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2 - J Novel
마미야 나츠키 지음, 시로미소 그림 / 서울문화사 / 2014년 8월
평점 :
개인적으로 서평을 나열하기 말하자면, 나는 정의라는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의는 윤리라는 가치관이 없다. 단지 정의라는 이름은 힘과 권력이란 개입을 정당화시키는 악적인 수단이다. 어느 작품에서 나온 것처럼 정의라는 이름은 악이란 이름을 질투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런 것일까? 아닌 것인가?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 것은 정의라고 말하는 자와 정의라는 것에 매달리는 자는 자신의 정의론에 대해 생각해 볼 의무가 있다. 문제는 그런 자신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 대한 성찰 없이 단순히 정의는 그 자체로서 의문을 가지게 해서 안 될 극단의 성역인 것이다. 성역이란 이름이 되어버린 정의가 하나의 관념처럼 돌아다녀 눈에 보이지 않은 대기 중에 떠다니는 공기라면 문제가 없을지 모르나, 그것은 인간의 관념 안에 숨을 쉬고, 때로는 인간의 숨을 끊어주게 만든다.
그런데 그 정의라는 이름은 분명히 어떤 조건 안에서 타당해야 하는가? 우리는 살아오면서 자신의 정의로운 존재라고 믿고 있다. 그것만큼 가장 큰 착각과 오만, 그리고 편견이란 인간이 가진 그 어떤 죄보다 더 무겁고 지독하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의 정의라고 믿는 것은 자신들이 믿는 가치관이나 도덕관이 옳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점이다. 가령 최근에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차별적 폭격과 총격은 두고 우리는 그것을 정의라고 논하는가? 물론 정의의 철퇴라고 말하는 부류도 있지만, 국제연합 UN에서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두고 비인간적인 처사고,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라고 비난했다.
정의라는 가치를 두고 저 사건을 생각하면 무엇이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전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어보았다.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의 갈림길, 그 갈림길 속에서 그 어떤 것이라도 좋은 결과를 볼 수 없었다. 더 나아가 마이클 샌델이 강의하는 하버대학교 정치철학과에서 강의하던 존 롤즈의 <정의론>에선 이렇게 인간의 선택에 대해 이렇게 논한다. 인간이 선택하는 것은 제일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손해나 피해가 적은 것으로 선택한다고 말이다. 정의에 대한 가치는 결국 인간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의라는 그 자체로서는 도덕적이고 사회 관념에 따른 힘으로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대다수의 판단에서 비롯되는 다수결, 문제는 다수결이란 것은 인간의 보편적 사고이기도 하나, 그 보편적 사고를 지배하는 인간의 사고방식 역시 진지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왜 라이트노벨 1권을 읽으면서 이런 정의와 도덕 그리고 인간의 선택이란 난해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가? 이번에 읽은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라는 라이트노벨은 그런 인간의 딜레마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고, 그 딜레마를 어렵지 않게 그저 라이트노벨이란 경소설이란 장르에 맞게 재미로서 이끌어 간다. 중간마다 보여주는 플롯과 또한 그 플롯을 배치하기 위한 복선은 기본적으로 암시하거나 또는 생략하기도 했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1권에서는 카미우치 유우진의 자살심리에 대한 저지에 반해 2권에서는 사나 엔마에 대한 성정체성에 대한 열띤 토론을 펼쳤다. 하지만 그 복선의 구조가 어디서 나오는가에서 1권에서 이미 사나 엔마의 고뇌가 시작되었다. 2권에서 검도부 1학년이 목격한 엔마의 몸은 단순히 발화의 시작점에 지나지 않았다. 1권부터 사나 엔마는 이미 밀폐된 공간에 방치된 가스처럼 언제 어디서라도 스위치가 눌러지면 폭발해야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2권에서 보여주었고, 그것으로 통해 리코와 리코 일행들이 보여주는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투쟁을 보여준다.
