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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비평의 쟁점 - 잃어버린 만화 문화의 자리찾기
김성훈 지음 / 니들북 / 2014년 8월
평점 :
한국 만화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결국 구한말 아니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올라가야 할 것이다. 한국의 만화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만화같이 단순히 애들이나 보거나 또는 시간 때우기 용으로 이용되는 오락도서만이 아니란 점이다. 물론 오락적 기능도 중요하다.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즐길 수 있는 휴식시간에 즐거운 마음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런다고 만화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것으로 본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만화라는 것은 단지 그림으로 되어 있다고 하여도 그 안에는 엄연히 이야기가 존재하고, 그 이야기 내에는 상대방에게 의미를 전하고자 하는 기호적인 요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의 만화문화는 단순히 재미와 오락을 생겨나기 보다는 시대적인 흐름에 대한 비판과 풍자로서 생긴 문화다. <한국 만화비평의 쟁점>에서 처음 소개된 대한민보에 실린 최초의 만화가 나온다. 긴 모자에 양복과 구두, 그리고 지팡이를 잡고 있는 중년남성을 보면 무엇인가에 대해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 만화는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의 삽화로서 만화의 역사와 더불어 만화라는 매체로 통한 비판적인 요소, 그리고 민중적인 요소를 반영하여 그 문화적 명맥을 유지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만화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그래 쉬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만화이기 때문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대 지식인이며 언론인이던 최성수는 만화로 통해 언론적 기능을 강화하고, 만화라는 매체가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도 프랑스혁명사에 관심이 많지만, 그 혁명적 배경에는 민중에 의해 민중을 위한 정보와 홍보 수단으로 만화가 중요한 수단이었다. 최성수 언론인은 프랑스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통치와 나폴레옹 이후 다시 부르봉 왕가가 통치하고 또한, 나폴레옹3세가 집권하기 이른다. 이런 와중에 권위적이고 비자유적인 통치에 대해 프랑스 파리 시민들이 반발하자, 프랑스 만화작가 오노레 도미에는 시민들의 편에서 만화를 그린다. 그의 작품 중에 <봉기>는 분명 만화라기보다는 혁명을 위한 그림에 가까우나 그래도 만화가라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그림들이 대부분 시대적 문제를 풍자적인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하면 만화라는 매체가 효과적인 이유는 억압받는 민중계급 부류들은 대부분 글자를 몰랐으며, 글자를 모르는 것은 그런 문제점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판단력 내지 그런 개념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과 같다. 가령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모든 국가의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이 없었다면 프랑스대혁명의 불꽃과 심지어 전 세계의 헌법조차 만들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개념을 알려면 받아들이는 상대방에게 정보력을 각인 시키야 하는 점이다. 정보의 각인에서 기표가 되는 그림이 상대방에게 이해가지 못한다면 정보매체로서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만화라는 그림은 상대방에게 매우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누구나 그릴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만화가 가진 언론적인 기능은 곧 누구나 보고 이해할 있고, 누구나 그릴 수 있는 점에서 만화는 민중을 위한 문화가 아니라 민중에 의한 문화라는 것처럼 매우 민주주의적인 문화라는 점이다. 특히 보는 이로 하여금 쓴 웃음을 짓게 만드는 시사만화의 경우, 누가 보더라도 이해가 빠르면서 한편으로 미소와 더불어 씁쓸한 맛을 베어나게 만든다. 그렇지만 시사만화라는 것은 시대적 문제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이슈를 부각시키고, 그것으로 하여금 대중들에게 관심을 유도하므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한국의 만화역사에서는 결국 시사만화 내지 민중의 삶에 스며든 민중의 대변자라 볼 수 있다. 그런 만화에 대한 인식이 하나의 비평적 쟁점이 되고, 만화로 통해 보여주고 그것에 대한 고찰로서 만화비평은 성립된 점이다.
