 남녀의 성적인 영역이 생물학적으로 달라도, 사회적인 영역에서는 별 차이점이 없는 것으로 드러낸다.

 

특히 발키리 조종사가 기존에 남성이었으나. 맥시밀리언과 결혼한 밀리아 역시 발키리 조종사로 출전하여 전투는 남자만의 세계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일본사회에서 본다면 기존에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영역을 남성이 주도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점차 그 자리에 여성들이 차지하게 되면서 남성도 직급이나 상황에 따라 여성 아래 놓이게 되었다. 현재 21세기에서 본다면 여성CEO 내지 정치인 그리고 많은 사회 인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20세기에서는 지금보다 여의치 않았다. 점점 남성들의 세계가 여성들이 들어오면서 남성은 이치죠처럼 갈등을 가지게 되었다.

 

전장의 파일럿과 전투함의 작전장교라는 상하체계가 연상인 여자와 연하의 남자의 관계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우위에 있어도 그 여성은 그 남성에 대해 받아줄 수 있는가라는 의문도 생기게 되었다. 처음에 하야세는 이치죠에 대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은 문제 파일럿에 버릇 없는 아이로 취급했으나, 몇 번이나 자신을 구해주었으며, 마크로스가 위기에 처하면 가장 먼저 해결해 주었다. 아무리 직급이 낮고 어려도 이치죠가 보여준 활약은 상관으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치죠가 보여준 인간적인 모습은 여성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8.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의 가와이이에 대한 미학

가와이이라는 단어는 일본어로 귀엽다는 말이다. 하지만 귀엽다는 말은 단순히 귀여운 대상을 보면서 우리가 귀엽다고 해주는 것과 다르다. 즉 가와이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말하자면 cute, pretty로 대체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가와이이는 귀여워도 왜 귀여운지를 생각해야 한다. 가와이이에 대한 미학에서 이치죠 히카루가 삼각관계에 놓인 린 민메이와 하야세 미사의 모습으로 생각해야 한다. 린 민메이는 아주 자유분방하고, 자신의 기분에 맞추어 행동하는 소녀다. 때에 따라서는 이치죠 히카루에게 매우 매력적인 여자아이로 보여주기도 하나, 때에 따라서는 이치죠 히카루가 잡히지 않는 존재와 같았다.

 

린 민메이는 평소 애교를 잘 보여주며, 이치죠 히카루가 자신에게 많은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고도 자신의 사촌인 린 카이훈과 사이좋게 지낸다.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노래하는 린 민메이는 화려한 아이돌가수다. 이에 반해 하야세 미사는 사관학교 출신의 장교로 군인집안의 영애(아버지가 지구방위사령부의 고위참모)로서 항상 규칙과 약속을 중시하며, 평소 행동을 조심히 하는 어른스러운 여성이다. 그래서 하야세 미사는 린 민메이와 달리 남자에게 귀여워 보이지 않은 존재로 나온다. 즉 가와이이 하지 않다는 점이다. 가와이이에 대한 미학적 정의에서 린 민메이는 손에 잡히지 않지만 손에 넣고 싶은 존재라면, 하야세 미사는 역으로 잡히지 않고 싶은 존재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가와이이 미학은 여자가 남자에게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것보다 여자가 남자에게 애교 내지 변덕으로 보여준다. 처음 린 민메이가 히카루를 만날 때 2사람은 조난을 당한 상태이며, 린 민메이는 마크로스 낯선 방에 갇히면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죽기 전에 결혼식을 올렸으면 좋겠다며, 이치죠에게 눈물을 보인다. 이때 이치죠의 마음에는 린 민메이에 대한 애정이 극에 달했으며, 언제나 이치죠는 린 민메이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난에서 구출되고, 미스 마크로스에 당선되며, 가수로서 활동할 때 린 민메이는 생명의 은인인 이치죠에 대해 성심껏 대하기보단 그저 친구로서 대한다.

 

출격하더라도 린 민메이를 생각하던 이치죠가 린 민메이의 미스 마크로스 콘테스트 우승은 다가갈 수 없는 존재로 여긴다. 하지만 린 민메이에 대한 히카루의 미련은 쉽게 버릴 수가 없었으며, 린 민메이에 대해 미련을 남길수록 히카루만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가와이이에 대한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의 미학을 린 민메이에게 적용한다면 가와이이한 존재란 가질 수 없는 존재를 가지고 싶은 것이다. 현재의 가와이이에 대한 요소는 자신이 지켜주고 싶거나 혹은 뭔가 자신보다 능력이 상황이 낮은 대상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감정이다. 즉 내가 옆에서 지켜주고 싶어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의 카와이이 요소가 반영된 애니메이션과 린 민메이에 대한 요소가 다른 점은 린 민메이는 히카루와 친구라는 점이고, 지금 애니메이션에선 가와이이 대상이 되는 여성캐릭터가 대부분 어리거나 또는 정신적으로 덜 성숙한 존재인 점이다. 즉 동경하고 싶은 상대보단 동정하고 싶은 상대로 바뀌어버린 모에 요소라고 보면 된다. 린 민메이와 달리 하야세 미사는 그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잘 생활할 수 있는 현대적 여성이며, 직장인 마크로스함대 내에서도 매우 우수한 작전장교다. 하아세 미사를 보면 확실히 히로인은 맞으나, 그녀에 대해 뭔가 소유하여 지켜주고 싶다는 감정보단 뭔가 같이 서로 의지하면 살아가고 싶다는 감정이 앞선다.

 

두 여자의 차이는 린 민메이는 기존 남성이 생각하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이라면 하야세 미사는 기존 남성이 원하지 않은 여성상인 셈이다. 그러나 히카루는 린 민메이 대신 하야세 미사와 같이 길을 걷기로 한다. 처음에 어리라고 놀림 받던 히카루가 성장하면서 한 사람의 몫을 수행하면서 남성에게 필요한 여성은 처음에는 귀엽고 애교가 넘치는 가와이이 속성을 가진 여성이었다면, 최후에 필요한 여성은 본인 자신에게 충실하고 타인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인 점이다. 글로벌 장군이나 이치죠의 선택한 사람이 하야세 미사라는 점은 일본사회가 점차 여성에 대하여 그 여성이 가진 능력과 책임감으로 볼 수 있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가와이이 요소를 가진 린 민메이는 모두의 아이돌로서 팬에게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녀의 변덕은 결국 남성에게 사랑받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사랑받는 여자는 가와이이 요소를 지닌 여자가 아니라 가와이이 요소가 부족해도 자신의 위치에서 충실한 여자인 셈이었다.

