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지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지음, 이용대 옮김 / 한겨레출판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미(Nemi)라는 아름다운 작은 호수가 있는 숲 속은 지금도 아름다운 풍경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예전에는 아주 무서운 일들이 벌어진 곳이었다. 그곳에는 칼을 든 남자가 커다란 나무 앞에서 아주 위협적인 행동을 주변의 적을 막고 있었다. 바로 그 나무는 황금가지가 달린 참나무고, 황금가지는 겨우살이라는 식물로 다른 나무에 기생하는 종이다.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바로 유럽과 인도, 조선과 일본, 심지어 러시아와 태평양 군도에 자리 잡힌 식민지에 있는 신화와 문화들을 수집하여 인류의 역사를 다시 말하고 있다.

 

본래 인류학이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오래 전의 문화 내지 혹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원시부족이나 원주민들만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인류학은 인류의 기원부터 시작하여 최근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인류학을 연구하게 되면 원시부족에 대한 연구부터 과거에 살았던 인류에 대해 상세한 연구를 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현대문명이란 과학기술에 의해 미개한 사회로부터 멀어졌을 것이다. 아마도 말이다.

 

우리는 도시화된 지구에서 거대한 주거시설과 산업시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나, 그렇게 된 시기도 얼마 되지도 않으며, 설사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우리 인류가 현재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지성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학문적인 영역에서 책으로 통해 얻어지는 지식은 또 다른 경험이며, 삶의 양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주어진 지식이란 자신이 살아온 시간적 축척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극히 단순하고 편협한 경험주의적인 요소는 인간 스스로를 착각과 편견에 빠지게 하는 마법약과 같다. 문제는 그 약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산하여 스스로 복용하고, 이제 그 마법약은 독약이 되어 상대방의 목을 조르고 눈을 가리게 하는 마약이 되기도 한다.

 

지식으로 통해 얻어지는 책의 가치에서 바로 우리가 알 수 없던 것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인류의 삶을 더 가치 있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읽는 것은 단순히 고대사회부터 시작하여 근대까지 있었던 원시부족과 미개 및 야만부족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설사 고대사회에 살았던 야만족이 존재하여 100년 전 인류가 그 야만족에 대해서도 분명 야만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우리는 100년 전이란 인간들과 현재 우리의 차이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인류는 현재 야만적이지 않은가? 아니면 우리는 언제나 지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모든 일에 대해 올바른 가치관으로서 풀어내는지 말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엄청난 오만과 편견, 그리고 치명적인 실수다. 인류의 잔혹하고 비윤리적인 범죄는 바로 그런 점을 망각하면서부터 시작이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영혼아래 숨겨진 원시적인 요소를 더듬어 찾음으로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황금가지>에 나오는 이야기는 현재 우리가 본다면 참으로 미개하고 야만적이며, 또한 어이 없는 이야기가 터질 것이다.

 

저자인 제임스 프레이저 역시 그런 점을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여기면 안 될 것이다. 그도 역시 많은 제보자와 기록을 찾으면 원시문화와 혹은 전통문화에 새겨진 과거의 미신을 찾아내어 기록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보니 <황금가지>에는 우리의 조상인 조선이란 국가를 나타내었다. 현재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나, 산모가 태아를 놓게 되면 3·7일이라 하여 즉 21일 동안 집 앞에 고추를 묶은 금줄을 치는 것을 볼 수 있다. 21일 동안 산모와 태아를 외부와 격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 역사 혹은 그 역사의 왜곡된 뿌리라고 볼 수 있는 신화에서도 볼 수 있다.

 

한국 시조라고 불리는 단군왕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의 아버지인 환웅천자는 배달국의 임금이기도 하나, 인간이 된 곰과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낳았다고 한다. 곰이었던 웅녀가 인간이 되기 위해 3·7일간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난 후에 인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전통신앙은 하늘을 조상으로 여기는 무속신앙으로서 샤머니즘, 그리고 곰을 숭배한 토테미즘이란 점에서 한국인의 역사는 곧 한국인의 신화와 더불어 존재한 것이다. 생각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4400년 전에 있었던 신화로서 제시된 역사적인 기록에서 웅녀가 인간이 되기 위한 날과 현재까지 민간신앙으로 전해오는 금줄의 관계에서 신화는 계속 그 민족의 역사와 삶에서 남은 것이다.

