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3분기 애니메이션 중에 <아키메가 벤다>가 주목받고 있다. 그 작품을 처음 1화만 봤을 때 쳅터편 제목이 "어둠을 베다"이다. 2화와 3화는 각각 "권력을 베다"와 "응어리를 베다"로 나온다. 작품을 전반적으로 보자면 칼로서 베다라는 것으로 통해 무엇을 어떻게 베고 싶은가라는 목적의식이 드러난다. 그것은 1화부터 등장한 타츠미의 수도에 오면서이다. 수도라는 곳은 황제가 사는 곳으로 거대한 도시이며, 많은 사람들이 밀집하여 살고 있다. 그곳에는 왕족부터 시작하여 귀족들이 살고 있으며, 거리에는 하층민들이 주로 돌아다닌다.
타츠미는 처음 도성에 와서 나이트레이드 멤버인 레오네에게 돈을 털린 후 길거리에서 노숙하던 중 귀족아가씨의 도움으로 신세를 지게 된다. 문제는 그 귀족의 집에 가면서부터다. 귀족의 집안은 화목하고, 친절한 분위기로 타츠미는 안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타츠미가 머물던 다음날 밤, 나이트레이드가 침범하여 맨 처음으로 그 집안의 안주인을 칼로 베고, 다음으로 파수병과 귀족남자를 베어버린다. 그 뒤로 귀족의 딸을 베려고 할 때 타츠미는 그녀에게 죄가 없다며 말리지만, 알고보니 그 집안 전체가 시골에서 올라온 나그네들을 집으로 유인하여 약 탄 음식을 먹인 후 잔인한 고문을 한 것이었다.
작품에서 보이는 광기는 사드 후작의 <소돔의 120일> 3편과 4편에 나올 정도로 잔인했다. 그 가족들은 타인에게 고문과 생체실험으로 쾌락을 가진 것이다. 이런 일이 인간에게 가능한가? 라는 의문에 인류는 그동안 이런 잔혹한 일들을 계속 했었다. 20세기만 하더라도 일본에서 731부대 마루타 실험이나 독일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광기는 인간이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라고 회의감을 가질 정도다. 물론 <소돔의 120일>에도 그런 잔인한 살인마도 있었다.
부패한 정권과 각료 그리고 거기에 동화되어버린 국민들, 프랑스혁명 이전의 프랑스에서는 국민들은 귀족과 성직자의 과중한 세금과 향략에 시달렸으며, 그 분노가 촉발되어 바스티유감옥이 함락되었다. 그런 점에서 나이트레이드란 존재는 폭력과 불관용이라는 이름이 하나의 정의와 도덕이 된 사회다. 정의와 도덕에서 도덕은 윤리와 다르다. 윤리는 상대방의 입장과 조건 그리고 거기에 대한 자신의 사유가 필요하나, 이와 다르게 도덕이란 하나의 법과 제도적인 요건이다.
법과 제도는 권력층에 의해 조직되며, 법과 제도가 과연 하층민이나 대다수 국민에게 효율적으로 다가오는지 아니라면 역으로 고통과 분노를 전달한다면 그 사회의 도덕과 정의는 타락한 것이다. 타락한 윤리가 하나의 정의와 도덕이 되었기에 타츠미는 사디즘에 빠진 소녀의 파수병에게 도성의 현실을 듣는다. 어린 왕은 무력하고, 주변의 신하들이 권력을 조작하는데, 요괴보다 더 요괴같은 존재들이 그들이며, 만약 이런 애기가 밖으로 새게 될 경우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해결될 수 없기에 그 어떤 협의나 토론으로 그 사회는 구제를 받을 수 없다. 오히려 그대로 썩어들어가 결국은 내부의 붕괴로 이어지는 것이 정치적인 상황이다. 그런 어두운 권력이 만든 정의를 다시 정화시키려면 방법은 그 사회 자체를 붕괴해야 하는 것이다. 혁명이란 것은 바로 그렇게 피지배계급이 자신을 지배하는 계급을 전복하여 사회구조를 변모시키는 행위다. 문제는 혁명이란 것은 기존의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세력이기에 기존의 지배계급에겐 강력한 공권력 내지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일부 사람들이며, 무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 역시 그렇다. 무력을 소유한 곳은 대부분 국가권력기관과 왕족, 귀족들이다. 그렇다면 일반 국민들은 그들에 대해 대항할 능력이나 조건조차 되지 못한다. 그러면 혁명이란 어떻게 해야하는가? <아카메가 벤다>는 바로 그런 혁명을 다수의 국민이 아니라 소수의 반영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반영웅이라 칭한 것은 국가에 대해 하나의 정치적인 행위로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히 테러로서 혁명적 행위를 하기에 칭한 것이다.