 

9. 엔딩 이후의 세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서사의 시작은 평화로운 세계에 어떤 외적인 문제가 발생하여 그 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원래로 복귀하는지 혹은 다른 방향으로 결말을 맞이한다. 그래서 서사의 시작은 서사의 종료로 이어지고, 그 종료는 또 다른 서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가 보여준 서사적 특성은 바로 서사완료 후의 서사의 연결이다. 극장판인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라는 작품을 보면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TVA의 축소판이기도 하나 조금 다른 서사적 방향을 보여준다.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에서 이야기의 종료는 린 민메이가 프로토 컬처의 노래를 복원하여 그 노래를 우주로 보내 젠트라디와 멘트라디, 그리고 마크로스의 전쟁을 평화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런 서사적 패턴은 최근에 만든 TVA <마크로스 프론티어>에서 그대로 반영했다. 그러나 본래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는 인류가 젠트라디와 전쟁에서 승리하여 서로 동맹을 맺고 같이 공존하나, 젠트라디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 내전으로 계속 고민하는 모습이 나온다. 젠트라디인들이 마이크론화하지 못하면 많은 음식과 생활재료가 필요하고, 그것을 나누어줄 형편이 마땅하지 못했다. 전쟁 이후 지구가 황폐화되었기 때문에 물자가 부족했으며, 인류가 젠트라디와 화합을 하려고 해도 모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 덕분에 일부 젠트라디인 중에서 호전적인 자는 반란을 도모하고, 테러를 일으킨다.

 

그때는 안타깝게도 린 민메이의 노래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으며, 린 민메이 역시 자신의 노래에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어 방황한다. 린 카이훈이란 사람은 평화주의자라고 하나, 평화를 위해서 무조건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은 중요하나, 그 신념을 일방적으로 따르게 된다면 인류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린 카이훈이 린 민메이를 이용하여 돈벌이에 고민하고, 린 민메이에 대해 심하게 간섭하고, 결국 2사람은 갈 길을 달리하게 된다. 린 민메이는 린 카이훈과 활동하면서 예전에 자신을 좋아해주던 이치죠를 생각하게 되고, 이치죠에게 찾아가나, 결국 이치죠는 하야세 미사와 같이 길을 걷는다.

 

어떻게 보자면 전쟁이 끝난 후의 마크로스와 지구의 모습은 보통 애니메이션에 보여주지 않은 에피소드다. 그저 절정의 위기상황을 넘게 되면 그것으로 결말이라는 해소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와 젠트라디의 연합을 만든 것과 동시에 뒤에 일어나는 내전에서 평화는 쉽게 가지지 못했으며, 평화라는 관념조차 순간적인 감정에 의해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이다. 평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서로 공감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회가 구조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체계가 정비 되어야 하는 점도 알 수 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처음에 손에 들어오지 않게 되어 다른 것을 대체되어도 결국에는 다시 본래 원하는 바를 찾기 마련이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엑시돌 참모가 마크로스 내의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중요한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다.

 

 

인류는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지 혹은 싫어하는지, 아니라면 인간은 평화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원하지 않은지 말이다. 답은 둘 다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었다. 본래 젠트라디인들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프로토 컬처 사람들이 서로 싸우기 위해 만들어낸 인조인간들이었다. 그리고 프로토 컬처 인류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다가 멸망했다. 그런 인류간의 전쟁과 투쟁은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마크로스함이 건재되기 전에 10년 동안 인류는 전쟁을 벌였고, 그 전쟁이 끝난 후에 젠트라디군과 전투를 했고, 그 후에는 인류와 연합하려는 젠트라디인이 연합을 반대하는 젠트라디인과 싸우게 되었다. 인간은 계속 전쟁과 투쟁에 의해 살아오던 존재이고, 그런 만큼 평화를 찾기를 바란 것이다.

 

평화를 위해서라면 결국은 인간은 스스로에게 정의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타인과의 소통과 공감이 필요한 점이다. 물론 그 소통과 공감은 단순히 인간의 이성만이 아니라 감정에 의해서도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왜 글로벌 장군이 하야세 미사에게 우주이민선단을 만들어 지구를 떠나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이 결국 서로 싸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인류가 사는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

 

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이 지구에 사는 존재인데도,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인류는 전쟁을 계속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계속하기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떠나는 것은 다르게 보면 평화를 위해서다. 인간이 결국 전쟁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평화를 위해 인간이 사는 곳을 포기한다는 점은 다르게 해석하자면 지구 현실에서는 평화를 가질 수 없다는 의미도 된다.

 

그렇다면 지구를 떠나지도 않고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참으로 난감한 문제다. 평화는 결국 나 혼자 혹은 우리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어야 하며, 그것은 개인적 이익을 위해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며, 누구는 자신만의 정의를 내세워 폭력을 합리화하고 있다. 그런 정의와 합리화가 정당한 세상이라면 마크로스함대는 계속 우주를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과 같은 지구인류로부터 버림받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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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7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7-17 15:54   좋아요 0 | URL
으아~! 곰발님이 이토록 밀다니...요새 일에 찌들려 책을 많이 읽지 못함이 부끄럽군요

Mephistopheles 2014-09-25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극장판 마크로스 마지막 전투에서 발키라가 쏟아붓는 미사일을 슬로우모션로 보며 박장대소 했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4-09-26 08:30   좋아요 0 | URL
아니 전투를 보고 박장대소라니~!!!

Mephistopheles 2014-09-26 15:01   좋아요 0 | URL
그게 말이죠.....회심의 소나기 미사일을 퍼부을 때...슬로우 모션으로 보면..미사일이 아닌 오만가지 별 잡다한 물건들이 튀어나간답니다.(예를 들면 맥주캔이라던지..) 이타노 서커스로 검색해보시면 내용이 나옵니다.
 
교육사유 - 실천하는 교사,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함영기 지음 / 바로세움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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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란 것은 참 어렵다. 왜 어려운 것일까? 사실 인간은 인간을 스스로 키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이란 인간에 의해 사회적 그룹으로서 성장할 수밖에 없다. 현재 21세기가 과거 조선시대 내지 봉건사회였다면 농경산업으로서 살 수 없으니 말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어린아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오히려 어린아이 내지 청소년들을 가리켜 작은 어른이라고 했다. 단지 몸이 작을 뿐이지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하는 업무나 책임을 이미 소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정에서 요리를 하는 소녀나, 논과 밭에서 추수하는 소년들이 있었고, 심지어 10살 내외의 아이들도 나름 잔잔한 심부를 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가장 행복은 그 인간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고, 카를 마르크스는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노동이라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작은 아이였던 청소년들은 지금의 청소년처럼 단순히 보호받고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나름대로 삶의 한 영역에서 열심히 일을 했던 것이다. 중세유럽부터 근대유럽까지 학교라는 곳은 모두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귀족이나 왕족, 그리고 일부 부유한 사람에 한하여 가능했다. 그러나 산업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산업구조는 농경사회가 아니라 경공업으로 변모되면서 노동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공업이란 특성에 인간을 맞추어야 했다.