 

또한 신화적 특성, 또는 신이 되는 존재, 또는 토템의 대상인 동물과 식물, 하다못해 일상생활의 패턴조차 계속 이어져 온다. 우리는 왜 미신을 두고 유치하다고 여기면서 계속 이끌리는가? 그것은 인간이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이성과 지성에 의존하기보단 그 너머의 감각과 무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통적인 요소가 <황금가지> 내에서 자주 등장한다. 제일 놀란 부분은 일본 훗카이도에 거주하였던 아이누족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누족은 본래 몽골계통 부족으로, 처음 그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된 동기는 일본 애니메이션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에 의해서다.

 

<원령공주>에서 하나의 모티브로 설정된 것이 남자주인공으로서 그는 아이누족의 젊은 청년이면, 그가 입은 의상은 우리 한국이 조선이란 국가로 있을 때의 일본인들이 입은 의상과 전혀 다른 점이었다. 작품 내에서 조총이 나온 점을 두고 본다면 17세기 정도로 보이며, 아이누족의 청년은 당시 도쿠가와 막부시절의 의상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현재 일본 기모노는 당시 막부로부터 이어져 온 의상이란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활을 사용했으며, 부족은 아주 공평한 계급체계에 늙은 부족장이 부족을 이끌어가는 형태였다. 그런데 이 아이누족이 사실 곰을 신성한 존재로 여겼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곰은 신적인 대상이나 그들에게 곰은 아주 맛있고, 유용한 동물로서 죽임을 당하는 동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곰이란 존재를 토템적인 요소를 부여한 점에서 그들의 원류가 몽골족이란 점에서 토템적인 원형이 단군신화의 요소로 본다면 상당히 흥미 가는 부분이었다. 당시 단군신화에서 웅녀는 실제 곰이 아니라 곰을 토템으로 삼는 종족이고, 범은 곧 호랑이를 토템으로 삼는 부족이다. 문제는 곰과 호랑이는 다 무섭고 사나우며 사냥에 아주 능한 맹수다.

 

그들을 토템으로 설정한 것은 그들의 강함을 그대로 부족에게 이양하여 사냥을 잘 할 수 있도록 스스로 주술을 거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방법은 곰과 호랑이와 같은 맹수 어느 하나를 두고 자신과 같은 존재라 여기며, 그 맹수와 자신은 영혼을 나눈 사이로 볼 것인지, 아니라면 맹수를 잡아 그 맹수를 잡아먹음으로서 자신에게 맹수의 용맹성이 들어온 것처럼 여기는 것인지 또는 맹수 그 자체를 신처럼 받들어 인간 희생양을 보내어 인신공양을 하는 것인가에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만약 나에게 그런 선택을 한다면 1번이 가장 안전하고 합리적인 대안일 것이다. 인신공양이란 점은 누군가를 계속 희생해야 하며, 언젠가는 분명 한계점이 올 것이다. 한국의 설화 중에서 <심청전>을 보면, 심청은 인당수에 빠져 용왕에게 보내진 것으로서 인신공양을 합리화한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문화적 형태를 설화로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어린 소녀를 희생한 점에서 남성지배 이데올로기를 확고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용왕이야기처럼 바다마을이 있는 지역에서는 매년 일정기간이 되면 용왕제를 벌인다. 마을 어부들과 주민들이 모여 서로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노래와 춤을 추는 행사는 만선의 기원을 바라는 주술적 행사다.

 

우리가 유치하고 미개한 행동이나, 아직까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분명 존재하고 있는 행사이고, 앞으로도 열릴 행사다. 해양환경으로 판단할 경우 바다의 수온과 COD, pH, 각종 중금속을 통한 화학적 요건, 조석과 조위 같은 물리적 요건, 플랑크톤에 의해 적조발생 등과 같은 생물학적 요건들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 분명 생선은 계절적으로 영향을 받아 어장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만선을 기원하면 풍어를 바라며 용왕제를 열고, 무당을 부르고 춤판을 연다. 미신으로 가득하나 현재 굿을 할 수 있는 일부 무속인들은 무형문화제로 남고, 또한 그런 굿판이나 각종 전통행사 역시 무형문화제로 등록되기 시작한다.

