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코치 K 2 - 내 안의 불협화음
이진 지음, 재수 그림, 조벽 외 감수 / 해냄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에게 말하는 꿈이란 무엇일까? 지금 당신들에게 나는 질문 1가지를 던지고 싶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혹은 그 대상이 어른이라면 당신의 아이들의 꿈은 무엇입니까? 참 어려운 질문이다. 꿈이란 것은 우리가 잠을 자면서 수면 중 이미지로 보는 환상이 아니라 자신이 언젠가는 되고 싶은 미래의 모습이다. 시간은 앞으로 흘러가지 뒤로는 되돌아가지는 못한다. 1번뿐인 인생에서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아니면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인생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오직 자신만의 것이어야 했다.


‘것이다가 아닌 것이어야 했다.’라는 말은 결국 우리는 꿈을 꾸기는 하지만, 우리의 꿈이 아니라 타인의 꿈을 자신의 것으로 해야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것뿐이다. 따라서 취미생활을 하는 것은 직업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우리의 꿈이나 또는 자아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정해진 틀에만 끌려가면 항상 우리의 마음은 촉박한 시간관념 아래 자신을 감옥으로 내몰 것이다.


<감정코치K> 2권에서는 그런 학생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공부를 잘하고 외모도 단정하며, 심지어 아버지는 국문학과 교수, 어머니는 학교 교사이다. 그리고 그 부모들은 하나뿐인 딸에게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학교에서 공부하기보단 더 좋은 곳을 보라고 한다. 보는 순간 참 답답한 모습이었다. 자신의 딸은 그러면 자신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은 타인에게 도덕적이고 존경받는 사람처럼 되고 싶어 하면서 정작 중요한 상황에서 결국 자신의 이익으로 가게 된다. 그런 부모의 이중성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다른 부모라면 몰라도 교육자라는 부모들은 그런 도덕적 가치를 떠나 더 윤리적인 가치를 요구되는데 말이다.


그 교육자의 아이인 학생은 공부를 최고이나, 자신의 친구 중에 춤을 좋아하는 학업성과가 부진한 소녀가 있다. 그 소녀는 외모는 볼품이 없더라도 항상 뭔가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의 힘으로 방송출현까지 한다. 그런 소녀를 보면 우등생 친구는 질투를 한다. 자신은 아무 것도 정한 것도 없이 이렇게 고민하는데, 뭔가 이루는 그 소녀를 보면서 말이다. 그 소녀의 질투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계속 자신을 다그치는 상황에서 자유로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은 부러움의 대상, 즉 동경과 질투의 대상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부족한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알기에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학생에게 꿈을 꾸게 하기보단 오히려 꿈을 부정하고, 정해진 성공이라는 출세만 요구한다. 성공의 인생은 무엇인가? 문학과 고전에서 위인들의 업적들을 보여주면서 그 위인들이 그렇게 될 수 있던 이유는 막상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가치이지 단순히 공부만 하는 기계로 만들 수는 없다. 아이들에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망가뜨리는 교육방법에서 18세기 철학자 루소의 <Emile>이 전해주는 바는 정말 큰 것 같았다. 물론 지금은 그 당시와 다르지만, 학생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전혀 가르쳐주지 않는 불편함에서 아이들은 강요만 당한다.


어른들은 지성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나 감성적인 공감성은 없고,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냄새를 맡을 수 없다. 단지 풍기는 것은 향수나 화장품 냄새 또는 담배냄새 정도일까? 아이들은 자신의 고민을 쉽게 털어놓지 못한다. 고민을 터는 순간 돌아오는 것은 위로와 이해보다는 다그침과 강요뿐이란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들은 더욱 교활해지거나 또는 더욱 반항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고민은 더 심해지고, 자기가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내몰린다. 이 책 다른 편에서 아주 뚱뚱한 여학생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겉보기에 너무 뚱뚱하고, 신체검사에서 100㎏을 넘을 정도도 매우 심각한 건강상태였다. 그 학생이 그렇게 된 이유는 가정환경이었다. 그런다고 부모와 가족을 나무라고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안 계시고, 어머니는 하루 종일 청소부 일로 지쳤으며, 남동생은 아직까지도 어린 아이다. 그러나 그 학생은 어린 시절 삼촌과 같이 살았는데, 대한민국에서 남자친척이 여자가족에게 성추행하는 게 1/3이란 점이 매우 놀라웠다. 보이지 않는 가족사회의 어두운 부분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학생은 과식을 하게 되었다. 스트레스성 폭식은 인간이 심리적으로 내몰리면 반사적인 조건에 의해 계속 음식을 먹게 된다. 음식을 먹으면서 자신의 심리를 되찾으려 하나, 막상 신체가 변하면서 또 다른 심리적 위축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런 과거가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마치 자신의 죄인 것처럼 여긴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만큼 인간의 마음은 쉽게 깨지기 쉬운 유리와 같은 것이다. 깨진 유리를 다시 복원할 수 없지만, 그 깨진 유리의 파편을 치워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강조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은 마치 그런 부당한 일을 보면서 당연히 그래야지 혹은 마치 자신이 좋은 사람인양 말을 하겠지만, 막상 상황에 닥치면 그렇게 하기란 정말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또 다른 이야기지만, 성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동성연애에 대하여 다소 혐오적인 눈으로 보고 있지만, 그런다고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동성연애를 하는 것 자체를 막을 권리는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렇게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면 동성연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난하고 절망적인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을 제대로 건네주고 있는지도 궁금할 정도다. 자유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무엇을 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단지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조건 아래서 말이다. 그렇지만 그게 용납되지 않은 것은 사회라는 여전하고, 그런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라면 더욱 심하다.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은 법적인 처벌로 바로 처리할 수 있지만, 학교 안의 폭력은 상당히 미묘하다. 동성연애에 눈을 뜬 남학생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 대상이 되어야 하는 대상은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다고 그런 학생의 마음을 짓밟는 것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그 상태로 계속 살아야 한다면 참 어려운 삶일 수밖에 없다. 사회라는 공간에서 우리 인간은 언제나 남과의 경쟁을 강요받아 왔다. 하지만 천재가 아닌 이상, 혹은 경제적․사회적 조건이 현저하게 차이나지 않은 이상 거기서 거기인 평범한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보았자 우린 우월함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자신의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단체 내에서 소수의 약자를 선발하여 억압하여 거기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왕따현상이나 학원폭력에서 단순히 제왕적인 일진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군중심리 자체도 더 심각한 문제다. 일진은 따로 격리하여 다른 방식으로 교육방침을 내리면 되지만, 집단 내의 폭력이란 하나의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다.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학생을 게이라고 왕따 시키는 학생들의 모습에선 자신의 부조리를 인정하는 것보단 차라리 정의의 가치로서 사회악을 근절하는 정의의 사도처럼 보인다.


그런 왕따를 하는 학생에 대해 어른들은 분명히 나무라 하겠지만, 그렇게 만든 것은 어른이고, 어른들조차도 그런 왕따현상을 더 심하게 만들고 있다. 사람이 소중하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이익에 치중하는 모습에 어떻게 학생들에게 인생의 가치를 논할 수 있으랴? 계속 그런 가치관에 물들여진 학생들의 모습에서 언젠가 또 다른 가면을 쓴 어른이 되어 억압의 사슬은 계속 묶여질 뿐이다. 감정코치K에 나온 상담자는 그런 세상을 이미 맛을 본 사람이고, 그런 세상의 일원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따라서 상담이 가능한 것은 그 자신조차 방황을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황하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면 계속 억압의 사슬은 더 심하게 조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