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화사 1 - Novel Engine POP
정연 지음, R.알니람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우연인지 아니면 인연인지 모르지만, 내가 읽어본 <유랑화사>를 읽는 순간, 이 책을 읽기 전에 읽고 있던 책과 뭔가 연계성이 있어서 놀라웠다. 그 책은 제임스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라는 책이다. <황금가지>는 네미(Nemi)라고 하는 숲 속에 호수가 있는 곳으로 아주 황홀한 풍경을 내뿜는 전설 같은 장소다.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곳에 어느 미친 남자가 칼을 들고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외치고 있다. 왕인 그는 신이면서도 또한 희생양이기도 하다. <황금가지>라는 책을 반 정도 읽을 쯤에 인류의 문화에 대해 조금씩 맛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왜 <황금가지>와 <유랑화사>를 같이 나는 다루는가?


기본적으로 <황금가지>는 인류학 관련도서이고, <유랑화사>는 노블엔진에서 만든 pop으로 만든 라이트노벨이다. 하지만 라이트노벨로만 보기에 어려운 이유는 pop이란 것은 popular, 즉 대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 <유랑화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내내 컬러 이미지는 표지 일러스트와 책갈피 정도였다. 겉은 환상 세계를 안내하는 라이트노벨인 것처럼 보여도 속은 완전히 소설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일반 대중들이 읽을 수 있는 소설로 말이다. 내가 소설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소설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문자서사로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나, 그 이야기가 전혀 색 다른 세계가 아니라 지금 우리 한국인과 한국의 문화를 말하는 것과 같다.


예전에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을 읽으면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서사에서 서사의 가장 머리는 신화(神話)다. 신화는 신의 이야기라고 하나, 신은 정말 종교학이나 형이상학에서 다루는 신이란 존재보단 인간의 집단적 무의식에서 드러난 인간의 집단무의식이다. 신화라는 것은 인간이 가진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으로 통해 나오는 게 아니라 다른 존재로서 나오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일상이나 혹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런 대사를 볼 수 있다. “있잖아! 이것 비밀인데, 이 이야기는 내 친구의 친구의 이야기야. 그래서 이 친구에게 어떤 일이 있었냐면...”


신화의 이야기는 바로 저렇게 인간이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론 자신이 드러낼 수 없는 이야기도 있으며, 그 사회의 사람들이 모두 생각하는 이야기도 드러낸다. 신화라는 것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보단 왜곡되거나 은폐되거나 새로이 탄생하기도 한다. 신화라는 것은 과거의 이야기만은 아니고, 지금도 신화는 이루어지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가진 신화적인 이야기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모습을 따라간다. 그런 점에서 <황금가지>라는 아주 무서운 살인 이야기가 실린 인류학 도서를 꺼내는 이유는 <황금가지>는 인류학이란 영역이 결국 신화와 경계로 마주보고 있다는 점이다.


신화는 미신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인류학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풀어간다. <황금가지>를 읽은 상태에서 <유랑화사>에 대해 딱하고 느낌이 오는 것은 바로 주술이란 점이다. 인간의 언어에 대해 논하자면, 인간의 언어는 주술성을 가지고 있고, 언어로서 나오는 글과 말은 상당한 힘이 있다는 점이다. 아니 과학적으로 내가 어느 사람에 대해 “재수 없으니 제발 없어주면 좋겠어!”라고 외쳐도 실제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위해는 없다. 하지만 <유랑화사>에서는 그런 일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로 지어내어 있고, <황금가지>에서도 그런 내용이 드러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런 주술이,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행위가 실제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가령 어느 부족에서 터부(금지)되는 행위 중에서 사람이 걸어간 자리에 새겨진 발자국에 칼을 찌르거나 혹은 불길한 주술을 외치면 정말 그 사람에게 불길한 일이 닥치고, 어느 부족에서 터부시 되는 일을 겪으면 실제 그 터부에 접촉된 사람이 죽게 되는 경우도 있다. <유랑화사> 1권에 제4회에 해당되는 목각인형은 완벽한 주술의 세계였다. 그래서 <황금가지>를 읽는 동안, 그런 인류의 역사 중에서 미신에 대해 집착하는 인간은 비단 그 시대만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다.


왜냐하면 당시는 주문과 같은 주술이라면 지금은 유희적으로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유희적인 주문이라도 아직도 그것은 주술적인 힘을 발휘한다. 작가의 글에서는 전통문화 요소를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 살아있는 그 모든 것 혹은 살아있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신성성, 다소 애니미즘(Animism)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애니미즘은 눈앞에 존재하는 어떤 사물에 대해 생명이 있다고 여기는 원시종교 형태다. 애니미즘이 아주 원시적이고 미개하다면 곤란하다.


애니메이션 즉, Animation이란 단어에서 Anima는 영혼, Animate는 영혼을 만들어낸다는 의미다. 살아있지 않은 것에 대해 살아있는 것은 결국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믿음이고, 그것은 환상이란 영역으로 이어진다. 환상이 비현실적이지만, 결코 비현실이 아닌 이유는 환상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평소 드러나지 않은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시나 문학, 그림조차 그렇다. 무의식적으로 잠재된 집단적인 심리나 혹은 개인적으로 억압된 심리조차 드러난다.