 

정말 미개한 것들이 이제는 하나의 문화적 유산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의 무의식에서 자리 잡은 신화와 민담,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들의 드러나지 않은 언어로서 드러나는 점이다. <황금가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가령 위에서 아이누족은 곰을 잡는 것에서 토템이 되는 동물을 다른 민족과 부족들이 잡는다는 점이다. 단지 조금 아쉬운 점은 이 책은 유물론적인 요소를 상당히 배제한 느낌이 강하다. 문화인류학에서 <문화유물론>의 저자이기도 한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적인 관점에서는 그 문화적 행사나 각종 의례가 단순히 미개부족의 믿음이 아니라 그들 나름대로의 환경과 경제적 조건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구조주의 창시자이면서도 인류학의 거두인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의 책을 보면 원시부족이 우리로서 이해하지 못하는 괴상한 행동이 그들 나름대로의 과학적인 행위이며, 그 무의미하게 보이는 행동 그 자체가 언어적인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황금가지>의 주요 대상이 되는 부족들은 농경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고, 그 농경문화에서 계절적인 변화가 결국 신이란 존재를 관념 속으로 만든다든 점이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봄-여름-가을-겨울의 흐름에서 봄은 모든 생명을 열게 하고, 여름은 그 생명이 가장 성장하며, 가을은 생명을 수확하며, 겨울은 생명이 모두 잠을 자게 된다.

 

그 계절적 변화가 바로 자연의 이치를 하나의 신으로서 만드는 것이다. 계절의 신을 어느 관념적 존재에게 부여하고, 그가 바로 인간과 같은 이름과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신은 포도주의 신인 디오니소스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인간의 여자에서 태어난 반신으로서 그는 사지가 모두 분해된 채로 죽지만, 다시 태어난다.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부활에서 죽음은 겨울은 가리키고, 탄생은 봄을 가리킨다. 결국 죽음이 있어야 생명이란 이름의 봄이 오는 것이다. 신의 죽음과 부활 혹은 탄생에서 판단해보면 분명 신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에게 보인다고 믿으며, 그 믿음은 바로 꿈과 몽상 또는 간질에서 나오는 환상이다.

 

꿈은 인간이 수면 중에 꾸는 생리적 현상이다. 그러나 고대 사회의 사람에게 꿈은 예지며 하나의 계시다. 꿈이 곧 인간의 무의식적인 요소로 통해 인간에게 보여주는 현상이듯이 그들은 그런 무의식에 존재하는 인간, 많은 인간들이 공유하는 그 무의식으로 신을 만든 것이다. 신화란 그 사회집단 인간들이 가진 집단적인 무의식 내지 공통성이란 말처럼 오히려 그 신화적인 이야기가 하나의 과학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 자신들만의 과학성에서 미개함을 넘어 폭력적인 야만이 존재했다. 신은 절대 죽지 않아야 하므로 그 신을 대신할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 대상은 동물일 수도 있고, 인간일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들이 여기는 신의 존재에 가장 가까운 존재로 여기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 동물과 식물이 될 수 있고, 심지어 인간이 공작해 놓은 도구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만큼 가장 신에 부합한 존재는 없으며, 오히려 인간이기에 다른 인간들에게 신의 계시 내지 집행 그리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설사 동물을 신으로 모시거나 희생양으로 올려도 결국 그 결과적 판단은 인간이 한다. <황금가지>에선 바로 네미숲속의 사제의 죽음부터 시작하여 각종 인간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가장 잔인하고도 야만적인 죽음은 후반에 나오는 북유럽 쪽의 사형이었다.

 

중범죄를 저지른 죄인과 전쟁에 사로잡은 포로를 식물줄기로 만든 거대한 동물인형에 넣어 거기에 각종 가축과 동물을 같이 들어가게 한 후 불로 태우는 것이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상황에서 죽음으로부터 절규하는 동물들과 사람들은 서로 비명을 지르고, 동물들은 다른 동물과 사람들을 할퀴며 뒤엉키며 죽어간다. 이 잔혹한 행위에 두고 <황금가지>에서는 그들의 주술적 행위로 보겠지만, 문화유물론적인 요소로 본다면 식량을 포로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아깝거나(부족하거나) 또는 그런 식으로 사형을 처하게 하여 상대부족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줄 수 있는 경제적인 방법이다. 만약 그 불길에 타버린 불쌍한 영혼의 육체를 식사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만약 식사용으로 한다면 2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이다.

