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화배우가 선박침몰사고로 죽은 희생자의 가족에게 막말을 한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참 답답하기 짝이 없다. 셰익스피어라는 대문호의 글을 인용하면서 정작 중요한 점은 정치적인 입장에서 헌법에 대한 기본적인 맥락을 제외했다. 즉 문학적으로 말하면서도 정치철학적으로 배제된 글이라고 볼 수 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반대로 이제는 우리는 역사가 시보다 철학적인 상황이 도래했다.


하지만 역사라고 해도 그것은 시라고 할 수 있다. 국민 대부분이 그 현장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세계라는 이미지로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1세기는 이미지를 읽을 수 없는 사람은 결국 문맹인으로 되는 것처럼 가상세계의 이미지가 제 아무리 실재하는 현실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하나의 가상이다. 우리의 현실은 역사적 가상이란 시로서 움직이고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그 배우의 문제점보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도 그만의 논리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문제는 국가의 기본법률은 헌법이고, 헌법에 명시된 국가정부와 행정기구가 과연 그렇게 제대로 대응했는지 그리고 그 이후의 상황적인 기록을 본다면 인간이 극단적으로 몰리는 것에 대한 비관찰성이다. 타인의 관찰은 넘어가도, 결국 자신의 개인적 내력으로서 자신의 비극적 삶을 관찰하게 해준다.

 

단지 실수는 자신의 형님이 돌아가신지 10일이 지났다면, 그 사망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죽었고, 그 원인과 배경을 상세히 나열해야 한다. 선박사고는 정해진 용량초과, 안전도구 미비, 선원들의 직무자각인식(비정규직 내지 근로조건 열악도 포함), 해경과 해수부의 관료조직의 부패, 거기에 연류된 정경유착과 암묵적인 비리가 원인이다.

 

누군가 분명히 약속을 하고, 그렇게 해준다고 선언했지만, 전혀 뒤에 일어난 반응은 시원치 않다. 약속을 먼저 했다면 약속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내세워야 한다. 물론 피해자 측의 과도한 발언을 문제삼는다면, 그것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정확히 지적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자신을 지지하는 인물에 대해 과오가 있다면 인정해야 하나, 그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욕을 해서 욕을 했다는 어리석은 판단이다.

 

부모의 죽음에서 그것은 자신의 배우인생이란 개인적 책임이지, 사고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어린 생명과 다르다. 병으로 죽은 것과 사고로 죽은 것에서 무엇이 같을까? 만약 형님이 억울하게 죽었다면, 그 과정과 원인, 상황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 아닌가?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위대하다. 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를 위대함만 보는 것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작품 그 자체를 비평한다. 

 

그러나 가장 착각하고 있는 것은 배우가 배우로서 셰익스피어를 말한다면,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헌법을 논해야 한다. 국가의 주인이 누군인가부터 시작하여 아무리 간접의회민주주의 정치제를 가지고 있더라도, 헌법정신을 두고 발언해야하는 점이다.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법은 법을 위해 존재하는가? 법을 만든 자를 위해 있는가? 법 그 자체를 초월해 있는 자를 위한 것인가? 노모스 법 위의 군림하는 자 즉 정치적으로 통치하려는 자인가? 대한민국은 절대왕정의 군주제가 아니다.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처럼 그 나라의 정치를 보면 그 나라의 국민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희생자라는 약자를 궁지로 모는 현실에서 우리의 앞날은 어두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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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2014-08-2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만애비 님, 이 회색톤다운 주황은 으아앗
부디 친절한 색으로 바꿔주시기를요!

만화애니비평 2014-08-28 15:44   좋아요 0 | URL
교체했습니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2 - J Novel
마미야 나츠키 지음, 시로미소 그림 / 서울문화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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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서평을 나열하기 말하자면, 나는 정의라는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의는 윤리라는 가치관이 없다. 단지 정의라는 이름은 힘과 권력이란 개입을 정당화시키는 악적인 수단이다. 어느 작품에서 나온 것처럼 정의라는 이름은 악이란 이름을 질투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런 것일까? 아닌 것인가?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 것은 정의라고 말하는 자와 정의라는 것에 매달리는 자는 자신의 정의론에 대해 생각해 볼 의무가 있다. 문제는 그런 자신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 대한 성찰 없이 단순히 정의는 그 자체로서 의문을 가지게 해서 안 될 극단의 성역인 것이다. 성역이란 이름이 되어버린 정의가 하나의 관념처럼 돌아다녀 눈에 보이지 않은 대기 중에 떠다니는 공기라면 문제가 없을지 모르나, 그것은 인간의 관념 안에 숨을 쉬고, 때로는 인간의 숨을 끊어주게 만든다.

 

그런데 그 정의라는 이름은 분명히 어떤 조건 안에서 타당해야 하는가? 우리는 살아오면서 자신의 정의로운 존재라고 믿고 있다. 그것만큼 가장 큰 착각과 오만, 그리고 편견이란 인간이 가진 그 어떤 죄보다 더 무겁고 지독하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의 정의라고 믿는 것은 자신들이 믿는 가치관이나 도덕관이 옳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점이다. 가령 최근에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차별적 폭격과 총격은 두고 우리는 그것을 정의라고 논하는가? 물론 정의의 철퇴라고 말하는 부류도 있지만, 국제연합 UN에서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두고 비인간적인 처사고,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라고 비난했다.

 

정의라는 가치를 두고 저 사건을 생각하면 무엇이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전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어보았다.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의 갈림길, 그 갈림길 속에서 그 어떤 것이라도 좋은 결과를 볼 수 없었다. 더 나아가 마이클 샌델이 강의하는 하버대학교 정치철학과에서 강의하던 존 롤즈의 <정의론>에선 이렇게 인간의 선택에 대해 이렇게 논한다. 인간이 선택하는 것은 제일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손해나 피해가 적은 것으로 선택한다고 말이다. 정의에 대한 가치는 결국 인간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의라는 그 자체로서는 도덕적이고 사회 관념에 따른 힘으로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대다수의 판단에서 비롯되는 다수결, 문제는 다수결이란 것은 인간의 보편적 사고이기도 하나, 그 보편적 사고를 지배하는 인간의 사고방식 역시 진지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왜 라이트노벨 1권을 읽으면서 이런 정의와 도덕 그리고 인간의 선택이란 난해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가? 이번에 읽은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라는 라이트노벨은 그런 인간의 딜레마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고, 그 딜레마를 어렵지 않게 그저 라이트노벨이란 경소설이란 장르에 맞게 재미로서 이끌어 간다. 중간마다 보여주는 플롯과 또한 그 플롯을 배치하기 위한 복선은 기본적으로 암시하거나 또는 생략하기도 했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1권에서는 카미우치 유우진의 자살심리에 대한 저지에 반해 2권에서는 사나 엔마에 대한 성정체성에 대한 열띤 토론을 펼쳤다. 하지만 그 복선의 구조가 어디서 나오는가에서 1권에서 이미 사나 엔마의 고뇌가 시작되었다. 2권에서 검도부 1학년이 목격한 엔마의 몸은 단순히 발화의 시작점에 지나지 않았다. 1권부터 사나 엔마는 이미 밀폐된 공간에 방치된 가스처럼 언제 어디서라도 스위치가 눌러지면 폭발해야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2권에서 보여주었고, 그것으로 통해 리코와 리코 일행들이 보여주는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투쟁을 보여준다.

 

왜 정의와 도덕 그리고 선택이 따를까? 기본적으로 학교라는 공간은 단순히 생각하면 아직 미성년인 학생들을 가르치고 기르는 훈육기관이다. 학교 그 자체적인 기능을 생각하자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라는 공간은 학교라고 하여 그 자체로 분리된 공간이기도 하나, 때로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다. 학교는 학생이란 존재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학생이란 이름 뒤에는 사회적인 배경과 조건이 따른다. 학교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사회구조로서 움직이는 조직인 것이다. 따라서 그 사회구조 속에서 정치적인 맹점과 정치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투표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

 

투표라는 것은 결국 참여에 대한 인간의 권리다. 그 참여라는 것이 하나의 선택지점을 지정하고, 그 선택은 그 정치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사나 엔마가 처해진 상황은 바로 그 정치적 상황 그 자체였다. 따라서 리코는 1권에서 프로이트와 융과 같은 정신분석학자의 이름과 이론을 내세웠다면, 2권에서는 왜 니체의 이름과 그의 말을 따라 했는가? 리코는 학생회의 하라 사이토가 보낸 강력한 도전장을 두고 니체의 말을 인용하였다. “저 유명한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 말했지. ‘정의는 거의 동등한 힘의 상대를 전제로 하는 보상과의 교환이다.’라고, ‘정의’는 정정당당하게 부를 때가 아름답지 않은가? 적어도 약한 상대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태에서 철퇴를 내리려는 행동은 삼류 행동이라고 할 수밖에 없군. 그런데 하라 사이토 군, 자네는 몇 류지?”

