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을 두고 말하기란 참 어렵다. 인생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기간을 말하는 것이다. 인생의 가치는 결국 시간적 축척에 의해 현재 조성된 본인의 지금으로 통해 결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생을 그 누구의 판단으로 결정해야 하는지 아니면 타인에 의해 보이게 해야 하는지는 정말 어렵다. 가령 우리는 우리의 판단 아래 우리의 가치를 결정하기보단 타인의 관점에 의해 결정된다. 남들보다 좋은 차, 남들보다 좋은 집, 남들보다 좋은 여건 등에서 말이다. 물론 물질적인 만족에서 인생의 출세라는 목표는 보통 인간이라면 모두 가지고도 남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과 앞으로 살아갈 미래 그 모두가 인생이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라이트노벨 원작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인생>은 참으로 독특한 소재를 차용하여 만든 작품이다. 인생이란 말은 쉽게 사용하면서 막상 논하자면 매우 어려운 내용이다. 인생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시작하면 어디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일까? 인생은 사랑이라든지 혹은 고통이라든지 고독이라든지 다양한 말이 나온다. 철학에서 결국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 역시 인간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한 것 역시 인간의 삶에 대해 고찰하기 위해서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보다 그들은 지혜를 사랑했다. 단순히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은 남녀의 사이도, 부모의 사이에도 존재하듯이 사랑이란 이름은 어떻게든 여기저기서 사용되는 말이다. 하지만 지혜에 대한 사랑이란 앎을 알아가는 것에 대해 사랑이다.

 

알고 싶은 것은 그저 보고 외우는 암기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을 넘어 인간 그 자체를 과연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인간은 시간을 흘러 그 시간의 축척에 의해 현재의 모습이 결정화된다. 그런 만큼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이며, 비가역적인 시간으로 인해 살아있음이 있다면 분명히 죽음이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결국 죽어가는 것이고, 인간이 죽었다는 사실이 있었기에 살아있었다는 사실이 인정되는 것이다. 단 하나의 삶,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인생에 대해 논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아마 철학책 수백 권이 들이대어도 난해한 문제다.

 

2. 애니메이션 <인생>

결국 인간에 대해 생각하면 마지막에 본인으로 돌아가고, 그 자신에 대한 실존적인 존재를 의문하고, 거기에 대한 답은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루소의 자연주의적인 요소일지? 아니면 타인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지는 각자마다 다르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윤리학이란 결국 인간의 삶을 다루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말해주는 학문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삶이란 바로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지금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행복을 위해서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새로운 만족을 위해서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고, 그 인간의 시간들이 곧 인생이다.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 <인생>은 바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들이 오고, 그 고민을 위해 해답을 내는 것이 제2신문부원들의 업무다. 인생 상담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자? 만약 어떤 문제가 발생하거나 혹은 가지고 싶은 것이나 모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도저히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으로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면 그 사람은 분명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나이가 10대든, 20대든, 혹은 그 이상이 되어도 작은 문제가 발생하여 해결하지 못한 채 계속 주변을 방황하고 있다면 일상생활이 원만히 지나갈 수 없다.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인간은 자연 속에 살아가는 동물이 아니다. 동물들은 무의식적인 본능과 순간적인 감정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자신의 이성에 의한 판단력으로 살아가지 않는 존재이다. 인간이 가진 판단력이 있기에 인간은 동물이면서 사회화된 존재다. 인간은 사회화된 존재이기에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은 단순히 자신의 단순한 무의식과 감정으로 채울 수가 없다. 인간이 가진 미적 감각 즉 쾌 내지 불쾌라는 판단력이 존재하고, 바로 그 때문에 취향이 생기는 것이다. 인간이 아주 동물 중에 흔하게 볼 수 있는 참새처럼 배고프면 모이를 먹고, 잠이 오면 잠자고, 때로는 번식활동을 하는 것에 모든 삶을 바친다면 인간으로서 인생이 존재하지 않는다.

 

3. 등장인물들

인간에게 인생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여가생활, 즉 자신이 어디에 얽매여 기계처럼 단순작업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이다. 때로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서 타인의 목적과 부딪히기도 하여 갈등과 고통이 수반되기도 한다. 인생이란 어떻게 보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도 보여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완벽하게 배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인간은 스스로 노력하고 새로운 운명을 찾으려 한다. <인생>에서 많은 학생들이 고민 상담상자 속에 이런저런 사연을 보내준다.

 

다들 처음에 별로 없을 것이라 여겼지만, 점차 질문 횟수가 늘어나고, 제2신문부원에서 이과계열 리노, 문과계열 후미, 체육게열 이쿠미가 상담을 맡아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결과들을 제2신문부장의 사촌동생 아카마츠가 정리하여 준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아카마츠는 모든 경계선상에 해당되지도 그리고 접점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이과, 문과, 체육계는 서로 극성인 분야고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추후에 들어오는 예술계 에미까지 말이다, 왜 인생에 대해 이렇게 서로 다른 4명의 소녀가 모여 이야기 하는 것일까? 우선 이과에서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존재하고, 지식과 과학기술에 의해 삶을 유지했다, 그런 점에서 이과의 리노가 선택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기록을 문자로 남기고, 특히 역사서적으로 남긴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상상력으로 문학을 펼쳐 인간의 문화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문학의 후미가 선택되었다. 인간은 이성과 감정 앞에 무의식이란 것에 의해 더 작용을 많이 받는다. 조건적으로 반사하는 점에서 체육계 이쿠미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삶은 하나의 예술이라 했던가? 사실 인간의 삶은 그대로 바라보면 절대로 우리는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을 광학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하나의 가치가 아니라 어느 한 대상으로 통해 여러 가지의 시선을 남겨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에미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하는 조건이 성립된다.

 

4. 제2신문부의 설립

이들이 펼치는 고민 해결 상담은 문제를 받아본 상담자로서 혹은 그 문제를 안고 있는 고민하는 자로서 차근차근 숙제를 해결한다. 즉 우리 인간 그 누구도 고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없으며, 그 고민을 상담 받는 사람도 역시 고민이 있어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 <인생>이란 애니메이션에서 4명의 미소녀가 내놓는 답은 생각 외로 생뚱맞고 극단적이나, 그런 극단적인 요소가 서로서로 맞물리면 새로운 결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 결과의 마지막 숙제를 정리하는 것은 아카마츠다. 아카마츠의 역할을 보편적인 존재, 보편적인 사람, 보편적인 인생이다. 다른 부원과 달리 아카마츠의 장점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제11화에서 아카마츠의 사촌누나이며, 제2신문부장인 아야카의 말을 빌려보자. 11화에서 아야카는 학생회장의 부정을 밝히기 위해 제2신문부를 만들고, 자신만의 영역을 확대하려 했다. 그리고 새로운 학생회장으로 바로 아카마츠를 내놓으려 했다. 그런 점에서 아야카의 대사를 잘 들어야 하는 점이다. “각성해! 네 안에 잠든 사자의 혼을 깨워! 유우키는 질 가능성이 높은 싸움에서도 해야만 할 때는 결코 물러서지 않아. 그런 남자지(아카마츠는 여기에 대해 ‘너무 과대평가야. 그것은 시라카와 학생회장에게 깨질 각오를 일하라는 이야기지?’라고 대답)? 어째든 평소의 유우키는 눈에 띄지 않고, 물개성에 공부나 운동도 못하고, 특기도 없고, 재밌는 이야기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여자애를 좀 엉큼한 눈으로 보지만, 여차할 때에는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일 걸 알아.”