왜 정의와 도덕 그리고 선택이 따를까? 기본적으로 학교라는 공간은 단순히 생각하면 아직 미성년인 학생들을 가르치고 기르는 훈육기관이다. 학교 그 자체적인 기능을 생각하자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라는 공간은 학교라고 하여 그 자체로 분리된 공간이기도 하나, 때로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다. 학교는 학생이란 존재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학생이란 이름 뒤에는 사회적인 배경과 조건이 따른다. 학교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사회구조로서 움직이는 조직인 것이다. 따라서 그 사회구조 속에서 정치적인 맹점과 정치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투표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
투표라는 것은 결국 참여에 대한 인간의 권리다. 그 참여라는 것이 하나의 선택지점을 지정하고, 그 선택은 그 정치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사나 엔마가 처해진 상황은 바로 그 정치적 상황 그 자체였다. 따라서 리코는 1권에서 프로이트와 융과 같은 정신분석학자의 이름과 이론을 내세웠다면, 2권에서는 왜 니체의 이름과 그의 말을 따라 했는가? 리코는 학생회의 하라 사이토가 보낸 강력한 도전장을 두고 니체의 말을 인용하였다. “저 유명한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 말했지. ‘정의는 거의 동등한 힘의 상대를 전제로 하는 보상과의 교환이다.’라고, ‘정의’는 정정당당하게 부를 때가 아름답지 않은가? 적어도 약한 상대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태에서 철퇴를 내리려는 행동은 삼류 행동이라고 할 수밖에 없군. 그런데 하라 사이토 군, 자네는 몇 류지?”
저 말은 어렴풋이 내 기억에서 돋아났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출판사 책세상)>에 나오는 문구 중에 하나일 것 같다는 점이다. 니체의 서적은 당시 도덕관이나 정의관에 대해 무척이나 비웃고 깨부수려고 했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를 읽다보면 학생회의 하라 사이토가 왜 유치한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니체는 본래 민주주의를 혐오하던 사람이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에서 대다수의 군중으로 이루어 있으며, 그들은 충분한 판단력과 이성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중심리에 의해 자행되는 일들은 그것이 분명히 틀린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인간이 가진 광기의 폭발이 정당화 되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도덕과 정의라는 이름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에서 내가 발췌했던 글 중에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문 일이다. -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에서는 일상적인 일이다.”라고 한다. 결국 집단과 시대라는 특성 아래 사이키델리코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하나의 집단이 구성된 조직이고, 현대적인 상식이란 이름을 가진 시대적 요건도 갖추어져 있다. 학생회는 학교학생들의 대표이기도 하나, 그것은 정말로 대표인지 아니면 하나의 권력을 가진 존재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조직과 집단 또는 국가조차도 법과 제도가 있다. 법과 제도는 그 자체로 공정하고 공평해야 하나, 그 공정성과 공평성의 이름을 가진 법과 제도는 자신의 이름으로 집행하지 않는다. 어느 특수한 인간으로서 공정성과 공평성을 실행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 개인에게 공정성과 공평성이 완벽하지 않을 경우 어느 특정한 이해관계나 사적인 감정이 녹아들어가는 순간 이미 법과 제도라는 자체는 공정성과 공평성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2권에서 바로 그 공정성과 공평성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것에서 결국 권력이란 이름의 도덕과 정의는 정당한가라는 리코의 반격이 시작되는 점이다.
1권부터 복선을 깔라놓은 사나 엔마, 그는 아니 그녀는 원래 여자지만, 남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녀가 여자인데도 남자로 살아가야할 이유는 단순히 엔마가 변태적인 성욕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그녀가 자라온 환경이었다. 즉 학교라는 것이 사회구조고, 모든 사람들은 같은 조건 아래 성장할 수 없고, 같은 상황에서 살아갈 수 없다. 바로 개인적인 의지와 상관없이 외압적인 조건에 의해 자신의 현재가 갖추어지는 점이다. 엔마의 아버지는 뛰어난 무술가이고, 게다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여행을 다니는 방랑무술가였다. 어머니도 없이 아버지 아래 아버지 같은 생활을 했다면 분명 평범한 여성으로 삶을 기대할 수 없다.
섹슈얼리티라는 생물학적인 조건에서 엔마는 키도 크고 날씬한 소녀였지만, 젠더적인 요소에서는 그녀는 여자보단 남자로 살아야 했다. 결국 남자 옷을 입고 남자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엔마의 집안사정에 따른 문화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분명히 여자가 여자 옷을 입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남자라는 존재로 학교를 다니는 것은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하라 사이토는 엔마의 약점을 두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퇴학을 내리려 한다. 퇴학의 조건에서 일반적으로 학교 내 교무위원들이 의론을 걸치고 나서 결정해야할 사안이나, 먼저 학생회에서 의론을 결정하였기에 학생회의 대회의로서 결정지으려 했다.