 

저 말은 어렴풋이 내 기억에서 돋아났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출판사 책세상)>에 나오는 문구 중에 하나일 것 같다는 점이다. 니체의 서적은 당시 도덕관이나 정의관에 대해 무척이나 비웃고 깨부수려고 했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를 읽다보면 학생회의 하라 사이토가 왜 유치한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니체는 본래 민주주의를 혐오하던 사람이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에서 대다수의 군중으로 이루어 있으며, 그들은 충분한 판단력과 이성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중심리에 의해 자행되는 일들은 그것이 분명히 틀린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인간이 가진 광기의 폭발이 정당화 되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도덕과 정의라는 이름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에서 내가 발췌했던 글 중에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문 일이다. -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에서는 일상적인 일이다.”라고 한다. 결국 집단과 시대라는 특성 아래 사이키델리코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하나의 집단이 구성된 조직이고, 현대적인 상식이란 이름을 가진 시대적 요건도 갖추어져 있다. 학생회는 학교학생들의 대표이기도 하나, 그것은 정말로 대표인지 아니면 하나의 권력을 가진 존재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조직과 집단 또는 국가조차도 법과 제도가 있다. 법과 제도는 그 자체로 공정하고 공평해야 하나, 그 공정성과 공평성의 이름을 가진 법과 제도는 자신의 이름으로 집행하지 않는다. 어느 특수한 인간으로서 공정성과 공평성을 실행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 개인에게 공정성과 공평성이 완벽하지 않을 경우 어느 특정한 이해관계나 사적인 감정이 녹아들어가는 순간 이미 법과 제도라는 자체는 공정성과 공평성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2권에서 바로 그 공정성과 공평성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것에서 결국 권력이란 이름의 도덕과 정의는 정당한가라는 리코의 반격이 시작되는 점이다.

 

1권부터 복선을 깔라놓은 사나 엔마, 그는 아니 그녀는 원래 여자지만, 남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녀가 여자인데도 남자로 살아가야할 이유는 단순히 엔마가 변태적인 성욕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그녀가 자라온 환경이었다. 즉 학교라는 것이 사회구조고, 모든 사람들은 같은 조건 아래 성장할 수 없고, 같은 상황에서 살아갈 수 없다. 바로 개인적인 의지와 상관없이 외압적인 조건에 의해 자신의 현재가 갖추어지는 점이다. 엔마의 아버지는 뛰어난 무술가이고, 게다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여행을 다니는 방랑무술가였다. 어머니도 없이 아버지 아래 아버지 같은 생활을 했다면 분명 평범한 여성으로 삶을 기대할 수 없다.

 

섹슈얼리티라는 생물학적인 조건에서 엔마는 키도 크고 날씬한 소녀였지만, 젠더적인 요소에서는 그녀는 여자보단 남자로 살아야 했다. 결국 남자 옷을 입고 남자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엔마의 집안사정에 따른 문화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분명히 여자가 여자 옷을 입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남자라는 존재로 학교를 다니는 것은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하라 사이토는 엔마의 약점을 두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퇴학을 내리려 한다. 퇴학의 조건에서 일반적으로 학교 내 교무위원들이 의론을 걸치고 나서 결정해야할 사안이나, 먼저 학생회에서 의론을 결정하였기에 학생회의 대회의로서 결정지으려 했다.

 

그 목적은 엔마의 퇴학이나, 그 이면에 학생회에서 눈에 가시거리로 비추어지는 리코의 기압제선이었다. 학교에서 기인으로 소문난 리코에게 리코의 주변인들을 쳐내는 것으로 충분한 반격이 될 것이고, 리코가 학교 내에서 유명인이지만 확실한 친구가 없다는 점이다. 리코의 약점을 노려 리코를 눌러 버리는 것이 하라 사이토의 목적이다. 하지만 리코가 분명히 특이하고 단정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단지 리코가 어느 특정인에 대해 특별한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은 선에서 말이다.

 

하라 사이토와 같이 결백증이 강한 입장에서 리코는 자신의 미적인 감각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예전부터 계속 마찰이 있었다는 점에서 어떻게 이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 방법이 바로 상대방의 약점을 잡고 물고 늘어지는 방법이다. 책을 읽는 독자로선 하라 사이토의 방법이 매우 치사하게 보이겠지만(물론 치사하지만), 이것이 우리 현실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고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편집자의 후기에서 분명 나타냈기도 했지만, 학교라는 공간은 사회의 축소판처럼 여론으로 통해 마녀사냥하기가 참 용이한 곳이다. 더구나 학교는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군중심리를 자극하기가 참 좋다.

 

왜 리코가 메이드복을 입고, 퍼포먼스를 펼치는가? 대중은 왜 그런 리코를 기대하는가? 한 마디로 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나, 또는 학교 내의 대의회 역시 하나의 쇼라는 점이다. 쇼라는 이유는 이미 학생회에서 엔마에 대한 불리한 판결이 내리도록 사전에 수를 쓴 것과 동시에 정의라는 이름을 들먹인 것으로 모든 학생들을 피해자처럼 만들었다. 특히 검도부 1학년 후배는 그때 엔마의 모습을 본 것으로 큰 충격을 받아 더 심각한 피해자로 만들었다. 조용하고 정체된 사회에서 어느 외적인 침략자 내지 혹은 내적으로 반역자가 나올 경우 그들을 제거함으로써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단결력이 강해져 더 큰 결속력을 보여준다.

 

이것은 흔히 서사에서 말하는 Narrative적인 요소다. 쉽게 말하면 누군가는 나쁜 사람이 필요하고, 그 나쁜 사람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적으로 인식되어, 그 적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대중들은 정의로운 행동을 하게 된다고 믿게 된다. 그게 바로 니체가 가장 증오하는 모습 중에 하나인 것처럼 말이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에서 또 인상적인 말은 “우리의 가장 강항 충동, 우리 안의 있는 폭군에게는 우리의 이성뿐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도 굴복하게 된다.”라고 한다. 양심 그것은 무엇일까? 이미 대회의 이전부터 대회의 진행 도중까지 엔마는 자신의 초라하고 나약함에 두려움을 떨었고, 그는 사나운 염라대왕이 아니라 그저 연약한 남장여자였다.

 

이미 전교생에게 알려진 마당에 계속 학생회로부터 내려오는 비수 같은 폭언은 그녀로 하여금 심한 정신적 붕괴를 유도했다. 그러나 그런 비정상적인 존재는 세상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물론 그들에 대해 다소의 불쾌감 내지 이질감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으며, 그들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은 이상 그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지 그렇게 사는 것 자체에 대해 우리는 방관해주는 것이 오히려 자유라는 이름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자유라는 것은 타인에게 어떤 피해를 주지 않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단지 성별을 속이고 부활동을 하고, 연습까지 했다는 점에서 충분한 자숙과 근신을 처하는 것이 옳다.

 

리코의 행동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엔마의 탈의모습을 목격한 1학년 여학생이 큰 충격을 받아, 그것으로 인해 엔마가 퇴학을 당하여 학교에서 떠나면, 과연 그 1학년의 충격은 모두 없어지는 것인가? 뒤에 가서 분명 자신 때문에 엔마가 퇴학당하여 불우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학할 것이다. 대신 그녀가 자학할 순간에는 정의와 도덕을 외치는 자들은 무관심하게 그녀는 방치하고, 오히려 지나간 일에 매달리는 그녀를 두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정의와 도덕이란 이름을 보여주면 그 후에 일어나는 남의 일은 그저 개인의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리코가 엔마의 퇴학을 막은 이유는 3가지다. 1번째 엔마는 자신의 친구이기에 친구를 위해서고, 2번째 엔마가 자신의 처음 친구이기에 엔마가 없으면 외로워지므로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이고, 3번째는 검도부 여학생이 나중에 겪게 된 양심의 가책에 대해서였다. 그 1학년 소녀는 자신의 괴로움과 검도부를 위해 검도부장과 상담하여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 했으나, 한편으로 그 이유로 어느 개인이 비참한 상황에 맞이하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분명히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쇼가 이루어지는 대회의 시간에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란 없다. 단지 이분법적인 대립관계에서 어느 한 쪽 세력을 지지하여 잘나지도 않은 정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와 도덕은 다른 이유는 윤리는 약자의 입장과 더불어 소수자의 상황을 고려하지만, 도덕이란 이름은 절대적인 대다수의 입장만 견지한다. 엔마 같은 소수자들은 어느 사회에서 환영하지 못할 존재다. 또한 리코나 유우진 역시 그렇다. 리코는 부모가 없고, 유우진은 부모 없이 살다가 누나마저 눈앞에서 자살했다. 인간이 비틀어지는 이유는 처음부터가 비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비틀어지는 이유가 있다. 어느 일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 결과론적인 요소로서 사람들은 판단하나, 그 이면에 가려진 원인에 대해 충분한 고려를 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에 대한 판단은 결국 어리석은 기만에 불과할 것이다.