 

5. 아카마츠의 가치

이렇게 말한다. 아야카의 말에 아카마츠는 “플러스 치고는 너무 마이너스 평가다.”라고 대답한다. 아야카를 다정한 미소로 사촌동생인 아카마츠에게 “자신감을 가져. 유우키가 그런 성격이라 모두 안심하고 활동하는 거야. 엉뚱한 짓을 해도 유우키가 마지막까지 어떻게 해주니까. 리노도 후미도 이쿠미도 에미도 모두 그렇게 생각할거야. 사실은 의지하고 있을 거야. 나도 그래, 나 때문에 학생회장이랑 대립하게 되었는데, 불만 하나 없이 오히려 나를 지지해주잖아.”라고 말이다. 결국 학생회장과 싸우게 된 아야카는 다른 4인의 미소녀처럼 속성을 가지지 않은 미소녀지만, 1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저널리즘이란 기자의 정신이다. 신문부원인 그녀가 학생회장의 비리를 폭로로 인해 강제로 퇴출당하고, 제2신문부를 만들었으며, 다시 그 문제를 밝히기 위해 아카마츠와 4인 소녀를 부원으로 맞이한다. 저널리즘이란 결국 사실에 대한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한 공정성이 중요한 것이다. 기자의 업무는 부당한 권력에 대한 폭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고발에서 기자정신이 나온다. 5명의 미소녀들이 아카마츠를 의지하는 이유는 아카마츠가 너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카마츠가 유일하게 가진 것은 보편적인 가치관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보통 사람과 같다는 점이다. 합숙훈련 연습을 부실에서 할 때 자신이 가진 야한 책을 어디에 숨기는지 이야기할 때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남자고교생이었다. 보통 학생이고 자신에게 아무런 특기와 내세울 것이 없다. 그래서 유우키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곧 자신이 아무 것도 내세울 것도 없으니 그만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남의 말을 경청하거나 최대한 이해하려 해주는 것이다. 다른 부원들이 자신의 의견에 대해 고집하고 주장할 때 오직 아카마츠만 중간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최후의 답변은 그가 작성한다.

 

6. 아카마츠의 행동

물론 제대로 채택된 답변자의 코멘트도 올라가지만, 아카마츠가 모든 고민을 정리하여 부원들에게 알려준다. 그래서 리노가 친구를 사귈 수 있었고, 리노와 아카마츠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아카마츠는 내세울 것은 전혀 없지만, 1화부터 리노의 말을 잘 경청해준다. 이때까지 리노는 그 누구와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진 지식은 일반 고등학생이 가진 지식을 넘어선 것이고, 특히 이과계열에서 일반과학이 아니라 전문적인 물리학, 지구과학, 화학, 생물학으로 파고들어갔다. 이쿠미의 경우 운동을 좋아하므로 야구나 축구, 농구 등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후미 역시 평소 성격이 부드럽고, 문학계열이므로 다양한 소재로 통해 타인과 대화가 가능했다. 에미는 미술부에 원래 있었기 때문에 나름 부활동을 열심히 한 셈이다.

 

그러나 에미는 예술계로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광학적으로 바라보기에 그녀가 붓을 잡으면 광인이 되어 예술인으로서 새로운 세계가 등장한다. 물론 에미 역시 고립된 존재이기도 하나 자기만의 세계가 너무 강하여 감히 누가 옆에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런다면 에미 그 자체는 타인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개성이 너무 강했기 때문일 뿐이었다. 이에 반해 리노는 타인과의 교제를 무의식적으로 하고 싶으나 어떻게 할지 몰라 억지로 멀리하려 했다. 그런 공간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관심거리인 과학에 대해 귀를 기울여준 아카마츠가 등장했다.

 

아카마츠는 그저 처음에는 남들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부터 시작했으나, 사실 리노와의 사건으로 인해 점차 가까워져 갔다. 그리고 아카마츠가 혹시라도 다른 여자아이에게 관심을 주거나 뭔가 이상한 행동들이 보이면 리노는 무의식적으로 질투를 하기 시작했다. 추후에 자신이 제일 귀엽다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투표를 할 적에 아카마츠는 리노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리노에게 가장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다수의 미소녀에 남자 1명이란 하렘구조가 외부로 드러나지만, 사실상 애니메이션 <인생>에서 하렘적인 요소를 제거되었다. 게다가 리노와 아카마츠의 관계를 보면서 오히려 옆에 친구들이 응원해주는 모습과 고교생이 되어도 여자 친구 한 명 제대로 사귀지 못한 아카마츠를 두고 설교하는 아야카의 모습에선 이 작품이 보통의 애니메이션처럼 미소녀를 간판으로 내걸지만, 결코 미소녀연애시뮬레이션이나 하렘 같은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았다. 따라서 <인생>이란 제목과 같은 작품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7. 시학(詩學)

아카마츠가 결코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니나, 그가 구심점이 되는 이유는 바로 위에서 거론한 것처럼 그가 보여준 보편적인 정신이고, 그 보편성은 윤리적인 의식이다. 타인에 대한 절대적 가치에서 공공선, 최소한으로 지켜주는 선이 아니라 그 이상의 공동선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가 학생회장에게 맞선 것과 골치 아픈 일들을 도맡는 것에서 아카마츠의 인격이 나온다. 그리고 아카마츠 중심으로 부원들이 일상생활을 보여준다. 그 일상생활이란 남들의 고민을 듣고 해결하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 들어오는 고민들은 너무 거창하거나 너무 대단한 것보단 언제 어디서 누구나 생각할만한 고민 상담들이다.

 

따라서 <인생>은 거대한 이야기를 중심이 아니라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구조를 이룬다. 물론 최종목표는 학생회장의 타도이고, 그 과정에서 제2신문부의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상담활동을 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poetics)에서 아주 유명한 문구가 있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 시는 바로 그 누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고, 역사는 어느 특정인물의 기록이다. 물론 <인생>에서 어느 누구의 고민 이야기는 작품에서 하나의 역사로 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역사적 가치는 주류적으로 정치적인 큰 영향력이 있을 경우 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책에 소년 A가 소녀 B를 사랑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는 <춘향뎐>에서 나올만한 이야기다.

 

<인생>의 고민 코너는 우리가 살면서 흔히 부딪히는 문제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우리의 고민이 저런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었지! 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고민을 상담하여 해결하는 과정에서 너무 누구나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요소도 있었지만, 이른바 정론이란 것이 존재했고, 단지 정론으로 풀어나갈 상담에서 좀 더 이런 관점에서 보는 것이 어떨까라는 것을 강조했다. 우리 인간은 거대한 문제로 고민하기보단 오히려 사소한 것들로 고민한다. 아주 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손을 쓸 방법도 없고 바꿀 수 있는 여지도 없다. 국가경제나 세계평화 같은 큰 문제를 우리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소한 것들은 얼마든지 생각하고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소한 것에 짜증을 내고 웃고 울기에 고민하는 것이다.

 

8.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추구하는 존재인가?

<인생>이란 제목처럼 이 작품은 인생에 대하여 상담을 받는다. 그렇다면 인간이 결국 무엇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질문에서 그 해답은 행복이다. 행복이야말로 인간이 최종적인 목표고 희망사항이다. 여기에 덧붙여 행복을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처음에 이 글에서 인간은 재력과 권력의 척도로 행복으로 연결될 수 있겠지만, 결국 그것도 타인의 존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고, 인간 그 자체가 사회화로서 자기의 실제적인 모습을 은폐되고, 허례허식적인 모습만 나올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그 행복은 어떻게 해야 나오는가? 그것은 <인생> 5화에서 나온다. 5화에서 제1신문부와 제2신문부의 통폐합 승부에서 각 팀에서 3명씩의 발제자가 나와 서로 토론을 벌인다. 처음에 리노와 땡중, 이쿠미와 제1신문부, 그리고 마지막이 후미와 후미의 할아버지다. 제3파전의 후미와 할아버지의 대화는 이 작품에서 나오는 <인생>이란 제목을 정확하게 알게 해주는 것이 나온다. 후미와 할아버지 대화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어느 질의한 사람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다가갈 수 없는 꿈이라면 바로 그 목표인 꿈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을지에 대한 질문을 시합에 의뢰한다.

