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블랙 불릿을 처음 보면서

블랙 불릿(black bullet)이란 작품을 보는 순간, 제법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란 것을 알았다. 예술이란 것은 어떤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가? 그것은 단순히 보기가 좋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다. 가령 우아한 자신들의 팀을 위해 모두가 열심히 노력하는 일명 “잇쇼겐메이(いっしょけんめい)”의 결과로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것이다. 다르게 설명하자면 예술이란 것은 현실에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불협화음 내지 추악함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요소들로 하여금 인간들에게 충격을 주어야 한다. 예술이라 함은 근대까지 다른 모습으로 이른바 탈근대적인 모습으로 인간이 절대적으로 여긴 것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을 파괴해야 하는 점이다.

 

근대중심의 사고는 이미 낡아버린 사고방식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이 어느 절대적 가치아래 묶이는 것 자체가 바르지 못한 방식이고, 그런 가치관을 추구하는 것은 파시스트적인 요소로 변질된다. 이미 오래 시간을 들어 20세기 역사에서 그런 현장을 보아왔다. 하지만 거기에 대항하는 안티적인 파시스트적인 존재 역시 파시스트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나는 생각하고 있는가? 아직 일본은 2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태평양전쟁 이전의 인간과 이후의 인간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태평양전쟁 중심의 사회보다는 태평양전쟁이란 속성이 가진 인간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그로테스크적인 요소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블랙 불릿은 그런 인간들의 투쟁을 보여준다. 그로테스크라는 일그러지고 낯설며 불편한 진실이란 무엇인가? 동경에어리어에 살아가는 인간과 그 뒤에 숨어 있는 권력집단, 그리고 그것에 대항하는 자의 광기가 있기에 흉측한 인간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블랙 불릿은 10년 전에 야생의 가스트레아라는 괴물집단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보통 공격으로 죽지 않은 무서운 괴물인 가스트레아는 살아있는 인간 그리고 동물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2. 가스트레아와 인간

그들은 인간을 죽이고 포식하며, 때로는 그들의 바이러스로 인해 인간과 동물들을 감염시켜 버린다. 감염된 인간과 동물은 세포 안에 침식된 가스트레아 바이러스로 인해 숙주가 되고, 그 숙주는 바이러스의 영양분이 되어 마지막에 가스트레아에 의해 잡혀먹게 된다. 바이러스에 대한 처방이 되는 백신을 즉시 접종받지 못하면 인간은 죽게 되는 점이다. 그런 절대절멸적인 비참한 상황에서 인간이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보통의 공격으로 죽지 않고, 자위대에서 출동한 전투기 폭격이나 탱크의 공격으로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가스트레아 일정 등급이상이 될 경우 보통의 무기조차 통하지 않는다.

 

이른바 바라늄이란 금속으로 가스트레아를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바라늄이란 금속은 현실적인 화학에서 등장하지 않은 금속이나 인간이나 보통 동식물에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금속이다. 하지만 가스트레아나 또는 가스트레아 세포 내지 바이러스가 있는 생물체에겐 매우 효과적인 영향을 준다. 가령 보통 총알에 의해 가스트레아가 죽지 않으나 바라늄으로 만든 총알 앞에서는 무력화될 수 있으며, 동경 에어리어를 막고 있는 모노리스 성분이 바라늄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금속 중에서 특정한 파장 내지 혹은 성분을 포함하는 금속이 있다. 가령 구리는 살균효과를 지니며, 수은은 소독효과가 있으며(대신 인체에 과도노출 시 미나마타병에 걸릴 수 있음), 게르마늄 같은 경우 인간에게 좋은 파장을 내뿜는다고 한다.

 

하다못해 우라늄 같은 경우 핵에너지를 발산하고, 세슘의 경우 인간에게 폐질환을 주기도 한다. 바라늄의 속성이란 결국 가스트레아를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가스트레아 세포와 바일러스까지 섬멸할 수 있는 금속이어야 한다. 바라늄으로 무장한 민간경찰과 그들을 돕는 이니시에이터인 10세 소녀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일하게 가스트레아를 막을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3. 저주 받은 아이들