그 목적은 엔마의 퇴학이나, 그 이면에 학생회에서 눈에 가시거리로 비추어지는 리코의 기압제선이었다. 학교에서 기인으로 소문난 리코에게 리코의 주변인들을 쳐내는 것으로 충분한 반격이 될 것이고, 리코가 학교 내에서 유명인이지만 확실한 친구가 없다는 점이다. 리코의 약점을 노려 리코를 눌러 버리는 것이 하라 사이토의 목적이다. 하지만 리코가 분명히 특이하고 단정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단지 리코가 어느 특정인에 대해 특별한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은 선에서 말이다.
하라 사이토와 같이 결백증이 강한 입장에서 리코는 자신의 미적인 감각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예전부터 계속 마찰이 있었다는 점에서 어떻게 이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 방법이 바로 상대방의 약점을 잡고 물고 늘어지는 방법이다. 책을 읽는 독자로선 하라 사이토의 방법이 매우 치사하게 보이겠지만(물론 치사하지만), 이것이 우리 현실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고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편집자의 후기에서 분명 나타냈기도 했지만, 학교라는 공간은 사회의 축소판처럼 여론으로 통해 마녀사냥하기가 참 용이한 곳이다. 더구나 학교는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군중심리를 자극하기가 참 좋다.
왜 리코가 메이드복을 입고, 퍼포먼스를 펼치는가? 대중은 왜 그런 리코를 기대하는가? 한 마디로 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나, 또는 학교 내의 대의회 역시 하나의 쇼라는 점이다. 쇼라는 이유는 이미 학생회에서 엔마에 대한 불리한 판결이 내리도록 사전에 수를 쓴 것과 동시에 정의라는 이름을 들먹인 것으로 모든 학생들을 피해자처럼 만들었다. 특히 검도부 1학년 후배는 그때 엔마의 모습을 본 것으로 큰 충격을 받아 더 심각한 피해자로 만들었다. 조용하고 정체된 사회에서 어느 외적인 침략자 내지 혹은 내적으로 반역자가 나올 경우 그들을 제거함으로써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단결력이 강해져 더 큰 결속력을 보여준다.
이것은 흔히 서사에서 말하는 Narrative적인 요소다. 쉽게 말하면 누군가는 나쁜 사람이 필요하고, 그 나쁜 사람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적으로 인식되어, 그 적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대중들은 정의로운 행동을 하게 된다고 믿게 된다. 그게 바로 니체가 가장 증오하는 모습 중에 하나인 것처럼 말이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에서 또 인상적인 말은 “우리의 가장 강항 충동, 우리 안의 있는 폭군에게는 우리의 이성뿐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도 굴복하게 된다.”라고 한다. 양심 그것은 무엇일까? 이미 대회의 이전부터 대회의 진행 도중까지 엔마는 자신의 초라하고 나약함에 두려움을 떨었고, 그는 사나운 염라대왕이 아니라 그저 연약한 남장여자였다.
이미 전교생에게 알려진 마당에 계속 학생회로부터 내려오는 비수 같은 폭언은 그녀로 하여금 심한 정신적 붕괴를 유도했다. 그러나 그런 비정상적인 존재는 세상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물론 그들에 대해 다소의 불쾌감 내지 이질감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으며, 그들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은 이상 그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지 그렇게 사는 것 자체에 대해 우리는 방관해주는 것이 오히려 자유라는 이름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자유라는 것은 타인에게 어떤 피해를 주지 않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단지 성별을 속이고 부활동을 하고, 연습까지 했다는 점에서 충분한 자숙과 근신을 처하는 것이 옳다.