영웅과 반영웅은 같은 존재이나 시점과 세력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타츠미가 사는 국가에서 나이트레이드는 국가반역자고, 작품 내의 시점에서 정의를 가진 처형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에 대해 정치적인 단체가 아니라 일종의 테러리즘으로 대항하므로, <아카메가 벤다>라는 작품은 아나키스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아나키스트 중에서 단재 신채호와 이회영 선생이 유명한데, 그들의 방법은 소수의 아나키스트들이 목표대상에게 몰래 접근하여 암살을 기도한다는 사실이다. 1920~30년대 독립운동사에서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은 그렇게 테러리즘에 의해 입각한 것이다.
<아카메가 벤다>는 바로 반국가적 테러행위로 어두운 권력과 부패를 베려고 하는 것이다. 작품이 만들어진 계기는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조금 의아하나 제작사는 <슈타인즈 게이트>와 <슈퍼 소나코>를 제작한 업체로, <슈타인즈 게이트>에 일본이 한국을 강제통치한 것에 대하여 2CH에서 거기에 대한 조롱하는 내용을 작품 내에 그렸으며, <슈퍼 소나코>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자고 하는 것을 그리기도 했다. 이런 작품을 만든 제작사인데, <아카메가 벤다>는 위 2작품과 다른 관점으로 제작되었기에 조금 의아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일본에서 아나키스트로 고토쿠 슈스이가 있으며, 그의 저서인 <장광설>은 단재 신채호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는 1911년 천황 암살기도로 처형을 당한다. 또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안중근 의사를 칭송했다고 한다. 웃기는 이야기나 1930년대 동아시아 아나키스트 모임에서 각 국가별 대표가 나올 때 일본인도 있었다. 그런 역사적 맥락에서 <아키메가 벤다>는 작가 스스로가 아나키스트는 아니겠지만, 작품 그 자체적으로 아나키스트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작가가 작품으로 통해 일본이란 현실을 보는 것은 부조리와 부패로 가득한 것이고, 그런 문제점을 일반인들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약한 개인이 바꿀 수 없는 사회인만큼 <아카메가 벤다>처럼 누군가 그런 현실을 바꾸어주었으면 하는 욕망이 담겨있다. <아카메가 벤다>에서 나이트레이드는 국가라는 조직은 철저히 부정하며, 그 국가조직의 권력인 귀족들에 대해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한다. 그래도 일본에 대해 국화와 칼이라고 말할 만큼 <아카메가 벤다>는 칼에 대한 일본인의 집착을 볼 수 있다.
작품을 보면 사지가 절단되고 피가 유혈되는 하드 고어한 설정 속에서 칼로서 적을 베어 어두운 현실을 타파한다는 설정은 칼(도쿠가와 이후 메이지시대~현재)로 만든 일본이 이제는 칼로서 다시 베어야 한다는 무의식적 심리가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현재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 이후로 조선에 대한 강제통치시절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주요인사의 후예들이 여전히 일본정치계의 거물로 등장하고 있다. 일본 총리 아베의 경우 역시 그런 점범들의 후예들이고, 전범들의 후예들은 과거의 죄를 뉘우치기보단 오히려 영광의 역사로 알고 있다.
그들은 일본 정계에 진출하면서 각종 경제인사들과 유착하고, 거기에는 야쿠자 조직도 관여하고 있다. 과거 칼로서 지배하고 칼로서 침략하던 이들이 몰락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칼(일본 자위대 군사조직화)을 세우는 현실에서 일본 역시 우리나라처럼 사회적인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하다. 그런 모순과 부조리가 가득한 세계에 사는 만큼 <아카메가 벤다>는 과연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가? <아카메를 벤다>에서 아카메가 속한 나이트레이드는 무장테러를 감행하는 혁명조직이다.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처럼 일본이 점령당한 것도 아니고, 기존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개된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 주인공이 속한 국가를 부정하는 작품은 드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