 

토론을 하다가 할아버지가 십자창을 휘두른 후에 정신집중으로 얻은 답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꿈을 가지지 않아도 결과를 낼 수 있다고 했지? 하지만 꿈이란 성과를 내기 위해 갖는 게 아니다. 꿈이란 사람의 삶의 모습 그 자체다! 이 세상에 태어나 한번 밖에 없는 자신의 인생을 살기 위해 꿈이 있는 게다. 결과는 꿈을 갖는 것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후미는 “저도 집중할게요. 마치 최종화인 것처럼. 지금까지의 경험과 기억을 전부 불러들이겠어요. 너무 집중해서 떠올릴 범위를 좀 넘어버렸지만, 인생을 빛나게 하는 것은 꿈만이 아니에요. 인생을 빛나게 하는 것은 사람이에요. 소중한 사람과 보낸 시간이 인생을 빛나게 해줘요. 니노, 이쿠미, 아카마츠, 소중한 사람들과 보낸 나날이 제 인생을 빛내주고 있어요! 물론 할아버지와의 시간도요. 할아버지 늘 고마워요.”

 

9. <인생>의 목표는 행복

<인생>의 작품 외적인 결론은 11화에서 아야카가 아카마츠를 차기 학생회장으로 추천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적인 결론, 즉 <인생>이란 애니메이션 인생이란 타이틀로서 말하는 결론은 5화에서 나온다. 바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에서 꿈이

중요한지 아닌지에서 결국 꿈은 없어도 살 수 없지만, 인간이 인간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요소는 프랑스 문학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란 가명으로 적은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랑이란 단순히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남녀의 사랑만이 아니라 자기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이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면 꿈이 없어도 행복하고, 그 공간에서 꿈과 목표가 생기는 것이다. 그 목표는 이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다는 것이다.

 

고민 상담을 하는 사람들이 그 고민이 해결하는 순간 얼굴에 미소가 만발하여 다시 일상생활에 돌아온다. 그렇지만 또 다시 다른 고민에 빠지고 또 거기에 대한 근심이 생긴다. 인간은 한 번 태어난 이상 고민과 근심을 버릴 수 없는 존재다. 물론 힘들기도 하나 그것이 해결되면 하나의 성취감으로서 큰 행복이 온다. 그렇지만 행복은 혼자만 즐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옆에 아무도 자신의 감정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결국은 외톨이란 점이다. 위에서 왜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다 리노와 아카마츠가 나왔는가? 리노는 이때까지 자신의 생일을 한 번도 챙기지 않은 소녀이고, 거기에 대해 아카마츠와 친구들은 리노의 생일을 챙겨준다.

 

생일을 챙겨주는 이유는 단지 리노가 친구로서 좋아하기 때문인 것이다. 친구들이 서로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역시 기분 좋은 행복이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이 행복함을 느끼기보단 모두 나누면 그 배가 되는 것이다. <인생>에서 리노의 첫 모습과 마지막화의 모습을 보면, 처음에 차갑고 외로운 소녀이나, 마지막엔 사랑에 빠진 평범한 소녀로 등장한다. 자신에게 아무 것이 없다고 생각한 리노가 자신에게도 의지하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후미가 말한 것처럼 사랑, 우정은 소중하다.

 

10. 우리들의 삶과 <인생>

그것은 우리 인간들을 하나의 도구가 아니라 그 존재 객체로서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최근 산업화 이후 자본주의 급속화로 세상은 모든 것은 물질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친구 사이에도 손익분기점을 따지면서 가린다.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물화(物化)되었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인간적인 요소로서 대해주는 게 아니라 계속 도구적 가치로 남아버린 것이다. 남을 도구로 보게 되면 자기 자신조차도 도구로 전략하고, 인간이 도구로 된다는 것은 결국 소외되어 고립되는 셈이다.

 

그런 인생이 과연 재미있을까? 물론 물질적인 부와 권력이 넘치면 좋겠으나, 마이다스의 왕처럼 자신의 손에 닿은 모든 게 금이 된다면 그는 영원한 외톨이로 살다 죽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인간에게 인간이 가장 필요하기 때문에 가장 저렴한 존재가 되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인간을 착취, 억압, 방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다른 것은 모르지만 친구의 소중함은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인생>이란 애니메이션은 후미의 버스트 무빙(여자의 몸과 가슴이 따로 움직이는 장면) 내지 판치라(치마 아래 팬티가 보이는 장면)가 종종 보이지만, 예고편에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후미가 좋아하는 이야기로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인 <달려라 메로스>가 중요하다.

 

<달려라 메로스>는 고대 그리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메로스가 난폭한 왕에게 반항하다가 붙잡혀 며칠 후에 처형된다. 그런데 메로스에게 하나뿐인 아름다운 여동생이 있고, 그 여동생은 어느 남자와 결혼한다. 죽기 전에 메로스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왕에게 간청하나, 왕은 그것을 보장하기 위해 메로스의 친구를 대신 감옥에 갇히게 하고, 만약 메로스가 기일에 오지 않으면 메로스를 살려주나 친구를 대신 처형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메로스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다 본 후 다시 처형장으로 가야 하나 마지막까지 고뇌하고 방황하지만 결국 친구와의 약속을 지킨다. 메로스를 믿어준 친구, 그 친구를 살리기 위해 달린 메로스의 우정이 <인생>이 보여준 작품의 테마가 아닌가 싶다. 친구는 역시 소중하다. 그것은 나이가 먹거나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되어도 유일하게 받아줄 사람들은 가족과 친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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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연필 2014-11-1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니코윤리학을 보게 될 줄이야!! ㅎㅎㅎ

만화애니비평 2014-11-11 12:45   좋아요 0 | URL
오덕력은 뭐든지 통합니다
 
현대인의 교사 루소 - 루소는 에밀을 어떻게 가르쳤는가
김상섭 지음 / 학지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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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루소에 대해 생각하면 보통 나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인권을 주장한 사상가로 생각해왔다. 물론 그는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와 <인간불평등기원론>으로 통해 인간사회가 가진 억압과 고통에 대하여 진지한 비판과 그만의 독특한 상상력으로 문장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곧 하나의 철학이 되었다면, 카를 마르크스가 제기한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를 읽게 되면, 루소는 카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드,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사상가와 혁명가들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런 루소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카를 마르크스의 경우에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에 나온 이 문장에서 이때까지 철학은 세상을 계속 해석해 오는 것에 충실했다면, 그 해석을 하는 철학이 결국 탐구하고 보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탐구대상의 영역이 무언가 오류나 잘못된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거기서부터 단순히 비판하여 고찰만 해야할 철학에서 실재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실천철학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철학은 당시 사회인 프랑스 계몽주의 물결에서 볼테르나 디드로 같이 단순히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기보단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계몽주의 철학자와 달리 루소는 엘리트이면서도 엘리트인 것에 치중하지 않았다. 사실 볼테르와 루소가 프랑스 파이에 있는 팡테옹이란 신사에 나란히 묻혀 있다고 해도 두 사람의 계몽주의적인 요소를 그 만큼 달랐다. 볼테르는 지식인 중 뛰어난 사람들에 대한 우월주의적인 요소가 있었다면 루소는 그들과 달리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결국 마르크스가 제기한 것처럼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결국 위에 있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이 세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서 핍박받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에서 변증법적으로 물질이 사회구조를 변화한다는 것처럼 당시 프랑스 사회는 빈곤한 하층민의 삶은 그야말로 비참했던 것이다. 루소의 사상이 왜 그렇게 변화를 주었는가? 사실 왕정사회에서 국민이란 그저 왕에 의해 통치를 받는 사람이고, 그들의 재산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왕으로부터 얼마든지 수탈당할 수 있는 위치였다. 심지어 목숨조차도 왕이나 귀족의 노여움에 의해 보장받지 못할 경우도 있었다.