한국의 만화비평문화는 결국 언론의 기능으로서 즉 민족독립에 대한 자유에 대한 열망과 일제로부터 착취와 억압에 시달린 민중의 한을 내보인 것이다. 최성수의 그런 가치는 그가 남긴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첫째는 조선의 저널리즘이 먼저 만화를 알고 또 저널리즘이 가져야 할 만화와의 동반성을 잘 인식하는 동시에 세계 저널리즘과의 만화대세를 거울삼아 거기서 조선 저널리즘이 가져야 할 위치를 깨달아 그 깨달은 바를 하루바삐 이루어져 할 것과 둘째로는 민중이 만화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가져야겠고 마지막으로 만화가는 좀 더 만화다운 만화를 창작하여야 할 것이다.”
만화이기에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프랑스에서 9가지 예술에서 만화 역시 예술의 한 범주에 들어간다. 미학에서 예술이란 것은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이라 한다. 그렇기에 만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대해 작가로 눈으로 통하여 새롭게 해석하여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주는 것이 만화작가의 소임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만화의 가진 가치를 논하는 정신이기에 한국만화는 계몽주의적인 요소를 내재한 근대적인 문화였다. 그렇지만 만화는 그 누구에게 열린 세계이며, 특히 한국전쟁 이후로는 그 대상이 어른에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게 된다.
아마 만화가 아이들이 보는 것이라는 인식은 군사독재정권 이전에 한국전쟁 전후로 근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쟁이 닥치면 어른들은 밖에서 일을 하게 되면, 집에는 어린 아이들이 남게 되고, 또한 전쟁고아와 같이 누군가를 의지할 수 없는 사람들도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 어린 아이들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만화였고, 새로운 만화가 나오면 아이들의 손에서 이리저리 흘러 다니며,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렇지만 이런 형태는 만화에 대한 작품적 가치를 다루기보단 대량적으로 만들고, 재미위주로 가게 되는 모순이 생긴다. 만화에서 물론 시대적인 배경과 시사정신이 빠질 리는 없지만, 만화가 그런 가치에만 몰입할 수 없는 것이다.
예전에 일본 문화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은 이미 쇠퇴하고 이제 그것을 대체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란 문구를 보았다. 문학평론가와 언론인에 의해 우리나라 만화문화가 발전한 것은 사실이나,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할 상황이 온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만화는 여전히 자유로운 사고와 즐거운 마음을 가지게 해줄 수 있는 매체였다. 그런 만화에 대한 평론은 만화가 단지 저속한 문화로 인식되는 것에서 좀 더 넓은 관점으로 보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김현, 오규원 선생 같은 문학도의 출현은 매우 중요한 의미인 점이다. 만화규장각에서 발행한 <한국만화비평의 선구자들>에서 김현 선생은 자신이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엘리트임에도 불구하고, 만화가 가진 민중예술성을 재발견했다.
위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문구처럼 지식이 없다면 자신이 처해진 위치나 상황조차 파악할 수 없다. 글을 모른다는 것은 지식을 축척할 수 있는 방법이 어렵다는 것이고, 지식의 축척은 곧 지식이 없는 대상으로 하여금 우월한 위치에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따라서 지식은 권력으로 이어지고, 권력은 지식은 생산하는 것처럼, 만화의 기능은 지식이 없는 자에게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만화를 보고 그는 처음에 자신인지 모르지만, 그 만화를 보고 나서 뭔가 잘못된 점을 느끼고, 그 만화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가치로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만화가 예술적인 요소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삶을 하나의 시학(詩學)처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개연성 내지 필연성이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점이다. 하지만 생각하게 되는 것과 그 생각으로 인해 사회적 문제를 알게 된다면 그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억압하거나 은폐, 조작, 위조를 하려고 한 것이다. 한국에 대표적인 만화분서갱유는 유신체계에 대한 권력독재화의 산물이다. 만화가 자유로운 사고로서 그것을 제작하고 보는 이들은 매우 귀찮은 존재가 아닐 수가 없다. 따라서 만화의 검열과 제한된 이야기, 그리고 사유의 폭을 제공하는 만화를 억압함으로 만화문화는 그저 아이들이나 보는 단순한 오락물로 치부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1980년대로 오게 되면서 만화비평에 대한 도서도 나오고, 1990년대에는 신춘문예에서 만화비평도 하나의 비평가의 등단기회로 올라가게 되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만화비평으로 통해 정식으로 만화평론가로 등단할 수 있는 신춘문예에 만화부문은 빠져있다. 그렇지만 만화가 가진 이야기의 전달력은 신춘문예가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만화비평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만화비평의 맥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1990년 국내 최초로 공주대학교에서 만화학과가 창립되어 만화라는 것이 단순히 오락이 아니라 학문적 기능을 유지하며, 만화에 대한 평론가협회 내지 만화를 연구하는 만화학회를 창립하여 만화라는 것이 하나의 학문적, 예술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도 만들었다.