 

식물식량의 절약과 단백질의 보충, 물론 이런 식의 논리는 너무 잔혹하거나 억지스러운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아즈텍 문명의 심장 가르기는 분명한 처사를 보여준다. 인류학 도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시대나 그 지역의 기온과 습도, 강우량과 식생조건이다. 게다가 지형과 지질적 요소는 인간에게 적합한 생활이 될 수 있는지 또는 곡식을 재배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서는 가정에서 기르는 가축 그리고 들판이나 숲에 있는 야생동물은 얼마나 존재하는가? 남미의 국가는 대부분 높은 지대이며, 사나운 맹수는 잘 없었으며, 주로 토끼나 쥐 같은 작은 동물이 많았다. 그리고 옥수수 재배에서 옥수수신에 대한 경배는 식물이 아니라 인간을 희생한다는 점도 이상하다.

 

옥수수의 신은 식물의 신이지 동물의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포로를 죽이거나 혹은 희생양을 지정된 슬픈 인간이든지 그의 죽음으로 옥수수의 신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차라리 옥수수를 위해서라면 들판의 옥수수가 물의 흐름이 잘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 수로정비나 밭에 거름을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다고 죽은 인간의 시체를 잘게 부수어 토질을 비옥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 인간의 심장을 꺼내어 신상에 바치고, 목을 베어 그 인간의 고기를 모두 나누어 먹는다. 1년 중에 자연사하는 인간보다 제의로 통해 죽는 인간의 수가 많다는 점은 결국 제의는 경제적, 환경적 조건이 따르는 점이다.

 

많은 인구를 가진 왕국에서 옥수수와 같은 탄수화물 섭취는 단백질의 보충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살인은 어떻게든 합법적으로 이성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신이란 이름은 어떠한가? 모든 죽음은 합법적이지 않으나 유독 영화나 소설에서는 이런 죽음을 정당화 시키는 방법이 있다. “신과 정의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희생은 그 어떤 부조리에서도 정당하다. 신이 곧 정의이기에 정의라는 이름 역시 그런 폭력적인 희생을 무마시킨다. 아니 그 죽음을 당하야 하는 희생양조차도 오랫동안 준비된 존재이기에 자신들의 희생은 아주 기쁘고 위대하며 좋은 것으로 인지되도록 교육시킨다.

 

<황금가지>에서는 바로 저 죽음을 두고 영원한 생명, 풍요로운 삶의 혜택을 위해 의식을 치룬 것으로 보나, 그것으로 인해 얻어지는 이익은 자세히 연구하거나 판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각 문화와 국가, 그리고 민족과 원시사회의 신화를 연구하고 떨어진 국가라도 그 연접한 곳에 있는 지역이라면 뭔가 유사함 요소를 발견한다. 이름은 다르나 신의 역할과 신이 처해진 운명, 그리고 그 신을 받드는 인간의 생활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그 미개하거나 또는 야만스러운 행동은 단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교나 가톨릭과 같은 큰 종교에서도 발견되는 점이다.

 

이해가지 않을 수 있겠지만, 한국은 삼국시대에 불교를 받아들이며 대승불교국가로서 그 문화적 유산을 이어져 온다. 본래 인도에서 불교는 소승불교로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며, 한국에서는 삼국시대역사와 고려시대처럼 국가통치이념으로서 불교를 영입한다. 그러면서 점차 민간에 퍼지면서 불교가 한국의 대표종교로 부상하나, 그 속에 분명히 민속 문화와 무속신앙이 잠자고 있다. 불교에서 백중에 방생하는 행사는 분명 오리지널인 인도종교에 없는 점이고, 죽은 자에 대한 49제나 100일제 역시 없다. 오히려 그런 요소는 무속신앙에서 전해져 온 것을 불교에서 흡수한 것이다.