 

가령 옷감을 만드는 기계를 다루기 위해서는 물과 석탄 그리고 재료의 배합을 알아야 했으며, 장거리 수송을 위한 교통에서도 말과 소보단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도구를 다루거나 수리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전문적 기술이 요구되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자본주의 산업체계에서 지식은 농업을 하는 것과 다르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기계가 능률이 좋아지는 만큼 세분화된 작업구조와 그 기계에 대한 작업능력이 요구되므로 공장에서 근로하는 사람들에게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육의 시작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글이 되었는데, 사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란 도서에서 감옥의 역사에서 감옥은 단순히 법적인 조치로 만들어진 물리적 감옥 즉 교도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 학교, 병원 등 다양한 공간에 머무는 인간 역시 감옥 같은 감시체제로 이루어진 셈이다. 제레미 벤담의 일망감시탑인 판옵티콘에서 감시와 통제로서의 기능은 결국 인간에게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이 되기를 바라기보단 그저 그 감시와 통제로서 이익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교육이 교육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나 교육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정치적인 권력에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계속 유지되어야 하고, 기존의 노동인력이 빠지면 새로운 노동인력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며, 만약 대체되지 않으면 구조적으로 그 사회는 계속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국가조직이란 하나의 구조에서 본다면 국가의 운영과 존립에서 하나의 토대를 이루는 하부구조로 되는 것이고, 국가라는 전체적 틀에서 떠나 개인으로 본다면, 교육으로 통해 인간의 자아성찰과 더불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아쉽게도 현실적으로 바라보면 그저 감시와 처벌로 이어지는 하나의 통제시스템으로 이어가고 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교육사유>로 생각해보는 한국의 교육이란 항상 위기의 연속이다. 아직까지 우리는 근대에서 넘어 탈근대로 이어져야 할 단계이나 아직까지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 머물려 있다. 이른바 계몽이란 것이 진실한 계몽이 아니라 계몽이란 이름의 새로운 억압으로 등장한 것이다. 교육은 가르치는 것으로 되는 것일까? 우리는 헌법에서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데, 자유와 민주주의는 인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같이 좋은 삶을 살아가야할 가치관이다. 민주공화국이란 단어에서 공화국은 결국 그 나라의 국민이 전쟁이나 위험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이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험은 단순히 국가외부의 적이나 자연재해만이 아니라 그 내부로부터 등장할 수 있다. 그런 위험을 줄일 수 있는 것이 나는 교육이라 생각한다. 비행청소년 내지 각종 왕따 사건 그리고 사회에 나가서도 일어나는 각종 문제들은 결국 교육에 의해 일어나는 인간의 재해라고 보는 것이다. 인간이 원래 인간으로 된 게 아니라 인간은 후천적인 요건에 의해 인간이란 존재로 사회로 나오는 것이다. 물론 태어날 때 두뇌가 우수한 아이나 또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극단적인 형태로 등장할 수 없기에 결국 인간은 교육으로서 자신의 인생이 크게 좌우되는 것이다.

 

<교육사유>를 읽기는 했지만, 먼저 이 책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 한국사회에 전반에 일어나는 교육문제를 다룬 것은 맞다. 그 문제에 대한 원인 역시 언급한 것까지도 인정하다. 그러나 깊이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어느 사례에 대해 구체적이고 종합적이면 적용이 가능한 사례를 들어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물론 존 듀이라는 미국 교육사상가에 대한 거론은 좋으나, 존 듀이의 이론을 어느 정도 구체적인 설명보다 일반적인 설명으로 끝난 것이 아쉬우며, 차라리 존 듀이의 서적들과 그 연구결과 그리고 존 듀이의 연구를 계속 진행하는 사상가들을 소개하여 우리가 어떤 서적을 보는 것이 좋은가 하는 안내가 없던 게 아쉬웠다.

 

기본적으로 교육에 대해 생각하자면, 교육학이나 교육철학을 직접 공부하거나 수업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정치․사회학․철학․문학 등을 접하면 교육에 대한 사유와 의미를 들여다보는 것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가령 교육의 기회에서 균등배분은 미국의 저명한 정치철학자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등장하는 내용이다. 롤즈의 경우 최소수혜자로 하여금 그들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혜택이 경제적인 문제로 배제되는 것이 안 되며, 그들로 하여금 최소한의 기회를 부여하여 스스로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고 거론했다. 그렇다면 교육사유에서 그런 부분이 등장하고, 그런 중요한 사안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것은 학생과 교사 개인적인 영역에서 학교와 사회 그리고 정책을 입안하는 정부로 이어간다.

 

교육이란 것은 누가 임의로 정하여 가르치는 게 아니라 교육행정에 의해 이루어진 체계이며, 아쉽게도 우리는 교육을 인간의 성장으로 통한 미래투자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경제적 이익을 생각하는 투자라는 점이다. 그런 투자가 인간의 성장에 대한 투자가 아닌 경제적 조건으로 연결되니 학생들은 인격이 아니라 자본적 가치로 보는 것이다. 국가는 얼마나 적은 비용으로 큰 효율을 보는지, 혹은 학교는 얼마나 작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보는지, 부모는 얼마나 애들이 성적이 올라 좋은 대학에 들어가 대기업에 취업하여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 말이다.

 

아니라면 공무원 중에서 고위직이나 또는 전문직으로 수익이 월등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랄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국가에서 돈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모든 것이 돈으로 보기에 인간을 돈에 대한 효율성으로 따지므로 학생들 역시 효율적인 것만 따지고, 그 효율적인 요소는 이기심에 의해 조성된다. 왕따 내지 폭력문제가 발발하는 것은 바로 그런 조직사회라는 은폐공간에서 학생들 스스로 인격체라고 여기는 게 아니라 그저 도구로 보기 때문이다. 도구로 보기에 타인의 고통이나 상처에는 연연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자신의 목표는 좋은 대학과 일자리, 없으면 오늘 하루 어떻게 견뎌 무사안일하게 지나가는 것이다.

 

이런 학교구조 누가 만들었나? 학교는 그 사회의 축소판이다. 사회라는 규모에서 국가가 가장 큰 규모이니 학교는 그 나라의 현재 상태를 가장 잘 알 수 있다. 학교는 보이지 않은 은폐공간에 계속 집단적으로 격리되어 감시와 처벌이 이루어지 때문이다. 문제가 있으며 그것을 드러내어 해결하기보단 오히려 은폐 및 조작으로 이루어진다. 최근에 자살한 어느 중학생의 경우 집단폭행에 괴로워 다른 곳으로 전학가기를 바랐지만, 결국 그것은 교사와 어른들이 학생들끼리 잘 지내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수수방관에 그 피해학생은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단지 시끄러운 일이 생기면 자신들에게 책임이 오는 것부터 걱정하는 것이다.

 

안심하지 못하고 학교강단에 서는 선생, 그리고 그 선생을 믿을 수 없는 학생, 집에 가면 학생들은 더 감옥이 된다. 왜냐하면 집에서 바라보는 교육이란 시험 후에 돌아오는 통지표로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와 압박으로 가정이 평온한 곳이 아니라 오히려 가시바늘이 돋는 감옥처럼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세상이 되었을까? 물론 돈 잘 벌고 좋은 직장에 가면 좋겠지만, 모든 학생에게 그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고, 어떻게든 누군가는 덜 좋거나 더 힘든 일을 해야 한다. 문제는 그런 좋은 조건으로 보이는 자리가 과연 몇 %가 되는가?