 

이렇듯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은 단지 권력자들에 의해 모조리 박탈당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루소의 <에밀>을 읽게 되면 그가 본 사회는 참으로 위태로운 것은 분명했다. 왜냐하면 <에밀>이 발간된 시기는 1762년 당시 유럽 어느 사회든 왕이 통치하지 아니한 국가는 거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프랑스 루이16세가 지배하던 왕정국가에서 그 이전의 루이14세는 태양왕으로서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왕권신수설까지 도래한 시기다. 무너지지 않을 듯한 철벽같은 왕정시대에서 <에밀>에서 이제 곧 혁명이 도래할 것이란 위험한 말이 등장한다.

 

지금에 와서 역사적인 흐름을 본다면 혁명이란 것은 최근에 한국에서도 일어난 운동이고, 세계적으로 혁명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 혁명의 원인을 찾아보면 민주주의 국가체계에서 헌법을 명시한 국민이 곧 국가의 주인이기 때문이란 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소가 살던 시대에는 국가의 주인은 곧 왕이었다. 왕이 모든 것의 주인이던 시기에 루소의 발상은 그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상이었다. 바로 그런 사상이 세계를 움직이게 만들었고, 18세기를 지나 21세기까지 그의 사상은 여전히 우리를 흔들고 있다.

 

그렇다면 단순히 정치철학 내지 사회혁명으로서 루소의 가치를 보는 것에 대해 내가 개인적으로 주안을 두었다면, 이번에 읽은 도서는 조금 다른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자연적이고 그 존재는 자유로우나 이미 세상 도처에 널려 있는 사슬에 의해 억압의 사슬로 묶여 버린다. 인간이 태어나는 이상 사회화라는 것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이다. 인간이 사회에 발을 들이는 순간 인간은 또 다른 야만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 야만의 세계란 무지몽매하고 물리적 폭력이 난무하는 미개한 야생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잔혹한 야만성이 가득한 사회라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에서는 폭력에 의한 물리적 타격은 없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말과 그리고 오묘하게 숨어있는 질투, 시기, 모함 등이 존재한다. 루소가 왜 그토록 인간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을까? 루소가 말한 자연이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장 자크 루소의 <식물사랑>을 보듯이 루소가 아주 평화로운 들판을 걸으며 발견한 식물을 채집하여 그 식물이 무엇인지, 그 식물의 외형은 무엇인지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 편지처럼 자연 그 자체가 존재하는 세계 1가지가 있다. 이에 반해 다른 1가지는 인간 사회의 자연성이었다. 인간에게 수렵이나 채집과 같은 농경산업 이전의 비문명사회로 가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본연의 마음에 접근하여 인간 그 자체로서의 본질에 다가가는 자연성이었던 것이다. 가령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 물들여 살아가고 있다. 세속에서 하나의 도덕으로 작용하여 그게 가끔 좋은 것으로 비추어질 때도 있겠지만, 대부분 세속적인 가치가 인간에게 유용한 게 아니라 하나의 허례허식 내지 남을 깔아뭉개거나 혹은 차별하는 도구로도 사용된다. 루소는 바로 그런 세속적인 인간에서 인간의 사회성이 결국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본 것이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인간이 가진 잔잔한 재주는 어쩔 수 없더라도 자신이 가진 재주 내지 재산, 권력을 뽐내기 위해 억지로 자신만을 돋보이려는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재물과 재화를 소모시키는데, 그로 인해 많은 가난한 농부들이 밀가루를 구할 수가 없어 빵을 먹을 수 없는 것도 지적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밀가루는 당장 급하게 구입해야 하나, 그들에게 가진 가난함은 오히려 절실하지 않으나 얼마든지 밀을 살 수 있는 자에 의해 그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밀이 절실하게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만큼 밀이 아니더라도 다른 것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여유가 넘치기 때문이다. 그런 여유만큼 얼마든지 구매하고 소모시킬 수 있으므로, 절실하게 원하는 자에게 밀이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사회에서 인간이 가장 소중하고 귀중한 것이나, 인간이 가장 필요한 존재가 인간이므로 결국 가장 비참하고 저렴한 존재는 인간으로 되는 것이다. 루소가 그런 인간들의 모습을 본 것은 어린 시절 농부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던 때이다. 굶주림과 긴 여행으로 허기진 루소는 어느 농부의 오두막에 가서 먹는 것을 달라고 하자, 농부는 아주 형편없는 빵과 음식을 내어주었다. 그런데 루소는 그것을 아주 맛있게 먹어치우자, 농부는 자기가 숨겨둔 좋은 치즈와 음식을 내어주었다. 루소가 보통 농민과 달리 좋은 옷을 입고 있었기에 자신의 재산을 빼앗으려 온 줄 알았지만, 루소가 단지 배가 고픈 사람이란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경험으로 루소는 자신의 인생가치를 바꾸게 되고, 후에 가서는 귀족적인 의상에서 아주 간편하고 소박한 의상으로 바꾸게 된다.

 

루소가 경험한 사회에서 이런 농부들의 행동, 파리 도시에 가서 본 비참한 거지와 빈곤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결국 루소는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점과 거기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루소가 그것을 인지한 지점에서 인간은 어떻게 하면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게 바로 <에밀>인 것이다. 이미 그가 추구한 자연적인 인간들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신이 자연적인 인간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문학적 요소로서 만든 교육철학 도서가 <에밀>이고, 그것은 프랑스대혁명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혁명이 되게 하는 큰 구심점이 되었다.

 

에밀은 어느 귀족의 아들로서 부모는 없고, 오로지 에밀의 후원자 한 사람인 장 자크가 맡게 된다. 에밀에 대한 교육방법은 지금과 다르게 매우 혁명적이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인 현재에서 에밀에 대한 교육방법은 민주주의적인 요소가 매우 잘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한계성은 에밀을 두고 일대일이란 교육시스템은 어려우나, 그런 시스템적인 요소를 조금 다르게 해결한다면 인간을 두고 새로운 가치관을 부여할 수 있던 것은 분명했다. 가령 20세기부터 경제성장과 물질문명의 지나친 발전은 인간이 가져야할 인간성을 파괴하고, 가족관계는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이어지고, 가정환경은 자녀들에게 학교라는 단체교육기관에 위탁하도록 만들었다.

 

옛날 교육체계는 학교나 혹은 학교 이전의 교육기관이 있더라도 집안 자체가 대가족이고, 아버지와 어머니, 심지어 할아버지와 할머니, 삼촌, 고모 등이 같이 살았기에 얼마든지 교육의 경로가 존재했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이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인간이 사회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배워야 하는 교양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경제적 요건의 변화는 모든 가족의 해체로 이어지고, 아이들은 더 이상 가족의 보호가 아니라 타인의 위탁으로 이어진다. <에밀>에서 에밀은 자신의 가족이 아닌 가상의 후원자에게 맡겨지나, 적어도 그들은 피가 이어지지 않을망정 하나의 가족과 같았다.