 

본문에서 리코의 반론을 잘 생각해야 한다. 그녀는 학생회의 하라 사이토에게 “윤리의 중요성을 부장하겠다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도덕만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해. 정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천차만별, 시대와 문화, 이들은 외적 요인에 쉽게 좌우되는 애매한 가치관이거든, 획일적인 가치관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사물의 본질을 간과할 수 있다니까?”라고 말이다. 현대사회는 이른바 사회적인 요소가 인간의 개인을 지배한다. 결국 인간이 문화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인간을 지배하고, 문화로 통해 하나의 사회적 양상까지 좌우되는 것이다.

 

문화적인 요건에서 상대방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 번역자인 MOEX의 후기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 과거 시대라면 인간을 나누는 것이 조선시대에 사농공상, 군주정인 유럽에는 왕족, 귀족, 평민, 농민, 노예라면 이제는 자본의 소유다. 자본이란 것은 단순히 경제학적으로 말하는 화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사회적 조건, 그리고 문화적 자본까지 고려해야한다. 문화자본이란 개념이 존재하듯이 사나 엔마의 문화자본은 여성의 삶을 강탈된 삶이었고, 그런 삶에서 고교생이 되는 순간 억지로 여자로서 삶을 강요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질과 양의 변증법에서 사나 엔마라는 존재가 살아온 시간에서 그녀는 여자보단 남자로서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여고생이란 정체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대회의의 사건과 그 사건이 원인이던 비밀의 노출, 사나 엔마는 대회의라는 계기가 하나의 통과제의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 것이다. 그렇지만 그 통과제의 과정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상식이란 것이 얼마나 인간의 생각을 옭아매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인간에게 큰 편견과 고정관념이 되는지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상식이란 것은 결국 대다수 사람들이 가지는 사고방식이나 그 사고방식이 되는 기본적인 정보가 일방적이거나 획일적인 가치라면 인간의 판단은 올바른 길보다 어긋난 길로 간다는 점이다. 사나 엔마가 마녀사냥 당해야하는 것처럼 인간의 판단력은 언제나 옳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2권까지 읽다보면 분명 리코는 기인이고, 특이한 인물이다. 절대 보편적인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기에 그 사회구조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틀에 갇힌 인간이 가진 사고방식으로 그 사회의 구조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을 잡을 수 없다. 오히려 그곳에서 벗어나는 인간이어야말로 그 사회의 틀을 보거나 바꾸어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도 리코에게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는 있었다. 친구는 소중하다고 말이다. 단지 상식적인 시선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점이고, 그래서 리코는 사나 엔마의 모든 것을 감싸줄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정의와 도덕이란 이름으로 무장한 편견과 오만으로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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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비평의 쟁점 - 잃어버린 만화 문화의 자리찾기
김성훈 지음 / 니들북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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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결국 구한말 아니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올라가야 할 것이다. 한국의 만화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만화같이 단순히 애들이나 보거나 또는 시간 때우기 용으로 이용되는 오락도서만이 아니란 점이다. 물론 오락적 기능도 중요하다.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즐길 수 있는 휴식시간에 즐거운 마음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런다고 만화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것으로 본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만화라는 것은 단지 그림으로 되어 있다고 하여도 그 안에는 엄연히 이야기가 존재하고, 그 이야기 내에는 상대방에게 의미를 전하고자 하는 기호적인 요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의 만화문화는 단순히 재미와 오락을 생겨나기 보다는 시대적인 흐름에 대한 비판과 풍자로서 생긴 문화다. <한국 만화비평의 쟁점>에서 처음 소개된 대한민보에 실린 최초의 만화가 나온다. 긴 모자에 양복과 구두, 그리고 지팡이를 잡고 있는 중년남성을 보면 무엇인가에 대해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 만화는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의 삽화로서 만화의 역사와 더불어 만화라는 매체로 통한 비판적인 요소, 그리고 민중적인 요소를 반영하여 그 문화적 명맥을 유지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만화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그래 쉬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만화이기 때문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대 지식인이며 언론인이던 최성수는 만화로 통해 언론적 기능을 강화하고, 만화라는 매체가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도 프랑스혁명사에 관심이 많지만, 그 혁명적 배경에는 민중에 의해 민중을 위한 정보와 홍보 수단으로 만화가 중요한 수단이었다. 최성수 언론인은 프랑스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통치와 나폴레옹 이후 다시 부르봉 왕가가 통치하고 또한, 나폴레옹3세가 집권하기 이른다. 이런 와중에 권위적이고 비자유적인 통치에 대해 프랑스 파리 시민들이 반발하자, 프랑스 만화작가 오노레 도미에는 시민들의 편에서 만화를 그린다. 그의 작품 중에 <봉기>는 분명 만화라기보다는 혁명을 위한 그림에 가까우나 그래도 만화가라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그림들이 대부분 시대적 문제를 풍자적인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하면 만화라는 매체가 효과적인 이유는 억압받는 민중계급 부류들은 대부분 글자를 몰랐으며, 글자를 모르는 것은 그런 문제점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판단력 내지 그런 개념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과 같다. 가령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모든 국가의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이 없었다면 프랑스대혁명의 불꽃과 심지어 전 세계의 헌법조차 만들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개념을 알려면 받아들이는 상대방에게 정보력을 각인 시키야 하는 점이다. 정보의 각인에서 기표가 되는 그림이 상대방에게 이해가지 못한다면 정보매체로서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만화라는 그림은 상대방에게 매우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누구나 그릴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만화가 가진 언론적인 기능은 곧 누구나 보고 이해할 있고, 누구나 그릴 수 있는 점에서 만화는 민중을 위한 문화가 아니라 민중에 의한 문화라는 것처럼 매우 민주주의적인 문화라는 점이다. 특히 보는 이로 하여금 쓴 웃음을 짓게 만드는 시사만화의 경우, 누가 보더라도 이해가 빠르면서 한편으로 미소와 더불어 씁쓸한 맛을 베어나게 만든다. 그렇지만 시사만화라는 것은 시대적 문제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이슈를 부각시키고, 그것으로 하여금 대중들에게 관심을 유도하므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한국의 만화역사에서는 결국 시사만화 내지 민중의 삶에 스며든 민중의 대변자라 볼 수 있다. 그런 만화에 대한 인식이 하나의 비평적 쟁점이 되고, 만화로 통해 보여주고 그것에 대한 고찰로서 만화비평은 성립된 점이다.

 

한국의 만화비평문화는 결국 언론의 기능으로서 즉 민족독립에 대한 자유에 대한 열망과 일제로부터 착취와 억압에 시달린 민중의 한을 내보인 것이다. 최성수의 그런 가치는 그가 남긴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첫째는 조선의 저널리즘이 먼저 만화를 알고 또 저널리즘이 가져야 할 만화와의 동반성을 잘 인식하는 동시에 세계 저널리즘과의 만화대세를 거울삼아 거기서 조선 저널리즘이 가져야 할 위치를 깨달아 그 깨달은 바를 하루바삐 이루어져 할 것과 둘째로는 민중이 만화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가져야겠고 마지막으로 만화가는 좀 더 만화다운 만화를 창작하여야 할 것이다.”

 

만화이기에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프랑스에서 9가지 예술에서 만화 역시 예술의 한 범주에 들어간다. 미학에서 예술이란 것은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이라 한다. 그렇기에 만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대해 작가로 눈으로 통하여 새롭게 해석하여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주는 것이 만화작가의 소임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만화의 가진 가치를 논하는 정신이기에 한국만화는 계몽주의적인 요소를 내재한 근대적인 문화였다. 그렇지만 만화는 그 누구에게 열린 세계이며, 특히 한국전쟁 이후로는 그 대상이 어른에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게 된다.