 

아무리 바득바득 따라가도 갈 수 없다면 제3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학생의 자유고, 그것을 유도하는 것이 선생이고, 그것을 배려해주는 것이 부모다. 안 그래도 프랑스대혁명 발생 225주년인 올해 7월, 나는 다시 루소의 서적들을 찾아보고 있는데, <에밀>이 너무 생각났다. <에밀>이란 서적은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함께 세계적인 도서이며,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존재하게 만든 정치사상도서다. 그런 <에밀>에서 교육에 의한 방법론적인 요소를 단순히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문학적인 요소로 이끌어간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생은 부모고, 부모가 아니더라도 그 어른은 아이에게 너무 미리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아이로 하여금 자연과 어울리게 하여 그 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불어넣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세상은 아이에게 자유의지를 불어넣는 것보다 강제로 의자에 앉히기를 바란다. 교육을 하는 것은 인간의 성장이나 오히려 인간의 폐쇄성과 이기심만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위인과 문호들은 왜 루소의 <에밀>을 보고 큰 전환점을 얻었을까? 아이에게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는 또 다른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이고, 그들이 아직 인격적으로 부족해도 그것을 억지로 누르는 게 아니라 그 인격을 새롭게 이끌어가게 해주는 것이 진실한 교육이다. 예전처럼 1인의 천재가 10,000인의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게 아니라 10,000인의 사람이 10,000 인을 먹여 살리는 것이 옳은 것이다. 스스로 자기의 힘으로 생존할 수 있는 세계야 말로 진실한 교육의 가치가 드러나고, 그것이야 말로 헌법과 교육법에서 말하는 민주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과연 민주적인 인격체로서 성장하는가? 결국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그 어른이 되기 전에 그 당사자가 어떤 가치관을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 가치관은 누가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보는 관점과 아이들이 보는 관점은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항상 기존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풍조에서 우리는 창의적인 인간이 될 수가 없다. 20세기 산업은 레드오션이라고 하면 21세기는 블루오션이란 말이 있다. 게다가 21세기는 이미 문명적으로 개발이 다 되었기에 새로운 산업은 문화라는 거대한 인간의 삶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1달에 책을 얼마나 읽는지, 그리고 그 책은 어느 종류인지를 생각하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우리에게 보이는 책은 단시간 내에 성과를 내려는 자기계발서 내지 주식투자서 등과 같은 도서다. 그런다고 모두 그 책을 보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계발서는 그 본인의 역사이지 우리 모두의 역사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다”라고 하는데, 개인의 역사가 우리에게 이루게 해줄 가능성은 과연 0.01%나 될까? 아니라면 주식투자 역시 주식시장의 변화, 국제사회의 변동, 시시각각 움직이는 정국에서 그 흐름조차 판단할 수 없는 인간이 계속 주식투자에 집착해보았자 결국은 망하게 되는 점이다. 우리는 조금 더 느리게 생각하고 판단해야하는 것을 빨리 자각해야 한다.

 

어차피 21세기는 다양한 업종과 다양한 사회가 조성되어 있기에 어느 일정한 것으로 모두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언제나 주입식 교육만 추구하는 현실에서 사교육은 언제나 공교육의 앞에 전제되었고, 사교육의 부담은 가정살림에 부담이 오며, 가정의 살림이 압박이 오면 인구까지 감소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맞이했다. 국가적으로 교육이 중요하나, 그 교육정책과 흐름이 역으로 한국에서 젊은 인구가 줄고 있는 것이다. 재생산적인 가치로 따지자면 우리 사회 역시 또 다른 모순과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미래에 대한 투자는 당장 실적이 이어지지 않겠지만,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교육 실태는 차가운 복도와 막혀있는 창문, 그리고 숨 막히는 경쟁의식에 학생들은 깊은 나락에 삼켜지고 사라진다. 세계에서 가장 청소년 자살이 많은 국가로서 아직 꽃도 피워보지 못한 이들의 비명에 우리의 미래는 과연 빛을 향하여 가고 있는가?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그 나라의 정치적 흐름에 맞물려 있다. 교육에 대한 사유는 비단 내 아이만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 나라에 대한 문제다. 내 아이는 다르다는 생각은 버려야한다. 어차피 그 아이도 우리가 살아가는 국가와 사회 안에서 어떤 운명을 맞이할 줄 모른다. 내가 피해가고 싶어도 피해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공간적 안식처를 만들어가야 한다. 전에 지방자치단체 투표하기 전에 우리 회사 직장동료에게 이 말을 들었다.

 

자신이 지지하는 당은 그다지 있는 것은 아니나, 어느 당이 마음에 들지 않으나, 자신은 거기에 투표할 것이라 했다. 그 이유는 거기 지역에 출마한 후보자가 자신의 친척이 되는 것이란 점이다. 나중에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무슨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말에 나는 참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도움이 되는 일이 몇 번인지 혹은 그 도움을 준다고 해도 얼마나 만족할 수 있는지, 제일 중요한 것은 진짜 도와주는 지였다. 나라면 그런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의 자식이나 앞으로의 미래를 위한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만 했다. 진짜 교육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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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3 - Seed Novel
온점 지음, 모밍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3권을 읽으면서 전에 읽은 1권과 2권을 생각했다. 최근 들어 일본이나 한국에 마법소녀를 중심으로 만든 만화, 애니메이션 그리고 라이트노벨이 활발히 발행되고 있다. 게다가 용사와 마왕장르까지 나오면서 기존의 마왕용사와 마법소녀의 일반적인 형태를 해체하고 있다. 문제는 해체라는 것이 기존의 틀에서 해체된다고 하여 그 해체주의적인 작품 역시 또 다른 틀이 된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틀과 흐름의 물길을 돌린다면 그 물길 역시 다른 틀과 흐름에 잡힌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전개는 틀린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이 계속 유지되어 일종의 패턴주의적인 형태로 간다는 사실은 그렇게 좋게만 볼 수 없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에서 가장 맨 처음 다른 해체적 시도는 마법소녀가 다소 폭력적이란 점과 동시에 여고생보단 오히려 남학생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1권부터 심지어 2권 그리고 최후의 3권에서는 남자의 의상을 입고 있다. 그것도 나비넥타이를 목에 걸고, 옆에 악당조직 중간보스인 주인공은 차이나드레스로 요염하게 포즈를 하고 있다. 여자와 남자라는 생물학적 관계는 역시 일러스트로 하여금 의미가 없어지게 만들었다. 라이트노벨의 작가와 일러스트를 그린 작가는 서로 다른 인간이기에 각자의 인식과 방식으로 적거나 그림을 그린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3권에서 주인공은 남자인데도 아주 가늘고 마른 남성이나, 제 아무리 남성이 몸이 가늘고 야위어도 대퇴부 근육과 골격이 그렇게 형성되지 않는다. 라이트노벨 작가는 마르고 성격이 유약한 주인공으로 표현했다면, 일러스트 작가는 주인공을 여장남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여자로서 그린 셈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처음과 끝까지 마법소녀의 모습과 악당 중간보스의 모습 계속 반대로 한 것이다. 설정을 본다면 그것은 좋고 나쁘다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단지 작가가 설정한 세계관의 일종일 뿐이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3권은 주인공의 요염한 자태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점을 암시했고, 주인공 역시 선머슴이란 사실을 각인했다. 남자교복 상의를 계속 입어야 했던 마법소녀의 아이러니에서 마법소녀가 마법소녀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충분히 깰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작가본인의 의도는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아쉬운 부분은 전에 2권을 지적한 것처럼 점장의 여동생이 붉은 이리집단에 속했던 것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이 작품은 현실에서 물가라는 개념을 적용한다. 예를 들어 고기뷔페 중에 가격이 저렴한 곳은 1인당 10,000원 정도하는 것은 현실성이 있고, 돼지두루치기를 12,000원에 파는 것도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그런 리얼리티에서 점정과 붉은 이리의 삽을 든 악당이야기는 아쉽게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 3권도 역시 아쉬운 눈으로 바라봐야 했다. 2권은 너무 쓸데없이 늘리고 늘렸다면, 3권은 너무 줄이고 줄여 결말이 다소 명확히 끝을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작가가 3권이 발매될 무렵에 국방의 의무로 군입대를 해야 하는 점이다. 군입대를 하고 제대까지 걸리는 시간은 거의 2년이다. 그동안 라이트노벨을 집필하지 못하는 점에서 3권은 아쉬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3권은 2권보다 설정이나 전개가 좋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갈등, 그리고 비밀과 그 비밀 속에 가려진 마법소녀의 정체성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1권부터 마법소녀 같이 안 보이는 하춘식이 악의 조직 중간보스인 주인공과 Lovely 하게 흘러가는 것은 처음부터 알 수 있었다. 단지 그 과정에서 어떤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그로 인해 무엇을 전달하는지가 중요한 셈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디세이아> 이야기를 보면 주요인물이 처음 등장하여 모험을 떠나면 그 모험을 마치고 결국은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가는 것이 전형적인 이야기다. 그렇다면 엇갈린 두 남녀의 이야기라면 마지막은 결국 연애적인 요소다. 마법소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흔히 말하여 마법소녀는 사랑과 우정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라고 한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을 읽는다면 하춘식 사랑과 우정까지 그렇지만 마을의 평화를 위해 싸우는 것만은 분명하다. 단지 보통 마법소녀처럼 마법(魔法)보단 마력(馬力)적인 힘으로 F-Killer의 주인공을 아주 쉽게 무찌를 뿐이다. 3권 역시 전혀 마법소녀에 상대되지 않은 주인공이 계속 하춘식에게 쩔쩔 매는 모습이 나온다. 그래도 조금 실마리가 풀리는 것만은 좋은 전개라고 생각했다. 단지 그 전개과정이 3권으로 마무리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에피소드로 통해 최소 5~6권 이상 되는 게 좋지 않았나 싶으나, 국방의 의무를 생각하면 아쉬울 뿐이다.