 

가족의 중요성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심리적인 안정을 추구하고 있으므로, 심리적 안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뭔가 집착하거나 또는 불안해진다. 우리 사회의 교육은 그런 불안한 아이들에게 계속 억지로 주입하거나 틀에 맞추어지는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은 청소년들의 비행이나 왕따, 그리고 소외다. 그런 청소년들이 어른으로 성장하면 그들이 경험한 것에 의해 새로운 고통이 반복되고, 그 영원한 고통과 고뇌의 순간을 단절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을 대안적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의 자연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 회복은 인간이란 비록 완전하지 못해도 그 인간성 자체에서 완전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배운 학교생활은 그저 판옵티콘에 갇힌 죄수와 같았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할 수 없이, 그저 주어진 것만 받아들이어야 하고, 그것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면 처벌로 이어진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처럼 이미 우리 인간은 학교라는 공간조차도 수용소의 한 자락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인간에게 그런 사회화란 것은 누구에게 속박당하고, 거짓과 위선으로 상대방을 속이는 기술만 배운 것이다.

 

정작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말이다. 단지 사회에서 정해져 준 가치란 결국 성공이란 것인데, 그 성공은 출세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삶에서 우리의 성공의 가치는 결국 인간이 가진 재력과 권력으로 측정되어 버렸다. 루소가 가장 안타까워한 것은 결국 재력과 권력이 중심이 되면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오늘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그 <레미제라블>의 정신적 토대가 되는 루소의 사상 역시 지금도 묻고 있다.

 

<레미제라블>에서 비참한 사람들은 단지 자신만 비참한 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그 비참함은 대를 이어 계속 물려주고 언제 끝나지도 않을 것만 같은 시간지옥 같았다. 인간은 자신을 누군가에게 팔리지 않을 정도로 가난하면 안 되는 것인데,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언제라도 버려야 하는 그런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루소는 그런 사회가 결국 인간의 자연성을 찾지 못한 것이라 보았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자연성이란 숲과 강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본연의 마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누가 아프거나 다치면 그것을 보고 당연히 도움을 주어 그가 제대로 생활해야 한다는 공동선을 추구해야 하는 점이었다.

 

<에밀>에서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에밀이 사랑하는 여인 소피가 에밀을 기다리고 있는데, 에밀과 에밀의 스승이 약속시간까지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아본 바, 어느 누가 심하게 다쳐 도저히 몸을 가누지 못할 때, 에밀은 그를 간병하고, 의사를 부르러 갔으며, 그의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위로한다고 늦었던 것이다. 결국 타인이 처한 어려운 처지를 보고 당연히 도와주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좋아하는 즐거움조차 포기했다는 점이다. 그런 판단력을 갖출 수 있는 인간, 그것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라 보는 인간이 루소가 추구한 <에밀>의 내용이었다.

 

물론 이런 내용이 아니더라도 <에밀>에서 보여주고 들려주고 생각해야 할 내용들은 너무나 많다. 에밀은 자신이 부유한 재산이 있더라도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편안하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마을의 이웃과 즐거움 삶을 살기를 택했다. 자신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삶을 정하고, 때로는 타인을 위해 같이 힘을 합치며 모두와 조화롭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루소가 바라는 이상적인 삶이란 바로 저런 것이 아닌가 싶다. 단지 루소가 추구한 것은 인간의 본연의 자연적 모습이라면, 더 나아가 칸트와 롤즈는 이성적인 요소로서 사회적 자유를 본 것이다.

 

물론 루소 역시 이성을 중시했다. 그의 저서인 <사회계약론>은 인간은 동식물이 위치한 자연에서 살 수 없기에 사회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이 그 주인이 되어 일반의지로서 자신의 자유를 찾아가는 것을 원했다. 결국 인간의 교육은 사회화라는 흐름에 가겠지만, 그 사회화에서 자연적 본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타인의 평가로부터 관찰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로서 평가하여 판단하는 게 타당했던 것이다. 이성을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그게 결코 이성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성을 활용하는 방법에서 자신의 이기심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런 대다수 군중의 이기심은 전체의지로 변하여 일반의지를 대체하게 된다.

 

일반의지란 결코 모든 것을 바꾸는 절대적 힘이 아니라 어느 방향을 향하여 길을 제시하고 안내해주는 등불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은 전체의지로서 일반의지를 파괴하고, 그것이 하나의 도덕적 가치관으로 이어진다. 그런 전체의지를 두고 니체는 군중의 허상으로부터 벗어나기 바란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실존주의적인 인간상은 니체 이전에 이미 루소가 정립하였으며, <에밀>을 읽더라도 인간은 자연 그 자체로서 살아가는 것조차가 실존주의적인 인간상이었다. 실존적인 존재이므로 자신의 판단력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하지만 그런 인간을 만드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다.

 

그런 점에서 루소는 인간을 만드는 것은 타인의 손에 의해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찾아가도록 길을 제시해야 주는 것이었다. 그 경로에는 처음에 인간은 자기애에 의해 이기심이 발동하지만, 그 과정조차도 타인에 대한 배려로 이어지도록 유도한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본인이 가장 소중하다. 이런 자아와 타인에 대한 존재를 스스로 인식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에서 인생의 참모습 그리고 더 나아가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으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있다. 그 작품에서 주인공 이카리 신지는 14세의 중학생으로 아직 개인의 자아가 확립되지 못한 채,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무관심, 어른들은 오로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만 강요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언제나 자신을 스스로 몰아넣고 외로움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본다면 우리 사회의 청소년과 이카리 신지의 모습은 큰 차이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라 그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학교라는 교육기관이 인간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사회라는 전체적인 구조가 인간을 형성하게 만든 것이다. 에밀이 그렇게 성장할 수 있던 계기는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자 하는 어른이 존재이고, 그 존재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지난날의 모습이 옳지 못한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루소의 서적에 나온 문구들은 너무나도 훌륭하여 <현대인의 교사 루소>에 나온 루소의 글들을 보는 내내 나는 감탄을 마지못했다. 왜 칸트가 매일매일 일정한 시간에 산책을 하는데(칸트 동네 사람들은 칸트가 산책 나오는 시간을 보고 현재 시간을 알았을 정도였다.), 루소의 <에밀>을 읽는 것 때문에 몇 번 그 산책하는 시간을 깜빡했다고 한다.

 

<에밀>만 아니라 다른 서적에서 생각지도 못한 문구와 너무 인상 깊은 단어는 내 가슴을 움직인다. 루소는 다른 철학자와 달리 그의 서적을 읽으면 마음에서 뭔가 불타오르는 느낌을 받는다. 철학은 차가운 이성으로 볼 것으로 여길 수 있으나, 루소는 뜨거운 영혼을 우리에게 불어넣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저자는 교육철학자이기에 다소 책 내용이 어려우나, 제4장에 나온 그의 테제는 아주 인상 깊었다. “사상가 루소는 유명한 제자 에밀을 창조했지만, 학습자 에밀은 휼륭한 교육자 장 자크를 창조했다.”