 

아마 만화가 아이들이 보는 것이라는 인식은 군사독재정권 이전에 한국전쟁 전후로 근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쟁이 닥치면 어른들은 밖에서 일을 하게 되면, 집에는 어린 아이들이 남게 되고, 또한 전쟁고아와 같이 누군가를 의지할 수 없는 사람들도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 어린 아이들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만화였고, 새로운 만화가 나오면 아이들의 손에서 이리저리 흘러 다니며,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렇지만 이런 형태는 만화에 대한 작품적 가치를 다루기보단 대량적으로 만들고, 재미위주로 가게 되는 모순이 생긴다. 만화에서 물론 시대적인 배경과 시사정신이 빠질 리는 없지만, 만화가 그런 가치에만 몰입할 수 없는 것이다.

 

예전에 일본 문화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은 이미 쇠퇴하고 이제 그것을 대체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란 문구를 보았다. 문학평론가와 언론인에 의해 우리나라 만화문화가 발전한 것은 사실이나,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할 상황이 온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만화는 여전히 자유로운 사고와 즐거운 마음을 가지게 해줄 수 있는 매체였다. 그런 만화에 대한 평론은 만화가 단지 저속한 문화로 인식되는 것에서 좀 더 넓은 관점으로 보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김현, 오규원 선생 같은 문학도의 출현은 매우 중요한 의미인 점이다. 만화규장각에서 발행한 <한국만화비평의 선구자들>에서 김현 선생은 자신이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엘리트임에도 불구하고, 만화가 가진 민중예술성을 재발견했다.

 

위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문구처럼 지식이 없다면 자신이 처해진 위치나 상황조차 파악할 수 없다. 글을 모른다는 것은 지식을 축척할 수 있는 방법이 어렵다는 것이고, 지식의 축척은 곧 지식이 없는 대상으로 하여금 우월한 위치에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따라서 지식은 권력으로 이어지고, 권력은 지식은 생산하는 것처럼, 만화의 기능은 지식이 없는 자에게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만화를 보고 그는 처음에 자신인지 모르지만, 그 만화를 보고 나서 뭔가 잘못된 점을 느끼고, 그 만화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가치로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만화가 예술적인 요소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삶을 하나의 시학(詩學)처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개연성 내지 필연성이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점이다. 하지만 생각하게 되는 것과 그 생각으로 인해 사회적 문제를 알게 된다면 그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억압하거나 은폐, 조작, 위조를 하려고 한 것이다. 한국에 대표적인 만화분서갱유는 유신체계에 대한 권력독재화의 산물이다. 만화가 자유로운 사고로서 그것을 제작하고 보는 이들은 매우 귀찮은 존재가 아닐 수가 없다. 따라서 만화의 검열과 제한된 이야기, 그리고 사유의 폭을 제공하는 만화를 억압함으로 만화문화는 그저 아이들이나 보는 단순한 오락물로 치부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1980년대로 오게 되면서 만화비평에 대한 도서도 나오고, 1990년대에는 신춘문예에서 만화비평도 하나의 비평가의 등단기회로 올라가게 되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만화비평으로 통해 정식으로 만화평론가로 등단할 수 있는 신춘문예에 만화부문은 빠져있다. 그렇지만 만화가 가진 이야기의 전달력은 신춘문예가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만화비평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만화비평의 맥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1990년 국내 최초로 공주대학교에서 만화학과가 창립되어 만화라는 것이 단순히 오락이 아니라 학문적 기능을 유지하며, 만화에 대한 평론가협회 내지 만화를 연구하는 만화학회를 창립하여 만화라는 것이 하나의 학문적, 예술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도 만들었다.

 

만화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만화가 지금처럼 하위문화로 간주된 게 아니라 만화가 차지하고 있던 한국사회의 여가생활에서 TV의 보급과 극장의 설립이 멀티미디어매체로 인해 만화가 한국 대중으로부터 저절로 멀어지게 되었다. 하위문화가 된 만화가 계속 대중문화와 그것을 이용하는 대중으로부터 저질문화로 인식되지 않기 위해서는 만화 그 자체에 대한 가치를 올릴 수밖에 없다. 만화비평은 처음에는 시대정신과 저항의식, 그리고 민주화 열기로서 발전해왔다. 하지만 만화라는 것도 역시 하위문화라고 해도 대중문화에 포함되므로, 만화가 보급되면서 만화라는 위치가 영화나 문학과 같이 예술성, 작품성을 인정받는 것이 사회적인 조건에서 유리하다는 점이다.

 

1980년대 만화비평가인 위기철의 글에서는 만화의 대중성을 결국 사회적으로 보급되면서 자본과의 관계를 제외할 수 없다. 그래서 위기철가 남긴 글로 “한 작품이 성실히 작가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상업성의 산물일 때 그 비평적 접근은 당연히 작품 생산의 동력이 되는 ‘상업성’을 주목할 수밖에 없게 되며, 또한 이 상업성이 비단 만화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일 때 비평의 접근방식은 당연히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보는 만화책, 최근 그 만화책의 토대가 되어가는 게임과 라이트노벨, 위의 이야기들로 만들어지는 애니메이션 역시 상업적인 요소가 반영되지 않을 수가 없다. 대중에 대한 상품적 가치로서 만화관련 콘텐츠는 사회구조적인 요소로 보지 않을 수가 없고, 대중에게 만화가 전달되는 것 역시 자본을 매개로 하기에 만화비평 역시 사회적인 구조와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단순히 보자면 작품적인 가치 높고 낮고를 떠나 어떤 작품에 대해 비평을 할 때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 기능과 정치적 현황 또한 사람들이 최근 가지고 있는 인식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점이다.

 

물론 만화 혹은 서브컬처로 같이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게임 등과 같은 부류는 그 역할과 기능을 인정받지 못한다. 현대사회에서 보이는 문제로는 대중문화는 획일적인 가치관을 강요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면 낯설게 되는 것이다. 만화비평이 모든 이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만화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다양한 문화의 공존성이다. 만화가 만화라는 부류에 갇히게 된다는 것은 결국 고립된 부류로 낙인찍히고, 당초 만화는 즐거움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의 교감이란 목적성 자체를 상실하게 되는 점이다.

 

예술이란 것은 정치적인 요소와 멀어져 보이겠으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처럼 인간의 사회적 동물, 곧 정치적 동물이다. 정치라는 것이 단순히 말하여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에 앉아있는 고위관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자유롭게 행동하고 생각하여 말할 수 있는 것조차 정치다. 아니라면 자신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조차 정치적이다. 그 정치성을 논하는 이유는 만화라는 것으로 통해 자신의 삶을 윤택하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것 역시 정치적인 논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무료로 보는 웹툰은 문제 삼지 않으면서 작가들과 출판사들의 수익을 거두게 하는 출판만화의 무관심 내지 편견은 어떻게 보면 만화를 즐기는 부류에게 큰 타격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만화비평이 필요한 점은 만화가 프랑스에서 제9의 예술이란 말처럼 그 예술적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결국 그것을 즐기는 부류가 스스로 앞장을 서야 하는 점이다. 프랑스 부르봉왕가에 대해 풍자를 날린 프랑스 화가 오노레 도미에는 먼저 그림을 그려 대중에게 알렸고, 대중들은 그 그림으로 통해 시대적 현황을 파악한다. 그리고 프랑스는 1848년 2월 혁명에서 영원히 군왕을 추방한다. 물론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가 대통령이 된 후 의회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혼란에 빠졌지만, 계속 저항을 하던 그들이 있었다. 근현대적으로 저항이 있는 곳에 풍자만화 내지 시사만화가 뒤따라오지 않을 수가 없다.

 

만화비평은 단순히 만화를 보고 비평을 남긴 것으로 만화비평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라면 그 자체에서 만평을 통한 비평일까? <한국만화비평의 쟁점>에서 다루고 있는 사안에서 기존에는 엘리트들이 만화비평문화를 이끌어왔다면 21세기 온라인 문화에서는 대중들이 만화비평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까지 단순한 리뷰 내지 감상에 머물러 있기에 그 작품에 대한 활발한 논의에서 깊이를 논하기는 어렵다. 대부분 소개된 만화비평가들 중 최근에 소개된 사람들은 만화작가 내지 대학교수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만화는 분명 하위문화인 서브컬처이다. 그렇기에 가장 밑자락에서 즐길 수 있다. 만화를 즐기는 점에서 단순히 보다는 개념에서 읽는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시도되어왔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문학평론가와 문학도 혹은 만화전문비평가 내지 교수들에 의해 주도된 점은 안타까운 점이다. 대중 스스로 만화비평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만화의 기능이 이제 만화만이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로 점차 번지기 때문이다. 만화는 대중문화이기도 하나 하위문화이기에 다양한 이야기와 소재들이 위로 떠오른다. 기존의 대중문화는 계속 대중의 대다수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같은 이야기와 소재를 반복한다.