리코의 행동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엔마의 탈의모습을 목격한 1학년 여학생이 큰 충격을 받아, 그것으로 인해 엔마가 퇴학을 당하여 학교에서 떠나면, 과연 그 1학년의 충격은 모두 없어지는 것인가? 뒤에 가서 분명 자신 때문에 엔마가 퇴학당하여 불우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학할 것이다. 대신 그녀가 자학할 순간에는 정의와 도덕을 외치는 자들은 무관심하게 그녀는 방치하고, 오히려 지나간 일에 매달리는 그녀를 두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정의와 도덕이란 이름을 보여주면 그 후에 일어나는 남의 일은 그저 개인의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리코가 엔마의 퇴학을 막은 이유는 3가지다. 1번째 엔마는 자신의 친구이기에 친구를 위해서고, 2번째 엔마가 자신의 처음 친구이기에 엔마가 없으면 외로워지므로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이고, 3번째는 검도부 여학생이 나중에 겪게 된 양심의 가책에 대해서였다. 그 1학년 소녀는 자신의 괴로움과 검도부를 위해 검도부장과 상담하여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 했으나, 한편으로 그 이유로 어느 개인이 비참한 상황에 맞이하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분명히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쇼가 이루어지는 대회의 시간에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란 없다. 단지 이분법적인 대립관계에서 어느 한 쪽 세력을 지지하여 잘나지도 않은 정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와 도덕은 다른 이유는 윤리는 약자의 입장과 더불어 소수자의 상황을 고려하지만, 도덕이란 이름은 절대적인 대다수의 입장만 견지한다. 엔마 같은 소수자들은 어느 사회에서 환영하지 못할 존재다. 또한 리코나 유우진 역시 그렇다. 리코는 부모가 없고, 유우진은 부모 없이 살다가 누나마저 눈앞에서 자살했다. 인간이 비틀어지는 이유는 처음부터가 비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비틀어지는 이유가 있다. 어느 일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 결과론적인 요소로서 사람들은 판단하나, 그 이면에 가려진 원인에 대해 충분한 고려를 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에 대한 판단은 결국 어리석은 기만에 불과할 것이다.
본문에서 리코의 반론을 잘 생각해야 한다. 그녀는 학생회의 하라 사이토에게 “윤리의 중요성을 부장하겠다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도덕만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해. 정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천차만별, 시대와 문화, 이들은 외적 요인에 쉽게 좌우되는 애매한 가치관이거든, 획일적인 가치관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사물의 본질을 간과할 수 있다니까?”라고 말이다. 현대사회는 이른바 사회적인 요소가 인간의 개인을 지배한다. 결국 인간이 문화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인간을 지배하고, 문화로 통해 하나의 사회적 양상까지 좌우되는 것이다.
문화적인 요건에서 상대방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 번역자인 MOEX의 후기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 과거 시대라면 인간을 나누는 것이 조선시대에 사농공상, 군주정인 유럽에는 왕족, 귀족, 평민, 농민, 노예라면 이제는 자본의 소유다. 자본이란 것은 단순히 경제학적으로 말하는 화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사회적 조건, 그리고 문화적 자본까지 고려해야한다. 문화자본이란 개념이 존재하듯이 사나 엔마의 문화자본은 여성의 삶을 강탈된 삶이었고, 그런 삶에서 고교생이 되는 순간 억지로 여자로서 삶을 강요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질과 양의 변증법에서 사나 엔마라는 존재가 살아온 시간에서 그녀는 여자보단 남자로서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여고생이란 정체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대회의의 사건과 그 사건이 원인이던 비밀의 노출, 사나 엔마는 대회의라는 계기가 하나의 통과제의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 것이다. 그렇지만 그 통과제의 과정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상식이란 것이 얼마나 인간의 생각을 옭아매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인간에게 큰 편견과 고정관념이 되는지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상식이란 것은 결국 대다수 사람들이 가지는 사고방식이나 그 사고방식이 되는 기본적인 정보가 일방적이거나 획일적인 가치라면 인간의 판단은 올바른 길보다 어긋난 길로 간다는 점이다. 사나 엔마가 마녀사냥 당해야하는 것처럼 인간의 판단력은 언제나 옳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2권까지 읽다보면 분명 리코는 기인이고, 특이한 인물이다. 절대 보편적인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기에 그 사회구조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틀에 갇힌 인간이 가진 사고방식으로 그 사회의 구조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을 잡을 수 없다. 오히려 그곳에서 벗어나는 인간이어야말로 그 사회의 틀을 보거나 바꾸어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도 리코에게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는 있었다. 친구는 소중하다고 말이다. 단지 상식적인 시선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점이고, 그래서 리코는 사나 엔마의 모든 것을 감싸줄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정의와 도덕이란 이름으로 무장한 편견과 오만으로부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