 

우리는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단지 교육자란 이유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려고 하지만, 사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 역시 학생들로부터 충분히 교육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직 학생들의 이성적 수준과 지성의 범위가 넓거나 깊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나, 그들이 품고 있는 상상력과 창의력은 교사보다 더 월등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죽이는 것만 권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자연적인 모습을 파괴하고 억압하고 파멸시키고 있다. <현대인의 교사 루소>처럼 루소가 현대인들의 교사가 되어야 할 점은 인간이 인간처럼 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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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볼리바르 -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자 서해역사책방 17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조재선 옮김 / 서해문집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볼리비아라고 하는 나라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남미에 위치한 나라, 이름은 분명 어디서 들었지만 잘 알 수 없는 나라, 혹은 조금 더 잘 알 수 있다면 1960년대 아주 유명한 혁명가 체 게바라의 마지막으로 발을 들였던 곳으로 알 수 있다. 체 게바라는 혁명을 위한 투쟁 중에 볼리비아 산중에서 총에 맞고 죽는다. 그의 한 손을 잘린 채 그의 시체는 볼리비아에 묻힌 셈이다. 체 게바라가 활동하던 그 냉전시기 이전에 아주 명망 있는 혁명가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시몬 볼리바르, 볼리비아라는 국가이름이 된 이유는 볼리바르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이름으로 통해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볼리바르의 이름과 얼굴은 남미 세계에서 상당히 많이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위대한 혁명가였다. 남미의 혁명은 서유럽과 북미대륙과 다르게 조금 뒤에 일어난 혁명이다. 그 혁명의 발원지는 서구사회도 아니고, 게다가 백인종이 주류가 된 국가도 아니다. 오히려 백인들이 와서 인디오나 인디언을 무참히 학살하고 나서 노예로 만든 비참하고 슬픈 역사가 숨은 나라들이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에서 남미국가가 보인 지난날의 상처들을 보여준 편이 있었다.

 

자신들의 문화가 소멸하고, 억지로 터전을 잃은 가난한 원주민들의 이야기에서 남미는 그야말로 한이 서린 국가라고 볼 수 있다. 북미에 아메리카가 건설되는 것과 달리 남미에서는 처음부터 식민지로 되었기 때문에 독립국가 도래는 상당히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게다가 북미의 독립과 남미의 독립은 개념이 달랐다. 북미의 경우는 기존 아파치를 비롯한 수많은 인디언 부족들을 내몰고 독립 국가를 세웠다는 점이고, 남미의 경우는 원래 원주민들이 다시 자신의 국가를 되찾으러 간 것이다. 자신들의 낙원을 찾기 위해 타인의 낙원을 파괴한 역사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세계역사는 서구중심사회이므로 유럽의 혁명은 매우 대단하게 다룬다. 물론 프랑스대혁명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조차 만든 거대한 사건이나, 사람들은 그것 외에 다른 것을 보려 하지 않는 점이다. 프랑스대혁명이 왕정시대의 막을 내리게 했다면, 남미의 혁명은 식민지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했다는 점이다. 혁명이란 기존의 체계를 전복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프랑스대혁명은 프랑스 공화국 이전의 왕정을 국민들이 무너뜨린 것이기에 프랑스 그 자체의 주인만 바뀌었다면, 남미의 혁명은 식민지에서 노예로 살아야했던 원주민들이 이루었기에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혁명의 시대를 만든 사람이 바로 시몬 볼리바르라는 인물이다. 19세기 후반혁명과 18세기 후반의 혁명에서 사상적 근본에서 19세기부터 카를 마르크스가 주도했다면, 그 이전에는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이 주도했다.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 발견자, 루소>를 읽다보면 마르크스조차 루소의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루소의 사상이 남미까지 흘러오게 된 동기는 이 책의 저자인 핸드릭 빌렘 반 룬이 밝힌 것처럼 루소의 <emile>을 시작하여 <사회계약론>, 그밖에 볼테르, 몽테스키외, 디드로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철학을 남미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 구체제의 낡은 사상은 시대적 흐름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사상들이 계속 세계를 돌아다니며 세상을 변화하려 했다. 철학자들은 세상을 다양하게 해석을 했으나, 정작 중요한 것은 철학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이 틀렸고, 무엇이 문제고,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노예근성이 생기는 이유는 타성에 길들여진 이유도 있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고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다. 자신들이 지배받는 것을 하나의 정당성으로 여기게 만드는 사회에서 어떻게 피지배계급이 그 문제를 생각조차 할 수 있을까?

 

세계의 역사, 그리고 인류의 문명을 들여다보면 온갖 착취와 폭력 그리고 억압으로 가득 찬 사슬의 세계이다. 그 사슬로 묶인 공간에서 오로지 사슬을 풀려고 한 사람들은 피지배계급들이나 그들을 항상 앞에서 이끈 자들은 지식인 내지 권력을 충분히 가졌던 사람이다. 그들은 사고를 통해 현실을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갖추었고, 자신의 이익보다는 타인에 대한 윤리적 의식이 있었기에 혁명이 가능했다. 사상적 중심과 행동하기 위한 냉철한 이성이 갖추지 못하면 그저 민중의 봉기는 단순한 난으로 끝날 수 있다. 따라서 지식인의 양심과 행동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이유는 그들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안다는 점이고, 어떻게 하면 하나하나씩 실타래를 풀어 문제를 정리해 나갈 수 있는가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항상 좌절과 시련 그리고 비참한 운명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당통도 그러하고 로베스피에르도 그러하다. 마르크스는 가난과 질병, 가족을 잃은 고통에서 먼 이국에서 죽었으며, 수많은 혁명가들이 그런 운명으로 사라진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의 비극과 고통에 후회보다는 늘 새로운 목표를 향하여 힘들게 걸어간다. 시몬 볼리바르 역시 그러하다. 아주 명석한 두뇌를 가진 그는 식민지에서 태어난 부유한 스페인 후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과 달리 똑똑했으며, 학교선생이나 가정교사에 대해 항상 골려주는 것을 좋아한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삼촌인 시몬 로드리게스라는 친척은 볼리바르에게 새로운 바람이었다.

 

자연인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 로드리게스는 루소의 열렬한 신봉자였고, 자신이 배운 지식을 볼리바르에게 전해준다. 루소의 사상에서 자연주의적인 철학은 모든 인간은 자연적으로 자유로우며, 그 누구에게 속박 받아서는 아니 되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사상은 볼리바르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볼리바르는 우연히 만난 혁명가 미란다를 만나 혁명군 장교로 시작하여 계속 베네수엘라를 시작하여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 5개의 나라를 해방한다.

 

그 해방을 위해 자신은 귀족 집안인데도 또한 거대한 재산이 있음에도 모든 것을 버리고 이성으로 입각하여 평생을 헌신했다. 많은 나라를 해방했으나, 같은 편에서 벌어진 배신과 소중한 친구의 죽음은 그로 하여금 병들게 했다. 최초의 남미 대통령이면서도 가장 가난하게 죽은 대통령, 그가 죽을 때 깨끗한 셔츠조차 없다는 말에 혁명가는 평범한 죽음조차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각인한다. 그가 죽기 전에 한 말인 “꺼져가는 생명이여, 이제 너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는 죽음뿐이구나.”라는 것은 볼리바르가 그동안 해놓은 일들이 거품처럼 사라진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는 해방된 남미가 다시 분쟁으로 가면서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이 세상 모든 것과 화해하기로 한다. 즉 죽음의 안식을 기다린 것이었다. 볼리바르의 죽음은 매우 애석한 영웅의 뒷모습이었다. 그러나 20세기를 지나 21세기로 오면서 남미 역시 자유와 평등의 물결이 일어나고, 국민들은 항상 억압받는 자에서 자신의 인간임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물론 이제 막 시작한 걸음마이나, 그런 기반에 시몬 볼리바르의 영혼이 숨어있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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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코치 K 2 - 내 안의 불협화음
이진 지음, 재수 그림, 조벽 외 감수 / 해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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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말하는 꿈이란 무엇일까? 지금 당신들에게 나는 질문 1가지를 던지고 싶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혹은 그 대상이 어른이라면 당신의 아이들의 꿈은 무엇입니까? 참 어려운 질문이다. 꿈이란 것은 우리가 잠을 자면서 수면 중 이미지로 보는 환상이 아니라 자신이 언젠가는 되고 싶은 미래의 모습이다. 시간은 앞으로 흘러가지 뒤로는 되돌아가지는 못한다. 1번뿐인 인생에서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아니면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인생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오직 자신만의 것이어야 했다.