 

따라서 새로운 전환점이나 가치관의 정립이 매우 어렵다. 만화라는 것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처럼 대규모의 자본과 인력이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 단독으로 할 수 있는 분야다. 작가의 개인적 특성을 반영하므로 어느 특정 개인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만의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는 점이다. 물론 한국의 만화작가를 보면 열악하다. 사회적 인식, 생계에 대한 부담, 그리고 이 어려운 여건 속에도 자신이 추구하는 열망, 실제 만화작가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쉬운 길을 택한 사람들이 아니다. 만화비평적인 요소에서 그들과 대화하면, 자신의 작품에 들어오는 의견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꼼꼼하게 평해주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만큼 자신이 만든 작품을 열심히 보고 생각했다는 점이 그리는 입장, 즉 이야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좋은 결과일 것이다. 만화비평은 만화문화의 저질성이란 인식개선에 큰 전환점도 되나, 작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만화비평은 단순한 리뷰쓰기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미학적 판단을 함으로써, 일반적인 문학과 영화를 보고 있다는 조건 아래 시작해야 한다. 영화나 문학이나 다 좋은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영화, 문학, 만화가 있고,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만화비평이 어려운 점은 이런 사회적 인식과 개인적 역량의 향상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만화를 그리는 것은 작가에게 이윤을 남기지만, 만화비평은 이윤이 오지 않은 것이 한계성이다.

 

대학교단이나 또는 문화관련 단체에 소속된 일부인사들을 제외하면 만화비평을 한다는 것은 순전히 개인의 취미생활로만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한국처럼 대중들에 의해 수행되는 비평문화가 거의 전무한 곳에서는 만화비평을 할 수 있는 자리는 매우 좁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만화를 좋아한다면 그 만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즐거움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의식주가 기본적으로 해결되어 남는 시간에 여가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가시간에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으나 만화만큼 짧은 시간에 즐거움을 주는 매체는 많지 않다.

 

우리 사회는 만화 내지 애니메이션이란 문화를 단순히 위해요소로 되거나 또는 아동이나 유아용으로 사용하려고 하며, 특히 교육자재로서 기능을 수행하려 한다. 만화작가와 만난 시간에서 많은 만화작가들이 교육자재에 필요한 그리는 것으로 수익을 본다고 한다. 물론 교육을 위한 교육자재에 만화를 그리는 것 역시 만화를 익숙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나, 만화작가가 본래 원하는 목적은 아니다. 결국 만화문화의 밝은 미래는 자유로운 창의성과 깊은 토론이 오갈 수 있는 문화정착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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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지음, 이용대 옮김 / 한겨레출판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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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미(Nemi)라는 아름다운 작은 호수가 있는 숲 속은 지금도 아름다운 풍경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예전에는 아주 무서운 일들이 벌어진 곳이었다. 그곳에는 칼을 든 남자가 커다란 나무 앞에서 아주 위협적인 행동을 주변의 적을 막고 있었다. 바로 그 나무는 황금가지가 달린 참나무고, 황금가지는 겨우살이라는 식물로 다른 나무에 기생하는 종이다.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바로 유럽과 인도, 조선과 일본, 심지어 러시아와 태평양 군도에 자리 잡힌 식민지에 있는 신화와 문화들을 수집하여 인류의 역사를 다시 말하고 있다.

 

본래 인류학이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오래 전의 문화 내지 혹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원시부족이나 원주민들만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인류학은 인류의 기원부터 시작하여 최근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인류학을 연구하게 되면 원시부족에 대한 연구부터 과거에 살았던 인류에 대해 상세한 연구를 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현대문명이란 과학기술에 의해 미개한 사회로부터 멀어졌을 것이다. 아마도 말이다.

 

우리는 도시화된 지구에서 거대한 주거시설과 산업시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나, 그렇게 된 시기도 얼마 되지도 않으며, 설사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우리 인류가 현재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지성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학문적인 영역에서 책으로 통해 얻어지는 지식은 또 다른 경험이며, 삶의 양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주어진 지식이란 자신이 살아온 시간적 축척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극히 단순하고 편협한 경험주의적인 요소는 인간 스스로를 착각과 편견에 빠지게 하는 마법약과 같다. 문제는 그 약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산하여 스스로 복용하고, 이제 그 마법약은 독약이 되어 상대방의 목을 조르고 눈을 가리게 하는 마약이 되기도 한다.

 

지식으로 통해 얻어지는 책의 가치에서 바로 우리가 알 수 없던 것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인류의 삶을 더 가치 있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읽는 것은 단순히 고대사회부터 시작하여 근대까지 있었던 원시부족과 미개 및 야만부족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설사 고대사회에 살았던 야만족이 존재하여 100년 전 인류가 그 야만족에 대해서도 분명 야만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우리는 100년 전이란 인간들과 현재 우리의 차이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인류는 현재 야만적이지 않은가? 아니면 우리는 언제나 지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모든 일에 대해 올바른 가치관으로서 풀어내는지 말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엄청난 오만과 편견, 그리고 치명적인 실수다. 인류의 잔혹하고 비윤리적인 범죄는 바로 그런 점을 망각하면서부터 시작이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영혼아래 숨겨진 원시적인 요소를 더듬어 찾음으로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황금가지>에 나오는 이야기는 현재 우리가 본다면 참으로 미개하고 야만적이며, 또한 어이 없는 이야기가 터질 것이다.

 

저자인 제임스 프레이저 역시 그런 점을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여기면 안 될 것이다. 그도 역시 많은 제보자와 기록을 찾으면 원시문화와 혹은 전통문화에 새겨진 과거의 미신을 찾아내어 기록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보니 <황금가지>에는 우리의 조상인 조선이란 국가를 나타내었다. 현재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나, 산모가 태아를 놓게 되면 3·7일이라 하여 즉 21일 동안 집 앞에 고추를 묶은 금줄을 치는 것을 볼 수 있다. 21일 동안 산모와 태아를 외부와 격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 역사 혹은 그 역사의 왜곡된 뿌리라고 볼 수 있는 신화에서도 볼 수 있다.

 

한국 시조라고 불리는 단군왕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의 아버지인 환웅천자는 배달국의 임금이기도 하나, 인간이 된 곰과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낳았다고 한다. 곰이었던 웅녀가 인간이 되기 위해 3·7일간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난 후에 인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전통신앙은 하늘을 조상으로 여기는 무속신앙으로서 샤머니즘, 그리고 곰을 숭배한 토테미즘이란 점에서 한국인의 역사는 곧 한국인의 신화와 더불어 존재한 것이다. 생각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4400년 전에 있었던 신화로서 제시된 역사적인 기록에서 웅녀가 인간이 되기 위한 날과 현재까지 민간신앙으로 전해오는 금줄의 관계에서 신화는 계속 그 민족의 역사와 삶에서 남은 것이다.

 

또한 신화적 특성, 또는 신이 되는 존재, 또는 토템의 대상인 동물과 식물, 하다못해 일상생활의 패턴조차 계속 이어져 온다. 우리는 왜 미신을 두고 유치하다고 여기면서 계속 이끌리는가? 그것은 인간이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이성과 지성에 의존하기보단 그 너머의 감각과 무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통적인 요소가 <황금가지> 내에서 자주 등장한다. 제일 놀란 부분은 일본 훗카이도에 거주하였던 아이누족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누족은 본래 몽골계통 부족으로, 처음 그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된 동기는 일본 애니메이션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에 의해서다.

 

<원령공주>에서 하나의 모티브로 설정된 것이 남자주인공으로서 그는 아이누족의 젊은 청년이면, 그가 입은 의상은 우리 한국이 조선이란 국가로 있을 때의 일본인들이 입은 의상과 전혀 다른 점이었다. 작품 내에서 조총이 나온 점을 두고 본다면 17세기 정도로 보이며, 아이누족의 청년은 당시 도쿠가와 막부시절의 의상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현재 일본 기모노는 당시 막부로부터 이어져 온 의상이란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활을 사용했으며, 부족은 아주 공평한 계급체계에 늙은 부족장이 부족을 이끌어가는 형태였다. 그런데 이 아이누족이 사실 곰을 신성한 존재로 여겼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곰은 신적인 대상이나 그들에게 곰은 아주 맛있고, 유용한 동물로서 죽임을 당하는 동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곰이란 존재를 토템적인 요소를 부여한 점에서 그들의 원류가 몽골족이란 점에서 토템적인 원형이 단군신화의 요소로 본다면 상당히 흥미 가는 부분이었다. 당시 단군신화에서 웅녀는 실제 곰이 아니라 곰을 토템으로 삼는 종족이고, 범은 곧 호랑이를 토템으로 삼는 부족이다. 문제는 곰과 호랑이는 다 무섭고 사나우며 사냥에 아주 능한 맹수다.