민간경찰의 경우 대부분 총과 칼, 그리고 무기들을 바라늄으로 만들고, 그들의 이니시에이터인 10세 소녀들은 태어날 때 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가스트레아 바이러스로 인해 유전자가 변형된 인간이다. 고의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적인 조작으로서 태어난 소녀들은 눈이 붉고, 보통 인간과 다른 신체적 능력을 갖추었다. 이들의 존재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존재로 비추어져 가스트레아가 아니지만 가스트레아의 세포를 가진 이유로 차별을 당한다. 인간의 차별이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하게 말하자면 옳지 않은 일이나 인간이란 존재는 이성보다는 감정이나 무의식에 의해 더 심하게 움직인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이니시에이터인 소녀들은 보통 인간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은 존재이나, 감정이나 무의식적인 영역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 소녀들은 보통 인간과 다른 능력을 가졌고, 그 능력으로 가스트레아를 헤치울 수 있기 때문이다. 괴물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과 인간의 중간에 있는 존재다. 그래서 반괴물이란 입장에서 이니시에이터는 싸움에 빠진다. 그 소녀들이 싸움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불평등이란 이름의 부당함이다. 인간의 불평등에는 크게 2가지가 있다(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 따르면).

 

하나는 선척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천적인 것이다. 후천적인 것은 사회적 지위, 경제적․ 문화적 조건, 교육의 수준 등과 같이 자연적인 인간이 아니라 비자연적인 인간의 조건이다. 그렇다면 선천적인 것은 성별, 인종, 나이, 민족 등이다. 소녀들은 나이나 성별, 그리고 민족적인 조건에서 전혀 불평등을 받을 이유는 없으나, 그녀들이 단지 가스트레아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태어난 죄로 불평등적인 차별을 당한다. 대부분 부모들은 그녀들을 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많은 사람들은 가스트레아에게 직접 대항하지 못하면 아무 죄도 없는 소녀들에 대해 폭력과 협박을 가한다.

 

4. 인간의 이면적 모습

자신이 현실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로서 자신보다 더 약한 약자를 박해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의를 관철한다. 엔쥬 역시 평범히 초등학교에 다닌다고 해도 히루코 카케타네의 책략으로 엔쥬는 학교로부터 외면당한다. 엔쥬가 학교에 평소에 남에게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학교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자신들의 생명을 위해 싸우는 자에 대한 자세에서 오히려 박해를 가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인간이란 이성보단 무의식이나 감정의 지배를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대사상의 기초는 계몽주의에 의해 태어났기에 근대사상은 이성에 의해 인간이 인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고 여기나 그 진실은 오히려 인간이 계몽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억압이 시작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블랙 불릿은 가스트레아와의 전투보단 그 가스트레아의 전투로 통해 보는 인간상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작품 원작이 라이트노벨이고, 원작에 비해 짧은 애니메이션 편성으로 본래의 내용을 충실하지 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작품 전개상 이해하기 힘든 전개나 상황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부연적인 설명이 없었기에 작품을 오락적 요소로 본다면 높은 점수를 주지 못하겠지만, 그 작품에 담론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가치는 최근 본 작품 중에서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5. 일본의 모습

블랙 불릿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관은 21세기 일본 동경이란 점이고, 동경의 통치자는 성천사라는 16세의 미소녀다. 거의 천사와 같은 외모와 지성, 그리고 인간성을 갖춘 완벽한 소녀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진정한 용기와 자비심은 분명히 말하자면 이상적인 정치인에 가까운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있다. 그녀는 현실을 각인하고 있지만, 현실주의자로 남아있기 보다는 이상주의자로서 살아가려 한다. 현실에 타협하여 적당히 넘어가자는 관료주의적인 정치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의 상징 Icon이다. 마지막 화에서 알데바란을 무찌르는 장면에서 성천사가 기거하는 건물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등불을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 축전지를 보급 받아 가스트레아의 행진을 관찰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누군가의 음모로 축전지는 오지 않아 위기에 처한 순간, 성천사는 자신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주변에 모인 시민들과 같이 하늘 위로 등불을 보낸다. 무력한 인간이나 누군가의 도움이 되기 위해 그 마음을 직접 보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주 받은 아이들에 대한 태도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버린 받은 아이들을 차별하고 무시하며, 심지어는 고의적으로 바라늄 폭탄을 그들의 피난처에 날리는 인간의 모습에서 극도의 잔인성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성천사와 함께 보내는 등불에서 버린 받은 아이들 중에 한 소녀가 옆에 한 소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미소를 보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미소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은 아무 이상 없이 태어난 당신만이 아니라 저주 받은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란 뜻이다. 단지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것이지 결코 그것을 원한 것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를 위협할 생각도 없다. 너와 나는 다르게 보이지만, 근본은 모두 인간의 마음을 가진 인간이란 점이다. 인간의 마음이 없는 정상적 육체를 가진 인간과 아니라면 가스트레아의 세포에 의해 기형적으로 태어난 소녀 중에서 누가 더 인간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은 신체적 조건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인간으로서 보여주는 말과 행동이다.