 

가톨릭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가령 추수를 하는데, 마지막 추수를 하는 사람을 두고 곡식어머니로 치부하여 놀림거리나 각종 행사의 대상으로 삼을 이유는 없다. 이런 행위는 가톨릭문화가 자리 잡은 지역에서 일어나고, 심지어 교회 앞 광장에서 그런 행사를 계속 한다. <황금가지>에서 초기 가톨릭은 기존의 민속 종교와 경쟁해야겠지만, 그들을 흡수하게 되면서 문화적 제의가 다르게 된 것이다. 글을 적는 지금이 2014년 8월 17일로서 한국에 가톨릭의 최고 수장이신 교황님이 방문했다.

 

한국에 와서 한국 천주교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123인에 대해 시복식을 내리는 가운데, 본래 윤지충이란 사람은 1791년 진산에서 어머니가 죽었는데, 그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워 역적이 되어 참수당한 사람이다. 본래 가톨릭에서 마테오리치가 중국에 오면서 중국에 신앙을 퍼뜨리기 위해 god이란 신을 동양권의 천주로 대체하여 문화적 차이를 줄이려 했다. 하지만 당시 신해박해가 있던 시기에 교황청에서는 그런 동양의 문화를 일체 하지 못하게 했으며, 그것에 대한 사건이 성호학파 선비의 죽음이다. 지금이야 다시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조치했지만, 유럽에서는 신에게 두 무릎을 꿇어도 군주에게 한 쪽만 꿇는다.

 

문화적 차이와 종교적 관념, 그리고 그 시대적 조건이 비극적인 역사가 탄생하는 점이다. 물론 당시 윤지충의 죽음은 천주교의 신앙심도 있었지만, 그가 정조 시대에 노론과 대립하던 남인 세력이었고, 그의 조상은 남인의 영수이며, 거두였다. 그의 죽음에는 신앙심이란 계기가 있지만, 당시 정치적(경제적) 이익에 따라 처형된 역사적 사건이다. 정조 이야기가 나와 그러나 <황금가지>에선 정조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몸에 종기가 생겨 치료를 받아야 했으나, 종기가 결국 치료되지 않아 죽고 만다. 임금의 몸은 일반 인간의 몸이 아니고, 신성하기에 함부로 만질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이전의 다른 조선임금들도 종기가 날 경우 의원을 불렀고, 침술로 통해 종기를 치료했을 것이나, 정조는 그렇게 하지 않은 점에서 의아한 점은 많다. <황금가지>의 한계점은 단지 신성한 것과 그 신성함에 대한 인간들의 이야기만 초점을 맞추었지, 그것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와 판단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래도 이 책이 계속 유효한 이유는 4가지 편에서 숲의 왕, 신의 살해, 속죄양, 황금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속죄양이 아직도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제의라는 것은 누군가를 희생하여 그 희생에 따라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기 마련이다. 이성적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데도 계속 억지로 약자를 희생시키는 그 야만은 아직도 사회 저편의 문젯거리로 등장한다.

 

주술에서도 주술은 분명 이로운 것도 있으나 남을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도 있다. 21세기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미디어가 각종 TV 및 인터넷, 신문잡지 등으로 퍼진 공간에서는 사실 있지도 않은 거짓은 사실로 만들거나 사실조차 은폐하거나 왜곡한다. 주술은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여기므로, 언론과 주술이 무엇이 다른가? 주술로서 희생양을 만들고, 그 희생양이 조직과 사회의 불온요소 만들어 광적으로 변하는 인간들을 보면 <황금가지>는 21세기에 도저히 유효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단지 아쉬운 것은 네미(Nemi)의 숲속에 있는 왕 대신 우리는 죄도 없거나 무관한 사람이 희생된다. 물론 <황금가지>에서 인신공양 되던 인간을 보면 죄 없는 인간이 많다는 점이었다.

 

죽음과 부활에서, 희생양이 죽으면 그에 해당되는 신은 계속 죽지 않고 새로운 생명으로 영원히 젊음을 누려 그 사회집단의 인간들에게 계속 혜택을 준다고 한다. 우리는 가상의 세계로서 사람들을 기록하여 죽지 않게 한다. 물론 육체적 존재는 죽어도 그의 잔상이 남는 이미지는 계속 남아 그의 육체적인 죽음에서 사회적인 삶으로 부활하고 있다. 특히 역사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킨 자나 혹은 큰 역할을 기여한 자들도 현대인들의 생활에서 부활한다. 안 그러면 우리는 죽은 자의 이름에 사로잡혀 갈등하는 현실을 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