 

그들을 토템으로 설정한 것은 그들의 강함을 그대로 부족에게 이양하여 사냥을 잘 할 수 있도록 스스로 주술을 거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방법은 곰과 호랑이와 같은 맹수 어느 하나를 두고 자신과 같은 존재라 여기며, 그 맹수와 자신은 영혼을 나눈 사이로 볼 것인지, 아니라면 맹수를 잡아 그 맹수를 잡아먹음으로서 자신에게 맹수의 용맹성이 들어온 것처럼 여기는 것인지 또는 맹수 그 자체를 신처럼 받들어 인간 희생양을 보내어 인신공양을 하는 것인가에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만약 나에게 그런 선택을 한다면 1번이 가장 안전하고 합리적인 대안일 것이다. 인신공양이란 점은 누군가를 계속 희생해야 하며, 언젠가는 분명 한계점이 올 것이다. 한국의 설화 중에서 <심청전>을 보면, 심청은 인당수에 빠져 용왕에게 보내진 것으로서 인신공양을 합리화한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문화적 형태를 설화로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어린 소녀를 희생한 점에서 남성지배 이데올로기를 확고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용왕이야기처럼 바다마을이 있는 지역에서는 매년 일정기간이 되면 용왕제를 벌인다. 마을 어부들과 주민들이 모여 서로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노래와 춤을 추는 행사는 만선의 기원을 바라는 주술적 행사다.

 

우리가 유치하고 미개한 행동이나, 아직까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분명 존재하고 있는 행사이고, 앞으로도 열릴 행사다. 해양환경으로 판단할 경우 바다의 수온과 COD, pH, 각종 중금속을 통한 화학적 요건, 조석과 조위 같은 물리적 요건, 플랑크톤에 의해 적조발생 등과 같은 생물학적 요건들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 분명 생선은 계절적으로 영향을 받아 어장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만선을 기원하면 풍어를 바라며 용왕제를 열고, 무당을 부르고 춤판을 연다. 미신으로 가득하나 현재 굿을 할 수 있는 일부 무속인들은 무형문화제로 남고, 또한 그런 굿판이나 각종 전통행사 역시 무형문화제로 등록되기 시작한다.

 

정말 미개한 것들이 이제는 하나의 문화적 유산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의 무의식에서 자리 잡은 신화와 민담,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들의 드러나지 않은 언어로서 드러나는 점이다. <황금가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가령 위에서 아이누족은 곰을 잡는 것에서 토템이 되는 동물을 다른 민족과 부족들이 잡는다는 점이다. 단지 조금 아쉬운 점은 이 책은 유물론적인 요소를 상당히 배제한 느낌이 강하다. 문화인류학에서 <문화유물론>의 저자이기도 한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적인 관점에서는 그 문화적 행사나 각종 의례가 단순히 미개부족의 믿음이 아니라 그들 나름대로의 환경과 경제적 조건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구조주의 창시자이면서도 인류학의 거두인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의 책을 보면 원시부족이 우리로서 이해하지 못하는 괴상한 행동이 그들 나름대로의 과학적인 행위이며, 그 무의미하게 보이는 행동 그 자체가 언어적인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황금가지>의 주요 대상이 되는 부족들은 농경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고, 그 농경문화에서 계절적인 변화가 결국 신이란 존재를 관념 속으로 만든다든 점이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봄-여름-가을-겨울의 흐름에서 봄은 모든 생명을 열게 하고, 여름은 그 생명이 가장 성장하며, 가을은 생명을 수확하며, 겨울은 생명이 모두 잠을 자게 된다.

 

그 계절적 변화가 바로 자연의 이치를 하나의 신으로서 만드는 것이다. 계절의 신을 어느 관념적 존재에게 부여하고, 그가 바로 인간과 같은 이름과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신은 포도주의 신인 디오니소스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인간의 여자에서 태어난 반신으로서 그는 사지가 모두 분해된 채로 죽지만, 다시 태어난다.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부활에서 죽음은 겨울은 가리키고, 탄생은 봄을 가리킨다. 결국 죽음이 있어야 생명이란 이름의 봄이 오는 것이다. 신의 죽음과 부활 혹은 탄생에서 판단해보면 분명 신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에게 보인다고 믿으며, 그 믿음은 바로 꿈과 몽상 또는 간질에서 나오는 환상이다.

 

꿈은 인간이 수면 중에 꾸는 생리적 현상이다. 그러나 고대 사회의 사람에게 꿈은 예지며 하나의 계시다. 꿈이 곧 인간의 무의식적인 요소로 통해 인간에게 보여주는 현상이듯이 그들은 그런 무의식에 존재하는 인간, 많은 인간들이 공유하는 그 무의식으로 신을 만든 것이다. 신화란 그 사회집단 인간들이 가진 집단적인 무의식 내지 공통성이란 말처럼 오히려 그 신화적인 이야기가 하나의 과학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 자신들만의 과학성에서 미개함을 넘어 폭력적인 야만이 존재했다. 신은 절대 죽지 않아야 하므로 그 신을 대신할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 대상은 동물일 수도 있고, 인간일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들이 여기는 신의 존재에 가장 가까운 존재로 여기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 동물과 식물이 될 수 있고, 심지어 인간이 공작해 놓은 도구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만큼 가장 신에 부합한 존재는 없으며, 오히려 인간이기에 다른 인간들에게 신의 계시 내지 집행 그리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설사 동물을 신으로 모시거나 희생양으로 올려도 결국 그 결과적 판단은 인간이 한다. <황금가지>에선 바로 네미숲속의 사제의 죽음부터 시작하여 각종 인간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가장 잔인하고도 야만적인 죽음은 후반에 나오는 북유럽 쪽의 사형이었다.

 

중범죄를 저지른 죄인과 전쟁에 사로잡은 포로를 식물줄기로 만든 거대한 동물인형에 넣어 거기에 각종 가축과 동물을 같이 들어가게 한 후 불로 태우는 것이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상황에서 죽음으로부터 절규하는 동물들과 사람들은 서로 비명을 지르고, 동물들은 다른 동물과 사람들을 할퀴며 뒤엉키며 죽어간다. 이 잔혹한 행위에 두고 <황금가지>에서는 그들의 주술적 행위로 보겠지만, 문화유물론적인 요소로 본다면 식량을 포로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아깝거나(부족하거나) 또는 그런 식으로 사형을 처하게 하여 상대부족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줄 수 있는 경제적인 방법이다. 만약 그 불길에 타버린 불쌍한 영혼의 육체를 식사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만약 식사용으로 한다면 2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이다.

 

식물식량의 절약과 단백질의 보충, 물론 이런 식의 논리는 너무 잔혹하거나 억지스러운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아즈텍 문명의 심장 가르기는 분명한 처사를 보여준다. 인류학 도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시대나 그 지역의 기온과 습도, 강우량과 식생조건이다. 게다가 지형과 지질적 요소는 인간에게 적합한 생활이 될 수 있는지 또는 곡식을 재배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서는 가정에서 기르는 가축 그리고 들판이나 숲에 있는 야생동물은 얼마나 존재하는가? 남미의 국가는 대부분 높은 지대이며, 사나운 맹수는 잘 없었으며, 주로 토끼나 쥐 같은 작은 동물이 많았다. 그리고 옥수수 재배에서 옥수수신에 대한 경배는 식물이 아니라 인간을 희생한다는 점도 이상하다.

 

옥수수의 신은 식물의 신이지 동물의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포로를 죽이거나 혹은 희생양을 지정된 슬픈 인간이든지 그의 죽음으로 옥수수의 신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차라리 옥수수를 위해서라면 들판의 옥수수가 물의 흐름이 잘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 수로정비나 밭에 거름을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다고 죽은 인간의 시체를 잘게 부수어 토질을 비옥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 인간의 심장을 꺼내어 신상에 바치고, 목을 베어 그 인간의 고기를 모두 나누어 먹는다. 1년 중에 자연사하는 인간보다 제의로 통해 죽는 인간의 수가 많다는 점은 결국 제의는 경제적, 환경적 조건이 따르는 점이다.

 

많은 인구를 가진 왕국에서 옥수수와 같은 탄수화물 섭취는 단백질의 보충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살인은 어떻게든 합법적으로 이성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신이란 이름은 어떠한가? 모든 죽음은 합법적이지 않으나 유독 영화나 소설에서는 이런 죽음을 정당화 시키는 방법이 있다. “신과 정의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희생은 그 어떤 부조리에서도 정당하다. 신이 곧 정의이기에 정의라는 이름 역시 그런 폭력적인 희생을 무마시킨다. 아니 그 죽음을 당하야 하는 희생양조차도 오랫동안 준비된 존재이기에 자신들의 희생은 아주 기쁘고 위대하며 좋은 것으로 인지되도록 교육시킨다.