 

바로 일본은 2가지의 모습에서 갈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태평양 전쟁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야생의 가스트레아가 왜 일본 동경에 오게 되었는가에서 텐도 키사라의 가족들이 꾸민 짓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가스트레아가 생겼는지에 대해 알 수는 없었다. 라이트노벨이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가스트레아의 존재는 유전자가 조작된 생물체에 의해 기인되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기형적인 생물이 나오는 배경은 20세기 들어와서 인류가 저지른 최악의 죄 중에 하나인 원자폭탄과 방사능사고다. 일본의 경우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맞게 되고, 그 결과로 태평양전쟁은 종료된다.

 

6. 텐도 가문과 정치적 이권

태평양전쟁과 텐도 가문의 관계는 무엇인가? 텐도는 작품에서 일본에서 오래된 유서깊은 집안이고 실제로 텐도 키사라의 오빠는 카즈미츠는 일본 국토교통성의 부대신이다. 게다가 키사라의 할아버지인 키쿠노죠는 성천사 옆에서 정치적 보좌를 맡고 있다. 성천사가 어떻게 통치자가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으나 기본적으로 텐도 가문은 작품 내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진 존재다. 그들은 알데바란이 동경지역에 나오게 한 것에 대한 책임과 있음과 동시에 오랫동안 그런 방식으로 이권을 누린 존재다. 그들이 누린 방식은 기존 관료들이 가진 특권의식으로부터 시작되는 점이다.

 

일본 경제성장에 주목할 만 점은 토목산업이다. 키사라의 오빠는 국토교통성에서 부대신이란 점이 중요하다. 국토교통성이란 기구는 한국으로 따지자면 국토교통부와 같은 곳이다. 국토교통부의 차관급인 키사라의 오빠는 상당한 권력을 가진 정치가이다. 그런 정치가가 손을 댄 것이 바로 모노리스의 건립이다. 모노리스는 고순도의 바라늄으로 제조해야 하나 일정 농도만 유지하면 등급이 낮은 가스트레아를 막을 수 있는 이유로 농도를 조절하여 그 차액을 챙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국토교통부에서 제일 중요한 사업은 바로 건설 사업이다. 건설사업의 비리 내지 유착의 부패는 수많은 인명을 희생하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토목건설의 사업비는 상당하고, 특히 원자재에 의한 차액은 엄청나다. 가령 철근 콘크리트에 10㎜ 짜리 철근 10개 대신 8㎜짜리 8개를 넣는다면 약 30% 이상의 차액을 챙길 수 있다. 모노리스 건설에서 바라늄의 농도는 중요하다. 그 농도의 약화로 모노리스가 침하되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고, 가스트레아 진격에 대한 방어에서 민간경찰과 이니시에이터 역시 희생이 만만치 않게 크다는 점이다. 그런 원인을 제공한 텐도 가문, 어떻게 보면 텐도가문은 일본 극우적인 집안과 연결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우선 텐도 가문이 세운 모노리스에 의해 알데바란이 침공하고, 야생 가스트레아가 왜 일본 중에 동경에 왔는지도 의문이다.

 

그 중심에 모든 것이 텐도 가문이고, 그것을 주도한 자는 텐도 키사라의 할아버지인 키쿠노죠라는 점이다. 키쿠노죠는 막대한 권력을 가진 일본 집안의 인물이고, 그가 어떤 일을 꾸미고 진행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총 5인의 인물에서 주도적인 사실이다. 그가 10년 전의 비극을 일으킨 주범이라고 본다면 그에 의해 희생된 수많은 시민들은 누구란 말인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범죄국가의 죄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독일과 같은 경우 나치의 행태를 평생 나오지 않도록 국법으로 제정할 정도다. 하지만 아직까지 일본은 평화헌법을 무시하고 자위대를 군사화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1945년 핵의 투하는 누구의 잘못으로 인한 것인가?