 

이때까지 등장인물 중에 있어도 그만 혹은 없어도 그만이던 조나단의 위치가 이번 편에는 확고했다. 철제 양동이를 머리에 쓰고 눈앞에 있는 대상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도 잘만 보고 심지어 대화까지 유능하게 하는 주인공의 참모, 그 참모의 정체가 의외로 쉽게 드러나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F-Killer가 있다면 그 만든 총장이 있었을 터이다. 아무리 봐도 총장의 정체는 양동이를 쓰고 장난 같은 헛소리만 늘어놓는 조나단이란 사실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마법소녀가 순결을 잃으면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처럼 과거 최고의 마법소녀이던 딥 블루가 10년 전의 전쟁을 종식시켜주던 이야기에서 그 중심에 조나단이란 사실을 조금 의외였다.

 

아니라면 작가는 복선을 깔아두고 싶었지만, 군입대로 인해 제대로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3권이 2권보다 내용적으로 조금 더 발전한 사유는 악의 조직과 마법소녀의 대립관계에서 과연 악이 무엇인가이다. 혹은 F-Killer가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이다. F-Killer는 남들이 가지진 행복을 가지지 못한 존재다. 어떻게 보면 흔히 불쌍하다거나 또는 무시당하는 존재다. 자신들의 정체성에서 남에게 폭력과 강제적인 힘으로 이권을 찾는 악당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여 행복하지 않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여기는 소시민적인 가치관이다.

 

덕분에 대놓고 범죄조직 같이 활동하는 악당보다 이런 어중간하고 목표자체가 의미 있는 악당이 더 위험하다고 마법소녀 관리부에서 판단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에 의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기존에 활동했던 마법소녀들은 대부분 중고등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존재고, 주인공은 초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했다. 이미 사회적인 불평등 내지 또는 자기희생에 의해 구축된 일상에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흔히 인간들은 전쟁 당시의 참혹함만을 기억하나, 막상 전쟁은 끝난 후에 더 잔혹할 수 있다. 누군가 죽는다면 누군가는 살아야 하고, 그 산자들은 기존에 같이 있던 망자들의 몫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라그나로크의 방문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조금 생각할 수 있다. 라그나로크는 딥 블루의 동기로서 강력하지 못하나 그나마 죽지 않을 정도로 마법소녀 세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베테랑이다. 라그나로크는 마법소녀가 10대에서 끝내야 하나 계속 20대까지 활동하고 있었으며, 악의 조직에 대해 일체의 자비나 용서가 없던 마법소녀다. 이와 다르게 딥 블루의 모습은 술에 빠지고, F-Killer 총수 만나 헤어진 뒤부터 계속 처녀라는 말을 한 것처럼 중간에 일탈적 행위가 있었다. 마법소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린 소녀의 순결이란 말도 있다.

 

딥 블루는 그것을 버리고 총장과 단합하여 전쟁을 종결한 대신 라그나로크는 10년 넘게 변신을 풀지 않고, 계속 마법소녀 모습을 활동했다. 자기가 이때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새로운 계기를 찾지 못하고, 옆에 있던 동료들의 죽음과 희생으로 인해 분노가 증오로 바뀌고, 증오가 다시 정의라는 이름 앞에 폭력이 합리화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구해줄 수 있으나 정작 자신은 구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영희라는 소녀로서 새로운 자기 자신을 찾아갔다고 볼 수 있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3권을 보면 결국 이 작품의 목적은 성별역할을 전환한 점에서 기존의 마법소녀의 틀을 깨려고 한 부분만큼, 악당이란 불리는 조직은 단순히 악의 조직이 아니라 세상에 악(보기가 좋지 못하거나 왠지 가까이 가기 싫은 존재)적인 존재로 되어야 한 사람들이다.

 

편의점에서 힘들게 일하는 주인공이나, 맨날 게임이나 하는 점장과 승희를 보면서 악당의 정체성보단 그저 소시민적인 자들이 몸부림치는 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나쁜 짓이라곤 처음 주인공이 하춘식을 유혹하여 마법소녀의 힘을 잃게 만들려는 수작이었으나, 처음부터 주인공이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아무튼 작가의 후기만큼 등장인물의 가족이나 과거사들이 제대로 엮어가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제대하면 작가는 다른 소설을 쓴다고 했으니 그때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여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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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블랙 불릿을 처음 보면서

블랙 불릿(black bullet)이란 작품을 보는 순간, 제법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란 것을 알았다. 예술이란 것은 어떤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가? 그것은 단순히 보기가 좋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다. 가령 우아한 자신들의 팀을 위해 모두가 열심히 노력하는 일명 “잇쇼겐메이(いっしょけんめい)”의 결과로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것이다. 다르게 설명하자면 예술이란 것은 현실에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불협화음 내지 추악함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요소들로 하여금 인간들에게 충격을 주어야 한다. 예술이라 함은 근대까지 다른 모습으로 이른바 탈근대적인 모습으로 인간이 절대적으로 여긴 것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을 파괴해야 하는 점이다.