<유랑화사>는 그런 환상 내지 미궁 속에 가려진 왜곡된 진실은 그림으로 통해 그것도 환상의 세계로 통해 보여준다.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 존재하지 않은 자, 신령과 도깨비, 어떤 사건을 마치 조감도를 보듯이 그려내기도 한다. 공중에서 항공기나 인공위성도 없는데, 어떻게 그 상황을 정확하게 찾아날까? 인간의 내면에 가려진 이야기를 그림으로 환상적 공간을 연출한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인간은 이야기를 듣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스토리텔링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이 이야기를 만들며 이야기할 때 인간은 그 이야기를 미리 생각하여 만드는 것보다 이야기하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유랑화사>에서 보이는 이야기의 모티프는 바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생각한 게 아니라 후기를 보듯이 작가가 이야기를 보거나 들을 것을 자신이 이야기하기 위해 새롭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전혀 낯설지 않은 이유는 소재 자체가 우리 전래동화(전설 속의 신화나 민담이 변형된 경우가 대부분)나 전설 속에 찾을 수 있는 이야기다. 인간이 아닌 여우가 인간으로 둔갑하는 것이나, 처녀귀신이 가진 잊을 수 없는 사랑이야기, 남을 위해를 가하는 인간, 심지어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까지도 말이다. 물론 인간을 잡아먹는 식인문화는 인류학에서 그렇게 낯선 일도 아니고, 20세기까지 있었던 일이다.

 

그런 점에서 <유랑화사>는 이미 오랜 전부터 있던 이야기를 현대적인 관점으로 다시 그 시대의 배경을 맞추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에서 대감이나 진사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며,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무당이나 무당을 사투리로 말하는 당골네가 등장한 것처럼, 문장에서 단어의 선택에서 한글의 고유명사를 등장시킬 정도 민담과 무속문화에 대해 깊이 보여주었다. 굿을 하는 무당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무속신앙에서 무(巫)라는 단어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그 중간 매개체에 인간이 있다. 즉 무당이란 존재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세상을 연결지어주는 매개체다.


위에서 말하던 <황금가지>에서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무참히 칼에 찔려 죽어야 하는 어느 늙은 남자의 행보는 바로 무속(巫俗) 문화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신은 눈앞에서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들은 존재한다고 여기고, 눈에 보이지 신의 존재를 있다고 만들기 위해서는 신의 대리인으로서 인간을 내세운다. 인간에게 신과 사제 그리고 왕이란 이름을 내리면서 중요한 특성은 농경문화다. 봄이 되면 푸른 새싹이 돋고, 여름에 무성한 숲을 이루어 가을에는 수확을 하나, 겨울에는 모든 것이 죽음에 이른다.


겨울에 이르는 죽음은 결국 우리 모두의 죽음이고, 신은 영원불멸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여 새롭게 태어나기에 그 죽음을 대체하기 위해 인간의 살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아니라면 왜 단군신화에서 왜 단군은 하늘의 자손이고, 그는 단군왕검으로 불려야 하는 것인가? 단군왕검은 결국 제사장과 군주의 2가지를 합한 것이다. 고대국가는 왕이 곧 신인 것이다. 왕과 제사장이 분리되면서 제사장의 역할을 무당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무당의 업무는 <유랑화사>에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들어주는 것이라 한다.


그 말은 인간은 누군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점이다. 그러나 망자 내지 혹은 보통 인간들 안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구할 수 없다. 오로지 가능한 것은 광인만이 새로운 이야기나 혹은 세계의 새로운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독일 철학가인 니체는 현대철학에 매우 중요한 철학가이나, 그는 기본적으로 광인이었고, 광인이었기에 그런 저서를 남겼다. <황금가지>를 읽은 후에 <비극의 탄생>을 읽어본다면 느낄 수 있다. 위대하고 자애로운 디오니소스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가진 신이고, 포도주는 인간을 기쁘게 만들지만 인간을 미치게 만든다.


<비극의 탄생>처럼 고대 그리스는 거의 모든 인간이 시인이고 광인의 기질이 있었다면 이제 그 광인은 현대에 오면서 없어지게 된다. 즉 광인들이란 새로운 이야기와 혹은 기존 우리가 보지 못한 세상을 노래한다. <유랑화사>를 보면 세상을 이리저리 왕래하는 화사는 겉으로 보면 세상의 이치를 원래로 복구해주는 존재이나, 그를 두고 정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를 광인으로 보는 것이 맞다. 작가는 화사로 통해 이야기를 진행하나, 화사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고,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을 보여줄 수 있게 해준다.

 

광인이기에 작품 내에서 무당들이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을 그는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소설이지만, 소설이라도 한국의 구비문학 요소를 현대적으로 다시 되살린 작품이다. 인간인데 귀신이나 신의 이야기를 못 듣는 무당이란 점은, 신의 이야기란 결국 인간의 내면에 갇혀 있는 억압된 심리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화사는 바로 인간이 드러내지 못한 이야기를 계속 찾아다닌다. 물론 시대배경이 조선시대고, 비현실적인 존재가 등장해도 그 이야기의 중심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보통 우리 같은 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할 이야기다.

 

한국의 민담에는 치명적인 법칙이 존재한다. 그것은 권선징악이란 단순한 진리이다. <유랑화사>에서는 재물에 대한 탐욕에 대해 4가지 이야기 중에 반을 차지하며, 그 모티프가 작용하여 배나무 꽃 같은 여우소녀가 화사와 여행하게 된 동기다. 여우소녀는 인간의 존재에서는 괴이한 존재다. 괴이한 존재가 괴이한 사건을 맞이하면서 풀어가는 이야기는 민담의 기본적으로 적용되는 권선징악 이외에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찾아가기도 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면에 담겨진 것이 있다. 바로 억압, 은폐, 왜곡이란 신화란 바로 거기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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