‘것이다가 아닌 것이어야 했다.’라는 말은 결국 우리는 꿈을 꾸기는 하지만, 우리의 꿈이 아니라 타인의 꿈을 자신의 것으로 해야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것뿐이다. 따라서 취미생활을 하는 것은 직업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우리의 꿈이나 또는 자아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정해진 틀에만 끌려가면 항상 우리의 마음은 촉박한 시간관념 아래 자신을 감옥으로 내몰 것이다.


<감정코치K> 2권에서는 그런 학생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공부를 잘하고 외모도 단정하며, 심지어 아버지는 국문학과 교수, 어머니는 학교 교사이다. 그리고 그 부모들은 하나뿐인 딸에게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학교에서 공부하기보단 더 좋은 곳을 보라고 한다. 보는 순간 참 답답한 모습이었다. 자신의 딸은 그러면 자신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은 타인에게 도덕적이고 존경받는 사람처럼 되고 싶어 하면서 정작 중요한 상황에서 결국 자신의 이익으로 가게 된다. 그런 부모의 이중성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다른 부모라면 몰라도 교육자라는 부모들은 그런 도덕적 가치를 떠나 더 윤리적인 가치를 요구되는데 말이다.


그 교육자의 아이인 학생은 공부를 최고이나, 자신의 친구 중에 춤을 좋아하는 학업성과가 부진한 소녀가 있다. 그 소녀는 외모는 볼품이 없더라도 항상 뭔가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의 힘으로 방송출현까지 한다. 그런 소녀를 보면 우등생 친구는 질투를 한다. 자신은 아무 것도 정한 것도 없이 이렇게 고민하는데, 뭔가 이루는 그 소녀를 보면서 말이다. 그 소녀의 질투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계속 자신을 다그치는 상황에서 자유로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은 부러움의 대상, 즉 동경과 질투의 대상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부족한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알기에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학생에게 꿈을 꾸게 하기보단 오히려 꿈을 부정하고, 정해진 성공이라는 출세만 요구한다. 성공의 인생은 무엇인가? 문학과 고전에서 위인들의 업적들을 보여주면서 그 위인들이 그렇게 될 수 있던 이유는 막상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가치이지 단순히 공부만 하는 기계로 만들 수는 없다. 아이들에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망가뜨리는 교육방법에서 18세기 철학자 루소의 <Emile>이 전해주는 바는 정말 큰 것 같았다. 물론 지금은 그 당시와 다르지만, 학생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전혀 가르쳐주지 않는 불편함에서 아이들은 강요만 당한다.


어른들은 지성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나 감성적인 공감성은 없고,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냄새를 맡을 수 없다. 단지 풍기는 것은 향수나 화장품 냄새 또는 담배냄새 정도일까? 아이들은 자신의 고민을 쉽게 털어놓지 못한다. 고민을 터는 순간 돌아오는 것은 위로와 이해보다는 다그침과 강요뿐이란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들은 더욱 교활해지거나 또는 더욱 반항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고민은 더 심해지고, 자기가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내몰린다. 이 책 다른 편에서 아주 뚱뚱한 여학생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겉보기에 너무 뚱뚱하고, 신체검사에서 100㎏을 넘을 정도도 매우 심각한 건강상태였다. 그 학생이 그렇게 된 이유는 가정환경이었다. 그런다고 부모와 가족을 나무라고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안 계시고, 어머니는 하루 종일 청소부 일로 지쳤으며, 남동생은 아직까지도 어린 아이다. 그러나 그 학생은 어린 시절 삼촌과 같이 살았는데, 대한민국에서 남자친척이 여자가족에게 성추행하는 게 1/3이란 점이 매우 놀라웠다. 보이지 않는 가족사회의 어두운 부분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학생은 과식을 하게 되었다. 스트레스성 폭식은 인간이 심리적으로 내몰리면 반사적인 조건에 의해 계속 음식을 먹게 된다. 음식을 먹으면서 자신의 심리를 되찾으려 하나, 막상 신체가 변하면서 또 다른 심리적 위축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런 과거가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마치 자신의 죄인 것처럼 여긴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만큼 인간의 마음은 쉽게 깨지기 쉬운 유리와 같은 것이다. 깨진 유리를 다시 복원할 수 없지만, 그 깨진 유리의 파편을 치워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강조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은 마치 그런 부당한 일을 보면서 당연히 그래야지 혹은 마치 자신이 좋은 사람인양 말을 하겠지만, 막상 상황에 닥치면 그렇게 하기란 정말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또 다른 이야기지만, 성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동성연애에 대하여 다소 혐오적인 눈으로 보고 있지만, 그런다고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동성연애를 하는 것 자체를 막을 권리는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렇게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면 동성연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난하고 절망적인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을 제대로 건네주고 있는지도 궁금할 정도다. 자유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무엇을 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단지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조건 아래서 말이다. 그렇지만 그게 용납되지 않은 것은 사회라는 여전하고, 그런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라면 더욱 심하다.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은 법적인 처벌로 바로 처리할 수 있지만, 학교 안의 폭력은 상당히 미묘하다. 동성연애에 눈을 뜬 남학생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 대상이 되어야 하는 대상은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다고 그런 학생의 마음을 짓밟는 것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그 상태로 계속 살아야 한다면 참 어려운 삶일 수밖에 없다. 사회라는 공간에서 우리 인간은 언제나 남과의 경쟁을 강요받아 왔다. 하지만 천재가 아닌 이상, 혹은 경제적․사회적 조건이 현저하게 차이나지 않은 이상 거기서 거기인 평범한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보았자 우린 우월함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자신의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단체 내에서 소수의 약자를 선발하여 억압하여 거기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왕따현상이나 학원폭력에서 단순히 제왕적인 일진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군중심리 자체도 더 심각한 문제다. 일진은 따로 격리하여 다른 방식으로 교육방침을 내리면 되지만, 집단 내의 폭력이란 하나의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다.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학생을 게이라고 왕따 시키는 학생들의 모습에선 자신의 부조리를 인정하는 것보단 차라리 정의의 가치로서 사회악을 근절하는 정의의 사도처럼 보인다.