 

근대중심의 사고는 이미 낡아버린 사고방식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이 어느 절대적 가치아래 묶이는 것 자체가 바르지 못한 방식이고, 그런 가치관을 추구하는 것은 파시스트적인 요소로 변질된다. 이미 오래 시간을 들어 20세기 역사에서 그런 현장을 보아왔다. 하지만 거기에 대항하는 안티적인 파시스트적인 존재 역시 파시스트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나는 생각하고 있는가? 아직 일본은 2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태평양전쟁 이전의 인간과 이후의 인간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태평양전쟁 중심의 사회보다는 태평양전쟁이란 속성이 가진 인간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그로테스크적인 요소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블랙 불릿은 그런 인간들의 투쟁을 보여준다. 그로테스크라는 일그러지고 낯설며 불편한 진실이란 무엇인가? 동경에어리어에 살아가는 인간과 그 뒤에 숨어 있는 권력집단, 그리고 그것에 대항하는 자의 광기가 있기에 흉측한 인간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블랙 불릿은 10년 전에 야생의 가스트레아라는 괴물집단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보통 공격으로 죽지 않은 무서운 괴물인 가스트레아는 살아있는 인간 그리고 동물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2. 가스트레아와 인간

그들은 인간을 죽이고 포식하며, 때로는 그들의 바이러스로 인해 인간과 동물들을 감염시켜 버린다. 감염된 인간과 동물은 세포 안에 침식된 가스트레아 바이러스로 인해 숙주가 되고, 그 숙주는 바이러스의 영양분이 되어 마지막에 가스트레아에 의해 잡혀먹게 된다. 바이러스에 대한 처방이 되는 백신을 즉시 접종받지 못하면 인간은 죽게 되는 점이다. 그런 절대절멸적인 비참한 상황에서 인간이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보통의 공격으로 죽지 않고, 자위대에서 출동한 전투기 폭격이나 탱크의 공격으로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가스트레아 일정 등급이상이 될 경우 보통의 무기조차 통하지 않는다.

 

이른바 바라늄이란 금속으로 가스트레아를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바라늄이란 금속은 현실적인 화학에서 등장하지 않은 금속이나 인간이나 보통 동식물에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금속이다. 하지만 가스트레아나 또는 가스트레아 세포 내지 바이러스가 있는 생물체에겐 매우 효과적인 영향을 준다. 가령 보통 총알에 의해 가스트레아가 죽지 않으나 바라늄으로 만든 총알 앞에서는 무력화될 수 있으며, 동경 에어리어를 막고 있는 모노리스 성분이 바라늄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금속 중에서 특정한 파장 내지 혹은 성분을 포함하는 금속이 있다. 가령 구리는 살균효과를 지니며, 수은은 소독효과가 있으며(대신 인체에 과도노출 시 미나마타병에 걸릴 수 있음), 게르마늄 같은 경우 인간에게 좋은 파장을 내뿜는다고 한다.

 

하다못해 우라늄 같은 경우 핵에너지를 발산하고, 세슘의 경우 인간에게 폐질환을 주기도 한다. 바라늄의 속성이란 결국 가스트레아를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가스트레아 세포와 바일러스까지 섬멸할 수 있는 금속이어야 한다. 바라늄으로 무장한 민간경찰과 그들을 돕는 이니시에이터인 10세 소녀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일하게 가스트레아를 막을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3. 저주 받은 아이들

민간경찰의 경우 대부분 총과 칼, 그리고 무기들을 바라늄으로 만들고, 그들의 이니시에이터인 10세 소녀들은 태어날 때 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가스트레아 바이러스로 인해 유전자가 변형된 인간이다. 고의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적인 조작으로서 태어난 소녀들은 눈이 붉고, 보통 인간과 다른 신체적 능력을 갖추었다. 이들의 존재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존재로 비추어져 가스트레아가 아니지만 가스트레아의 세포를 가진 이유로 차별을 당한다. 인간의 차별이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하게 말하자면 옳지 않은 일이나 인간이란 존재는 이성보다는 감정이나 무의식에 의해 더 심하게 움직인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이니시에이터인 소녀들은 보통 인간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은 존재이나, 감정이나 무의식적인 영역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 소녀들은 보통 인간과 다른 능력을 가졌고, 그 능력으로 가스트레아를 헤치울 수 있기 때문이다. 괴물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과 인간의 중간에 있는 존재다. 그래서 반괴물이란 입장에서 이니시에이터는 싸움에 빠진다. 그 소녀들이 싸움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불평등이란 이름의 부당함이다. 인간의 불평등에는 크게 2가지가 있다(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 따르면).

 

하나는 선척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천적인 것이다. 후천적인 것은 사회적 지위, 경제적․ 문화적 조건, 교육의 수준 등과 같이 자연적인 인간이 아니라 비자연적인 인간의 조건이다. 그렇다면 선천적인 것은 성별, 인종, 나이, 민족 등이다. 소녀들은 나이나 성별, 그리고 민족적인 조건에서 전혀 불평등을 받을 이유는 없으나, 그녀들이 단지 가스트레아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태어난 죄로 불평등적인 차별을 당한다. 대부분 부모들은 그녀들을 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많은 사람들은 가스트레아에게 직접 대항하지 못하면 아무 죄도 없는 소녀들에 대해 폭력과 협박을 가한다.

 

4. 인간의 이면적 모습

자신이 현실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로서 자신보다 더 약한 약자를 박해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의를 관철한다. 엔쥬 역시 평범히 초등학교에 다닌다고 해도 히루코 카케타네의 책략으로 엔쥬는 학교로부터 외면당한다. 엔쥬가 학교에 평소에 남에게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학교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자신들의 생명을 위해 싸우는 자에 대한 자세에서 오히려 박해를 가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인간이란 이성보단 무의식이나 감정의 지배를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대사상의 기초는 계몽주의에 의해 태어났기에 근대사상은 이성에 의해 인간이 인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고 여기나 그 진실은 오히려 인간이 계몽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억압이 시작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블랙 불릿은 가스트레아와의 전투보단 그 가스트레아의 전투로 통해 보는 인간상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작품 원작이 라이트노벨이고, 원작에 비해 짧은 애니메이션 편성으로 본래의 내용을 충실하지 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작품 전개상 이해하기 힘든 전개나 상황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부연적인 설명이 없었기에 작품을 오락적 요소로 본다면 높은 점수를 주지 못하겠지만, 그 작품에 담론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가치는 최근 본 작품 중에서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5. 일본의 모습