만화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만화가 지금처럼 하위문화로 간주된 게 아니라 만화가 차지하고 있던 한국사회의 여가생활에서 TV의 보급과 극장의 설립이 멀티미디어매체로 인해 만화가 한국 대중으로부터 저절로 멀어지게 되었다. 하위문화가 된 만화가 계속 대중문화와 그것을 이용하는 대중으로부터 저질문화로 인식되지 않기 위해서는 만화 그 자체에 대한 가치를 올릴 수밖에 없다. 만화비평은 처음에는 시대정신과 저항의식, 그리고 민주화 열기로서 발전해왔다. 하지만 만화라는 것도 역시 하위문화라고 해도 대중문화에 포함되므로, 만화가 보급되면서 만화라는 위치가 영화나 문학과 같이 예술성, 작품성을 인정받는 것이 사회적인 조건에서 유리하다는 점이다.
1980년대 만화비평가인 위기철의 글에서는 만화의 대중성을 결국 사회적으로 보급되면서 자본과의 관계를 제외할 수 없다. 그래서 위기철가 남긴 글로 “한 작품이 성실히 작가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상업성의 산물일 때 그 비평적 접근은 당연히 작품 생산의 동력이 되는 ‘상업성’을 주목할 수밖에 없게 되며, 또한 이 상업성이 비단 만화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일 때 비평의 접근방식은 당연히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보는 만화책, 최근 그 만화책의 토대가 되어가는 게임과 라이트노벨, 위의 이야기들로 만들어지는 애니메이션 역시 상업적인 요소가 반영되지 않을 수가 없다. 대중에 대한 상품적 가치로서 만화관련 콘텐츠는 사회구조적인 요소로 보지 않을 수가 없고, 대중에게 만화가 전달되는 것 역시 자본을 매개로 하기에 만화비평 역시 사회적인 구조와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단순히 보자면 작품적인 가치 높고 낮고를 떠나 어떤 작품에 대해 비평을 할 때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 기능과 정치적 현황 또한 사람들이 최근 가지고 있는 인식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점이다.
물론 만화 혹은 서브컬처로 같이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게임 등과 같은 부류는 그 역할과 기능을 인정받지 못한다. 현대사회에서 보이는 문제로는 대중문화는 획일적인 가치관을 강요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면 낯설게 되는 것이다. 만화비평이 모든 이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만화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다양한 문화의 공존성이다. 만화가 만화라는 부류에 갇히게 된다는 것은 결국 고립된 부류로 낙인찍히고, 당초 만화는 즐거움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의 교감이란 목적성 자체를 상실하게 되는 점이다.
예술이란 것은 정치적인 요소와 멀어져 보이겠으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처럼 인간의 사회적 동물, 곧 정치적 동물이다. 정치라는 것이 단순히 말하여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에 앉아있는 고위관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자유롭게 행동하고 생각하여 말할 수 있는 것조차 정치다. 아니라면 자신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조차 정치적이다. 그 정치성을 논하는 이유는 만화라는 것으로 통해 자신의 삶을 윤택하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것 역시 정치적인 논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무료로 보는 웹툰은 문제 삼지 않으면서 작가들과 출판사들의 수익을 거두게 하는 출판만화의 무관심 내지 편견은 어떻게 보면 만화를 즐기는 부류에게 큰 타격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만화비평이 필요한 점은 만화가 프랑스에서 제9의 예술이란 말처럼 그 예술적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결국 그것을 즐기는 부류가 스스로 앞장을 서야 하는 점이다. 프랑스 부르봉왕가에 대해 풍자를 날린 프랑스 화가 오노레 도미에는 먼저 그림을 그려 대중에게 알렸고, 대중들은 그 그림으로 통해 시대적 현황을 파악한다. 그리고 프랑스는 1848년 2월 혁명에서 영원히 군왕을 추방한다. 물론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가 대통령이 된 후 의회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혼란에 빠졌지만, 계속 저항을 하던 그들이 있었다. 근현대적으로 저항이 있는 곳에 풍자만화 내지 시사만화가 뒤따라오지 않을 수가 없다.