그런 왕따를 하는 학생에 대해 어른들은 분명히 나무라 하겠지만, 그렇게 만든 것은 어른이고, 어른들조차도 그런 왕따현상을 더 심하게 만들고 있다. 사람이 소중하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이익에 치중하는 모습에 어떻게 학생들에게 인생의 가치를 논할 수 있으랴? 계속 그런 가치관에 물들여진 학생들의 모습에서 언젠가 또 다른 가면을 쓴 어른이 되어 억압의 사슬은 계속 묶여질 뿐이다. 감정코치K에 나온 상담자는 그런 세상을 이미 맛을 본 사람이고, 그런 세상의 일원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따라서 상담이 가능한 것은 그 자신조차 방황을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황하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면 계속 억압의 사슬은 더 심하게 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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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코치 K 1 - 진짜 얼굴, 가짜 얼굴
이진 지음, 재수 그림, 조벽 외 감수 / 해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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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태어나면서 누구나 같을 수가 없다. 인간 그 모습 그대로의 자연적인 모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느 사람은 운동을 어느 사람을 글 쓰고 사색하는 것을 어느 사람들은 분석하는 것을 특기일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 사회는 아쉽게도 그런 개인적 소질과 적성으로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게 아니라 단지 그런 선택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효용적인 즉 자본력과 권력을 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추천한다. 인간의 사회성에서 한계성이란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로서 보는 게 아니라 타인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나의 타인은 당신일 수도 있겠지만, 그 타인이던 당신이 자신조차도 타인에게 타인이다. 우리는 타인과 타인 속에서 본인조차도 타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와 욕망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과 거기서 생겨난 틀에서 살아가야 한다. 따라서 자신의 있는 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한 채 소실되어 간다. 그런 점에서 감정코치K는 우리 사회에 보여주는 이런 단면적인 모순이 결국 사회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하게 왜곡되어 다양한 형태로 문제점을 일으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은 학생에게 증폭되어 보여준다. 학생들은 아직까지 이성적인 판단력이 완성되지 않고, 심지어 감정적인 조율 역시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없다. 그런다고 학생만이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그 학생들을 가르치고 돌보고 책임지어야 하는 어른조차도 더 심각한 판단력 부족과 감정의 부적절한 통제로 일을 더 크게 만든다. 아이들이 왜 힘들어 하는가? 대부분 어른들은 아이들의 문제라고 본다. 물론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문제를 당장 없애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인가?

 

어떤 문제인 부분만 제거하면 그것으로 끝이 날까? 학교폭력으로 얼룩이 진 사람을 다른 곳에 보낸다고 그 학교 자체에 폭력이 종결되는 것인가? 아니라면 폭력의 발생원을 다른 곳에 보내면 거기도 생기지 않은가? 극단적인 살인이나 강간 같은 범죄가 아닌 이상 분명 아이들의 비행행위나 또는 거기에 대한 피해는 원인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는 악독하고 도저히 인간의 윤리의식으로 저지르면 안 되는 행위지만, 후자의 경우 감정의 기복이나 무의식적인 충동에서 순간적인 사고가 발생한다.

 

나도 지금은 학생이란 신분에서 한참 멀어진 사람이나, 그런다고 하여 이 책에서 보인 학생들의 고민에 공감하지 않을 수도 없겠지만, 다소간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되었다. 우리 시대나 지금 학생시대나 학교라는 공간은 꿈을 키우는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꿈을 버리고 억지로 주형틀에 넣어 기성품을 만들어 내는 공장이라 생각한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처럼 학교는 하나의 감시체계가 존재하고,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요건으로 인간을 키우는 것보다는 인간 그 자체를 재생산하는 공장처럼 느낀다.

 

아이들의 감정과 마음은 자연적이나, 그 자연적인 요소를 억압된 공간에서 나두게 되니 당연히 뭔가 어긋나고 비뚤어질 수밖에 없다. 처음 이야기에서 투명인간인 학생은 자신은 그림을 좋아하지만, 그림만 그리다보니 남들에게 존재감이 없다. 그런 자신의 존재감 부족과 타인들로부터 왕따현상은 개인적 문제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다. 자기가 가진 특기가 드러낼 수 없다면, 결국 이것을 하나의 기예로서 당당히 올려 보여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자신의 특기가 인정받게 된다면 타인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른바 기죽이지 말고 기를 살려줘야 하는 교육방법이다.

 

기를 살린다는 것은 오만과 자만이 아니라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정해진 규율과 틀에만 고정시키는 협소한 교육방법이 아니다. 어차피 머리가 좋든 나쁘든 또는 시험을 잘 보든 못 보든, 학교시험을 보면 1등부터 꼴등은 정해진 자리이다. 어느 누구에게 성적이 떨어져 고민하고 있다면 다른 누구는 고민하지 않으랴? 공부 못한다고 하여 결국 다 같이 공부 열심히 해도 꼴찌는 존재하는 법이다. 꼴찌에게 따뜻한 손을 내어주지 않는 불친절한 세상을 생각하면 이 책에서는 인간의 삶에서 물질적인 혜택이 도래했지 마음에 대한 혜택은 일절 없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시대적 상황에 모든 것을 판단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른 세계를 보고 있고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다못해 일진인 애들도 최소한의 정이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 정조차도 없다. 인간이 철저하게 감정이 메말라 단지 학교의 아이들은 나의 적 혹은 이익이 되는 친구로 가고 있는 현상이 심한 것이다. 이런 책임은 아이들에게 몰아넣는 어른들의 무책임이 아이들을 더욱 스스로 감옥에 가두고 있다. <감시와 처벌>은 감시에 의한 통제력이나, 우리 사회는 어른들의 무책임한 관심에 의한 처벌로 이어지고 있다.

 

몸의 상처는 피가 나면 닦으면 되고, 상처가 남으면 연고를 바르고, 자국이 심하게 남으면 성형수술로 복원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눈에도 보이지 않고, 나체의 육신을 감추고 있는 의복을 다 벗기어내도 알 수 없다. 맨몸의 인간 신체 역시 마음을 알 수 없다. 마음의 깊이는 1㎜보다 낮으면서 1㎞보다 멀다. 도저히 가늠할 수 없기에 마음의 고통은 인간에게 트라우마 내지 스트레스, 노이로제 같은 행동을 보여준다.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저런 행동과 말을 하고 저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의문에서 그 치료가 시작된다.

 

타인의 기준에서 그런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타인이 되는 그 자신조차도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이성과 지성을 갖추어도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감정과 무의식적인 요소가 오히려 이성적인 척하는 모습도 다분하다. 어른들의 모습에서 어른들은 자기들이 그런 요소를 가진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게 문제다. 인간은 감정을 가지고 있고, 화도 내고 짜증도 부린다. 그런 자신이 있다는 사실부터 알아가야 타인을 대할 수 있다.

 

문제 학생들을 만드는 것은 학생들 자신의 자질도 있겠지만, 그 자질을 만들어내는 환경이 문제다. 옛날 초등학교 시절 좋은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면 이상하게 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는 환경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하지만 생각하면 겉보기에 날라리처럼 보이는 애들도 알고 보면 좋은 녀석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리어 겉으로 우등생이 더 짜증나 보일 때도 있다. 마지막에 부모의 문제, 선생의 문제에 크게 공감이 갔다. 뭐든지 좋은 것만 강요하고, 불리한 것은 제외하는 어른들이 보일 때마다 학생들은 자신이 도망갈 공간이 없다. 사이코 패스처럼 동물을 학대하는 애나, 그 동물을 사랑해주는 불량소년에서 누가 더 인간적인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길가에 버려진 연약한 동물을 괴롭히지 않고 사랑해주는 인간이 근본 자체가 나쁠 리는 없지만, 단지 그가 공부도 못하고 반항하는 이유로 몰아가기에 더더욱 심하게 불량해지는 것을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안다고 해도 방법론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잘은 모르겠다. 우리 역시 학생일 시절 인간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의 이익을 사랑하는 것만 강요했기 때문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맞다. 하류의 물이 상류로 올라갈 수 없다. 그것은 과학의 법치이고, 인간이 과학으로만 판단할 수 없지만, 사회과학적으로 인간 역시 과학적 판단으로 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중요한 점을 더 망각하고 있다. 감정코치는 아이들만 받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어른들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왜 그렇게 망가지는가? 망가지는 것은 아이들이 시작한 게 아니라 우리 어른들이 그렇게 만든 공간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삶의 여유를 빼앗고, 인생의 즐거움을 빼앗고, 자연적인 인간성을 파괴하면서 사회적 목적만 강요하는 공간에서 과연 감정코치를 한다고 해도 완성될까? 그런 것부터 같이 조금씩 바꾸면서 감정코치를 하는 게 바람직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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