블랙 불릿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관은 21세기 일본 동경이란 점이고, 동경의 통치자는 성천사라는 16세의 미소녀다. 거의 천사와 같은 외모와 지성, 그리고 인간성을 갖춘 완벽한 소녀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진정한 용기와 자비심은 분명히 말하자면 이상적인 정치인에 가까운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있다. 그녀는 현실을 각인하고 있지만, 현실주의자로 남아있기 보다는 이상주의자로서 살아가려 한다. 현실에 타협하여 적당히 넘어가자는 관료주의적인 정치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의 상징 Icon이다. 마지막 화에서 알데바란을 무찌르는 장면에서 성천사가 기거하는 건물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등불을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 축전지를 보급 받아 가스트레아의 행진을 관찰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누군가의 음모로 축전지는 오지 않아 위기에 처한 순간, 성천사는 자신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주변에 모인 시민들과 같이 하늘 위로 등불을 보낸다. 무력한 인간이나 누군가의 도움이 되기 위해 그 마음을 직접 보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주 받은 아이들에 대한 태도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버린 받은 아이들을 차별하고 무시하며, 심지어는 고의적으로 바라늄 폭탄을 그들의 피난처에 날리는 인간의 모습에서 극도의 잔인성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성천사와 함께 보내는 등불에서 버린 받은 아이들 중에 한 소녀가 옆에 한 소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미소를 보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미소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은 아무 이상 없이 태어난 당신만이 아니라 저주 받은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란 뜻이다. 단지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것이지 결코 그것을 원한 것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를 위협할 생각도 없다. 너와 나는 다르게 보이지만, 근본은 모두 인간의 마음을 가진 인간이란 점이다. 인간의 마음이 없는 정상적 육체를 가진 인간과 아니라면 가스트레아의 세포에 의해 기형적으로 태어난 소녀 중에서 누가 더 인간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은 신체적 조건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인간으로서 보여주는 말과 행동이다.

 

바로 일본은 2가지의 모습에서 갈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태평양 전쟁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야생의 가스트레아가 왜 일본 동경에 오게 되었는가에서 텐도 키사라의 가족들이 꾸민 짓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가스트레아가 생겼는지에 대해 알 수는 없었다. 라이트노벨이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가스트레아의 존재는 유전자가 조작된 생물체에 의해 기인되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기형적인 생물이 나오는 배경은 20세기 들어와서 인류가 저지른 최악의 죄 중에 하나인 원자폭탄과 방사능사고다. 일본의 경우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맞게 되고, 그 결과로 태평양전쟁은 종료된다.

 

6. 텐도 가문과 정치적 이권

태평양전쟁과 텐도 가문의 관계는 무엇인가? 텐도는 작품에서 일본에서 오래된 유서깊은 집안이고 실제로 텐도 키사라의 오빠는 카즈미츠는 일본 국토교통성의 부대신이다. 게다가 키사라의 할아버지인 키쿠노죠는 성천사 옆에서 정치적 보좌를 맡고 있다. 성천사가 어떻게 통치자가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으나 기본적으로 텐도 가문은 작품 내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진 존재다. 그들은 알데바란이 동경지역에 나오게 한 것에 대한 책임과 있음과 동시에 오랫동안 그런 방식으로 이권을 누린 존재다. 그들이 누린 방식은 기존 관료들이 가진 특권의식으로부터 시작되는 점이다.

 

일본 경제성장에 주목할 만 점은 토목산업이다. 키사라의 오빠는 국토교통성에서 부대신이란 점이 중요하다. 국토교통성이란 기구는 한국으로 따지자면 국토교통부와 같은 곳이다. 국토교통부의 차관급인 키사라의 오빠는 상당한 권력을 가진 정치가이다. 그런 정치가가 손을 댄 것이 바로 모노리스의 건립이다. 모노리스는 고순도의 바라늄으로 제조해야 하나 일정 농도만 유지하면 등급이 낮은 가스트레아를 막을 수 있는 이유로 농도를 조절하여 그 차액을 챙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국토교통부에서 제일 중요한 사업은 바로 건설 사업이다. 건설사업의 비리 내지 유착의 부패는 수많은 인명을 희생하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토목건설의 사업비는 상당하고, 특히 원자재에 의한 차액은 엄청나다. 가령 철근 콘크리트에 10㎜ 짜리 철근 10개 대신 8㎜짜리 8개를 넣는다면 약 30% 이상의 차액을 챙길 수 있다. 모노리스 건설에서 바라늄의 농도는 중요하다. 그 농도의 약화로 모노리스가 침하되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고, 가스트레아 진격에 대한 방어에서 민간경찰과 이니시에이터 역시 희생이 만만치 않게 크다는 점이다. 그런 원인을 제공한 텐도 가문, 어떻게 보면 텐도가문은 일본 극우적인 집안과 연결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우선 텐도 가문이 세운 모노리스에 의해 알데바란이 침공하고, 야생 가스트레아가 왜 일본 중에 동경에 왔는지도 의문이다.

 

그 중심에 모든 것이 텐도 가문이고, 그것을 주도한 자는 텐도 키사라의 할아버지인 키쿠노죠라는 점이다. 키쿠노죠는 막대한 권력을 가진 일본 집안의 인물이고, 그가 어떤 일을 꾸미고 진행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총 5인의 인물에서 주도적인 사실이다. 그가 10년 전의 비극을 일으킨 주범이라고 본다면 그에 의해 희생된 수많은 시민들은 누구란 말인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범죄국가의 죄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독일과 같은 경우 나치의 행태를 평생 나오지 않도록 국법으로 제정할 정도다. 하지만 아직까지 일본은 평화헌법을 무시하고 자위대를 군사화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1945년 핵의 투하는 누구의 잘못으로 인한 것인가?

 

7. 텐도 키사라의 악

미국이 단지 투하했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심리 내지 보상심리 그리고 저항의식도 아닌 반항심에 사로잡힌 극우적 일본정치가들의 자위행위는 도가 지나쳤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으로 다른 국가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자국민들을 군국주의사상으로 무장하여 희생시키며, 전쟁에 패배하여 전쟁전범들은 반성하기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애국자라고 선전하는 현실에서 블랙 불릿의 텐도 키사라의 할아버지와 오빠는 대표적인 위선자라고 볼 수 있다. 성천자는 분명히 이상적인 정치지도자이나 그녀 옆에 있는 키쿠노죠의 위선은 일본이란 나라의 양면성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텐도 키사라는 명문집안의 규수로 태어나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무술까지 겸비한 소녀지만, 그녀에겐 어둠이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의 부모님이 텐도 가문의 비리와 어둠을 고발하려고 했으나, 일족에 의해 제거된 것이다. 집안의 이익을 위해 집안의 양심을 스스로 죽인 셈이다. 양심적인 지식인의 죽음은 그 사회의 죽음을 말하는 것과 같다. 양심적 지식인들이 존재해야 그들로 통해 시민들의 자각심을 일깨우고 이끌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들이 정치적 주권자이라고 해도, 시민의 권리를 행세하기 쉬운 반면 그 권리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수행하기 어렵다.

 

책임의식을 가지게 되려면 사회적 문제를 올바르게 지적하고 생각해야할 것이며,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연대가 되어 정치적 자유주의로서 행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중심에 필요한 것이 지도자이고, 양심적 지식인이다. 누군가 그 문제점을 파악하고 알리지 않으면 시작부터 되지 않기 때문이다. 텐도 가문의 가족 비극사는 키사라로 하여금 광기에 빠지게 만들었다. 겉으로 좋은 회사동료인 키사라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깊은 어둠과 광기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오빠와 결투 후에 무참하게 갈라버린 그녀는 자신에게 정의는 없다고 한다. 단지 악을 처벌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8. 왜 그로테스크인가?