만화비평은 단순히 만화를 보고 비평을 남긴 것으로 만화비평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라면 그 자체에서 만평을 통한 비평일까? <한국만화비평의 쟁점>에서 다루고 있는 사안에서 기존에는 엘리트들이 만화비평문화를 이끌어왔다면 21세기 온라인 문화에서는 대중들이 만화비평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까지 단순한 리뷰 내지 감상에 머물러 있기에 그 작품에 대한 활발한 논의에서 깊이를 논하기는 어렵다. 대부분 소개된 만화비평가들 중 최근에 소개된 사람들은 만화작가 내지 대학교수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만화는 분명 하위문화인 서브컬처이다. 그렇기에 가장 밑자락에서 즐길 수 있다. 만화를 즐기는 점에서 단순히 보다는 개념에서 읽는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시도되어왔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문학평론가와 문학도 혹은 만화전문비평가 내지 교수들에 의해 주도된 점은 안타까운 점이다. 대중 스스로 만화비평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만화의 기능이 이제 만화만이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로 점차 번지기 때문이다. 만화는 대중문화이기도 하나 하위문화이기에 다양한 이야기와 소재들이 위로 떠오른다. 기존의 대중문화는 계속 대중의 대다수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같은 이야기와 소재를 반복한다.
따라서 새로운 전환점이나 가치관의 정립이 매우 어렵다. 만화라는 것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처럼 대규모의 자본과 인력이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 단독으로 할 수 있는 분야다. 작가의 개인적 특성을 반영하므로 어느 특정 개인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만의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는 점이다. 물론 한국의 만화작가를 보면 열악하다. 사회적 인식, 생계에 대한 부담, 그리고 이 어려운 여건 속에도 자신이 추구하는 열망, 실제 만화작가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쉬운 길을 택한 사람들이 아니다. 만화비평적인 요소에서 그들과 대화하면, 자신의 작품에 들어오는 의견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꼼꼼하게 평해주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만큼 자신이 만든 작품을 열심히 보고 생각했다는 점이 그리는 입장, 즉 이야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좋은 결과일 것이다. 만화비평은 만화문화의 저질성이란 인식개선에 큰 전환점도 되나, 작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만화비평은 단순한 리뷰쓰기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미학적 판단을 함으로써, 일반적인 문학과 영화를 보고 있다는 조건 아래 시작해야 한다. 영화나 문학이나 다 좋은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영화, 문학, 만화가 있고,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만화비평이 어려운 점은 이런 사회적 인식과 개인적 역량의 향상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만화를 그리는 것은 작가에게 이윤을 남기지만, 만화비평은 이윤이 오지 않은 것이 한계성이다.
대학교단이나 또는 문화관련 단체에 소속된 일부인사들을 제외하면 만화비평을 한다는 것은 순전히 개인의 취미생활로만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한국처럼 대중들에 의해 수행되는 비평문화가 거의 전무한 곳에서는 만화비평을 할 수 있는 자리는 매우 좁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만화를 좋아한다면 그 만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즐거움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의식주가 기본적으로 해결되어 남는 시간에 여가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가시간에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으나 만화만큼 짧은 시간에 즐거움을 주는 매체는 많지 않다.
우리 사회는 만화 내지 애니메이션이란 문화를 단순히 위해요소로 되거나 또는 아동이나 유아용으로 사용하려고 하며, 특히 교육자재로서 기능을 수행하려 한다. 만화작가와 만난 시간에서 많은 만화작가들이 교육자재에 필요한 그리는 것으로 수익을 본다고 한다. 물론 교육을 위한 교육자재에 만화를 그리는 것 역시 만화를 익숙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나, 만화작가가 본래 원하는 목적은 아니다. 결국 만화문화의 밝은 미래는 자유로운 창의성과 깊은 토론이 오갈 수 있는 문화정착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