 

7. 텐도 키사라의 악

미국이 단지 투하했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심리 내지 보상심리 그리고 저항의식도 아닌 반항심에 사로잡힌 극우적 일본정치가들의 자위행위는 도가 지나쳤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으로 다른 국가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자국민들을 군국주의사상으로 무장하여 희생시키며, 전쟁에 패배하여 전쟁전범들은 반성하기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애국자라고 선전하는 현실에서 블랙 불릿의 텐도 키사라의 할아버지와 오빠는 대표적인 위선자라고 볼 수 있다. 성천자는 분명히 이상적인 정치지도자이나 그녀 옆에 있는 키쿠노죠의 위선은 일본이란 나라의 양면성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텐도 키사라는 명문집안의 규수로 태어나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무술까지 겸비한 소녀지만, 그녀에겐 어둠이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의 부모님이 텐도 가문의 비리와 어둠을 고발하려고 했으나, 일족에 의해 제거된 것이다. 집안의 이익을 위해 집안의 양심을 스스로 죽인 셈이다. 양심적인 지식인의 죽음은 그 사회의 죽음을 말하는 것과 같다. 양심적 지식인들이 존재해야 그들로 통해 시민들의 자각심을 일깨우고 이끌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들이 정치적 주권자이라고 해도, 시민의 권리를 행세하기 쉬운 반면 그 권리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수행하기 어렵다.

 

책임의식을 가지게 되려면 사회적 문제를 올바르게 지적하고 생각해야할 것이며,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연대가 되어 정치적 자유주의로서 행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중심에 필요한 것이 지도자이고, 양심적 지식인이다. 누군가 그 문제점을 파악하고 알리지 않으면 시작부터 되지 않기 때문이다. 텐도 가문의 가족 비극사는 키사라로 하여금 광기에 빠지게 만들었다. 겉으로 좋은 회사동료인 키사라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깊은 어둠과 광기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오빠와 결투 후에 무참하게 갈라버린 그녀는 자신에게 정의는 없다고 한다. 단지 악을 처벌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8. 왜 그로테스크인가?

악을 대항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악이라는 설정은 결국 부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 대한 저항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시 부정하는 것이다. 키사라의 광기는 자신의 행위를 두고 스스로 악이라 한다. 하지만 그것은 타인에게 악이지만, 키사라 본인에겐 정의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부모의 원수, 그리고 자신이 짊어지는 그 죄의 무게를 스스로 벌하겠다는 말이다. 결국 가족에 대한 처벌은 자신의 가족을 죽이는 것으로 스스로를 처벌하는 것과 같다. 죽음의 충동으로 행동하는 키사라에게서 인간의 삶은 어느 것으로 지탱하는지 의문스럽게 만든다.

 

분명 린타로와 엔쥬는 서로를 바라보면 의지한다. 그리고 린타로는 저주받은 아이들에게 무자비한 세상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더 좋은 미래가 올 것이고, 그때까지 서로 살아가야 한다고 한다. 절망적인 세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미래가 오는 한 가닥 빛줄기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린타로 역시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눈 한 쪽, 팔 하나, 다리 하나가 인체가 아니라 바라늄으로 만들어진 반 기계인간이었다. 심한 부상에서 수술로 다시 회복한 린타로는 물질적으로 인간이기보단 기계와 같은 속성을 가진 것이다. 기계적인 신체가 되어버린 린타로에게서 기계화된 인간병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린타로는 분명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 속에서 그 모습이 슬프지 않게 되는 자신이 슬프다고 말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 중에 슬픔은 아주 중요하다. 슬픈 감정이 있기에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이해해주고 싶으며, 때로는 원망도 한다. 모든 사람들이 저주받은 아이들을 외면해도 린타로는 끝까지 그 아이들을 지켜주려 한다. 심지어 눈앞에서 죽어간 동료들까지도 말이다. 인간이 죽음 앞에서 마치 스쳐가는 풍경이라면 그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 감정 없는 로봇이다. 단지 싸우고 죽이고 부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감정 없는 것도 광기 중에 하나다. 왜냐하면 처음에 린타로는 가스트레아가 아니라 히루코와 싸웠기 때문이다. 히루코는 평화가 아닌 전쟁을 원하며, 민경들과 정부에 대한 반국가적인 행동만 한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기계화 병사였으며, 그 옆에는 자신을 두고 아빠라고 부르는 저주받은 소녀 코히나가 있었다. 히루코의 딸인 코히나 역시 아버지를 닮아 광기에 빠져 살육을 즐기는 소녀다. 그러나 그 소녀가 왜 히루코와 같이 광기에 빠졌는가? 히루코는 평화보단 전쟁을 원한다고 하면서 처음에 동경에어리어의 위협이 되었지만 알데바란이 침공한 후부터는 린타로의 든든한 아군이 된다.