악을 대항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악이라는 설정은 결국 부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 대한 저항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시 부정하는 것이다. 키사라의 광기는 자신의 행위를 두고 스스로 악이라 한다. 하지만 그것은 타인에게 악이지만, 키사라 본인에겐 정의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부모의 원수, 그리고 자신이 짊어지는 그 죄의 무게를 스스로 벌하겠다는 말이다. 결국 가족에 대한 처벌은 자신의 가족을 죽이는 것으로 스스로를 처벌하는 것과 같다. 죽음의 충동으로 행동하는 키사라에게서 인간의 삶은 어느 것으로 지탱하는지 의문스럽게 만든다.

 

분명 린타로와 엔쥬는 서로를 바라보면 의지한다. 그리고 린타로는 저주받은 아이들에게 무자비한 세상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더 좋은 미래가 올 것이고, 그때까지 서로 살아가야 한다고 한다. 절망적인 세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미래가 오는 한 가닥 빛줄기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린타로 역시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눈 한 쪽, 팔 하나, 다리 하나가 인체가 아니라 바라늄으로 만들어진 반 기계인간이었다. 심한 부상에서 수술로 다시 회복한 린타로는 물질적으로 인간이기보단 기계와 같은 속성을 가진 것이다. 기계적인 신체가 되어버린 린타로에게서 기계화된 인간병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린타로는 분명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 속에서 그 모습이 슬프지 않게 되는 자신이 슬프다고 말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 중에 슬픔은 아주 중요하다. 슬픈 감정이 있기에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이해해주고 싶으며, 때로는 원망도 한다. 모든 사람들이 저주받은 아이들을 외면해도 린타로는 끝까지 그 아이들을 지켜주려 한다. 심지어 눈앞에서 죽어간 동료들까지도 말이다. 인간이 죽음 앞에서 마치 스쳐가는 풍경이라면 그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 감정 없는 로봇이다. 단지 싸우고 죽이고 부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감정 없는 것도 광기 중에 하나다. 왜냐하면 처음에 린타로는 가스트레아가 아니라 히루코와 싸웠기 때문이다. 히루코는 평화가 아닌 전쟁을 원하며, 민경들과 정부에 대한 반국가적인 행동만 한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기계화 병사였으며, 그 옆에는 자신을 두고 아빠라고 부르는 저주받은 소녀 코히나가 있었다. 히루코의 딸인 코히나 역시 아버지를 닮아 광기에 빠져 살육을 즐기는 소녀다. 그러나 그 소녀가 왜 히루코와 같이 광기에 빠졌는가? 히루코는 평화보단 전쟁을 원한다고 하면서 처음에 동경에어리어의 위협이 되었지만 알데바란이 침공한 후부터는 린타로의 든든한 아군이 된다.

 

위기에 빠진 린타로를 그리고 알데바란 섬멸 작전 전에 퀸에 대한 섬멸작전을 도운 것도 히루코다. 그는 왜 린타로를 같이 하려고 했는가? 그는 전쟁을 위해 억지로 만든 몸이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딸마저 저주 받은 아이들처럼 되었다. 전쟁이 끝나 기계화된 병사는 필요 없고, 딸은 타인들에게 거부당한다면 히루코가 남은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순수한 증오와 저주일 뿐이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은 희생했으나 돌아온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히려 10년 전 사건 이후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로 되었기 때문이다. 가면 아래 숨겨진 얼굴은 알 수 없으나 그 눈빛에는 온갖 절망과 증오 그리고 파멸이 숨어 있다.

 

린타로의 공격에 목이 돌아가도 죽지 않고, 다시 원상 복구하는 히루코의 그로테스크한 신체는 과연 누구로부터 시작했는가? 전쟁에 필요한 군인들은 처음에 상관들에 의해 멋대로 개조되다가 어느 순간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려진다. 버려진 자들에 대한 반발의식은 그 모든 것에 대한 파괴본능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저주 받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아무런 죄도 없지만 무참히 죽거나 핍박받는 모습에서 그들이 느낀 세상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런 점에서 그로테스크한 모습은 가스트레아보단 오히려 인간의 말과 행동에서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인간이란 과연 자신들이 희생할 만큼 지켜줄 가치가 있는가에서 작품 전체에서는 없는 것 같이 보인다.

 

9. 블랙 불릿과 일본이란 사회

하지만 린타로는 그래도 지켜야 한다고 한다. 언젠가 자신들이 그곳에서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 날을 위해서 그 사회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신념 아래서 말이다. 헤밍웨이가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가? 라는 의문처럼 말이다. 동경을 지키는 린타로와 엔쥬를 비롯한 무리들은 버린 받은 아이들로 하여금 그 자리를 만들어주는 존재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다른 누군가로부터 차별과 공포의 대상이 된다. 오늘 하루 무사히 보낸 것도 누군가의 희생이나, 그 희생은 누군가는 잊은 채 그저 두려움과 적의로서 대한다. 하지만 그것을 만들어낸 근본적 범죄자들은 표면 위가 아니라 수면 아래 자기들의 이익만 추구한다. 만약 단순히 10년 전의 가스트레아가 괴물이 아니라 일본의 현실이라면 어떻게 볼 것인가?

 

그동안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그림자 뒤에서 온갖 공작을 부린 세력가들이 존재했고, 그들로 인해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또 다시 위기를 맞이한다. 정치가보다는 그동안 일본국민들의 정직한 직업정신과 장인정신으로 일본은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버블경제 이후 부동산문제나 물가상승, 최근에 노후화와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물론 한국 역시 물가상승, 고령화, 사회적 불평등의 심각성은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블랙 불릿은 일본이란 국가에서 누군가 노력했다면 그 성과가 그 자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누군가의 이익으로 돌아간 점과 그것도 모자라 그들이 이룩한 성과를 모두 파괴된 점이다.

 

10년 전 가스트레아 침공에서 동경에어리어의 시민들은 거의 모든 것을 잃었고, 그 후에 태어난 저주받은 아이들을 증오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원망과 증오를 받아야 할 이유는 바로 진정 비판받을 대상은 표면에 나오지 않고 숨어있는 것이고, 도리어 아무 죄 없는 이방인 같은 존재만 희생되는 점이다. 블랙 불릿의 관동 회전에서 예전에 일본에서 일어난 관동대지진이 생각났다. 본래 지진이란 지구의 맨틀의 운동, 화산활동 등의 지형지질적인 운동에서 시작되나,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음모로 여기고, 죄 없는 조선인들을 살해하거나 핍박했다.

 

그런 점에서 저주받은 아이들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배척받는 것과 당시 희생된 조선인들과 비교하여 기본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단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불안과 공포를 전가시키고, 극단적인 폭력으로서 상대방을 희생시키는 것이 정의라고 여겼다. 단체가 개인에 대한 폭력행사에서 폭력을 가하는 자는 자신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실행하고 있다고 여긴다. 폭력이 하나의 미적 기준으로 되어 정당성을 가지는 것이 바로 파시스트의 모습이다. 하지만 폭력이야 말로 유일한 정의를 실천할 수 있다는 점은 프랑스대혁명처럼 구시대의 모순을 뒤집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단지 그 폭력의 중심이 되는 것이 집단우월주의인지 혹은 그것을 뛰어넘은 인간의 일반의지인지가 구분되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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