 

<황금가지>에서는 바로 저 죽음을 두고 영원한 생명, 풍요로운 삶의 혜택을 위해 의식을 치룬 것으로 보나, 그것으로 인해 얻어지는 이익은 자세히 연구하거나 판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각 문화와 국가, 그리고 민족과 원시사회의 신화를 연구하고 떨어진 국가라도 그 연접한 곳에 있는 지역이라면 뭔가 유사함 요소를 발견한다. 이름은 다르나 신의 역할과 신이 처해진 운명, 그리고 그 신을 받드는 인간의 생활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그 미개하거나 또는 야만스러운 행동은 단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교나 가톨릭과 같은 큰 종교에서도 발견되는 점이다.

 

이해가지 않을 수 있겠지만, 한국은 삼국시대에 불교를 받아들이며 대승불교국가로서 그 문화적 유산을 이어져 온다. 본래 인도에서 불교는 소승불교로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며, 한국에서는 삼국시대역사와 고려시대처럼 국가통치이념으로서 불교를 영입한다. 그러면서 점차 민간에 퍼지면서 불교가 한국의 대표종교로 부상하나, 그 속에 분명히 민속 문화와 무속신앙이 잠자고 있다. 불교에서 백중에 방생하는 행사는 분명 오리지널인 인도종교에 없는 점이고, 죽은 자에 대한 49제나 100일제 역시 없다. 오히려 그런 요소는 무속신앙에서 전해져 온 것을 불교에서 흡수한 것이다.

 

가톨릭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가령 추수를 하는데, 마지막 추수를 하는 사람을 두고 곡식어머니로 치부하여 놀림거리나 각종 행사의 대상으로 삼을 이유는 없다. 이런 행위는 가톨릭문화가 자리 잡은 지역에서 일어나고, 심지어 교회 앞 광장에서 그런 행사를 계속 한다. <황금가지>에서 초기 가톨릭은 기존의 민속 종교와 경쟁해야겠지만, 그들을 흡수하게 되면서 문화적 제의가 다르게 된 것이다. 글을 적는 지금이 2014년 8월 17일로서 한국에 가톨릭의 최고 수장이신 교황님이 방문했다.

 

한국에 와서 한국 천주교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123인에 대해 시복식을 내리는 가운데, 본래 윤지충이란 사람은 1791년 진산에서 어머니가 죽었는데, 그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워 역적이 되어 참수당한 사람이다. 본래 가톨릭에서 마테오리치가 중국에 오면서 중국에 신앙을 퍼뜨리기 위해 god이란 신을 동양권의 천주로 대체하여 문화적 차이를 줄이려 했다. 하지만 당시 신해박해가 있던 시기에 교황청에서는 그런 동양의 문화를 일체 하지 못하게 했으며, 그것에 대한 사건이 성호학파 선비의 죽음이다. 지금이야 다시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조치했지만, 유럽에서는 신에게 두 무릎을 꿇어도 군주에게 한 쪽만 꿇는다.

 

문화적 차이와 종교적 관념, 그리고 그 시대적 조건이 비극적인 역사가 탄생하는 점이다. 물론 당시 윤지충의 죽음은 천주교의 신앙심도 있었지만, 그가 정조 시대에 노론과 대립하던 남인 세력이었고, 그의 조상은 남인의 영수이며, 거두였다. 그의 죽음에는 신앙심이란 계기가 있지만, 당시 정치적(경제적) 이익에 따라 처형된 역사적 사건이다. 정조 이야기가 나와 그러나 <황금가지>에선 정조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몸에 종기가 생겨 치료를 받아야 했으나, 종기가 결국 치료되지 않아 죽고 만다. 임금의 몸은 일반 인간의 몸이 아니고, 신성하기에 함부로 만질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이전의 다른 조선임금들도 종기가 날 경우 의원을 불렀고, 침술로 통해 종기를 치료했을 것이나, 정조는 그렇게 하지 않은 점에서 의아한 점은 많다. <황금가지>의 한계점은 단지 신성한 것과 그 신성함에 대한 인간들의 이야기만 초점을 맞추었지, 그것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와 판단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래도 이 책이 계속 유효한 이유는 4가지 편에서 숲의 왕, 신의 살해, 속죄양, 황금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속죄양이 아직도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제의라는 것은 누군가를 희생하여 그 희생에 따라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기 마련이다. 이성적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데도 계속 억지로 약자를 희생시키는 그 야만은 아직도 사회 저편의 문젯거리로 등장한다.

 

주술에서도 주술은 분명 이로운 것도 있으나 남을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도 있다. 21세기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미디어가 각종 TV 및 인터넷, 신문잡지 등으로 퍼진 공간에서는 사실 있지도 않은 거짓은 사실로 만들거나 사실조차 은폐하거나 왜곡한다. 주술은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여기므로, 언론과 주술이 무엇이 다른가? 주술로서 희생양을 만들고, 그 희생양이 조직과 사회의 불온요소 만들어 광적으로 변하는 인간들을 보면 <황금가지>는 21세기에 도저히 유효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단지 아쉬운 것은 네미(Nemi)의 숲속에 있는 왕 대신 우리는 죄도 없거나 무관한 사람이 희생된다. 물론 <황금가지>에서 인신공양 되던 인간을 보면 죄 없는 인간이 많다는 점이었다.

 

죽음과 부활에서, 희생양이 죽으면 그에 해당되는 신은 계속 죽지 않고 새로운 생명으로 영원히 젊음을 누려 그 사회집단의 인간들에게 계속 혜택을 준다고 한다. 우리는 가상의 세계로서 사람들을 기록하여 죽지 않게 한다. 물론 육체적 존재는 죽어도 그의 잔상이 남는 이미지는 계속 남아 그의 육체적인 죽음에서 사회적인 삶으로 부활하고 있다. 특히 역사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킨 자나 혹은 큰 역할을 기여한 자들도 현대인들의 생활에서 부활한다. 안 그러면 우리는 죽은 자의 이름에 사로잡혀 갈등하는 현실을 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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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화사 1 - Novel Engine POP
정연 지음, R.알니람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우연인지 아니면 인연인지 모르지만, 내가 읽어본 <유랑화사>를 읽는 순간, 이 책을 읽기 전에 읽고 있던 책과 뭔가 연계성이 있어서 놀라웠다. 그 책은 제임스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라는 책이다. <황금가지>는 네미(Nemi)라고 하는 숲 속에 호수가 있는 곳으로 아주 황홀한 풍경을 내뿜는 전설 같은 장소다.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곳에 어느 미친 남자가 칼을 들고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외치고 있다. 왕인 그는 신이면서도 또한 희생양이기도 하다. <황금가지>라는 책을 반 정도 읽을 쯤에 인류의 문화에 대해 조금씩 맛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왜 <황금가지>와 <유랑화사>를 같이 나는 다루는가?


기본적으로 <황금가지>는 인류학 관련도서이고, <유랑화사>는 노블엔진에서 만든 pop으로 만든 라이트노벨이다. 하지만 라이트노벨로만 보기에 어려운 이유는 pop이란 것은 popular, 즉 대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 <유랑화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내내 컬러 이미지는 표지 일러스트와 책갈피 정도였다. 겉은 환상 세계를 안내하는 라이트노벨인 것처럼 보여도 속은 완전히 소설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일반 대중들이 읽을 수 있는 소설로 말이다. 내가 소설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소설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문자서사로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나, 그 이야기가 전혀 색 다른 세계가 아니라 지금 우리 한국인과 한국의 문화를 말하는 것과 같다.


예전에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을 읽으면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서사에서 서사의 가장 머리는 신화(神話)다. 신화는 신의 이야기라고 하나, 신은 정말 종교학이나 형이상학에서 다루는 신이란 존재보단 인간의 집단적 무의식에서 드러난 인간의 집단무의식이다. 신화라는 것은 인간이 가진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으로 통해 나오는 게 아니라 다른 존재로서 나오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일상이나 혹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런 대사를 볼 수 있다. “있잖아! 이것 비밀인데, 이 이야기는 내 친구의 친구의 이야기야. 그래서 이 친구에게 어떤 일이 있었냐면...”