 

위기에 빠진 린타로를 그리고 알데바란 섬멸 작전 전에 퀸에 대한 섬멸작전을 도운 것도 히루코다. 그는 왜 린타로를 같이 하려고 했는가? 그는 전쟁을 위해 억지로 만든 몸이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딸마저 저주 받은 아이들처럼 되었다. 전쟁이 끝나 기계화된 병사는 필요 없고, 딸은 타인들에게 거부당한다면 히루코가 남은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순수한 증오와 저주일 뿐이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은 희생했으나 돌아온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히려 10년 전 사건 이후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로 되었기 때문이다. 가면 아래 숨겨진 얼굴은 알 수 없으나 그 눈빛에는 온갖 절망과 증오 그리고 파멸이 숨어 있다.

 

린타로의 공격에 목이 돌아가도 죽지 않고, 다시 원상 복구하는 히루코의 그로테스크한 신체는 과연 누구로부터 시작했는가? 전쟁에 필요한 군인들은 처음에 상관들에 의해 멋대로 개조되다가 어느 순간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려진다. 버려진 자들에 대한 반발의식은 그 모든 것에 대한 파괴본능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저주 받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아무런 죄도 없지만 무참히 죽거나 핍박받는 모습에서 그들이 느낀 세상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런 점에서 그로테스크한 모습은 가스트레아보단 오히려 인간의 말과 행동에서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인간이란 과연 자신들이 희생할 만큼 지켜줄 가치가 있는가에서 작품 전체에서는 없는 것 같이 보인다.

 

9. 블랙 불릿과 일본이란 사회

하지만 린타로는 그래도 지켜야 한다고 한다. 언젠가 자신들이 그곳에서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 날을 위해서 그 사회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신념 아래서 말이다. 헤밍웨이가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가? 라는 의문처럼 말이다. 동경을 지키는 린타로와 엔쥬를 비롯한 무리들은 버린 받은 아이들로 하여금 그 자리를 만들어주는 존재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다른 누군가로부터 차별과 공포의 대상이 된다. 오늘 하루 무사히 보낸 것도 누군가의 희생이나, 그 희생은 누군가는 잊은 채 그저 두려움과 적의로서 대한다. 하지만 그것을 만들어낸 근본적 범죄자들은 표면 위가 아니라 수면 아래 자기들의 이익만 추구한다. 만약 단순히 10년 전의 가스트레아가 괴물이 아니라 일본의 현실이라면 어떻게 볼 것인가?

 

그동안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그림자 뒤에서 온갖 공작을 부린 세력가들이 존재했고, 그들로 인해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또 다시 위기를 맞이한다. 정치가보다는 그동안 일본국민들의 정직한 직업정신과 장인정신으로 일본은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버블경제 이후 부동산문제나 물가상승, 최근에 노후화와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물론 한국 역시 물가상승, 고령화, 사회적 불평등의 심각성은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블랙 불릿은 일본이란 국가에서 누군가 노력했다면 그 성과가 그 자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누군가의 이익으로 돌아간 점과 그것도 모자라 그들이 이룩한 성과를 모두 파괴된 점이다.

 

10년 전 가스트레아 침공에서 동경에어리어의 시민들은 거의 모든 것을 잃었고, 그 후에 태어난 저주받은 아이들을 증오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원망과 증오를 받아야 할 이유는 바로 진정 비판받을 대상은 표면에 나오지 않고 숨어있는 것이고, 도리어 아무 죄 없는 이방인 같은 존재만 희생되는 점이다. 블랙 불릿의 관동 회전에서 예전에 일본에서 일어난 관동대지진이 생각났다. 본래 지진이란 지구의 맨틀의 운동, 화산활동 등의 지형지질적인 운동에서 시작되나,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음모로 여기고, 죄 없는 조선인들을 살해하거나 핍박했다.

 

그런 점에서 저주받은 아이들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배척받는 것과 당시 희생된 조선인들과 비교하여 기본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단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불안과 공포를 전가시키고, 극단적인 폭력으로서 상대방을 희생시키는 것이 정의라고 여겼다. 단체가 개인에 대한 폭력행사에서 폭력을 가하는 자는 자신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실행하고 있다고 여긴다. 폭력이 하나의 미적 기준으로 되어 정당성을 가지는 것이 바로 파시스트의 모습이다. 하지만 폭력이야 말로 유일한 정의를 실천할 수 있다는 점은 프랑스대혁명처럼 구시대의 모순을 뒤집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단지 그 폭력의 중심이 되는 것이 집단우월주의인지 혹은 그것을 뛰어넘은 인간의 일반의지인지가 구분되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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