신화의 이야기는 바로 저렇게 인간이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론 자신이 드러낼 수 없는 이야기도 있으며, 그 사회의 사람들이 모두 생각하는 이야기도 드러낸다. 신화라는 것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보단 왜곡되거나 은폐되거나 새로이 탄생하기도 한다. 신화라는 것은 과거의 이야기만은 아니고, 지금도 신화는 이루어지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가진 신화적인 이야기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모습을 따라간다. 그런 점에서 <황금가지>라는 아주 무서운 살인 이야기가 실린 인류학 도서를 꺼내는 이유는 <황금가지>는 인류학이란 영역이 결국 신화와 경계로 마주보고 있다는 점이다.


신화는 미신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인류학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풀어간다. <황금가지>를 읽은 상태에서 <유랑화사>에 대해 딱하고 느낌이 오는 것은 바로 주술이란 점이다. 인간의 언어에 대해 논하자면, 인간의 언어는 주술성을 가지고 있고, 언어로서 나오는 글과 말은 상당한 힘이 있다는 점이다. 아니 과학적으로 내가 어느 사람에 대해 “재수 없으니 제발 없어주면 좋겠어!”라고 외쳐도 실제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위해는 없다. 하지만 <유랑화사>에서는 그런 일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로 지어내어 있고, <황금가지>에서도 그런 내용이 드러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런 주술이,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행위가 실제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가령 어느 부족에서 터부(금지)되는 행위 중에서 사람이 걸어간 자리에 새겨진 발자국에 칼을 찌르거나 혹은 불길한 주술을 외치면 정말 그 사람에게 불길한 일이 닥치고, 어느 부족에서 터부시 되는 일을 겪으면 실제 그 터부에 접촉된 사람이 죽게 되는 경우도 있다. <유랑화사> 1권에 제4회에 해당되는 목각인형은 완벽한 주술의 세계였다. 그래서 <황금가지>를 읽는 동안, 그런 인류의 역사 중에서 미신에 대해 집착하는 인간은 비단 그 시대만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다.


왜냐하면 당시는 주문과 같은 주술이라면 지금은 유희적으로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유희적인 주문이라도 아직도 그것은 주술적인 힘을 발휘한다. 작가의 글에서는 전통문화 요소를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 살아있는 그 모든 것 혹은 살아있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신성성, 다소 애니미즘(Animism)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애니미즘은 눈앞에 존재하는 어떤 사물에 대해 생명이 있다고 여기는 원시종교 형태다. 애니미즘이 아주 원시적이고 미개하다면 곤란하다.


애니메이션 즉, Animation이란 단어에서 Anima는 영혼, Animate는 영혼을 만들어낸다는 의미다. 살아있지 않은 것에 대해 살아있는 것은 결국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믿음이고, 그것은 환상이란 영역으로 이어진다. 환상이 비현실적이지만, 결코 비현실이 아닌 이유는 환상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평소 드러나지 않은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시나 문학, 그림조차 그렇다. 무의식적으로 잠재된 집단적인 심리나 혹은 개인적으로 억압된 심리조차 드러난다.

<유랑화사>는 그런 환상 내지 미궁 속에 가려진 왜곡된 진실은 그림으로 통해 그것도 환상의 세계로 통해 보여준다.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 존재하지 않은 자, 신령과 도깨비, 어떤 사건을 마치 조감도를 보듯이 그려내기도 한다. 공중에서 항공기나 인공위성도 없는데, 어떻게 그 상황을 정확하게 찾아날까? 인간의 내면에 가려진 이야기를 그림으로 환상적 공간을 연출한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인간은 이야기를 듣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스토리텔링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이 이야기를 만들며 이야기할 때 인간은 그 이야기를 미리 생각하여 만드는 것보다 이야기하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유랑화사>에서 보이는 이야기의 모티프는 바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생각한 게 아니라 후기를 보듯이 작가가 이야기를 보거나 들을 것을 자신이 이야기하기 위해 새롭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전혀 낯설지 않은 이유는 소재 자체가 우리 전래동화(전설 속의 신화나 민담이 변형된 경우가 대부분)나 전설 속에 찾을 수 있는 이야기다. 인간이 아닌 여우가 인간으로 둔갑하는 것이나, 처녀귀신이 가진 잊을 수 없는 사랑이야기, 남을 위해를 가하는 인간, 심지어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까지도 말이다. 물론 인간을 잡아먹는 식인문화는 인류학에서 그렇게 낯선 일도 아니고, 20세기까지 있었던 일이다.

 

그런 점에서 <유랑화사>는 이미 오랜 전부터 있던 이야기를 현대적인 관점으로 다시 그 시대의 배경을 맞추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에서 대감이나 진사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며,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무당이나 무당을 사투리로 말하는 당골네가 등장한 것처럼, 문장에서 단어의 선택에서 한글의 고유명사를 등장시킬 정도 민담과 무속문화에 대해 깊이 보여주었다. 굿을 하는 무당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무속신앙에서 무(巫)라는 단어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그 중간 매개체에 인간이 있다. 즉 무당이란 존재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세상을 연결지어주는 매개체다.


위에서 말하던 <황금가지>에서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무참히 칼에 찔려 죽어야 하는 어느 늙은 남자의 행보는 바로 무속(巫俗) 문화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신은 눈앞에서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들은 존재한다고 여기고, 눈에 보이지 신의 존재를 있다고 만들기 위해서는 신의 대리인으로서 인간을 내세운다. 인간에게 신과 사제 그리고 왕이란 이름을 내리면서 중요한 특성은 농경문화다. 봄이 되면 푸른 새싹이 돋고, 여름에 무성한 숲을 이루어 가을에는 수확을 하나, 겨울에는 모든 것이 죽음에 이른다.


겨울에 이르는 죽음은 결국 우리 모두의 죽음이고, 신은 영원불멸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여 새롭게 태어나기에 그 죽음을 대체하기 위해 인간의 살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아니라면 왜 단군신화에서 왜 단군은 하늘의 자손이고, 그는 단군왕검으로 불려야 하는 것인가? 단군왕검은 결국 제사장과 군주의 2가지를 합한 것이다. 고대국가는 왕이 곧 신인 것이다. 왕과 제사장이 분리되면서 제사장의 역할을 무당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무당의 업무는 <유랑화사>에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들어주는 것이라 한다.


그 말은 인간은 누군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점이다. 그러나 망자 내지 혹은 보통 인간들 안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구할 수 없다. 오로지 가능한 것은 광인만이 새로운 이야기나 혹은 세계의 새로운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독일 철학가인 니체는 현대철학에 매우 중요한 철학가이나, 그는 기본적으로 광인이었고, 광인이었기에 그런 저서를 남겼다. <황금가지>를 읽은 후에 <비극의 탄생>을 읽어본다면 느낄 수 있다. 위대하고 자애로운 디오니소스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가진 신이고, 포도주는 인간을 기쁘게 만들지만 인간을 미치게 만든다.


<비극의 탄생>처럼 고대 그리스는 거의 모든 인간이 시인이고 광인의 기질이 있었다면 이제 그 광인은 현대에 오면서 없어지게 된다. 즉 광인들이란 새로운 이야기와 혹은 기존 우리가 보지 못한 세상을 노래한다. <유랑화사>를 보면 세상을 이리저리 왕래하는 화사는 겉으로 보면 세상의 이치를 원래로 복구해주는 존재이나, 그를 두고 정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를 광인으로 보는 것이 맞다. 작가는 화사로 통해 이야기를 진행하나, 화사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고,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을 보여줄 수 있게 해준다.

 

광인이기에 작품 내에서 무당들이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을 그는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소설이지만, 소설이라도 한국의 구비문학 요소를 현대적으로 다시 되살린 작품이다. 인간인데 귀신이나 신의 이야기를 못 듣는 무당이란 점은, 신의 이야기란 결국 인간의 내면에 갇혀 있는 억압된 심리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화사는 바로 인간이 드러내지 못한 이야기를 계속 찾아다닌다. 물론 시대배경이 조선시대고, 비현실적인 존재가 등장해도 그 이야기의 중심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보통 우리 같은 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할 이야기다.

 

한국의 민담에는 치명적인 법칙이 존재한다. 그것은 권선징악이란 단순한 진리이다. <유랑화사>에서는 재물에 대한 탐욕에 대해 4가지 이야기 중에 반을 차지하며, 그 모티프가 작용하여 배나무 꽃 같은 여우소녀가 화사와 여행하게 된 동기다. 여우소녀는 인간의 존재에서는 괴이한 존재다. 괴이한 존재가 괴이한 사건을 맞이하면서 풀어가는 이야기는 민담의 기본적으로 적용되는 권선징악 이외에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찾아가기도 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면에 담겨진 것이 있다. 바로 억압, 은폐, 왜곡이란 신화란 바로 거기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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